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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정구의 서찰과 제문 (2007. 9. 24. 태영(군) 제공)
(1) 한강 정구의 서찰
혹자에게 답함
삼가 위문하는 편지를 받고 보니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나는 당초에 수령으로 오래 재직할 계획이 아니었으나 상황에 이끌려 갑자기 떠나지 못하고 요즘에는 뜻밖에 중풍 증세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쓰러져 살아서 집을 나갔다가 죽어서 돌아와서는 안된다는 경계를 나 자신이 범하기라도 한다면 저 황천에서 부끄러운 마음을 지닐 것이니, 어찌 눈을 감을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살아서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어제는 파직해 줄 것을 청하는 글을 올려 보냈습니다. 다만 지난번에 말미를 좀 달라고 빌었는데도 방백(方伯)이 간곡한 말로 타이를 뿐, 흔쾌히 허락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직을 청한 것에 대해 아마도 즉시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걱정됩니다.
반년 가까이 재직하면서 관리와 백성들로부터 죄를 얻은 것이 이루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으니, 이제 돌아가는 날에는 마땅히 얼굴을 가리고 고을 경계를 빠져나가야지 어느 누구와도 만나 말을 주고 받으며 작별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우리 가문의 친족들과는 잠깐 한자리에 모여 석별의 정을 나누고 돌아 갔으면 하는데, 이 생각은 어떻겠습니까? 내일은 또 우리 외선조인 상락공(上洛公)<忠烈公 金方慶>의 묘소에 제사를 올릴 생각입니다.
혹자에게 답함 : 작자의 나이 65세 때인 1607년(선조40) 안동부사로 재직시에 쓴 편지이다. 출전: 한강집 별집제1권 (2)한강 정구의 충렬공 제문
외선조(外先祖) 김 충렬공(金 忠烈公)의 무덤에 제문
삼가 고합니다. 부군(府君)의 위대하고 거룩한 공은 역사에 빛나서 우리나라의 후세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흠모하는데, 더구나 부군의 외손인 우리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은 부군의 손녀로서 우리 청하군 부군(淸河君府君) 정책(鄭責)에게 시집와서 설헌(雪軒-정오(鄭?)과 설곡(雪谷-정포(鄭?)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 두 선생은 문장이며 기풍과 절개가 백대를 풍미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설곡선생의 후손으로 마침 안동부사로 재직하면서 부군의 봉분을 찾아 참배함으로써 평소에 흠모하는 정성을 바치려고 생각하였으나 그 소원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병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 가게 되었습니다.
정사신(鄭士信)은 설곡 선생의 후손으로 대대로 본 고을에서 살아온 자인데, 지금 그를 보내 대신 제물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이는 진정 조상의 한 기운을 나눠 받아 피차간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제가 몸소 참여하지 못하기에 마치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처럼 유감스럽습니다. 선영을 멀리 우러러볼 제 슬픈 감회가 더욱 새롭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존령께서는 이 정성을 굽어살펴 강림 하소서.
정구(鄭逑) (1543 ~ 1620)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 청주 호: 한강(寒岡) 시호:문목(文穆). 조식과 퇴계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통천군수, 우승지, 강원도관찰사, 성천부사, 충주목사 ,안동부사 ,대사헌 등을 역임. 천곡서원과 동강서원에 모셨다. 저서로는 <수사언인록> <경현숙록> <갱장록> <와룡지> <역대기년> <한강집> <오선생예설> <고금회수>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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