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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역사인물, <왕의나라 신하의 나라>의 충렬공 소개 (2008. 3. 11. 상석(제) 제공)
역사학자 이이화가 들려주는 한국사 속 인물 이야기
역사학자 이이화의『인물로 읽는 한국사』시리즈.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접할 수 있도록 구성한 책이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인물들을 발굴하고, 잘 알려진 인물들은 오늘의 관점에서 재평가하였다. 제왕, 혁명가, 종교가, 사상가, 독립운동가, 라이벌과 동반자 등 한국사의 다양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첫 번째 <왕의 나라 신하의 나라>에서는 왕조와 운명을 함께한 제왕과 위정자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역사 이해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위정자들의 통치방식과 철학, 그리고 치자의 행적을 살펴보고 있다. 최고 통치자 및 통치자가 되려고 활동한 인물들, 최고 통치자 곁에서 지배계층의 한 세력으로 활동한 인물들,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정치 참여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왕비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은이 이이화李離和는 1937년 『주역』의 대가인 야산也山 이달李達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 가운데 이離자는, 아버지가 『주역』 팔괘의 순서에 따라 아들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면서 이괘離卦에서 따온 글자이다. 『주역』의 이괘는 해와 불을 상징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대둔산에 들어가 종일토록 꿇어앉아 한학을 배우던 그는 열여섯 살에 집을 뛰쳐나와 부산과 광주 등지에서 혼자 힘으로 학교를 다녔다.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온 그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서 김주영, 천승세, 이근배, 홍기삼 등을 만나 떠들썩한 문학청년 시절을 보내던 중 한국학에 더 매력을 느껴 작가의 꿈을 접고 역사가의 길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지역갈등과 봉건적 신분질서를 타파하는 글을 주로 썼는데, 이를 통하여 우리 겨레의 고난의 민족사, 백성들의 자취가 짙게 밴 생활사, 압제를 받았던 민중사를 복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인물을 재평가하는 역사인물 연구도 정열을 기울인 분야이다. 그의 역사서술은 역사의 현재화와 역사의 대중화를 바탕에 깔고 있다. 요컨대 역사는 재미있고 쉬운 문체로 일반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된 생각이다.
민족문화추진회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한국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의 바른 대중화를 표방하는 역사잡지『역사비평』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을 주도했다. 현재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허균의 생각』『한국의 파벌』『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역사풍속기행』『한국사 이야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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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머리말-역사의 주역은 누구인가 1부 : 한국 고대사의 지도를 그리다 광개토대왕,김춘추,무왕,허황옥,대조영,궁예,진훤(견훤),왕건 2부 : 누가 성군이고 누가 폭군인가 세종,광해군,소현세자,정조,철종,흥선대원군-역사의 바퀴를 뒤로 돌리다 3부 : 충절과 변절의 갈림길 김방경-항쟁과 굴종 사이를 오간 고려의 버팀목 정도전,황희,신숙주,이목,조광조, 4부 : 정치가의 고민, 명분인가 실리인가 유운룡,유성룡,강홍립-실리외교로 전쟁을 조율하다 이덕형,김육,최명길-나는 척화파도 주화파도 아니다 양득중,박문수,원경하 5부 : 구중궁궐 여인의 눈물 인현왕후,정순왕후,철인왕후
작가는 머리말에서 -(중략)- 필자는 역사인물을 기술하면서 예전의 어떤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필자 나름의 가치판단에 따라 기술한 것이다.그에 따라 김방경,정여립,광해군,강홍립,정인홍,허균,장혼,이필제,전봉준 등 재조명 작업이 필요한 인물과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써왔다.물론 그 중에는 긍정적인 인물도 있고,부정적인 인물도 있다. -(중략)- 김방경 항쟁과 굴종 사이를 오간 고려의 버팀목
몽골에 맞서 처절하게 투쟁
김방경金方慶(1212~1300)은 고난의 시대에 살면서 그 주역의 한사람으로 항쟁과 굴욕을 함께 맛본 역사의 증인이다. 그는 처절한 대몽 항쟁을 겪으면서 우리 겨레가 초개처럼 쓰러지는 참담함을 보았고, 끈질긴 항쟁도 끝내 좌절되자 타협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시대가 인물을 만들기도 하나 때로는 시대가 인물을 삼키기도 한다. 그는 어느 쪽인가?-독자에게 물음표를 던지며 시작함--(중략)-이하 고려와 몽골의 시대상황을 작가의 입장에서 피력하며 끝으로 이런 광경이 그(충렬공)의 의식세계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나라의 명을 받아 삼별초 토벌에 나서다 김인준,임연 등의 무신정권의 말기를 설명하며 -(중략)- 내 몸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니었다
"그는 1283년(충렬왕9) 70이 넘는 나이로 퇴직하여 한가한 노년을 보내다가 89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그런데 그의 공적과는 달리 나라에서는 예장을 해주지 않아 쓸쓸한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에 대한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하고는 <고려사-열전>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무신이면서 무신정권에 가담하지 않았고,처음에는 철저히 대몽항전을 벌였다가 뒤에는 삼별초 토벌에 동원되었다. 고려 왕실을 위해 몽골에 외교 솜씨를 보였으며 강요에 따라 일본 정벌에도 나섰다.
그는 심한 갈등을 겪으며 몽골의 장수들과 게속 알력을 빚어 여러 번 문초를 당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늘 민생문제와 국가 피폐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신명을 바쳤다. 그는 항몽과 부몽 사이에서 번민과 눈물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고려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비겁하거나 눈치를 살피는 타협주의자가 아닌 고려의 버팀목이었다.뒷날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의 행동과 아주 그럴싸하게 비교된다.
그런데 박정희시대에 삼별초의 주체성을 부각시키면서 그를 배알도 없이 몽골에 타협한 인물로 그렸다. 군사독재 세력이 삼별초의 자주 이미지를 조작하면서 그를 희생물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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