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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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충렬공 관련 역사 유적자료 소개

 

충렬공의 사위인 채홍철 묘지명 (2005. 3. 9. 발용(군) 제공)

 

채홍철묘지명(蔡洪哲墓誌銘)

묘지명은 이곡(李穀)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권11과 『동문선(東文選)』 권124에 실려 있으며, 1340년(충혜왕 복위1)에 이곡이 작성하였다.

묘지명 주인공인 채홍철(蔡洪哲 : 1262~1340)의 자는 무민(無悶)이며, 교주도 평강현(交州道 平康縣) 사람이다. 조상의 세계(世系)는 밝혀져 있지 않다. 나이 18세에 성균시(成均試)에, 23세에 진사급제하였다. 장흥부사(長興府使)를 끝으로 14년간 한가하게 거하다가, 1308년 충선왕의 복위개혁에 참여한 이후 재상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1314년(충숙왕 1) 토지 조사사업을 주도하여 치적을 이루었다고 했다. 문장과 기예가 지극히 정교하고, 특히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졌다.

 

부인 김씨는 영가군부인(永嘉君夫人)으로 뒤에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해졌으며, 방경(方慶)의 딸이다. 『고려사』 권108 채홍철 열전에 따르면 부인은 김방경이 북계의 용강(龍岡) 고을 관비(官婢)와 낳은 여식이라 했다. 자녀 5인을 낳았다. 맏아들은 하중(河中), 둘째 아들은 하노(河老), 셋째 아들은 선지(先智)이다. 맏딸은 설현고(薛玄固)에게, 둘째 딸은 정광조(鄭光祖)에게 각각 시집갔다.

 

시대           고려

연대           1340년(충혜왕 복위1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미상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현존하지 않음

서체           미상

찬자/서자/각자    이곡(李穀) / 미상 / 미상  

 

<判讀文>

 

有元奉議大夫太常禮儀院判官驍騎尉大興縣子高麗純誠輔翊?化功臣三重大匡右文館大提學領藝文館事順天君蔡公墓誌銘

 

至元六年歲在庚辰正月十日癸亥大興縣子順天君蔡公年七十九以疾卒于其第將葬以禮其子壻以公之行狀乞銘於李穀曰公之行義高一時而功德著于國於銘何有公諱洪哲字無悶交州道平康縣人生十八以能文詞中成均試二十三登進士第始命膺善府錄事五轉而爲通禮門祗候出守長興府有惠政已而棄郡?閑于家凡十四年自號中菴居士常以浮圖禪旨琴書劑和爲日用性又不喜干謁與世淡然若將終身焉德陵素知其名至大戊申新政焉賢將大用公公臥益堅强而後起?除司醫副正皇慶壬子拜密直副使由前祗候一起而八遷五年作相士林榮之延祐甲寅使正經界公專其任?相四方三壤之宜酌其古制徵其定墾務適於時公私以便德陵益器之累加密直使明年冬以事已聞陞僉議評理轉三司使尋遷?成事庚申封平康君有公子仕元朝秩五品者以恩封大常禮儀院判官具階勳爵至順壬申毅陵復位圖任舊人再起相之旣又更封順天君進階三重大匡加功臣號仍以大右文領藝文館知丙子貢擧時稱得士公於文章技藝皆極其精而尤深於釋敎至論其道雖稱開士公片言折之苟無所見烏能如是耶?於第北??檀園常養禪僧頗有得道者又施藥園中國人賴之呼爲活人堂後於第南作堂名中和時邀永嘉君權公以下國相八人爲耆英會盖慕昔賢而風流不減焉公鑒識絶倫風猷希代取人無備觀過知仁居室接物一團和氣可謂大雅君子矣曾祖諱某贈尙書令祖諱某小府監贈平章事考諱某左右衛保勝郞將贈僉議政丞?朴氏昇平郡夫人贈韓國太夫人贈知密直事諱某之女也夫人金氏永喜郡夫人亦以子貴封大興縣君考諱某位至僉議中?上洛公有功世皇朝授中奉大夫都元帥夫人柔嘉淑善克持閨門生子五人長男河中宿?輦?選太傅府咨議?軍間仕本國判三司事今爲平康君次男河老判宗簿寺事次男先智學佛爲繼祖演眞大禪師長女適今?林府尹檢校僉議評理?玄固次女適故左右衛保勝別將鄭光祖先公歿公之卒也人亡楷範國失蓍龜莫不嘆悼以四月初八庚寅葬城東原銘曰

 

人之有德必位必壽亦或不然惟公克有惟其有之是以不朽

 

〔출전:『牧隱集』권11〕  

 

<해석문>

 

채홍철묘지명(蔡洪哲墓誌銘)

 

유원 봉의대부 태상예의원판관 요기위 대흥현자 고려 순성보익찬화공신 삼중대광 우문관대제학 영예문관사 순천군 채공묘지명(有元 奉議大夫 太常禮儀院判官 驍騎尉 大興縣子 高麗純誠輔翊贊化功臣 三重大匡 右文館大提學 領藝文館事 順天君 蔡公墓誌銘)

 

지원(至元) 6년(충혜왕 복위1, 1340) 경진 정월 10일 계해에 대흥현자 순천군(大興縣子 順天君) 채공(蔡公)이 79세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예로써 장사지내려 하면서, 그 아들과 사위가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이곡)에게 묘지명을 청하므로, 내가 “공의 행실과 의리는 한 세상에 높았고, 공덕은 온 나라에 알려져 있는데, 묘지명을 짓는 데 무엇을 더할 수 있으리오”하고 말했다.

 

공의 이름은 홍철(洪哲)이고 자는 무민(無悶)으로, 교주도 평강현(交州道 平康縣) 사람이다. 나이 18세에 문사(文詞)에 능하여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23세에 진사로 합격하여 처음 응선부녹사(膺善府錄事)에 임명되었다. 다섯 차례 옮겨 통레문지후(通禮門祗侯)가 되었다가 장흥부사(長興府使)로 나가 어진 정치를 하였다. 부사의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한가로이 있은지 무릇 14년이었다. 스스로 중암거사(中菴居士)라 부르면서 항상 불교의 선지(禪旨)와 거문고 책 약 짓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천성이 높은 사람을 사사로이 찾아보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일에 욕심 없이 깨끗하게 일생을 마칠 듯 하였다.

 

덕릉(德陵 : 충선왕)이 평소 그의 명성을 알았으므로, 지대(至大) 무신년(충선왕 즉위, 1308) 새 정치를 하면서 어진 이를 쓰기에 급하여 장차 공을 크게 임용하려 하는데, 공은 고집을 부리다가 강청에 못 이겨 벼슬길에 나갔으며, 곧 사의부정(司醫副正)에 임명되었다. 황경(皇慶) 임자년(충선왕 4, 1312)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다. 지후(祗侯)로 한 번 기용된 이후 여덟 번 옮겨 재상이 되었다. 사림(士林)들은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연우(延祐) 갑인년(충숙왕 1, 1314) 토지의 경계를 바로 잡는 임무를 공이 전담하여 이에 사방 토양의 성질을 살피며 옛 제도를 참작하여 개간지를 획정하고 조세를 때에 맞추어 거두는데 힘써, 공사(公私)가 편안하게 되었다. 충선왕이 더욱 큰 인물로 여겨 누차 승진하여 밀직사(密直使)를 더하였다. 이듬해 겨울에 일이 알려져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랐다가 삼사사(三司使)로 옮겼으며 얼마 후에 찬성사(贊成事)로 옮겼다. 경신년(충숙왕 7, 1320) 평강군(平康君)에 봉해졌다. 공의 아들이 원나라 조정에서 벼슬하여 관질(官秩)이 5품인 자가 있어 그 은혜로서 태상예의원판관(太常禮儀院判官)에 봉해져, 계(階)와 훈(勳) 그리고 작(爵)을 모두 갖추었다. 지순 임신년(충숙왕 복위1, 1332) 충숙왕(毅陵)이 복위하여 옛 사람을 임용하면서 다시 정승으로 기용되었고, 다시 순천군(順天君)에 봉해졌고 관계는 삼중대광(三重大匡)에 공신호가 더해졌다. 이어서 대우문(大右文 : 右文館大提學) 영예문관(領藝文館 : 領藝文館事)으로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많은 선비를 얻었다고 한다.

 

공은 문장과 기예가 지극히 정교하였다. 특히 불교에 조예가 깊어 그 도를 논함에 비록 승려라 하더라도 공이 한 마디 말로 굴복시켰다. 참으로 식견이 없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집 북쪽에 전단원(?檀園)을 창설하여 항상 선승(禪僧)을 봉양하니 자못 득도한 자가 나왔다. 또 약방을 (전단)원 가운데 베풀어 나라 사람들이 의뢰하였으며, 활인당(活人堂)이라 불렀다. 뒤에 집 남쪽에 당(堂)을 짓고 중화당(中和堂)이라 이름하고, 때로 영가군 권공(永嘉君 權公 : 權溥) 이하 국상(國相) 8인을 맞아들여 기영회(耆英會)를 만드니, 대개 옛 어진 이를 사모한 것으로 풍류가 줄어들지 않았다. 공은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고, 풍모와 지혜는 당대에 드물었다. 사람을 취하는데 미리 준비함이 없이 허물도 보고 어짐도 알았다. 집에 있으면서 남을 대할 때면 한 덩어리로 화기(和氣)롭게 하여, 훌륭하고 아름다운 군자라 할 만하다.

 

증조 모(某)는 상서령(尙書令)에 추증되었고, 조부 모(某)는 소부감(小府監)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모(某)는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 保勝郎將)을 지내고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박씨(朴氏)는 승평군부인(昇平郡夫人)으로 한국대부인(韓國大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추증된 모(某)의 딸이다. 부인 김씨는 영가군부인(永嘉君夫人)으로 역시 아들이 귀하게 되자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해졌으며, 부인의 아버지 모(某 : 金方慶)는 지위가 첨의중찬 상락공(僉議中贊 上洛公)에 이르렀고, 원나라 세조 황제때 조정에 공이 있다하여 중봉대부 도원수(中奉大夫 都元帥)에 임명되었다.

 

부인은 유순하고 아름답고 정숙하고 착하여 규문(閨門)의 법도를 잘 지켰고, 자녀 5인을 낳았다. 맏아들 하중(河中)은 원나라 궁중에 숙위하여 태부부 자의참군(太傅府 咨議參軍)에 선임되었고, 그 사이 본국에서 벼슬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지금 평강군(平康君)이 되었다. 둘째 아들 하노(河老)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이며, 셋째 아들 선지(先智)는 불교를 배워 계조연진대선사(繼祖演眞大禪師)가 되었다. 맏딸은 지금 계림부윤 검교첨의평리인 설현고(薛玄固)에게 시집갔으며, 둘째 딸은 죽은 좌우위 보승별장(左右衛 保勝別將) 정광조(鄭光祖)에게 시집갔는데, 공보다 앞서 죽었다.

 

공이 세상을 떠남에 사람들은 모범을 잃었고, 나라에서는 기구(耆龜)를 잃게 되어 탄식하고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4월 초8일 경인에 성의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銘)에 이르기를,

사람이 덕이 있으면 반드시 벼슬하고 반드시 장수하지만

혹 그렇지 못하기도 하는데 오직 공만은 능히 있었네.

오직 공만이 있으니 이 때문에 길이 전하도다.  

 

  *<채홍철에 대하여> (2005. 3. 9. 주회(안) 제공)

 

 충렬공 사위 채홍철(1262-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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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철(蔡洪哲)

1262(원종 3)∼1340(충혜왕 복위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무민(無悶), 호는 중암거사(中菴居士).

 

1283년(충렬왕 9) 과거에 급제하여 응선부녹사(膺善府錄事)에 보임되고, 그뒤 다섯 차례 전직하여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로 장흥부(長興府)에 출보되었다가 물러나 14년을 한거(閑居)하며, 불교와 음악·의약 등을 연구하였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의부정(司醫副正)으로 부름을 받고,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다.

문장과 각종 기예에 모두 능하였는데, 특히 의약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불교에 심취하였다.

일찍이 자기집 북쪽에 전단원(#전29檀園)을 지어 선승(禪僧)을 기거하게 하는 한편 많은 사람들에게 의약과 의술을 베풀었으며, 집 남쪽에는 중화당(中和堂)을 두어 국로(國老) 8인을 맞아 기영회(耆英會)라 칭하였다. 〈자하동신곡 紫霞洞新曲〉이라는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이곡(李穀)·이제현(李齊賢) 등과도 교유가 있었다.

《동문선》에 〈복주영호루 福州暎湖樓〉 등 시 몇 편이 있고, 저작으로 《중암집 中菴集》이 있다.

 

■ 충렬공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전취 박씨(前娶 朴氏)는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또다시 손씨(孫氏)를 재취(再娶)하여 딸 한 분을 나셨는데 그 따님은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 채의(蔡宜)에게로 출가(出嫁)하였다.

 

■ 《고려사》 제108권 - 열전 제21 >

채홍철

채홍철의 자는 무민(無閔)이요 평강(平康) 사람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응선부 녹사(膺善府錄事)로 임명되고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나가 장흥 부사(長興府使)로서 은혜로운 정치를 하였다. 이윽고 벼슬을 그만두고 14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면서 중암 거사(中菴居士)라 자칭하고 불교, 선교(禪), 거문고, 글씨 그리고 약을 짓는 것으로 일상사를 삼았다.

처음에 김방경(金方慶)이 북방 국경 지방을 수비하고 있을 때에 용강(龍岡) 고을 관비(官婢)와 관계하여 한 여식을 낳았던바 채홍철이 그에게 장가들어 채하중(蔡河中), 채하로(蔡河老) 두 아들을 낳았다. 채하중은 따로 전기가 있다.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2001.12월, 김용선,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p.862

 

249. 채홍철(蔡洪哲) 묘지명

-전거 [가정집]12  -연대 충혜왕복위 원년(1340)

---부인 김씨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으로 역시 아들이 귀하게 되자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해졌는데15> 아버지 아무개<金方慶>16>는 벼슬이 첨의중찬 상락공에 이르렀고 (元) 세조 황제의 조정에 공이 있어 중봉대부 도원수에 제수되었다. 부인은 유순하고 아름답고 정숙하고 착하여 규문(閨門)의 법도를 잘 지켰으며, 자녀 5명을 낳았다.

 

*15>[고려사]에는 金方慶이 北界를 다스리러 나갔을 때 龍岡의 官婢를 좋아하여 딸 한 명을 낳았는데, 채홍철이 부인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고려사] 108 채홍철전).

한편 [김방경 묘지명]에는 김방경이 孫氏와 결혼하여 딸 한 명을 낳았는데, 통례문지후 蔡宜에게 시집갔다고 적혀 있다.

[채홍철 묘지명]에 그의 이름이 蔡宜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채홍철이 통례문지후를 역임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채의와 채홍철은 같은 인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6>⇒[김방경 묘지명] (이책 pp.662-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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