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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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김광수(金光粹) 1468(세조14)∼1563(명종18)--(도)

자(字)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松隱), 충렬공(휘 方慶)의 8대손이며, 고려말에 도평의(都評議)를 지낸 바 있는 아버님 김구정(金九鼎)을 모시고 사촌으로 입향한 감목공 김자첨(監牧公 金子瞻)은 그의 증조부이다. 조부 효온(孝溫)은 1412년에 태어나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박팽년, 최항 등과 문과 동방으로 친교가 있었으며, 정통(正統) 경신년에 태어나서 기묘년에 생원이 되고, 신묘에 문과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와 지례 현감을 역임하면서 청렴하기로 널리 알려진 극해(克偕)는 그의 아버님이다. 외손자 서애 유성룡은 임난 7년 풍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더욱 유명하다.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연산의 정란을 예견하고 대과와 관직을 단념하고 귀향하여 기수 남안에 영귀정(詠歸亭)을 지어 시를 읊으며 은둔 강학하니 당시의 선비들이 송은거사(松隱居士)라 추앙하며 모여 들었다. 거실 서편에 우뚝 서 높푸른 만년송 아래 청빈을 벗삼아 살다가 소안백발의 지상선인 처럼 타계하니 향년 96세 였다. 몰한 뒤 대곡산(大谷山)에 장사지냈는데, 그뒤 외손인 유성룡(柳成龍)이 왕의 명을 받아 제사지내고 묘를 살펴보았다.

 

공의 학문과 덕망은 당시 영남일대에 알려졌고 그 후손에 이름난 선비가 연세 상전하여 대소 등과한 이가 50여명에 이르렀다, 숙종 11년에 공의 학덕을 추모하여 사림의 공의로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했다. 저서로는 경심잠(敬心箴)과 송은집이 있다.

 

 1. 사진 자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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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선생 문집>                                                  <경심잠>

(김창회 소장.2002. 8. 16.항용(제). 현지 방문. 촬영 제공)         (규장각 소장. 2002. 2. 항용(제) 조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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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선생 문집 내부. 송은 친필유묵>(2002. 6. 24. 정중씨(도) 자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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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선생 문집 내부. 송은 친필유묵>

 

2. 장대서원(藏待書院--송은 김광수 선생 배향서원) 소개 (2002. 6. 12. 정중씨(도) 자료 조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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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

 

장대리 기슭에 경현사와 강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상리 출신인 오봉 신지제가 세운 곳이다.

조선조 광해군의 혼정으로 공조정 랑의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1610년에 서당을 열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오봉 타 계 37년만인 1663년에 후진을 기르던 강당에 스승을 경모하는 뜻으로 경현사를 세워 향사를 하고 다음 해에 경정 이민성을 모셨다. 1702년에 경현사를 서원으로 추숭하고 송은 김광수, 회당 신원록선생을 함께 모셨다. 1868년 8월에 조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으며 1996년에 중건하였다.

 

3. 영귀정(詠歸亭) 소개 (송은 김광수 선생 정자. 2002. 6. 12. 정중씨(도) 자료 조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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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별 , 지정번호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234호.  명칭 :영귀정 (詠歸亭).  분류 :누(정).각.  수량: 1동. 지정일: 1991.03.25. 소재지:경북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319. 소유자:안동김씨문중. 관리자:안동김씨문중

 

영귀정은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외할아버지인 송은 김광수(1468∼1563) 선생이 연산군 때 관직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00년경으로 추정한다.

이 정자는 미천강변의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4. <송은집> 사진 자료 소개 (2003. 5. 20. 태서(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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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내부>(출전 :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5. <연려실기술>내 기록 내용 종합  (2003. 11. 11. 윤만(문) 제공)

 

▣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

 

○ 의성(義城) 장대서원(藏待書院)임자년에 세웠다. : 김광수(金光粹)호는 송은(松隱), 진사다. ㆍ이민성(李民宬)호는 경정(敬亭), 승지를 지냈다. ㆍ신원록(申元祿)호는 매당(梅堂)이다. ㆍ신지제(申之悌)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峯), 승지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본관은 아주(鵝州)요 의성(義城)에 살았다.

 

6. 국역 국조인물고_김광수(金光粹) 기록 내용 (2004. 5. 13. 윤식(문) 제공)

 

▲출전 : 국역 국조인물고 제3집 96~97쪽

묘표(墓表)  유성룡(柳成龍) 지음

공(公)의 휘(諱)는 광수(光粹)요, 자(字)는 국화(國華)이며, 김씨(金氏)는 본래 신라(新羅)의 왕실(王室)의 성(姓)이다. 고려(高麗) 때 휘 방경(方慶)이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큰 공훈(功勳)을 세상에 세웠는데, 공은 바로 그 후손이다. 증조(曾祖)는 함길도 감목관(咸吉道監牧官) 김자첨(金子瞻)이요, 조부(祖父)는 사직(司直) 김효온(金孝溫)이며, 고(考) 휘 극해(克諧)는 문과(文科)에 올라 벼슬이 지례 현감(知禮縣監)에 이르렀다.

 

공은 천성이 욕심이 없고 맑았으며 풍채가 단정하고 깨끗하며 부귀 영달에 전혀 뜻을 두지 않았는데, 일찍이 친구 사이에 시(詩)에 능하다고 알려졌다. 홍치(弘治 명 효종의 연호) 신유년(辛酉年 1501년 연산 7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뒤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의성(義城)의 북촌에 들어가 살면서 더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

 

길가에 왜송(矮松)이 한 그루 있었는데, 푸르고 울창하여 두어 이랑[畝]의 그늘을 만들었으므로 공이 이를 사랑하였다. 이에 매일같이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며 그 아래에서 한가히 지내며 스스로 송은 처사(松隱處士)라 불렀다.

 

집안이 가난하여 의식(衣食)을 잇대기 어려웠으나 공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조금도 불평 없이 만족하게 지냈는데, 당시 이웃 마을에 사는 현우(賢愚)와 소장(少長)을 막론하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즐겨 나아가 본을 뜨려 하였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타고나서 지례공(知禮公)이 일찍이 돌아가자 수십 년 어머니를 모시면서 안색을 살피고 뜻을 받드는 일을 모두 다하였으며, 한 아우가 안동(安東)에 살면서 오기로 약조한 날이며 매번 문에 기대어 기다리며 날이 저물도록 먹지 않다가 반드시 더불어 같이 밥을 먹곤 하였다.

 

평생 입으로 재산을 경영하는 데 대한 말을 하지 않았고, 오직 옛 사람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善行)을 노래로써 읊고 칭송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므로 비복(婢僕)들도 익히 듣고 능히 전하기까지 하였다. 아! 공은 독행 군자(篤行君子)라 할 만하다. 비록 옛날의 곤궁(困窮)하면서도 고상(高尙)한 뜻을 기른 선비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공의 선취(先娶)는 아들 김당(金溏)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은 김순(金珣)에게 출가하였다. 후취(後娶) 순천 장씨(順天張氏)는 밀직 부사(密直副使) 장홍(張弘)의 후예(後裔)로서 첨정(僉正) 장일신(張日新)의 딸이다.

 

딸 다섯을 낳으니 맏이는 신택(申澤)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김처선(金處善)에게 출가하였는데 충순위(忠順衛)요, 다음은 김온(金溫)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중영(柳仲郢)에게 출가하였는데 관찰사(觀察使)요, 다음은 이영(李苓)에게 출가하였는데 훈도(訓導)이다.

 

김당은 딸 하나를 낳으니 권덕린(權德麟)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김세우(金世佑)이다. 김순은 두 아들을 낳으니 김생하(金生河)ㆍ김생명(金生溟)이요, 사위는 강여개(康汝皆)이다. 신택은 두 아들을 낳으니, 신대년(申大年)ㆍ신대유(申大有)요, 세 사위는 김목(金牧)ㆍ문희정(文希禎)ㆍ조희조(趙希祖)이다. 충순위는 세 아들을 낳으니, 김응하(金應夏)ㆍ김응상(金應商)ㆍ김응주(金應周)요, 김온은 한 아들을 낳으니 김명견(金命堅)이다. 훈도는 딸 하나를 낳으니 사위는 김탄(金坦)이다. 내외손(內外孫)은 남녀 백여 인이다. 장 부인(張夫人)은 어질고 식견과 사려가 있어 공과 더불어 곤궁하게 살면서 거친 음식을 먹었지만 역시 스스로 즐거워하며 고된 생활을 싫어하는 뜻이 없었다.

 

공은 성화(成化 명 헌종의 연호) 무자년(戊子年 1468년 세조 44년)에 태어나 가정(嘉靖 명 세종의 연호)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에 돌아가니 향년(享年) 96세이었다. 임종(臨終)에 목욕하고 궤(几)에 기대어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기를, “족(足)하다.” 하고는 조금 뒤 홀연히 서거(逝去)하였는데, 피부는 살았을 때와 같았다.

 

장 부인은 공보다 몇 해 앞서 가정(嘉靖) 기미년(己未年 1559년 명종 14년)에 졸(卒)하니 88세였다. 대곡산(大谷山) 건좌 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공이 서거한 뒤 그 산기슭에 나아가 같은 묘역(墓域)에 봉분(封墳)을 달리한 제도(制度)로 만들었다.

 

그 22년 후에 외손(外孫) 유성룡(柳成龍)이 조정의 명을 받들고 관찰사로서 남쪽으로 내려와 공의 묘(墓)에 나아가 제(祭)를 올렸는데 그 묘도(墓道)에 비(碑)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었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덕(德)과 빛[光]이 따라서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고 민멸될까 크게 두려워하여, 드디어 짧은 빗돌을 그 앞에 세우고 대략 이상과 같이 그 후면(後面)에 서술(敍述)하니, 아마도 백세(百歲) 뒤에도 이로 인하여 공의 대개(大槩)를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7. 鶴沙先生文集에서 (2007. 10. 24. 윤식(문) 제공)

 

次金松隱 光粹 萬年松韻

霞外幽棲少俗塵。老仙遺躅尙如新。

孤標此日松無恙。活計當年道不貧。

晝愛淸陰侵几席。夜憐涼露濕衣巾。

瓊章一唱增三歎。更喜傳芳世有人。

 

-- 鶴沙先生(김응조)文集卷之一 / 詩○山中錄 중에서 --



푸른 선비의 기품이 있는 송은(松隱김광수(金光粹)
 

  
<영귀정>                                                          <송은 선생 묘소>




김광수(金光粹)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으로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松隱)이며 본관은 안동이며 만취당 김사원의 증조부서애 류성룡의 외조부이며 지례현감을 지낸 아버지 김극해(金克諧)와 어머니 연안 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천성이 고요하고 맑았으며 부모를 잘 섬기고 이웃 어른을 공경했다고 한다
1501(연산군 7) 진사시에 합격해서 성균관에 들어가 전도유망(前途有望)한 청년으로 입지를 넓혀 성리학은 물론 역학(易學)에도 능해 원로들의 질문에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고 사화로 올곧은 선비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한 그루 향나무를 심고 자호를 송은(松隱)이라 하고 병봉산 언덕에 영귀정(도 문화재자료 234)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영귀정(詠歸亭정자의 당호는 논어에서 공자가 증점(曾點)의 생각을 묻자 이에 증점이 답한 욕호기풍호무운영이귀(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기수에서 목욕하고무운에서 바람을 쐬며 읊조리다가 돌아온다.) 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정자를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00년경으로 추정하며 처음에는영귀모암(詠歸茅庵)’이라고 하였다가 이후 퇴락하여 1780(정조 4)에 후손인 함인재(含忍齋김종록이 주관하여 중수복원하고는 영귀정(詠歸亭)이라 하였다.
 
사가(私家)의 목조 건축물로 오래된 보물 제1825호인 만취당(晩翠堂주변에는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500년이 족히 넘는 향나무 만년송(萬年松:경상북도 기념물 제107)이 푸르름을 머금고 서있다만취당 마루에서 만년송을 바라볼 수 있으며 뒷문 위에는 선생이 직접 지은 시가 걸려 있다.
 
선생은 후손에게 전한 10개 항목으로 쓰여진 경심잠 (警心箴)이란 경계의 글을 남겼다.
필사본 1책으로 선생이 사습(士習)을 진작시키고 자손에게 예의를 가르치기 위해서 집필하였으며 앞머리에는 저자의 서문끝에는 저자의 간략한 약력이 수록되어 있다부모에 대한 효도’ 와 나라에 대한 충성에서부터죄 짓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과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가 담겨져 있다.
 
축약한 내용을 보면
1) 사친(事親) - 어버이 섬기는 일 2) 보군(輔君) - 나라에 충성할 일 3) 제묘(祭廟) - 제사를 받드는 일 4) 정가(正家) - 집을 바르게 다스림 5) 우애(友愛) - 형제자매 화목할 일 6) 근형(謹刑) - 형벌을 삼가할 일 7) 폐참(廢讒) - 남을 헐뜯지 말 일 8) 신색(愼色) - 여색을 삼가할 일 9) 결우(結友) - 친구를 잘 사귀는 일 10) 안빈(安貧) - 가난하면서도 분수를 지키는 일
의 10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촌마을에는 유독 의병에 앞장 선 분들이 많다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에 집중했지만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는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다임진왜란 때 김사원 삼형제 등이 의병 활동에 참여했으며 명성황후 시해 후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도 사촌마을에는 의병을 배출했다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촌마을에는병신창의기적비(丙申倡義紀績碑)’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나라를 구하기 위한 창의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송은선생이 만년송을 심고 절의를 지킨 것과 관련해 후손 만취당 김사원독수헌 김사형후송재 김사정 삼형제는 각각
만취당(晩翠堂만년송 푸른 빛이 가득한 집)
독수헌(獨秀軒만년송의 빼어난 기개)
후송재(後松齋만년송 뒤뜰에 있는 아늑한 집)
이렇듯 삼형제 모두 선조의 뜻을 잊지 않고자 만년송과 연관 지어 호를 지었다.
 
사촌마을에는 큰 난이 있을 때마다 임진왜란 때는 만취당 김사원정묘호란 때는 자락당 권수경병신창의 때는 운산 김상종 등 오직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정신이 곳곳에 남아있는 안동김씨 집성촌이다선생의 만년에는 자연 속에 은거하며 영귀정에서 시가를 읊으며 지내다가 96세에 세상을 떠났다사후 봉양 장대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묘는 점곡면 명고에 있다문집으로송은집저서에 소개한경심잠등이 있다.

                                                                                                                                                          (의성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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