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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원정 관련 기록
가)일본측 기록 (2004. 9. 17. 주회(안) 제공)
1274년,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과 관련하여 일본측 자료에는 당시의 전황을 상세히 기록한 문서가 몇가지 있습니다. 이들 자료도 입수 번역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스페셜 방영 장면을 보면, 대형 두루마기 그림 <몽고습래회사>의 칼라 도록을 게재하여 분석해 놓은 일본판 책자가 있는데 입수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대마도사(對馬島史)
「對馬島史」에는 연합군의 主力은 對馬 중앙부 아소우(淺茅)灣에 집결, 그 일부가 코모다에 내습했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코모다 이외에 對馬의 주요 거점들인 히타카츠(比田勝), 미네우라(三根浦), 카시우라(加志浦) 등지에도 상륙, 거기서도 在地武士들과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 팔만 우동기 : 쿄토 근교의 이와시미즈 하치만궁 신사에 보관 당시의 전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3)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 -쿠마모토(熊本)현 타케자키(竹崎) 마을의 토후쿠지(塔福寺)에 전해 옮, -일본 궁내청에 복제본 소장 (1293년경 완성)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아주 오래된 유물의 복사본이 있다. '몽골습래회사'. 바로 여기에 고려몽고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담겨 있다. 그림은 당시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한 일본인 무사의 활약상을 커다란 줄거리로 삼고 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이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물체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도 : 몽고습래회사 복제본. <다케자키 스에나가 에고토바(繪詞)>라고도 한다. 전권(그림 10폭, 사 9편), 후권(그림 11폭, 사 7편)으로 되어 있으며, 그림과 글(여기서는 사(詞))이 함께 이어지는 형식이다. 세로 39cm, 그림을 모두 합한 길이는 약 44m에 이른다. 1293년경 완성, 원본은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은 여몽 연합함대의 일본원정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쿠마모토(熊本)현 타케자키(竹崎) 마을의 토후쿠지(塔福寺)에는 희귀한 사료가 전한다. 700년 전 여몽 연합군의 일본원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두루마기 그림, 바로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다.
몽고습래회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물은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당시 연합군에 맞서 싸운 무사 다케자키 스에나가(竹崎季長)의 활약상을 큰 줄거리로 삼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인 스에나가는 실존인물이다. 절 뒤쪽에는 실제로 그의 무덤이 있다. 당시 이 지역의 영주였던 스에나가 전쟁에서 자신이 싸운 모습을 화가에게 그리게 한 것이다.
두루마리 그림에는 1281년 두번째 침략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의 배경이 이키노 마츠바라(生 松原) 지방이다.
<몽고습래회사>에는 무기뿐 아니라 군사들의 모습도 아주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금까지 고려 군사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었다. 남아 있는 기록이나 유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고습래회사>에 그 단서가 있다.
1274년 하카다 연안에 여몽 연합군이 속속 상륙한다. 본격적인 진격을 앞두고 그들은 이곳에 진을 친다. <몽고습래회사> 속의 장소는 소하라(祖原) 라는 곳이다. 해안가 바로 위. 여몽 연합군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야산에 진을 쳤다.
큐슈 중심부로 나가기 위해선 소하라를 지나야 한다. 바로 이곳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는 몽고습래회사의 주인공인 타케자키 스에나가의 첫 전투라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스에나가가 싸운 전투 장면으로 유명한 몽고습래회사 에도 일본군이 소하라에서 싸웠다는 기사가 나온다. 고려군과 일본의 무사들이 맞선 것으로 추정된다.
나) 원나라 측 기록 (2004. 9. 17. 주회(안) 제공) 충렬공께서는 원나라에 사신으로 또는 일본원정에 따른 원 세조의 부름으로 기록상 8차례이상 다녀 오셨습니다. 원나라의 역사서인 <원사> 4건, <신원사>에 9건의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대개 <고려사>와 비슷한 내용에 일본원정시 일본측 기록이 추가된 내용입니다.
그 외에도 칙서(勅書)나 표장(表狀) 등과 원나라에서 교유한 개인 문집 등에 충렬공 기록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사(元史)≫는 명(明)나라 송렴(宋濂) 등이 지은 원(元)나라 시대의 역사서로 지나치게 짧은 기간에 편찬되어 체제가 치밀하지 않고 오류가 많다. 모두 21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국 25사(史)의 하나이다.
≪신원사(新元史)≫는 ---추후 보완---
다)일본원정일지 (2004. 12. 15. 주회(안) 제공)
(1) 1차 공격일지
1274. 10. 3 그런데 그 출정을 앞둔 6월 중순에 高麗 국왕 元宗이 재위 15년에 타개했다. 元의 大都에서 세자 諶(심)과 황녀 쿠츠르가이미시(쿠빌라이의 딸인 齊國大長公主)의 결혼식이 거행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세자 諶(忠烈王)의 즉위식전과 元宗의 服喪(복상)이 잇달아 거행되는 바람에 출정의 시기가 연기되었다.
원정군이 合浦를 출항한 것은 元宗의 유해가 開京 교외 소릉에 안장된 9월12일의 다음 달, 즉 1274년 10월3일이었다.
征東行營의 소재지였던 마산시립박물관 뒷산 주변은 현재 추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산중턱에 위치한 박물관의 아랫동네(자산동 18번지) 큰길가에 蒙古井(몽고정)이 있다. 몽고정은 몽골의 둔진군에게 用水를 공급했던 우물로 추정되고 있다.
麗蒙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위해 출항했던 뱃머리는 박물관 정원 분수대에서 내려다보면 대우백화점이 보이는데, 그 왼쪽 일대이다. 제1차·제2차 麗蒙연합군 함대의 출항지였던 合浦洞(합포동) 일대는「마산의 자갈치」인 오동동과 馬山灣의 맨 안쪽인 산호동 사이의 동네다. 그 옆으로는 마산수출자유단지가 펼쳐 있다.
1274.10.5 麗蒙연합함대는 출항 이틀 후인 1274년 10월5일(이하 麗蒙연합군의 日本정벌 관련 날짜는 모두 음력) 오후 4시경, 對馬島 아랫섬의 사스우라(佐須浦)에 상륙했다. 사스우라가 바로 지금의 코모다이다. 對馬島의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와는 아랫섬의 「中央山地」를 가운데 둔 반대측 북서해안에 위치해 있다.
1274.10.6 다음날인 10월6일 麗蒙軍은 다시 전함 7, 8척으로부터 약 1000명의 軍勢를 상륙시켜 맹공을 가했다. 전투는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는데, 2시간 만에 對馬島軍은 전멸했다.
「對馬島史」에는 연합군의 主力은 對馬 중앙부 아소우(淺茅)灣에 집결, 그 일부가 코모다에 내습했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코모다 이외에 對馬의 주요 거점들인 히타카츠(比田勝), 미네우라(三根浦), 카시우라(加志浦) 등지에도 상륙, 거기서도 在地武士들과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골군은 이후 열흘 가까이 對馬島에 머물며 약탈을 감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對馬島를 정복한 연합군은 이즈하라港 등지에서 약 열흘간 휴식을 취한 후 다음 공격목표인 이키시마(壹岐島)로 진발한다.
1274.10.14 對馬島를 초토화하고 출항한 麗蒙연합군의 함대가 이키시마 북부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74년 10월14일 오후 4시경이었다. 大船 2척으로부터 약 400명의 몽골군이 상륙하자 가쓰모토의 村人들은 이를 세도우라(지금의 아시베港)의 후나카쿠죠(船匿城)에 급보했다. 城主는 이키의 守護代인 다이라노 케이류우(平景隆)였다. 가쓰모토에 상륙한 麗蒙연합군은 하카타(博多)港 공격에 편리한 세도우라를 점령하려고 동쪽으로 진격해 갔다.
세도우라에서 平景隆은 일족의 郎黨(낭당: 武家의 家臣) 100기를 이끌고 서쪽의 가쓰모토를 향해 출진했지만, 中途의 히츠메城(勝本町 新城) 앞에 이르면 연합군의 대부대와 조우하게 된다.
1274.10.15 다음날인 10월15일, 연합군은 이른 아침부터 히츠메城을 포위, 맹공을 가했다. 치열한 격전지였던 큐슈의 이키섬. 이곳은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옆에는 예사롭지 않은 무덤이 있다. 원구 천인총이다. 당시 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과 연합군이 함께 묻혀 있다. 7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키섬에는 당시 전쟁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지역 토산품 가게에서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목제품이 있다. 귀신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현지인들은 무쿠리 고쿠리라고 부른다. 무쿠리 고쿠리 무슨 뜻일까?
"이는 두 번에 걸친 몽고 침략,몽고군과 고려군의 침략으로 남자는 모두 살해돼 전멸했기 때문에 그 공포감과 처참함 잔학함을 나타내는 말로 예전부터 우는 아이를 달래때 사투리로 무쿠리 고쿠리 온다는 식으로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로 부터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연합군에 대한 공포는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1274.10.17 이키島를 초토화시킨 麗蒙연합군은 이어 肥前(히젠: 지금의 나가사키縣) 마쓰우라(松浦)郡의 다카시마(鷹島)를 습격했다.
1274년 10월17일, 麗蒙연합군은 다카시마(鷹島)로 침입, 이 섬의 阿翁과 船黨津의 해안으로부터 상륙했다. 한편 松浦黨의 무사들도 다카시마의 殿浦에 상륙, 남방의 곶(岬)에 日本山城을 구축하여 내습하는 麗蒙연합군에 항전했지만,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특히 다카시마 해역은 제2차 원정 때의 主戰場이었다. 지금도 다카시마 해역에선 麗蒙연합군의 유품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
지금도 해마다 일본 나가사키와 큐슈 앞바다에서는 7백년전 유물들이 건져지고 있다. 깊숙한 바다속에서 잠자고 있던 오래된 유물들 유물표면의 조개껍데기들이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칼과 갑옷들도 함께 나오고 있다. 갑옷 이 유물들은 일본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거대한 규모의 닻이다. 길이가 무려 7미터나 된다. 거대한 닻을 사용했던 7년전의 배 그것은 바로 고려몽고 연합군의 일본 상륙작전에 사용되었던 배 전함이었던 것이다.
고려 몽고 연합함대가 정박했다가 폭풍을 만난 곳이 바로 나가사키현 타카시마다. 이곳엔 7백여년전의 침몰선이 인양돼 있다. 배는 오랜 세월에 부식되어 사라졌지만 그 조각들이 남아있다. 인양된 유물은 도자기, 돌절구 등 다양하다. 그런데 인양된 유물 중에는 예사롭지 않은 것이 있다. 1994년 타케시마 해역의 고우자키항에서 출토된 소나무 닻이다. 놀랍게도 닻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발견됐다. 그런데 인양시 닻에는 이 두개의 돌이 함께 놓여 있었다 이 돌의 크기는 2미터. 이것은 닻의 하나가운데 박았던 돌이다. 닻돌이라고 한다. 하카다만 연안의 해저에서 인양된 닻돌은 모두 6개.
麗蒙연합군은 이어 大宰府 공략을 위해 하카타灣으로 진격한다. 연합군 함대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玄界島(겐카이도)의 西水道를 거쳐, 하카타灣에 그대로 침입했다. 6차례의 蒙使 파견, 특히 두 번에 걸친 趙良弼의 장기체재에 의해 규슈의 지리·풍속 등을 사전에 탐지해 두었기 때문인 것 같다.
1274.10.19 10월19일, 우선 일부 병력은 하카타灣의 서부 해안 이마쓰(今津)에 拔都魯輕疾舟를 대고 상륙하여 외곽에 거점을 확보했다. 다음날인 10월20일, 여명과 함께 하카타灣의 중앙부인 早良川(사와라가와) 河口인 모모치바라(百道原), 이키노하마(지금의 오키노하마), 하코자키(箱崎)해안 등 3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전개된다.
10월19일 이마쓰(今津) 해안에 상륙한 몽골군 支隊는 이마쓰의 監視隊를 밀어내고 포진, 그 일부가 다음날 하카타灣 중앙부인 모모치(百道) 해변에 상륙할 主力軍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東進하여, 모모치하마의 남방 소하라(祖原)山을 점거했다. 그때 祖原지구의 방어를 책임진 것은 하라다(原田) 一族과 마쓰우라(松浦)黨이었는데, 몽골군의 集團戰法과 新兵器의 위력 앞에 무참히 패퇴했다. 지금은 공원화한 소하라山에는 「元寇戰跡」碑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 麗蒙연합군의 本陣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1274.10.20 10월20일, 드디어 ★金方慶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메이노하마(姪浜) 앞 小戶海峽을 항행하여, 여명과 더불어 사와라가와(早良川) 河口인 모모치바라(百道原)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早良川의 지금 이름은 무로미가와(室見川)이다.
고려軍이 상륙한 지점에는 현재 초현대식 건물 「후쿠오카(福岡) 타워」(높이 123m에 전망대가 있음)가 들어서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그 바로 남쪽에는 후쿠오카 박물관, 동쪽엔 일본 프로야구단의 하나인 「다이에 호크스」의 홈그라운드인 「후쿠오카 돔」이 이웃해 있다.
이 전투에서 고려軍은 白道原을 완전히 확보하고 東進하여 현재 후쿠오카의 중심부인 鳥飼·別府·赤坂를 강습했다. 하카타의 이키노하마 앞바다로 침입한 몽골軍의 主力도 이키노하마와 하코자키(箱崎)에 상륙하여 少貳·大友·島津의 부대를 패퇴시켰다. 이로써 일본군 측의 하카타灣 해안방위선 30km가 모두 붕괴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20일의 하카타의 하코자키 지구 전투에서는 상륙한 麗蒙연합군을 島津久經의 부대가 용감하게 맞싸웠고, 하카타의 이키노하마의 전투에서도 少貳景資(經資의 동생으로 前線사령관)의 부대는 노도와 같이 몰려오는 몽골군에게 밀리면서도 힘껏 항전했다. 그는 스스로 長弓을 쏘아 몽골군의 副元帥(부원수)를 馬上으로부터 추락시켰다.
하카타灣岸에 있어서 양군의 主力戰은 10월20일 새벽부터 일몰까지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 있어서 일본군은 그 편성·장비·전투법의 어느 면에 있어서도 연합군보다 열등했다.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아주 오래된 유물의 복사본이 있다. '몽골습래회사'.바로 여기에 고려몽고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담겨 있다. 그림은 당시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한 일본인 무사의 활약상을 커다란 줄거리로 삼고 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이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물체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쿠마모토현 타케자키 마을. 이절에는 희귀한 사료가 전해지고 있다. 7백년전의 전쟁을 전하는 두루마리 그림이다. 몽고 습래 회사, 바로 고려 몽고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담겨 있다. 고려 몽고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는 것이다. 몽고습래회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물체는 놀라울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7백년전의 상황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그림은 당시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일본무사 스에나가의 활약상을 커다란 줄거리로 삼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인 스에나가는 실존인물이다. 절의 뒤쪽에는 실제로 그의 무덤이 있다. 당시 이 지역의 영주였던 스에나가는 전쟁에서 자신이 싸운 모습을 화가에게 전달해 그리게 했다
그는 2만여명으로 이루어진 고려군을 이끌고 1274년 10월 지금의 마산인 합포를 떠난다. 연합군의 상륙지는 모두 세곳. 그중 ★김방경부대는 소하라 지역으로 상륙한다.
1274년, 일본 본토인 하카다 연안에 고려 몽고 연합군이 속속 상륙한다. 본격적인 진격을 앞두고 고려 몽고 연합군은 이곳에 진을 친다. 몽고습래회사 그림의 이 장소는 소하라 라는 곳이다. 해안가 바로 위. 고려 몽고 연합군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야산에 진을 쳤다. "저쪽에서 몽고와 고려군이 상륙합니다 그리고 이 소하라 산이라는 낮은 산에 진을 친다 이 진을 친곳이 에마키에 이렇게 그려져 있는 곳이다" 큐슈중심부로 나가기 위해선 소하라를 지나야 한다. 여기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몽고습래회사의 주인공인 타케자키 스에나가의 첫 전투라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스에나가가 싸웠던 전투 장면으로 유명한 몽고습래 회사 화면에도 일본군은 소하라에서 싸웠다는 기사가 나온다 스에나가가 싸우는 그 장면은 소하라 진입한 고려군과 일본의 무사들이 싸웠던 전투 장면이라고 추정"
"이 두루마리 그림에는 1281년의 두 번째 침략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이곳 이키노 마츠바라 지방입니다
소바라로부터 赤坂에 이르는 戰場에서는 鳥飼瀉 부근이 습지대였던 것이 일본군에겐 다행스러워 한동안 연합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카타 지구에서는 少貳·島津 부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일거에 동남방이 뚫렸다. 몽골군은 奉行所를 습격, 하카타町의 민가와 氏神을 모신 쿠시다(櫛田: 즐전)神社를 불태웠다.
특히 大友賴泰가 수비하고 있던 하코자키(箱崎)지구가 뚫리자 鎭西軍 전체가 大宰府의 최종 防衛라인인 미즈키(水城: 수성)로 퇴각했다. 이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들이 최고로 숭배하던 武神을 모신 신사 ♥崎宮(거기궁: 하코자키구우)이 兵火로 소실되었다.
하코자키궁은 당시 전쟁을 기리는 신사다. 이곳 유물 창고에는 일본 원정때 연합군이 사용한 활이 보관돼 있다. 연합군측의 장군이 썼던 활이라고 한다. 활의 크기는 1m20cm미터 남짓, 전형적인 우리 활의 모양이다. 재질은 뽕나무와 대나무로 되어있고 나무로 된 몸체는 가운데가 쇠로 연결돼있다. 활의 양끝은 고래뼈를 붙였다
소바라 및 아카자카(赤坂) 지구에 있어서 일본군의 善戰에도 불구하고 하코자키(箱崎) 지구에서 劣勢(열세)에 처한 大友·島津 부대의 패퇴에 의해 일본군은 하카타灣으로부터 50여 리 밖 大宰府의 서쪽 방벽인 미즈키(水城: 수성)로 일제히 철퇴했다. 후쿠오카 일대는 방어전을 전개할 만한 요새지가 별로 없는 평야지대이기 때문이었다.
이 오토모(大友)·시마즈(島津), 양군의 철퇴에 따라 하코자키팔번궁의 宮司는 御神體를 받들어 宇美(粕屋郡 宇美町)의 極樂寺로 피란했다. 그 직후 일본 3大 社殿의 하나인 하코자키神社는 몽골군에 의해 불탔다.
몽골군은 하카타灣에 상륙하면 곧장 大宰府로 진격해서 이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몽골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일몰인 데다 地理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10월20일의 전투에서 主力병기인 短弓의 화살이 다했기 때문이다.
10월20일 밤, 연합군은 勝勢에도 불구하고 陸上 교두보에서 野營하지 않고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를 타고 하카타灣에 떠 있던 군함 千料舟로 물러났다. 육지에서 宿營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夜襲(야습)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귀함 후 연합군 수뇌부는 전투를 계속할 것인가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作戰會議(작전회의)를 열었다.
★金方慶이 말하기를, 『우리 兵들이 이미 敵陣에 침입해서 잘 싸우고 있어 「지금부터 一步」라는 상황에 있다. 옛날 秦(진)의 명장 孟明(맹명)은 (상륙 후에) 스스로 (타고 온) 배를 불태웠고, 漢의 淮陰侯 韓信(회음후 한신)은 背水陣(배수진)으로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 故事에 따라 決戰을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했다.
高麗의 사령관 ★金方慶은 하카타 교두보에서 野營한 뒤 다음날 일본군과 決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총사령관 ♥都와 右副元首(우부원수) 洪茶丘는 이 이상 싸워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지지 않을 것이니 만큼 철병해야 할 것이라고 거부했던 것이다.
한편 지휘부의 견해가 엇갈린 상황에서 歸艦(귀함)한 麗蒙연합군은 10월20일 심야로부터 21일 새벽에 이르는 사이에 하카타灣으로 몰아닥친 大폭풍우로 궤멸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1274.11.20 高麗史에는 『이번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의 총수가 무려 1만3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 병력은 꼭 한 달 후인 11월20일 合浦로 귀항했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 기록에서
■ 고려사 104 열전 17 (김방경)
○ <원종> 15년에 제(帝)가 일본을 치고자하여 김방경과 홍다구에게 조(詔)하여 전함(戰艦)을 감조(監造)하게 하니 조선(造船)을 만약 만양(蠻樣)에 의거하면 공비(工費)가 많고 장차 일국(一國)이 근심하였다.
김방경이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가 되어 먼저 전라(全羅)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어 자문(咨文)으로 중서성(中書省)의 격문(檄文)을 받고 본국(本國 고려(高麗) )의 조선양식(造船樣式)을 써서 독촉하여 만들었다.
이해에 원종(元宗)이 훙(薨)하고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매 김방경이 홍다구와 더불어 단기(單騎)로 와서 진위(陳慰)하고 합포(合浦)에 돌아와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과 부원수(副元帥) 홍다구·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전함(戰艦)을 사열(査閱)하였다.
김방경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박지량(朴之亮)·★김흔(金)·지병마사(知兵馬事) 임개(任愷)로 부사(副使)를 삼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김신(金侁)으로 좌군사(左軍使)를 삼고 위득유(韋得儒)·지병마사(知兵馬事) 손세정(孫世貞)으로 부사(副使)를 삼고 상장군(上將軍) 김문비(金文)로 우군사(右軍使)를 삼고 나유(羅裕)·박보(朴保)·지병마사(知兵馬事) 반부(潘阜)로 부사(副使)를 삼아 3익군(翼軍)이라 이름하니 ★김흔(金)은 곧 ★김수(金綬)이다.
그리하여 몽고군(蒙古軍)·한군(漢軍) 25,000명, 아군(我軍) 8,000명, 초공(梢工)과 인해(引海)·수수(水手 수부(水夫) ) 6,700명, 전함(戰艦) 900여 소()로써 합포(合浦)에 머물러 여진군(女眞軍)을 기다리니 여진군(女眞軍)이 기일(期日)에 늦을까 하여 이에 발선(發船)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서 쳐서 죽임이 심히 많았다.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언덕위에 진(陣)을 친지라 박지량(朴之亮)과 김방경의 서()인 ★조변(趙)이 쫓으니 왜가 항복을 청하다가 다시 와서 싸우거늘, 홍다구가 박지량과 조변(趙)과 더불어 1,000여 급(級)을 격살(擊殺)하고 배를 삼랑포(三郞浦)에 버리고 길을 나누어 나아가매 죽인 바가 대단히 많았다.
왜병(倭兵)이 갑자기 이르러 중군(中軍)을 쳐서 검(劒)이 좌우로 부딛쳤으나 김방경은 의연하여 조금도 물러가지 않고 한 효시(嚆矢)를 빼어 소리를 가다듬어 크게 외치니 왜(倭)가 놀라 피하여 달아나므로 박지량(朴之亮)과 ★김흔(金)·★조변(趙)·이당공(李唐公)·김천록(金天祿)·신혁(新奕) 등이 힘껏 싸워 왜병(倭兵)이 크게 패하여 엎어진 시체가 삼대와 같았다.
홀돈(忽敦)이 말하기를, “몽인(蒙人)이 비록 싸움에 익숙하였으나 어찌 이에 비하리오.” 하였다. 모든 군사가 같이 싸워 해가 저무니 이에 해산(解散)하였다.
김방경이 홀돈(忽敦)·홍다구(洪茶丘)에게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1,000리(里)에 현군(縣軍) 하면 그 칼날을 가히 당치 못한다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비록 적으나 이미 적경(敵境)에 들어와서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즉 맹명(盟明)이 배를 태우고 회음(淮陰)이 물을 등짐이라 다시 싸우기를 청한다.” 하매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소적(小敵)이 견수(堅守)하면 대적(大敵)에게 사로잡힌다.’고 하였으니 피핍(疲乏)한 군사를 채찍질하여 날로 불어나는 무리를 당적함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회군(回軍)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유복형(劉復亨)이 유시(流矢)에 맞아서 먼저 배에 오르므로 드디어 군사를 끌고 돌아올 때 마침 밤에 크게 풍우(風雨)가 있어 전함(戰艦)이 암벽(岩壁)에 부딛쳐 많이 파손(破損)되고 김신(金侁)은 물에 떨어져 죽었다.
합포(合浦)에 이르러 노획한 기장(器仗)을 제(帝) 및 왕에게 바치니 왕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장일(張鎰)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김방경을 먼저 돌아오도록 명하여 상주국 판어사대사(上柱國判御史臺事)를 더하였다.
▶해상왕국 고려의 造船과 관련해서는 KBS1TV 역사스페셜 (http://www.kbs.co.kr/history/)에서 방영된 다음을 보면 대본과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 1999. 03. 20 방영 <영상복원 - 해상왕국 고려의 군함>
(2) 2차 공격 일지
1281.4. 중순 (동로군의 몽골 한족부대, 합포에 도착) 東路軍의 몽골·漢族 부대는 大都로부터 2개월에 걸쳐 행군, 4월 중순에 고려의 合浦에 도착, 고려군과 합류했다.
忠烈王은 그의 희망대로 再征 직전에 征日本行省의 左丞相을 겸직하게 되었다. ★金方慶도 都·洪茶丘와 同格인 征일본도원수에 임명되었다. 忠烈王은 東路軍이 모두 合浦(합포: 마산)에 집결하자 都·洪茶丘·★金方慶이 나란히 뒤따르게 하여 全軍을 閱兵(열병)했다. 이것은 제1차 원정 때보다 고려군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1281.5.3 (합포 출발) 東路軍이 합포를 출발한 날은 1281년 5월3일이었다. 東路軍과 江南軍이 이키島에서 합류하기로 한 것은 6월15일이었기 때문에 아직 40여 일이 남아 있던 시점이었다.
1281.5.21 (대마도 앞바다 도착) 東路軍이 對馬島 앞바다에 나타난 날은 5월21일. 일부 병력이 世界村 大明浦에 상륙, 對馬島 수비대를 격멸했다. 大明浦는 지금의 佐賀村이라는 것이 通說이다. 佐賀村은 대마도 東岸의 要津으로서 예로부터 외국선의 정박지로 알려져 있다.
1281.5.26 (이키도 아시베만 집결) 對馬島에 상륙하여 점령한 東路軍은 이어 이키島로 진발했다. 도중 大風을 만나 장병 130명, 梢工(초공) 36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이키의 아시베(芦邊)만에 집결한 것은 1281년 5월26일이었다. 아시베灣에 집결한 東路軍은 船匿城에 鐵砲와 短弓을 쏘면서 상륙을 개시했다. 이키軍은 상륙하는 東路軍에게 바위를 굴리고 長弓을 쏘면서 항전하다가 玉碎(옥쇄)했다. 현재, 아시베(芦邊)町의 이키神社에서는 이 젊은 무사를 祭神으로 받들고 있으며, 아시베港 뱃머리에도 그의 騎馬像이 세워져 있다.
1281.6.6 (하카타만 상륙) 이키島를 점령한 東路軍은 10일간 휴식하고 소부대만 잔류시킨 뒤 6월6일 하카타灣으로 침입했다. 그런데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발도로경질주)를 타고 하카타 灣岸으로 접근하던 東路軍은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동쪽 카시이(香椎)로부터 서쪽 이마즈(今津)까지의 해안선에 연 20km에 걸쳐 防壘(방루)가 축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높이 2m 전후의 방루에는 무수한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일본병들이 빈틈없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東路軍은 즉각 작전을 변경, 防壘가 없고 수비가 엷다고 판단되던 시카노시마(志賀島)에 상륙, 그곳으로부터 「海의 中道」를 통해 내륙부로 진입하려고 했다. 시카노시마에서는 100여m에 불과한 「海의 中道」만 건너면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나온 하카타 동북쪽 半島에 상륙할 수 있었다(지금 시카노시마는 연육교로 하카타 동북부와 연결되어 있음). 東路軍은 300척의 함대를 동북쪽 나가도(長門)로 파견, 간몬(關門)해협을 차단함으로써 혼슈(本州)로부터의 증원군을 저지하려고도 했다. 이런 작전은 일본軍 측도 예상하고 있었다. 우선, 시카노시마에 상륙한 東路軍에 대해 오토모 요리야쓰(大友賴泰)의 부대가 공세를 걸었다. 그것을 아키다(秋田城次郞)가 이끄는 關東軍이 측면으로부터 엄호하여 東路軍을 해상으로 내몰았다. 시카노시마 쟁탈전은 6월6일 밤부터 8일간 계속되어 東路軍이 하카타灣으로부터 퇴각한 것은 6월13일이었다.
1281.6.8 전황에 대해 高麗史節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金方慶은 6월8일 일본군과 力戰하여 참수 300여 급을 얻었지만, 洪茶丘는 일본군에 돌파되어 패주했다. 王萬戶가 이끄는 弓弩(궁노)부대의 구원에 의해 洪茶丘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다음날 6월9일에도 패전을 거듭했다. 게다가 陣中에 疫病(역병)이 나돌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3000명에 달했다>
한편 300척의 함대를 구성, 나가도(長門)로 향했던 東路軍의 一枝軍은 다시 2隊로 나뉘어 角島(츠노시마)와 蓋井島(후다오이지마)를 점거했다. 나아가 나가도國 豊浦郡의 도이가하마와 黑井村의 야츠가하마에 상륙을 개시했던 것은 6월8일부터 9일에 걸친 양일 간이었다. 이때 도이가하마의 경비를 맡고 있었던 것은 나가도의 수비군과 가마쿠라 막부 직속의 무사 正上左京亮의 부대였는데, 3500명 규모의 몽골軍에 패해 田耕村의 고센가하라까지 퇴각했다. 그러나 위급함을 들은 나가도의 守護軍은 關東으로부터 내려온 아다치 모리무네(安達盛宗) 부대 등의 증원을 얻어 6월15일 고센가하라 전투에서 몽골군을 패퇴시켰다. 야츠가하마에서는 그곳 城主 아오야마(淸山玄蕃丞)가 일족을 이끌고 나가도 守護가 파견한 부대와 함께 약 2000명의 몽골 상륙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城主가 전사한 가운데 일본군은 厚母(아쓰모)까지 퇴각했다. 이 방면의 몽골군도 6월13일 厚母분지에서 패퇴하고 말았지만, 그때까지의 전반적인 전황은 결코 東路軍에게 불리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江南軍과 연합하여 전략적 요충 하카타를 再공략하기로 했던 것이다.
江南軍은 사전 약정된 이키島가 아닌 平戶島에, 그것도 근 보름이나 늦게 도착했다. 江南軍은 平戶島 앞바다에 도착한 후 하카타灣岸의 방위가 견고한 것을 알고 松浦에 상륙하려고 했지만, 이곳도 松浦黨(마쓰라도우)의 격렬한 저항을 받고 물러났다.
1281.7.27 (양 8.19) (평호도 앞바다 강남군과 합류, 웅도 점령)
東路軍은 이키島로부터 平戶島 앞바다로 항행, 7월 상순에야 江南軍과 합류할 수 있었다. 이런 작전상의 불협화음이 바로 연합군이 지닌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東路軍과 江南軍을 총괄한 최고사령관은 蒙將 아타하이(阿塔海)였다. 그는 도원수들을 소집해서 일본 본토 공략을 위한 작전회의를 열었다. 공략 목표는 역시 일본 鎭西軍의 본거지인 大宰府였다. 아타하이는 일본군의 반격과 전염병 창궐로 탈락자를 낸 東路軍을 재편성하고, 하카타灣의 공격부서를 정했다.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平戶島로부터 동쪽으로 逐次(축차) 이동, 이마리(伊萬里)灣 입구인 다카시마(鷹島) 근해에 집결했던 것은 7월27일(양력 8월19일)이었다. 연합군은 먼저 응도를 포위, 즉각 점령했다. 연합군의 대선단이 鷹島 앞바다에 집결, 이 섬을 점령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鎭西사령부는 즉시 하카타灣 일대의 軍船을 鷹島 근해로 출동시켰다. 그러나 일본 水軍으로서는 艦隊戰을 감행할 수 없었다. 수천 척에 달하는 연합군의 大함대가 鷹島 근해에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日本 水軍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은 연합군이 放心하는 틈을 타 夜襲(야습)을 감행하는 것뿐이었다.
『7월27일, 軍을 이동하여 鷹島에 이르니 곧 일본군의 軍船이 습격해 왔다. 이에 張百戶 장군은 즉각 대비, 부하들과 함께 주야로 응전했다. 일본군은 다음날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 江南軍으로 참전했던 張百戶라는 장군의 墓碑(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1281.윤7.1 (양력 8.23) (강력한 태풍 몰아치기 시작) 東路軍과 江南軍이 합류함으로써 戰列을 再정비한 연합군은 하카타灣을 향해 진격하려 했던 직전에 뜻밖의 사태에 직면했다. 7월30일 밤부터 강력한 西北風이 몰아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입춘 후 210일을 전후하여 일본 일대에 불어오는 颱風(태풍)이었다. 날이 바뀌어 閏 7월1일, 현행 양력으로는 8월23일이었다. 연합군 장병들은 크게 요동치는 함내에서 배멀미로 곤죽이 되었다. 태풍은 점점 거세어져 집채만 한 파도가 함대를 습격했다. 西北風이었기 때문에 鷹島 남단과 松浦 사이의 伊萬里灣에 정박하고 있던 연합군의 함대는 정면으로 강풍을 받았다. 연합군의 함대는 거친 파도와 바람에 휩쓸려 서로 충돌하거나 육지의 바위에 부딪혀 대부분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연합군 함대는 東路軍 900척과 江南軍 3500척, 합계 4400척. 서북풍이 불기 시작했을 때 응도 남단의 바다로 피난을 개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응도 남단 해역뿐만 아니라 응도의 북쪽 해역, 黑島 및 伊萬里灣 안쪽과 灣內의 御廚沖 방면의 해역과 玄界灘 등지에도 散開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풍의 계절이었던 만큼 바다가 거칠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시기에 海國 일본을 공략한다는 것은 무모했다. 태풍으로 큰 타격을 받은 연합군 중 일부는 간신히 鷹島의 船唐津으로부터 床浪·殿浦(토노노우라)에 이르는 南海岸에 漂着, 거기서 伐木하여 新造한 배를 타고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전원 전사했다. 鷹島에는 태풍의 피해를 받은 다수의 몽골군 장병이 도주해왔는데, 일본軍이 그들을 초토하기 위해 龍面庵이라는 곳에 진지를 설치했다. 사령관은 少貳景資로서 이 구릉지에 「御館」이라고 쓰인 標石이 남아 있다. 鷹島의 船唐津과 中川原은 일본군과 몽골군이 격렬하게 교전했던 곳으로서, 승리한 일본군은 몽골의 패잔병을 다수 참수하여 현재도 「首除(쿠비노키)」라고 하는 地名이 남아 있다. 그 전적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鷹島에 표착한 異賊 수천인, 이 가운데 깨어진 7, 8척의 배를 수리하여 몽골·고려인 약간이 타고 도주했다. 이것을 본 鎭西軍이 少貳景資의 지휘로 수백 척이 鷹島로 몰려갔다. 배가 없어 도주하지 못한 異國人 1000여 명이 항복을 구걸했지만 모두 붙들어 中河 하구에서 목을 쳤다> 위에 나오는 「中河(나카가와)」는 지금도 鷹島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작은 하천에 지나지 않지만, 이른바 「蒙古襲來遺蹟」으로서는 빠트릴 수 없는 현장이다. 궁지에 몰린 패잔병들도 최후의 항전을 감행, 日本 軍兵들도 다수 전사했다고 한다. 鷹島로부터 배후의 이마리灣 연안 지역 또는 灣內 御廚沖 방면에 산개해 있던 연합군 함대도 태풍에 의해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뉴스가 전해지면 하카타灣 방면에 포진했던 鎭西軍도 잔적토벌에 나섰다.
1281. 윤 7.7 (고려로 귀환)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이 초토전은 閏 7월7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아타하이·都·洪茶丘·★金方慶·范文虎 등 사령관들은 간신히 침몰하지 않은 군선들을 타고 고려로 돌아갔다.
현재, 鷹島의 남해안 床浪에서는 水中考古學에 의한 해저유적조사가 시행되어 인양된 다수의 침몰선박 및 해저유물이 鷹島町 新崎免의 町立 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鷹島 해저유물은 床浪지구뿐만 아니라고 남해안 전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鷹島의 南岸 床浪(토코나미)灣은 연합군 함대의 피해가 가장 컸던 장소였다. 이 해역의 실크層(두께 3m)의 모래층을 흡입기로 빨아 올리면, 아직도 700여 년 전의 遺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鷹島의 역사민속자료관에는 鷹島 해역에서 인양된 생활용품과 船具·무기가 다수 전시되어 있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 기록에서
■ 고려사 104 열전 17 (김방경)
<충렬왕(忠烈王)> 7년 3월에 군사를 내어 동정(東征)할 때 김방경이 먼저 의안군(義安軍)에 이르러 병장(兵仗)을 사열(査閱)하고 왕은 합포(合浦)에 이르러 크게 제군(諸軍)을 열병하였다.
김방경이 흔도(都), 홍다구(洪茶丘), 박구(朴球), 김주정(金周鼎) 등과 더불어 출발(出發)하여 일본 세계촌(世界村) 대명포(大明浦)에 이르러 통사(通事) 김저(金貯)로 하여금 격(檄)으로 설유(說諭)하였다. 김주정(金周鼎)이 먼저 왜(倭)와 더불어 교전(交戰)하매 제군(諸軍)이 다 내려 같이 싸워 낭장(郞將) 강언(康彦), 강사자(康師子) 등이 죽었다.
6월에 김방경, 김주정(金周鼎), 박구(朴球), 박지량(朴之亮), 형만호(荊萬戶) 등이 일본병(日本兵)과 더불어 함께 싸워 300여 급(級)을 베니 일본병(日本兵)이 돌진하므로 관군이 무너지고 홍다구가 말을 버리고 달아나거늘, 왕만호(王萬戶)가 다시 가로질러 쳐서 50여 급(級)을 베니 일본병(日本兵)이 이에 물러가고 홍다구는 겨우 면하였다.
그 다음날 다시 싸워 패적(敗績)하고 군중(軍中)에 또 크게 질병이 나서 죽은 자가 무릇 3,000여 명이라, 흔도 홍다구 등이 여러 번 싸워 불리하였고 또 범문호(范文虎)가 기일(期日)을 지나도 오지 않음으로써 회군(回軍)하고자 의론하기를,
“성지(聖旨)가 강남군(江南軍)과 동로군(東路軍)이 반드시 이 달 16일에 일기도(一岐島)에서 만나게 하였는데 지금 남군(南軍)이 오지 않고 아군(我軍)이 먼저 와서 여러 번 싸웠으나 전선(戰船)이 썩고 양식이 다 하였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리오.” 하니 김방경이 묵연(默然)하였다.
10여일에 또 의론이 처음같거늘 김방경이 말하기를, “성지(聖旨)를 받들고 3개월 분량의 양식을 가지고 왔으니 이제 한달 양식이 아직 있는지라 남군(南軍)이 오기를 기다려 합공(合攻)하면 이를 멸할 것이다.” 하니 제장(諸將)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범문호(范文虎)가 만군(蠻軍) 10여만을 거느리고 오니 배가 무릇 9,000소()였다.
8월에 대풍(大風)을 만나 만군(蠻軍)이 다 빠져 죽으니 시체가 조수(潮水)를 따라 포구(浦口)에 들어와 포구(浦口)가 이 때문에 막혀 밟고 다니게 되는지라 드디어 환군(還軍)하였다.
■ 김순 묘갈 번역문 (출전 : 안양문화유적총람/안양시 문화공보담당관실/1996. 2월) ---이로부터 부친께서는 막내 아들을 더욱 사랑하여 항상 신변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하정사(賀正使)로 가실 때도 꼭 데리고 다니셨으나 다만 일본을 정벌하러 가실 때는 따라오지 못하게 하신 것은 종군하여 위태한 일에 참여치 못하게 함이었다. 공이 이에 출정행차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몰래 먼저 군함에 올라타고 갔는데 마침내 부친을 호위하고 구원(救援)한 공(功)이 자못 컸으니 이는 공이 오로지 충효로서 발분(發憤)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임오년(壬午年)에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승진하고 ---
■ 고려사 김방경 열전 부 김순 열전 김순(恂)의 자(字)는 귀후(歸厚)인데 충렬왕 5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낭장으로 있다가 곧바로 학사 직강(學士直講)으로 올라갔다. 김방경이 일본 정벌로 떠나자 김순은 종군하려고 하였는데 김방경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가만히 배에 올라 종군하고야 말았다. 귀환하게 되자 전중 시사(殿中侍史)로 승직하고 ---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과 <여말선초의 대마도 정벌>과 관련해서는 KBS1TV 역사스페셜 (http://www.kbs.co.kr/history/)에서 방영된 다음을 보면 대본과 동영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2002. 02. 09 방영 <고려 몽고 연합함대 일본원정, 주력은 고려군이었다.> ○ 2002. 11. 02 방영 <원정함대 사령관 이종무는 왜 대마도에서 철군했나.>
▶이상의 자료 출전 : 월간조선 2003년 12월, 2004년 1월, 2월호
다) 일본 원정길에서 (204. 12. 15. 주회(안) 제공)
1) 충렬공께서는 제2차 일본원정을 준비하면서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를 개축하여 군량을 확보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2) 釋 宓庵(석 복암, *원감국사 충지)이 지은 충렬공의 일본원정 출정길을 축수하는 疏(소) 한 가지가 <동문선>에 실려 전하고 있습니다.
3) 충렬공께서는 1281년 2차 일본원정을 마치고 개경으로 귀환하는 길에 고향 안동을 지나면서 영호루에 올라 지은 詩 한 수가 또한 <동문선>에 실려 전하고 있습니다.
안동시내 낙동강 건너편 정하동의 우뚝 솟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映湖樓(영호루)는 197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강 건너편 당북동에 있었는데, 충렬공께서 젊은 시절에 이곳에 올라 시와 풍월을 읊으며 유상하시던 곳입니다.
1279년 제천의 의림지 개축 의림지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제방의 길이 530척으로 400결의 논에 물을 댈 수 있다 하였고, 현재도 물의 깊이가 12㎡나 되는 것으로 미루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1279년(충렬왕 5) ★김방경(金方慶)이, 세종조에는 정인지(鄭麟趾)가 개축하였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74-1281년) 밀양의 수산제 개축 신증동국여지승람 第26卷 密陽都護府 수산제(守山提): 수산현에 있다. 둘레가 20리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김방경(金方慶)이 뚝을 쌓아서 밭에 물대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군량(軍糧)을 갖추었다."한다. 못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연. 마름, 귀리가 보이는 끝까지 가득하다.
■ 도원수 김시중을 축수하는 소[都元帥金侍中祝壽疏]
현관(玄關 불문에 들어가는 관문)의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덕화는 감동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게 되옵고, 주벌(朱閥 궁궐)의 아래에 복을 비는 정성은 지극하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하물며 막측(莫測)한 땅을 정벌하려면, 미연의 우환을 먼저 막아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공손히 생각하니, ★현후(賢侯)께서는 성대에 태어나서, 일찍이 백여 차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두 왕대에 높은 벼슬을 역임하셨습니다. ♠중봉(中奉 중봉대부)과 ♠중찬(中贊)이 모두 높은 직위요, ♠상장(上將)과 ♠상상(上相)이 함께 귀한 자리입니다.
초변(貂弁)과 선관(蟬冠)은 덕망이 중하여서 백관들이 무릎걸음으로 공경을 표하고, 호부(虎符)와 귀인(龜印)은 위엄이 높아서 삼군(三軍)이 팔뚝을 떨면서 명령을 듣습니다.
이제 융거(戎車)를 몰아 왕궁 밖으로 나와서, 장차 훼복(卉服)(주D-001)들을 무찌르려고 1만 군사를 몰아 나감을 제갈공명이 촉(蜀)을 출발하는 듯하고, 1천 척의 배를 출동함은 왕준(王濬)(주D-002)이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보다 승합니다. 이러한 때에 부처님의 도움을 받게 되면 얼마 안 가서 개선(凱旋)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정묘한 공양을 장만하여, 특별한 법식을 차립니다. 이 정성스러운 마음이 부처님의 원명한 거울에 맞으시기 엎드려 원합니다. 운운. 한 돛이 바다를 잘 건너서 왜구(倭寇)들의 항복을 보게 되고, 일만 깃발이 무사히 돌아와서 순 임금 뜰에 첩서를 올리듯 하소서. 공명을 죽백(竹帛)(주D-003)에 길이 드리우고, 세월은 소나무와 참죽나무[椿]처럼 새로워지이다.
[주 D-001] 훼복(卉服) : 섬 오랑캐는 풀[卉]로 옷을 지어 입는다고 해서 일본(日本)을 훼복이라고 말한다. [주 D-002] 왕준(王濬) : 중국 삼국시대 말기 진(晋) 나라 사람.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오 나라 서울을 함락시키고 오 나라 임금의 항복을 받았다. [주 D-003] 죽백(竹帛) : 예전에 종이를 발명하지 못하였던 때에는 모든 기록을 대[竹] 가지나 비단[帛] 폭에 썼었다. 그래서 역사를 죽백이라고 말한다.
■ 福州(今安東) 映湖樓 /안동 영호루를 지나며 ---충렬공 김방경
山水無非舊眼靑 /산천은 변함없이 옛모습 그대로 있고 樓臺亦是少年情 /루대도(복주루를 말함) 또한 소년시절의 정이 그대로구나 可憐故國遺風在 /고국은 아직도 옛풍습 그대로 남아있고 收拾絃歌慰我行 /아름다운 거문고소리와 노래는 나의 갈길을 위로해 주도다
<문화유적총람 3편> 【유적명칭】영호루 유허비(映湖樓遺墟碑) 【소 재 지】경상북도 안동시 당북동 영호루 유허비(映湖樓遺墟碑)는 높이 179cm, 폭 61cm, 직경 31cm이며, ★김일대가 글을 짓고, ★남장수가 글을 썼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가부의 남쪽 관문인 이 곳이 영호루의 옛터다. 배야임수로서 앞으로 봉황암과 봉지산이 병풍같이 둘러있고 낙동강 700리 맑게 흐르니 사시지경이 장관이라 춘화 경명에 파형이 문체를 이루고 호월천리에 상하 누경이 영수만경하므로 이름하여 영호루라 하고 영남 삼대루의 하나로 명성이 높다".
그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밀양의 영남루와 진주의 촉석루는 여말에 건립되었으나 영호루는 고려 충렬왕 초년(1274) 명현 ★김방경이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향인 안동에 들려 이 누에서 시를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중엽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에 몽진하면서 이 누에 자주 소일하였고 환도후에 영호루 삼자의 어필을 하사하니 공민왕 17년(1368) 안동 판관 신자전이 누각을 중건하고 액자에 금을 입혀 편액하였다. -----139년후 갑술 7월 홍수로 다섯번째 유실되어 36년후 1970년에 시장 ★김낙현이 재직시 강 건너 남암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참고문헌】안동시립민속박물관, 1995, <<안동의 비석>>, 302-303.
라) 여몽 연합군의 출항지 합포 (2004. 8. 4. 주회(안) 제공) ■ 월간조선 2003년 12월호
麗蒙연합군의 출항지 合浦
11월3일 오전 8시40분 木浦(목포)발 馬山(마산)行 직행버스를 탔다. 마산은 몽골이 일본 정벌을 위해 征東行營(정동행영)을 설치했던 곳으로 당시엔 合浦(합포)라고 불렸다. 몽골의 世祖 쿠빌라이는 고려에서 삼별초의 항쟁이 평정되자 일본 정벌을 서둘렀다.
오후 3시 무렵 마산 종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늦가을의 해는 짧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마산시청 문화관광과로 찾아가 학예사 구수익씨를 만나 자료를 얻었다. 구수익씨는 마산시립박물관 송성안 박사가 마산의 몽골유적에 관해 전문가라고 귀띔해 주었다. 마산시청을 나와 택시를 타고 자산동 고지대에 있는 마산시립박물관으로 찾아갔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전국 박물관이 모두 휴관하는 월요일이었다. 宋박사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에게 『征東行營이 있었던 자리가 어디냐』고 물으니 『바로 박물관 뒷산』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다시 『麗蒙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위해 출항했던 뱃머리가 어느 지점이냐』고 질문했더니 『박물관 정원 분수대에서 내려다보면 대우백화점이 보이는데, 그 왼쪽 일대』라고 대답했다.
우선, 분수대로 가서 제1차·제2차 麗蒙연합군 함대의 출항지였던 合浦洞(합포동) 일대를 촬영했다. 합포동이라면 「마산의 자갈치」인 오동동과 馬山灣의 맨 안쪽인 산호동 사이의 동네다. 그 옆으로는 마산수출자유단지가 펼쳐 있다. 「합포동」이란 洞名에서 드러나듯 이곳은 마산항의 「어미땅」이다. 그 일대는 매립과 도시화로 인해 麗蒙연합군의 자취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征東行營의 소재지였던 마산시립박물관 뒷산 주변은 현재 추산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역시 당시의 유적이나 遺構(유구)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산시립박물관을 빠져나와 자산동 18번지에 있는 蒙古井(몽고정)으로 찾아갔다. 산중턱에 위치한 박물관의 아랫동네(자산동 18번지) 큰길가에 있다. 바로 그 앞에는 1960년 4·19 혁명을 촉발한 馬山시위를 기념하는 「3·15 기념탑」이 서 있다.
몽고정은 몽골의 둔진군에게 用水를 공급했던 우물로 추정되고 있다. 향토사학자 이학렬 선생에게 전화로 물으니 『몽골군이 판 우물은 모두 6개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론 그것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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