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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03년 대종회 태인 회장 취임 충렬공 묘소 고유제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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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 2003. 3. 28. (2) 장소 : 경북 안동시 능동 충렬공 묘소 및 회곡동 상락재. 물계서원 (3) 참석인원 : 약 60여 명 (4) 행사 동행기 및 사진 촬영 : 김발용(군). 작성 제공 (가) 행사 동행기(同行記)
어린 시절의 소풍 전 날처럼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예닐곱 번을 뒤척이다 일찍 출발 장소인 용산역으로 나갔습니다.
07:00 용산역 지난 2. 23일 강화 유적 답사 때 눈에 익은 광명 관광버스가 보입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먼저 와 계신 분들은 안 보입니다. 버스창에 붙일 안내문을 만들까 하여 피씨방을 기웃거리다. 편의점에 들러 매직 하나를 사 들고 나오니 영환, 만길, 성회님 등 낯익은 얼굴들이 반깁니다. 곧이어 군사공파 재석회장님, 명회 사무국장님 등 여러분의 종친들이 속속 도착하셨습니다.
08:00 안동으로 용산역을 출발합니다. 작년 안사연 여름캠프 참가 후 처음 가는 안동입니다. 그때의 일들을 생각하니 그리움이 새록새록 합니다. 올림픽도로를 거쳐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합니다.
08:50 중부고속도로 위 중부 고속도로 제3터널을 지나 도로변에 잠시 정차합니다. 서운관정공파 재준회장님과 돈영님께서 승차하십니다. 김성립선조님 묘역 주변에 차를 주차시키고 합류 하신 듯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보이는 창밖의 풍경이 너무나 평화로와 보입니다. 밭 매는 아낙들의 모습도 오늘은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문중 행사나 안사연 행사 때는 늘 날씨가 좋습니다. 이것이 모두 조상님의 음덕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09:40 증평 오창 I.C를 나와 증평 주유소에서 태인회장님과 안렴사공파 부회장 재균님등 몇 분이 합류하셨습니다. 모두다 즐거운 모습들로 보기에 좋습니다.
10:20 괴산 제학공파 학응회장님과 태섭님께서 차에 오르셨습니다. 태섭님은 항용종친의 부친이신데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먼 길 마다않고 참여하시는 열정이 젊은이 이상이십니다. 이제 안동까지는 두시간 여가 소요 될 예정입니다. 태인 회장님의 간단한 인사말과 명회 사무국장의 오늘 일정 소개가 있었습니다. 음수재 회곡동을 거쳐 안동종친들의 요청에 따라 물계서원을 방문한다는 소개입니다.이어 영환 종친께서 그간 안사연 학술대회에서 발표하였던 몇가지 자료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1. 충렬공 묘소의 발견시기는? 2. 충렬공 할아버지 본댁은 어디인가? 3. 충렬공의 싯구 중 山水無非舊眼靑 (산수무비구안청)에 대하여.. 4. 충렬공의 편지소개 5. 충렬공 할아버지 묘지명에 대하여..
한시간 여에 걸친 논리있는 설명에 태인회장님과 여러 종친어른들의 찬사와 격려의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이 밖에 여러 어른들의 물계서원 복원 문제. 안동지역에서의 안동김씨 위상에 대하여. 선안동과 후안동의 구분 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교환되는 가운데 어느덧 일행은 충렬공 할아버지 신도비에 도착하였습니다.잠시 내려 목례로 예를 갖춘 후 음수재로 향합니다.(신도비각 앞의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장군 신도비”라는 표석에 대해 잘못되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안사연 여름캠프 때도 논의 되었던 사항입니다)
12:30 음수재 음수재에 도착합니다. 안사연 여름캠프 때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잠시 회상에 젖어 있는데 벌써 행사 준비에 부산합니다. “김서방네는 성격이 급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 왔는데 여기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먼저 영정각에 고하고 충렬공 할아버지 묘소로 이동하여 고유제를 시작합니다.아직 도착 못한 정중종친의 일행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 집니다. 처음 시도되는 고유제문의 한글화에 모든 분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베리 굿”입니다. 감동이 그대로 전해 온다는 말씀들입니다. 이 고유제문은 항용종친(제)이 찬하고 성회종친(안)께서 서했으며 영환종친(문)께서 독축하였습니다. 고유제 행사 진행중 정중종친이 물찬제비(?)처럼 올라오는 것이 보입니다. 다 끝난 후에 도착하면 어떡하나 하고 마음 조렸는데 다행입니다. 음수재에서 뷔페식 식사를 한 후 회곡동으로 출발합니다. 회곡동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상락대를 지날 때쯤 안동유사 봉수님께서 상락대에 관련해 전해오는 전설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충렬공 할아버님을 너무나 사모하던 한 낭자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낭자의 유언에 따라 상락대 인근에 장사를 지냈답니다. 그런데 그 후 그 자리에는 지금까지도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원래 상락대에는 상락대비가 있었으나 동네사람들이 무슨 일이 잘 안될 때면 그것이 상락대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이 비를 강에 버려버렸다고 합니다.
수년전에 봉수님과 몇 분이 상락대비를 찾기위하여 상락대 정상부근을 뒤졌으나 찾지못하고, 동네의 100살이 넘은 어른으로부터 구전되어오는 위치를 전해들어 파보니 상락대비 좌대가 발견되었다고합니다. 그래서 그 좌대를 꺼내어 현재의 상락대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위치가 바로 풀이 나지않는 그 위치였다고 합니다.
3:00 회곡동 죽주박씨 할머니 제단 진설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말들이 들립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읽은 내용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흥미진진합니다. 결국 대종회쪽의견으로 결정되고 삼소재의 석교님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입니다.회곡동 유허비각이 40-50년 전에는(현 비각으로 교체 되기전) 유허비각 벽면에는 벽화가 사방에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벽화는 현재의 비각으로 교체하면서 다 헐어버렸다고 하는데 너무나 아쉬운 일입니다. 안동유사 봉수님은 그 때 본 벽화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합니다.
3:30 물계서원으로 이제 마지막 코스인 물계서원으로 출발할 시간입니다. 사촌의 희국어른께서는 버스에 올라 경북 의성 사촌마을의 민속마을화에 대한 설명을 하시며 작별을 고합니다. 사촌 가로숲 정비작업도 시작되었다 하십니다. 지나는 길이 있으면 꼭 들러 달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사촌마을이 풍산유씨의 하회마을처럼 성공한 민속마을이 되길 기원해 봅니다.
4:00 물계서원 물계서원이 있던자리는 약 10여 호의 민가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물계서원이 있었던 옛 자취는 찾을 수 없습니다. 안동지역 종친들은 물계서원 복원을 위하여 수년간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랍니다. 물계서원이 철폐된 후 지어졌다는 물계서당 역시 초라 한 모습으로 방치 돼 있었습니다. 이제 귀경 길입니다. 귀경길에 제학공파 학응회장님께서 괴산 유림에서 건립예정인 화암서원에 대한 소개 말씀이 있었습니다. 화암서원은 주벽을 퇴계선생으로 하며 제학공파의 오갑선조(충갑. 효갑. 우갑. 제갑. 인갑)분이 배향 될 예정이라 합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6:30 다시 괴산 괴산 시외버스공용 터미널 부근의 서울식당에서 아주 맛난 올갱이 국으로 식사를 한 후 학응 회장님, 태섭어른과 작별하였습니다.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7:40 다시 증평 아침에 회장님 일행을 태운 자리에서 태인회장님과 헤어졌습니다. 안렴사공파 부회장 재균님과 만길님 성회님등도 오창에서의 뒷풀이를 위해 하차합니다.
8:40 다시 중부 고속도로 허난설헌 묘역 맞은편 길가에서 서운관정공파 재준회장님과 돈영님께서 내리셨습니다. 재준회장님께서는 안사연 회원 전원에게 서운관정공파 종회보를 정기적으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내일 모레쯤 도착 할 종회보를 기대해 봅니다. 이제 남은 일행은 몇 명 안 됩니다. 오늘 학교 일로 고유제에 참석치 못했지만 하루종일 마음이 안동에 있었을 항용종친과 뒷풀이를 위해 신천역 부근에 내렸습니다. 영환 대부님과 함께......... 궁금해 하실 분들을 위하여 몇자 적어 보았습니다.
< 大宗會長 泰麟 就任 忠烈公 告由祭文> 維歲次 癸未 二月 乙亥朔, 二十六日 庚子에, 二十五代孫 泰麟은 중시조님이신 충렬공 할아버님께 삼가 고하옵나이다. 일찍이 우리 비조(鼻祖)이신 신라 대보공께서는 하늘의 계시(啓示)로 강림하시어 김씨를 사성 받으셨고, 그 후손들은 대대로 신라의 왕위를 계승한 찬란한 영화를 지닌 왕손이 되었습니다. 경순대왕 이후 고려조에 들어서서는 명문벌족(名門閥族)으로서, 500여 년 간 공경장상(公卿將相)이 끊이지 않았고, 삼한(三韓)의 으뜸가는 가계와 혈통을 유지하며 국가의 내우외환을 극복하고 번영과 영화를 이루는데 앞장 서 왔사옵나이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 중국 원나라의 세계제패 야욕에 의해 우리 온 국가와 민초들이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는 크나 큰 위기에 처했을 때, 할아버님께서는 이곳 안동에서 탄생하셨나이다. 탁월한 용맹과 지혜를 타고 나셨던 할아버님께서는 왕성한 학구열로 학문 수양에 전념하시며 성장하셨고, 입신(立身)하신 뒤에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이 나라를 온갖 지혜와 용기를 모아 온전히 보존되게 하는데 한 국가의 장상(將相)으로서 고전분투하셨나이다.
국내로는 왕권의 확립과 와해된 국력을 정비하는데 총력을 기울이셨고, 당시의 국가 최대 난제였던 삼별초 난을 명쾌히 처리하시어 국가 전체의 안전과 평화를 이루어 내셨사옵니다. 또한 원나라와 함께 이 나라 초유의 일본 원정이라는 육전과 해전을 겸한 세계적인 크나 큰 대전을 두 번씩이나 치루게 될 때에도 할아버님께서는 고려 최고 군통수권자인 도원수로서 이를 준비하시고 지휘·독전하시어 동양 최대의 장수가 되셨사옵니다. 그 후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라는 출장입상(出將入相)의 고귀한 자리에 오르신 다음 치사(致仕)하셨으며, 상락군 개국공(上洛郡 開國公)이란 작호와 함께 이곳 안동지방을 식읍(食邑) 삼천호(三千戶)와 식실봉(實封) 삼백호(三百戶)로써 받으셨나이다.
또한 충선왕때는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으로 추증되시어 명실공히 이 나라 최고의 영예에 오르셨으며, 89세에 훙(薨)하시어 시호(諡號) 충렬(忠烈)을 하사 받으시고 지금 이곳에 고이 영면하고 계시옵나이다. 할아버님으로 하여 우리 안동김이란 아름다운 이름은 고려, 조선을 거쳐 703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방의 으뜸가는 씨족(氏族)으로 더욱 빛나고 있사옵니다. 또한 할아버님께서 남겨주신 국태민안과 견위치명의 국가관, 뛰어나신 혜안과 통찰력에 의한 국제외교관, 청렴강직하면서도 어질고 덕성스러운 삶과 처세관, 엄격하고 자애로우셨던 자녀 교육관 등은 면면히 이어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가슴속에 삶과 철학으로 되살아나고 있사옵니다.
오늘은 지난 3월 8일, 본 안동김씨 대종회 총회 석상에서 미숙하고 부족하기만 한 제가 대종회 회장으로 추대되었기에 많은 종친 여러분과 더불어 할아버님께 이를 고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제를 올리고 있사옵나이다. 이 회장의 자리는 위로는 선조님들의 위대한 정신과 업적, 모든 유·무형의 유적들을 드높이고 보살피며, 아래로는 우리의 고유하고도 아름다운 전통문화와 문명을 후손들에게 전수하고 일깨우며, 이를 바탕으로 미래 새역사를 창조하는데 선도하고 이바지할 줄 아는 동량(棟樑)들로 성장하도록 힘을 북돋우는 일을 전담하는 책임자의 자리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사옵나이다. 이에 본 대종회의 여러 일들을 추진함에 있어 많은 현종 여러분들의 뜻을 모아 정성과 신명을 다해 일할 것임을 할아버님 영전에 맹세하며 동시에 이를 고하옵나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 굽어살피고 계신 공경하옵는 할아버님이시여! 부디 이곳에 있는 저와 우리 후손들이 할아버님의 자랑스러운 후손으로 거듭 날 수 있도록 큰 힘을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삼가 맑은 술과 간소한 제수를 올리오니 강림하시어 흠향하시옵소서.
*제학공 23세손 恒鏞 奉撰. 안렴사공 21세손 聖會 奉書. 문온공 18세손 榮煥 讀祝
<석송령 해설>(2003. 3. 31. 정중(도) 제공)
석송령(石松靈) * 위 치 : 예천군 천향리 804 * 내 용 : 천향리 석평마을에 있는 석송령(石松靈)은 예천에서 풍기방향으로 11km의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제294호로 지정(指定)되어 있다. 이 나무는 부귀(富貴), 장수(長壽), 상록(常綠)을 상징(象徵)하는 반송(盤松)으로 크기는 수고(樹高) 10m,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 4.2m, 수폭 동서(東西) 32m, 남북(南北) 22m이며, 그늘 면적은 990㎡에 이르는 큰 소나무로서 수령(樹齡)이 600여 년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마을의 단합(團合)과 안녕을 기원하는 동신목(洞神木)으로 보호받으며 매년 정월(正月) 대보름에 동신제(洞神祭)를 올리고 있다. 석송령(石松靈)의 유래(由來)는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洪水)가 났을 때 석관천(石串川)을 따라 떠내려 오던 소나무를 어떤 주민이 건져 지금의 자리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1930년경에는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李秀睦)이란 사람이 영험(靈驗)있는 나무 라는 뜻으로 석송령(石松靈)이라는 이름을 짓고 자기소유 토지 5,259㎡를 상속(相續) 등기해 주어 이때부터 이 나무는 수목(樹木)으로서는 유일하게 토지를 가진 부자(富者) 나무가 되었다고 하며, 재산을 가지고 세금(稅金)을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85년 대통령(大統領) 하사금(下賜金) 500만원으로 장학재단(奬學財團)을 조직하여 고향의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奬學金)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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