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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우왕8)∼1447(세종29)--(군) 군사공(휘 七陽)의 子로 1414년(태종14) 문과(文科)에 을과(乙科) 3등으로 급제,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묘는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백양산이다.
<연보> 1. 1382(우왕8. 1세) : 출생 2. 1414(태종14. 33세) : 진사 합격. 문과 을과 3등 합격 3. 1424(세종6. 43세) : 예조좌랑(禮曹佐郞) 4. 1429(세종11. 48세) : 영암부사(靈巖府使) 5. 1441(세종23. 60세) : 사재감정(司宰監正) 6. 1442(세종24. 61세) :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통훈대부(通訓大夫) 내자판사(內資判事)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7. 1447(세종29, 66세) : 고향 전남 강진에서 몰. 묘는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백양산 직제학공(휘 塡) 실전 묘소 확인행사 비망기 (2005. 10. 12. 발용(군). 윤식(문) 제공) 예손 재구, 방손 발용, 윤식은 삼가 비디오와 사진을 촬영하고 기록합니다.
■ 행사 개요 ◇일시 : 2005년 10월 2일 일요일 ◇장소 :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백양산 ◇주관 : 군사공파종회 ◇참석자(무순, 존칭 생략) □군사공파종회 - 수인(회장), 재석(전 회장), 창회(부회장), 준회(총무), 홍수(광탄문중 회장), 중묵(칠정문중 회장), 재화(칠정문중 이사), 용회(칠정문중 총무), 재구, 발용, 태영 □판교공문중 - 두식, 용주 □안사연 - 영윤, 상석, 은회, 태우, 항용, 윤식
■직제학공 계대 충렬공(휘 方慶) → 1子 선(愃) → 2子 승용(承用) → 1子 후(厚) → 3子 칠양(七陽) → 1子 土舌, 2子 진(塡), 3子 돈(墩)
■직제학공에 대한 족보 기록 □경진보(1580년 대동보) 누락 □기미보(1739년 영조 15년, 대동보) 呂州○墓 □을유보(1825년 순조 25년, 대동보) 麗州白羊洞 □을해보(1935년 대동보) 麗州白羊洞有碣 □기미보(1979년 대동보) 麗州白羊洞失傳 □계유보(1993년 군사공파보) 麗州白羊洞失傳
■계유보(군사공파보) 세부 기록 직제학공 휘 진(塡) 1414年 永樂 甲午中成均進仕 同年文科 歷監察 禮曹正郞 禮賓少尹 嘉善大夫 內資寺事 普文閣直提學 墓麗州白羊洞 失傳 設壇行祀 配 貞夫人 光州盧氏 育一男 墓坡州郡坡州邑延豊里 山一番地 寅坐 有表石 時享十月十日
■직제학공 소개 1382년(고려 우왕 8년)~1447년(조선 세종 29년) 1414년(조선 태종 14년) 진사시를 거쳐 식년시 3등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예조정랑, 영암부사, 사재감정, 사헌집의, 예문관 직제학을 거쳐 내자판사를 역임하였다. 묘는 여주군 백양동으로 전하나 실전하여, 경기 파주읍 연풍리 산1번지에 설단하였다.
■경과보고 □ 여주 백양동의 안렴사공파 여주 입향조이신 판교공(휘 丸)의 묘역 상단에 무연고 묘가 있어 판교공 후손들이 일가(一家)의 선대 묘소라 하여 오랜 기간 벌초 등 관리하여 왔다는 내용이 구전되어 오면서 여주 백양동에서 실전되었다는 제학공(휘 塡)의 묘소일 것이라는 추측과 기대감에 마침내 묘소 확인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 2003년 군사공파 총회에서 제학공의 실전된 묘를 찾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몇 분의 종친들이 현지방문을 하여 직제학공의 묘소로 추정되는 위치를 확인하고 돌아온 바 있다. □ 2004년 7월 화산군(휘 澍) 영정 봉안식 및 2005년 국역 우암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태영, 발용이 안렴사공파종회에 협조 요청을 하였다. □ 2005년 9월 10일 안렴사공파 여주종중의 용주 종친으로부터 직제학공의 묘소로 추정되는 장소를 확인하였으니 묘소 확인 날짜를 잡자는 연락을 발용 종친에게 하다. □ 즉시 군사공파 발용 종친이 태영 종친에게 판교공문중의 협조 의사를 전하다. 태영 종친은 파주 군사공파 준회 총무에게 같은 내용을 연락하다. □ 군사공파종회 고문 및 회장단은 직제학공 묘소 확인 행사에 대한 준비에 들어가다. □ 2005년 9월 27일(금요일) 은회, 발용, 태영, 항용 종친이 문정동에서 만나 안사연에서 협조할 사항과 행사 진행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하고, 행사 준비를 하다. □ 군사공파종회에서는 2005년 10월 2일(일요일)에 발굴 조사에 들어가기로 택일을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2005년 9월 24일 안렴사공파 용주, 두식(판교공문중 총무), 태영, 발용 등 4인이 사전답사차 현지를 다녀오다. □ 2005년 10월 2일 백양동 현지에서 직제학공 묘소로 추정되는 묘소를 발굴 조사하고 관련 유물을 수습하다. 연대 측정 및 상세 조사를 위해 전문가인 재갑 종친에게 수습한 유물 감식을 의뢰하다.
■제학공 묘소 확인과정 보고 1. 산신제 및 고유제 □ 2005년 10월 2일(일요일) 09:00시 정각, 서울 잠실올림픽경기장 맞은편에서 안사연 등 9명이 여주 백양산으로 출발하다. □ 약 1시간 후 만남의 광장에서 군사공파종회 회장단 및 종인들과 합류하다. □ 11:30분경 백양산 판교공문중 선영에 도착하다. □ 11:40분 분방을 하고, 고유제 준비를 마치다. □ 11:50분 군사공파종회 수인 회장이 행사 취지 및 인사말을 하다. 이 자리에서 수인 회장은 “오랜 세월 선조님의 묘소를 실전하여 죄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는데, 오늘 행사로 좋은 결과를 맞이하기를 희 망 한다.”고 말하다. 또한 수인 회장은 판교공문중과 안사연의 협조에 대해 감사말을 전하다. 행사안내를 하는 태영, 항용 종친 □11:55분 산신제
▲헌관 영윤, 축관 항용, 집사 은회. 태우, 집례 항용
▲산신제문 유세차 을유 팔월 신묘삭 이십구일 기미에 유학 김영윤은 토지지신께 삼가 고하옵니다. 안동김공 통훈대부 보문각 직제학공의 묘소가 오래 전부터 실전되어 죄스럽고 가슴 아픈 세월을 지내오다가 금번에 여러 종친들의 고증으로 이곳의 한 무연고 묘소를 확인하고자 하오니 신령께서는 후환이 없도록 잘 보살펴 주시옵소서. 이에 맑은 술과 포과를 올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2005년 10월 2일 충렬공 26대손 항용 謹撰 謹書 謹讀
□ 12:10 판교공 고유제
▲초헌관 두식, 아헌관 용주, 종헌관 창회, 축관 항용, 집사 용회.재화, 집례 항용
▲고유제문 유세차 을유 팔월 신묘삭 이십구일 기미에 십구대손 유학 斗植은 삼가 고하옵니다. 통정대부 승문원 판교이신 19대조 할아버님과 숙부인이신 연안이씨 할머님, 양천허씨 할머님이시여. 오래 전에 이곳 묘소 근처에 직제학공의 묘소가 있었으나 후손들의 불효와 불민으로 온전히 보전치 못하고 실전되어 오다가 이번에 여러 종친들의 고증으로 무연고 묘소 한 기를 확인하려 합니다. 이에 엎드려 바라건대 존령께서는 다소 흔들림이 있더라도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에 삼가 맑은 술과 포과를 올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2005년 10월 2일 충렬공 26대손 항용 謹撰 謹書 謹讀
□12:30분 무연고 묘소 고유제
▲초헌관 수인, 아헌관 재석, 종헌관 중묵, 축관 항용, 집사 재화. 재구, 집례 항용
▲고유제문 유세차 을유 팔월 신묘삭 이십구일 기미에 유학 김수인은 존령께 삼가 고하옵니다. 영령이시여! 저의 이십대조이신 안동김공 통훈대부 보문각 직제학공의 묘소를 오래 전에 이 근처에 모시고 받들어 왔으나 불효와 불민으로 묘소를 온전히 보존치 못하고 실전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금번에 여러 종친들의 고증으로 무연고 묘소인 존령의 묘소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영령께서는 다소 흔들림이 있더라도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에 삼가 맑은 술과 포과를 올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2005년 10월 2일 충렬공 26대손 항용 謹撰 謹書 謹讀
2. 묘소 주변 상황 □13:30분 소형 굴삭기를 이용해 발굴을 시작하다. □무연고 묘소 주변상황
▲ 판교공 묘소 위쪽으로 약 30여 미터 거리에 직제학공 묘소로 추정되는 무연고 묘소가 1기가 있다. ▲ 약 20년생 리키다소나무가 봉분 주위에 자라 있다. ▲ 봉분은 거의 다 내려앉아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 봉분에서 약 5미터 앞에 문인석 1쌍이 배치돼 있다. 하나는 쓰러져 있으며, 하나는 온전히 서 있다. 문인석은 조선 중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인석이 세워질 당시 묘소를 수호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크기는 1길 반 정도로 제법 큰 편이다. 봉분 앞에는 문인석 외에는 상석이나 다른 석물이 없다. ▲ 무연고 묘 위쪽으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또 다른 묘소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 측면을 세모꼴로 잘 다듬은 돌(약 2m 크기) 1기가 3분의 1쯤 땅에 묻혀 있다. 용도는 추정하지 못하다. 이 석물을 문인석 인근으로 옮기다. □ 14:00시 봉분 앞 리키다소나무 대여섯 그루를 정리해서 봉분 발굴 준비를 완료하다.
문인석
약 5미터 거리에 쓰러져 있는 문인석
직제학공 묘소로 추정되는 무연고묘 봉분
발굴작업 중 잠시 담소를 나누는 용주, 태영, 두식 종친(왼쪽부터)
3. 봉분 발굴 □1시간 가량 봉분 앞 혼유석 부근을 한 길 깊이로 발굴했으나 지석이나 기타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참석자 모두 긴장하다. □14:00분 이후 광중을 발굴하기로 결정하고, 한 길 반 정도로 파내려가다. □15:20분경 생흙과 달리 물기를 머금은 곳이 나타나다. 군사공파 종친들이 광중 자리로 내려가 삽과 호미로 조심스럽게 발굴하기 시작하다. □15:25분경 광중 자리로 보이는 곳에서 아주 검은 흙이 나타나다. □15:30분경 광중 자리로 보이는 곳에서 특이한 형태의 커다란 못이 다수 출토되다. 발굴작업이 활기를 띠다. □15:35분경 일단 작업을 멈추고 손으로 유물을 수습하다. 동시에 광중 자리 다섯 군데에서 흙을 한 줌씩 떠서 미리 준비한 비닐봉투에 정성스럽게 모시다. □15:40분경 손으로 유물 발굴작업을 계속하다. 대못이 계속 출토되다. 이때 갓 장식품인 관자(흰색)가 몇 개 발굴되다. 이 부근에 나무뿌리가 엉켜 있다. 나무뿌리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서 조심스럽게 관자를 더 수습하다.
■16:00 유물 수습을 마치다. 출토물을 정성스럽게 미리 준비한 비닐봉투에 모시다. 대못, 관자, 기타 외에 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다. ▲대못 - 30점 ▲관자 - 백색 13점(콩알 크기), 청색 9점(녹두알 크기), 황갈색 4점(작은 콩알 크기), 투명한 우윳빛 유리구슬 4점(중앙이 뚫려 있어 관자와 함께 사용된 것으로 추정됨. 大 1점, 極小 3점) , 미상 4점 ◇추기 - 출토물 정리과정에서 유리구슬에서 극히 작은 유리구슬 3점이 추가로 발견됨. 이 소형 유리구슬은 놀랍게도 모두 중앙이 뚫려 있는 형태임. ◇추기 - 미상4점은 모두 중앙이 뚫려 있으며, 관자와 함께 갓끈 장식품으로 사용된 것임. ▲기타 - 2점(은제품 1점, 목재片 1점)
□16:15분 무연고묘 고유제 ▲헌관 홍수, 축관 재석, 집사 중묵.태우, 집례 항용 ▲고유제문 - 無緣故墓慰安祝 維歲次 乙酉八月 辛卯朔 二十九日己未 幼學 金鴻洙 敢昭故于 古墓之靈 意失先塋 將尋幽誌 敢毁封域 爰玆誤啓 仍築旣苡 依舊新封謹告以酒 休咎是寧 (재석 전 회장 근찬)
□16:25분 굴삭기를 이용해 봉분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하고, 발굴작업을 마치다. 수인 회장은 군사공파종회의 숙원사업에 한 가닥 희망을 갖게 된 소감을 피력하고, 추후 추진사항은 문중 회의를 거쳐 결정할 것임을 밝히다. 20여 년간 직제학공 실전 묘소를 찾으면서 백양리에 5번이나 방문한 재석 전 회장은 생전에 중요한 일을 마무리짓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 소감을 밝히다. 발굴작업 후 향후 계획 및 소감을 밝히는 재석 전 회장과 수인 회장 (앞줄 왼쪽부터) 은회, 태영, 항용, 재석, 윤식, 중묵, 준회, (뒷줄) 용주, 상석, 두식, 태우, 영윤, 창회, 수인, 홍수, 용회, 재구
□수습된 유물은 전문가인 재갑 종친에게 감식을 의뢰하기로 결정하다. 발굴 후 유물을 정리하던 중 투명한 유리구슬 관자 속에서 3개의 극소형 유리관자가 발견되었다. 극소형 유리관자는 사진 아래쪽 중앙부분의 구멍 뚫린 작은 구슬들이다. 관자 모두가 유리로 조선 초기에는 높은 관직을 지녀야만 가능했다고 한다.
관자 장식품들. 모두 중앙이 뚫려 있다. 맨 오른쪽은 크고 작은 관자가 두세 개 엉겨붙은 것이다.
은제품.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은박을 눌러찍은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이러한 기법은 고도의 제작기업으로 고위 관직자가 소유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번 직제학공 묘소 확인행사는 여러 모로 중요한 선례가 된 행사였음을 기록한다. 또한 재석 전 회장을 비롯해 태영 종친 등 여러 종친이 뜻을 세우고 군사공파 문중회의에서 전 종친의 중지를 모아 적극적인 협조로 추진되었음을 아울러 기록한다.
--- 이상 직제학공(휘 진) 실전 묘소 확인행사에 대한 비망기를 마칩니다. 혹여 잘못 기록된 내용이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시옵고, 잘못된 내용은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김발용 / 기록 김윤식> 직제학공(휘 塡) 묘비 건립 고유제 및 제막식 참예기 (2007. 11. 1. 글-윤식(문), 사진-발용(군) 제공) ■ 일시 : 2007년 10월 28일(음 9월 18일) 10:00 ■ 장소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연풍리 산1번지 선영 ■ 주관 : 안동김씨 군사공파 직제학공 묘비 건립위원회 ■ 참석(무순, 존칭 생략) □ 군사공파종회 : 묘비 건립위원회 위원 및 후손 50여 명 □ 안사연 : 영환, 재구, 발용, 항용, 윤식 ■ 행사 개요 2007년 10월 28일 군사공파종회는 경기도 파주의 선영에서 직제학공(直提學公 諱 塡)의 천묘(遷墓)에 따른 고유제를 지내고, 모역정화사업 일환으로 묘비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내자판사(內資判事) 보문각(寶文閣) 직제학공(直提學公)께서는 군사공(諱 七陽)의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으나, 큰아드님의 후사가 이어지지 않아 실질적인 장자(長子)로서 군사공파를 대표하는 선조이시다.
직제학공의 유택은 후손들이 대대로 수호해 왔으나, 근세에 들어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등 혼란한 사회상이 점철되다가 1945년 광복 이후 우리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유택을 실전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를 이어가며 수십 년에 걸친 후손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군사공파종회는 족보 기록과 우리 문중에 전해져 오는 구전(口傳) 등에 의거해 2005년 10월 2일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귀백리 백양산에서 직제학공의 유택을 되찾기에 이르렀다. 또한 유택에서 수습한 유물을 수차에 걸쳐 전문가들의 감정을 실시, 여말선초의 유물임을 확인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양동 인근에 세거해 오고 있는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판교공문중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음을 특별히 기록하며 관계자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후 군사공파종회는 문중 어른들의 자문과 종친들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여러 차례 문중 회의를 소집해 직제학공 후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였다. 그 결과 군사공파종회는 연풍리 선영에 영면하고 계신 배위 광주노씨(光州盧氏)와 합폄(合窆)하기로 결정하고, 천묘(遷墓)에 따른 묘역 정화사업을 실시해 묘역을 새로이 단장하였다. 아울러 직제학공 묘비 건립위원회를 구성, 2007년 10월 28일 묘비건립 고유제 및 제막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 새로 조성된 묘소 옆에 모셔 놓은 직제학공 선조님의 단비와 광주노씨 할머님의 묘표
▲ 과장되지 않은 소박함이 두드러지는 문인석이다.
▲ 단비를 살펴보는 재갑(在甲) 고문(오른쪽)
■ 묘비건립 고유제 및 제막식 행사 09:30분경 50여 명의 종친들이 연풍리 선영에 모여 10:00시 정각 경건하게 행사를 시작하였다. 항용(안사원 회원)의 사회로 고유제 분정이 발표된 후 묘비건립위원회 태영 총무는 직제학공 묘소 천봉 및 묘비 건립에 대한 경과보고를 하였다.
▲ 태영(건립위원회 총무), 항용(제학공파, 홈페이지 관리자), 중묵(건립위원회 부위원장)
이어 수인 회장의 병환으로 인해 묘비건립위원회 중묵 부위원장이 묘역 정화 및 묘비건립 의의를 참석 종친들에게 설명하였다. 아울러 중묵 부위원장은 직제학공 유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판교공문중의 적극적인 협조와 안사연(안동김씨 사이버 학술연구회)의 노력에 대해 각별한 사의(謝意)를 밝혔다. 이어 묘비 제막식에 참석한 안사연 회원 5명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이후 군사공파종회와 묘비건립위원회 및 참석 종친들은 10:30분에 경건하게 고유제를 올렸다. 이 날 분정 내역은 다음과 같으며, 독축 내용은 별도로 게재한다.
□ 산신제 헌관 : 재철(낙용) 좌집사 : 재구 우집사 : 재우 독축 및 집례 : 항용 □ 고유제 초헌 : 창회(묘비건립위원회 운영위원) 아헌 : 용회 종친 종헌 : 재찬(대구문중) 좌집사 : 준회(위원회 운영위원) 우집사 : 기묵 독축 및 집례 : 항용 ▲ 집례자(항용)
▲ 초헌관 창회(군사공파 부회장)
▲ 독축
▲ 아헌관 용회 종친
▲ 종헌 재찬(대구문중)
▲ 고예성(告禮成)
▲ 음복례
고유제는 10: 55분경 종료되었으며, 11:00시 정각 직제학공을 기리는 묘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오석(烏石) 묘비 전면에는 通訓大夫內資判事寶文閣直提學 安東金公 塡 配 淑人 光州盧氏 祔左 라 적고, 양 측면과 뒷면에 직제학공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비문 찬자(撰者)는 문학박사 진태하(陳泰夏) 선생, 서자(書者)는 서예가인 해청(海淸) 손경식(孫敬植) 선생이다. 비문 내용과 묘비건립위원회 명단은 별도로 게재한다.
▲ 중묵 건립위원회 부위원장의 인사말
▲ 묘비 제막식
▲ 태영(위원회 총무) 종친의 경과보고
뒤이어 영환(전 안동김씨대종회 감사, 현 문온공파종회 이사) 종친은 묘비 건립 고유제 및 제막식에 대한 축사를 통해 직제학공의 업적과 가족관계를 소상히 설명하고, 직제학공 천봉 및 묘비 건립을 축하하였다. 모든 행사가 종료된 후 참석 종친들은 묘역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 영환(전 안동김씨대종회 감사, 현 문온공파종회 이사) 종친의 축사
▲ 기념 촬영
예손 재구, 방손 발용, 윤식은 삼가 비디오와 사진을 촬영하고 기록합니다.
▲ 행사 기념 타올 및 안내 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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