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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김방경 일본정벌 그 전적지를 찾아서 이재범(경기대 교수) - 답사를 가기 전에
갑자기 전화를 받고 당황하였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에 관해서 문의를 해온 것이다. 물론 『고려사』에 관심이 많으니 비전공자보다야 상식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같은 시대라고 해도 전문가가 따로 있는 한국사이다 보니 내가 과연 자문을 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과히 우리 역사상 평가하기가 매우 어려운 인물을 오로지 조상 하나라는 사실만으로 답사를 가겠다고 하니 일견 대견해 보이기도 하였다.
- 김방경 후손들의 열정
김방경(金方慶)은 원간섭기를 살았던 인물로 역사적 평가가 그리 쉬운 편은 아니다. 일단은 원간섭기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하는 것이 문제이고, 다음이 원의 간섭하에서의 김방경의 활동이다. 원간섭기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하나는 원의 침공에 대한 고려인의 항쟁이다. 그리고 원의 간섭하에서의 고려에 대한 수탈이다. 어느 시기 하나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시기가 없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그는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하였고, 두차례의 일본정벌의 책임을 졌던 장군이었다. 그런 한편 백성들에게 제방을 쌓게하고, 농토를 개간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기도 하였다. 이러한 종합적인 연구성과가 없다는 것이 이 시기 연구에 대한 어려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기를 살다간 인물들의 비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후일을 기약하고, 예비 만남을 서초동의 음식점에서 가졌다. 여기서 처음 알게 된 것이 약 5년전부터 여몽연합군의 고려군 사령관이었던 김방경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선조의 얼을 기리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이미 제주도와 대마도 답사를 마쳤고, 그 밖에 고려와 몽고군이 경유했던 지역들을 답사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김방경의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이미 관계전문가들에게 원고도 의뢰한 상태라고 했다.
이렇게 하다보니 몇몇 분은 이미 전문가 이상의 식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첫 만남의 장소에 참석은 하지 않았으나, 여몽연합군의 일본점령에 대하여 저서를 내신 분도 있었다.(김봉석, 『김방경, 일본을 정벌하다』, 시간의 물레, 2006) 어떤 분은 그 책에 굵은 줄을 긋고 거의 암기하다 싶이 한신 분도 있었다. 그러니 나처럼 이 시대 전공자가 아닌 사람은 자칫 말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관계 자료에 대하여 나보다 훨씬 식견이 높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7년 이상을 유학하고 오셨다는 일본어에도 능통하신 분이 있어서 사람을 여간 주눅들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든 그날은 나로서는 내가 준비해 간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서너차례 답사시에 구입했던 자료들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잇키(壹岐), 타카시마(鷹島), 시카노지마(志賀島) 등 여몽연합군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던 지역의 소개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내가 놀란 것은 이날의 회식 자리에서 이 지명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체로 고려와 몽고군의 일본정벌에 대해서 말하면 대개 묻는 것이 일정하다. 그 질문은 ‘고려군이 일본에 상륙하긴 했나요’이다. 그런데 이날은 모두가 너무나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지역이 구체적으로 어디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첫 만남은 그렇게 밤이 깊었고, 나의 긴장 속에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후 책임을 맡고 계시다고 한 태영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함께 동행 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미 두어차례 다녀온 바가 있고, 또 환율도 오르고 하는데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지역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많이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잘못하면 엉뚱한 여행만 하고 오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생겨 응락을 했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2월 21일부터 24일까지의 3박 4일간의 일본답사였다.
- 시카노지마의 모꼬쓰까(蒙古塚)를 찾아서
2008년 2월 21일, 집결시각은 오전 8시였다. 이른 비행기로 가서 조금이라도 더 보아야 일정을 줄여 비싼 외환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것 같았다. 참가자는 영환, 재영, 재구, 우회, 발용, 태우, 태영, 재하(항렬, 연장자 순)로 모두 8명, 여기에 내가 더하니 총 9명이다. 9시 30분에 출발한 비행기는 예정된 시각에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박명성(朴明盛)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사장은 일본에서 성공한 교포로서 우리 학교(경기대학교) 박사과정을 마친 분이다. 이번 여행은 워낙 특수한 지역을 다닐 뿐만 아니라, 환율도 올라서 특별히 박사장에게 부탁을 해두었다. 일반여행사를 이용할 처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일본 방문시 몇차례 박사장에게 신세를 져서 늘 미안하던 차였는데, 이번에도 또 신세를 지고 말았다. ▲ 하늘에서 내려다본 후쿠오카 공항 주변
▲ 박명성사장(가운데 모자를 쓴 사람)은 박혁거세 몇세손, 도래 100년이라고 인쇄 된 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박사장은 기사와 차를 인도하고 무언가 바쁜지 저녁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시카노지마로 향했다. 시카노지마는 여몽연합군이 두차례 원정시 모두 격전을 벌였던 전적지이다. 이곳은 일찍부터 일본의 관문으로 ‘금으로 만든 도장’(金印)이 발견되어 일본의 고대사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여몽연합군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적이 있다. 바로 몽고군 공양비(원구공양비)가 있는 곳이다. 이곳을 모꼬쓰까(蒙古塚)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포로가 되었던 몽고군이 일본군에 의하여 목이 잘린 ‘몽고의 수총’도 있다. 이곳에 있는 공양탑은 소화 2년, 그러니까 1927년에 세워졌다. 이때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실현을 위하여 만주의 군벌 장작림을 이용하여 장개석군대와 전투를 하게 했다. 그리고 이 공양탑을 세워 일본과 만주와의 오래 묵었던 감정을 해소한다는 제스츄어를 취했다. 이때 장작림은 감동하여 평화를 도모하자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가 장개석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가는 기차를 일본에서 폭파시켜 죽여버렸다.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만주의 영웅을 놔둘리 없었던 것이다. 이 공양비는 그러한 정치적 의동 하에서 세워졌다. 그런데 이 비석의 위치가 전과 달라 보였다. 계단을 상당히 가파르게 올라가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했는데, 차도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무언가 달라졌다고 느꼈던 것이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후쿠오카 지진 때 쓰러져서 아래 쪽으로 옮겼다고 했다. 어떻든 이 비석을 보면서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것은 왜 고려군의 존재는 없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고려는 몽고의 속국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지독한 간섭을 받고 있었으니, 유구무언이다.
▲ 구몽고총 고적지로 오르는 계단
▲ 몽고총이 있던 자리에있는 이치렌종(日蓮宗)의 개조(開組) 이치렌(日蓮)의 좌상
▲ 몽고총 고적지에서 바라본 후쿠오카 앞 바다. 700여년전 이곳은 여몽연합군의 함선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 좌로부터 재영, 발용, 태우, 재구, 우회, 태영, 영환
▲ 아래로 옮겨 새로이 조성된 원구유적 몽고총
▲ 몽고군 공양비 앞에서
시카노지마 공양비를 보고 들린 곳은 시카노지마 해신사였다. 이 신사는 그 유래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고대까지 소급이 된다. 이 지명이 사슴이 많아서 된 것인데, 신공황후가 그 사슴들을 잡으러 이곳에까지 왔었다는 것이다. 시카노지마라는 지명은 바로 사슴이 많아서 시카(鹿, 사슴)의 섬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곳은 제1차와 제2차의 정벌때 주전장이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 신사에는 고려후기의 것으로 전하는 고려 동종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혀 보여줄 생각이 없다.
▲ 일본의 신사앞에 있는 돌기둥. 한자로 "조거(鳥居)"라고 쓰고 "도리이"라고 읽는다. 도리이 안쪽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며 그경계에 세운다. 우리나라의 홍살문과 비슷하나, "조거(鳥居)"라고 쓰는 것으로 보아 한국의 "솟대"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
▲ 시카노지마 해신사 누문(楼門)
▲ 시카노지마 해신사 본전(本殿)
▲ 녹각당(鹿角堂). 옛날부터 사슴을 신비한 힘이있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 1만여개의 사슴뿔을 봉헌하여 보관하고 있다.
- 여몽연합군 격퇴의 기도처, 하코자키 신사
시카노지마 신사를 거쳐 원구방루(元寇防壘)를 찾아 나섰다. 원구방루란 여몽연합군의 일차 침입때 놀란 일본에서 하카타만(博多灣)을 따라 세워 둔 석축을 말한다. 일본은 방루의 흔적을 계속 발굴하여 사적으로 지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기사가 여러 차례 찾는 것을 실패하였다. 이유가 있었다. 민가 가운데 있었고, 차가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몇 개의 돌만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 원구방루라고 하는 나무로 만든 표지가 없었다면, 아무도 알아 볼 수 없을 그런 유적이었다. 이 유적을 뒤로 하고 하코자키궁(箱崎宮)으로 이동하였다. 하코자키궁은 여몽연합군의 공격시 천황이 내린 ‘적국항복(敵國降伏)’이라는 글씨를 받고 여몽연합군의 격퇴를 기도했던 신사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당시의 글씨라고 전하는 적국항복이라는 현판을 신사의 정면에 부착해 두고 있었다.
▲ 방루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원구방루를 알리는 표석과 안내문 만이 남아있다.
▲ 하코자키궁(箱崎宮) 입구
하코자키궁을 답사후 우리 일행이 찾은 곳은 동공원(東公園)이었다. 이곳에는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할 당시의 상황(上皇)이었던 가메야마(龜山)와 불교 승려인 의 이치렌(日蓮)의 동상과 원구사료관이 있다. 원구사료관은 관람객이 적어서인지 아무 때나 개방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거대한 구메야마 상황과 이치렌의 동상을 보면서 이 일대가 대륙으로부터의 위협과 거부감을 느끼게 교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새삼 놀랄 수 밖에 없었다.
▲ 여원 연합군의 1.2차 일본정벌 당시 일본의 천왕인 가메야마의 동상
▲ 이치렌종의 창시자 일연의 동상. 여원 연합군의 침략을 예언해 영웅으로 칭송받고있다.
▲ 동공원 내의 원구사료관.
여기까지 답사를 하고나니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의 숙소는 타케오(武雄)이다. 타케오는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도저히 민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은 야지를 달리다 산으로 접어든다. 누군가가 이거 아주 형편없는 외진 곳이 아닐까하는 걱정을 한다. 그러다 잠시 후 상당히 번듯한 온천장으로 들어간다. 이곳이 첫날 우리를 맞이하게 된 ‘사계절의 하늘(四季節天空)’이라는 온천장이다.
▲ 온천장, 사계절의 하늘(四季節天空)
온천을 하고 유카타로 갈아 입은 뒤 저녁식사를 했다. 일본을 점령하러 온 장군의 후손들이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나오니 다소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다소 긴장하고 있었던 듯 하다. 김방경장군의 후손들을 안내하였기 때문일까? 소주가 몇잔 돌아가고 나니 웃음도 나오고 한다. 이렇게하여 첫날 답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 원구로망의 섬, 타카시마를 향하여
새벽부터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타카시마를 가기 위해서다. 타카시마는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특별하게 관광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천이 유명하지도 않다. 우리 일행처럼 특별하게 여몽연합군의 자취를 찾는 사람들이 이따금 찾는 그런 곳이다.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몇가지 루트가 있다. 큐슈 북쪽의 호시카(星賀)쪽으로 가면 연육교가 있다. 그러나 타케오에서 가는 것은 무리다. 타케오에서는 이마후쿠(今福) 항구로 가서 그곳에서 페리에 승선하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이마후쿠항에 예정대로 도착했다. 날씨는 썩 좋지가 않아서 가랑비가 내리다가 그치고 하는 정도였다. 타카시마행 페리는 비도(飛島)를 거쳐 타카시마의 도노우라항(殿 浦港)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의 노화도 정도의 작은 섬이다. 그러나 이곳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소개된 사건이 있을 정도로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물론 동방견문록에는 타카시마라는 지명이 소개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 여몽연합군이 진격해 들어가던 다카시마(鷹島)의 해안.
▲ 태풍을 피해 몰려온 배들이 서로 부딫쳐 침몰했다는 다카시마의 해만(海灣)
----- 동방견문록의 내용 :
159장 여기서 그는 치핑구섬(일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전략) --- 또 한가지 놀라운 것은 이 섬 군주의 궁궐이다. 그는 온통 순금으로 뒤덮인 멋진 궁전을 갖고 있는데, 우리가 집이나 교회를 납판으로 덮듯이 금으로 쒸워 놓았다. 그것이 얼마나 값비쌀지는 말로 다하기 힘들 정도이다. 또한 그의 궁실에 있는 보도들 역시 모두 순금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두손가락 정도나 된다.
---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누군가가 대카안에게 바로 이 같은 엄청난 재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지금의 통치자인 쿠블라이는 그 섬을 정복하고 싶어했다. 그개서 그는 수많은 배에 기병과 보병을 싣고 신하 두사람에게 지휘하도록 하였다.
--- 어느날 하루는 바람이 북쪽에서부터 어찌나 세차게 불어오는지, 군인들은 만약 지금 떠나지 않으면 배들이 모두 부서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배에 올라 그 섬을 떠나 바다로 들어갔다. 그들이 4마일쯤 갔을 때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었고 워낙 많은 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부딪쳐서 상당수가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부서지지 않은 배들은 바다로 흩어져 난파는 모면했다. 그때 그들은 그 근처에서 그리 크지 않은 또 다른 섬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 섬까지 헤쳐간 배들은 그곳에 피신할 수 있게 되었지만, 헤쳐나가지 못한 배들은 그 섬에좌초하고 말았다. 난파된 배에 탄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그 섬으로 피신했지만 섬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죽었다. --- 이 섬에 피신해 남아 있던 사람들의 숫자는 거의 3만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마르코 폴로/김호동, 사계절, 2001>
결국 위의 3만명은 거의 포로가 되어 하카타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 도노우라항에 하선하면 맨 처음 우리를 놀라게 하는 표석이 있다. 타카시마인들이 스스로 붙인 자신들의 섬에 대한 별명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섬을 ‘원구로망의 섬’이라고 부른다. 원구란 일본에서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칭하는 별칭이다. 원의 침구를 줄여서 부른 것이다. 우리가 왜의 침구를 왜구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 밖에도 일본에서는 원구 대신 몽고습래라고 부르기도 한다. 몽고가 쳐들어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타카시마에서는 원구가 쳐들어온 것을 격퇴한 낭만의 섬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외적 격퇴지에서 호국정신을 되새기는 것과 같은 정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것에 대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이 일본이 그런다는 것은 과히 유쾌하다고 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 '어서오십시오 다카시마' '원구 로망의 섬' 이라 새겨진 표석
- 타카시마의 향토역사자료관
그런 기분을 느끼면서 종합적으로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타카시마향토역사자료관으로 향했다. 타카시마섬에는 날씨 탓도 있겠지만, 돌아다니는 사람을 거의 만날 수가 없었다. 우리 버스의 기사도 여기가 처음이라고 했다.
타카시마의 향토역사자료관은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진열도 잘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이 정도 도서지역에 이만한 역사자료관이 있을까라고 의문을 품어 보았다. 내고향 곡성의 읍단위 지역에도 이만한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일본인의 향토애와 역사의식은 우리보다 한 수 위로 생각되었다. ▲ 다카시마 역사민속사료관
▲ 바다에서 건져올린 여몽연합군 함선의 닷돌
▲ 어부에 의해 발견된 직인으로 "官軍総把印" 이라 새겨있다. '총파'란 원으로부터 들어온 고려후기의 관직으로 일본원정 당시 충렬공의 사위인 조변(趙汴)의 관직이 총파이다.
타카시마의 향토역사자료관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한 곳은 전시실이고, 다른 한 곳은 유물보존실이다. 전시실의 주된 내용은 타카시마의 역사와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내용이었다. 후자에 대한 것이 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물보존실은 이 일대에서 건진 목선들을 복원하는 현장이었다. 아마도 군선의 골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을 모아 염분을 빼고 원래대로 맞추는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들 가운데 저 나무들이 천관산 아니면 변산에서 온 것이라는 목 멘 소리도 있었다. 당시 고려는 1차에 900척, 2차에 900척 모두 1,800척의 군선을 건조하였다. 그 장소가 전라북도 부안의 변산과 전라남도 장흥의 천관산 일대였다.
향토역사자료관을 나와서 고려불상을 찾으러 나섰다. 타카시마에 있는 고려 불상은 여몽연합군이 공격을 할 때 싣고 왔다가 군선이 난파되자 수장된 것을 건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당시의 군인들이 종교시설을 수반하고 원정에 나섯던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타카시마가 초행이라는 기사는 이 중요한 자료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더욱 난감한 것은 이곳이 섬이기 때문에 나가는 배편을 놓치면 얼마동안 섬에 지체해야 할 지 알수가 없는 노릇이다. 결국 다음 목적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목적지는 몽골촌이었다. 몽골촌은 이곳에 마치 몽골의 초원을 재현해 놓은듯한 그런 정경을 연출해 놓은 곳이었다. 섬의 정상부에 몽골의 초원지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몽골의 말을 사육하고 있고, 이곳에 몽골에서 볼 수 있는 유목민의 거주지인 겔도 만들어 놓았다. 마치 유목 체험을 하듯 만들어 놓은 겔은 냉난방이 되는 숙소였다. 일본인들의 상술보다도 그 이전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읽을 수 있었다. 이곳은 이 일대에서는 상당한 관광지인 듯, 모노레일도 설치하여 이동을 돕고 있었는데 겨울이라서 운행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 몽고의 가옥인 겔 앞에서 재영님. 몽고인들은 흰색을 숭상하기 때문에 하얀색으로 겔을 짖는다.
▲ 겔의 내부
몽골촌의 답사가 끝나고 옆에 있는 고전장에 들렀다. 이곳도 여몽연합군과 일본군의 접전이 있었던 곳인데, 공원처럼 잘 꾸며 놓았다. 자신들의 격전지를 공원처럼 꾸며 놓은 일본인들이 얄밉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애착을 보이는 그들이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다.
- 히라도(平戶)를 찾아서
몽골촌 답사를 마치고 다음 행선지를 히라도로 정했다. 그런데 시간이 벌써 1시를 넘기고 있었고, 점심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허기가 엄습할 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불평을 토로하는 이가 없다. 다른 여행이나 답사팀과 달리 조상의 얼을 찾아 나선 탓에 그럴 것이라고 짐작을 하였다. 시간이 지체되기는 했지만, 점심 식사는 타카시마를 일단 출항한 다음 결정하자고 하여 그때까지 견디기로 하였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생겼다. 처음 출항지였던 이마후쿠로 가지 위하여 승선준비를 다했는데, 그곳에서 배가 출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항구로 차를 움직였다. 다행히 그곳에서 페리에 승선하여 히라도를 향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점심을 먹을만한 식당이 없는 것이다. 겨우 기사가 헤메고 묻고 하던 끝에 찾은 식당은 준비가 덜 되었다고 1시간 정도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겨우 찾은 곳이 ‘나이샷 쇼토’라고 하는 음식점이었다. 이곳에서 함박스텍을 겨우 먹을 수 있었는데, 음식이 나온 시간은 3시가 더 지난 늦은 점심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억지로 웃을 거리를 찾자면 음식점의 상호였다. ‘나이스 쇼토'라는 상호가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여주인의 말이 걸작이다. 골프에서 쓰는 용어인 ’나이스 샷‘이란다. 같은 영어라도 ‘오렌지’와 ‘오뤤지’가 다르다더니, ‘나이스 샷’과 ‘나이스 쇼토’는 또 어떤 경우인가?
▲ 히라도로 가는 배안에서 바라본 다카시마. 이노우에 야스시의 검푸른 해협이 연상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였으니, 일단 점심을 해결하고나니 다음 행선지인 히라도성을 답사하여야 할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배도 부르고 아침 일찍부터 설쳐댄 탓에 약간은 지쳐 있는듯하였다. 게다가 빗줄기가 점차 거세지더니 이젠 우산이나 우비가 없이는 다니기가 어려운 날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일행들의 분위기도 점차 그만 두었으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본여행을 여러번 다녀도 히라도까지 온다는 것이 그리 자주오는 기회는 아니다. 더구나 충렬공 김방경장군을 찾아서 나선 그 후예들이 이 정도의 우천에야 망서려서야 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제의도 없었는데 이윽고 아무도 불평없이 점점 더 게세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히라도성을 향해 전진했다.
▲ 히라도성 전경
▲ 히라도성 연표를 보고 있는 답사 일행
히라도는 여몽연합군이 제2차 원정때 중요한 거점으로 지정하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과 남송군이 합류하기로 하였던 지점이다. 그런데, 여몽연합군은 제 날짜에 이곳에 도착하였으나 남송군이 지연출발하여 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재집결지로 잇키섬을 정하였고, 이러던 중에 강풍이 불어 원정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히라도의 성주는 마스우라씨(松浦氏)이다. 마쓰우라씨는 좋게 말하면 중세의 해양호족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해적이었다. 마쓰우라도오(松浦黨)라고 하면 13세기부터 동아시아 일대의 해양을 호령하던 대해상세력이었다. 이들은 여몽연합군의 원정때도 일본을 지키는데 한몫을 단단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때는 조선을 침공한 세력이기도 했다. 이러한 마쓰우라 세력의 본거지인 히라도성의 입구에는 그들의 내력이 대형 현판에 소개되어 있다.
히라도성의 내부는 역사자료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성주였던 마쓰우라 가문이 사용하던 갑옷도 있고, 칼도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의 규모와 구조를 알아 볼 수 있는 평면도도 전시되어 있었다. 히라도성의 천수각(天守閣)에 올라가니 다른 여늬 일본성과 마찬가지로 일대의 지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천수각이라고 하는 것은 다층으로 되어 있는 일본성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방을 말한다. 이곳에서 성주들은 자신의 관할구역을 관찰하였다는 것이다. 천수각에서 바라보는 히라도 주변의 해협은 그야말로 해상 요충이라고 할만하였다. 그곳만 봉쇄하면 선박들이 엄청난 거리를 우회하여야 한다는 것은 수로에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히라도의 번주였던 마쓰우라 히로무가 착용했다던 갑옷이 전시되어있다.
▲ 히라도성 천수각에서 내려다본 히라도 해안 모습
그러니 이러한 해상요충을 여몽연합군이 점령하려고 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히라도는 이러한 해상과의 근접성으로 일찍부터 외래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이 지역에 오니 적지 않은 교회당의 소개 문건을 볼 수가 있다. 일본은 본디 신도와 불교의 나라인데, 유럽 문화가 일찍 전래되었던 이 지역에서는 기독교문화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일본에 꽃피운 조선의 도자기 문화
악천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예정된 일정은 꾸려나가게 되어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이제는 숙소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이날의 숙소는 우레시노 온천마을이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일본에서는 아주 이름있는 온천지대이다.
이러한 숙소를 앞에 두고 기사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아리타(有田)였다. 아리타는 일본의 이마리(伊万里), 샤쓰마(薩摩)와 함께 대규모 도자기 도시이다. 특히 아리타는 임진왜란때 일본에 건너 간 조선 도공 이삼평(李參平)이 뿌리를 내린 곳으로 유명하다. 또 다른 도공 심수관(沈壽寬)이 뿌리를 내린 곳은 샤쓰마이다. 아리타에 도착하니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래도 이곳에 와서 이삼평의 흔적은 보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일행은 철로 뒤로 보이는 도리이(鳥居)를 향해서 걸었다. 이곳에서는 이삼평을 도조(陶祖)라고 기록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신사가 도산신사(陶山神社)이다. 왜 조선의 도자기 예술이 이곳에서 꽃피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기분이 꼭 좋지만은 않았다. 우리의 것에 대한 애착과 그것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비쳐졌다.
▲ '이삼평 비 ' '이삼평 묘'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 도산신사를 오르는 건널목의 경고판. 한글이 크게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리타와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함을 알수있다.
▲ 도조 이삼평을 모신 신사답게 도리이 및 사자상이 도자기로 되어있다.
우레시노(嬉野) 온천마을에 도착했다. 우리가 머물 곳은 봉양(鳳陽) 호텔. 이곳의 온천은 마그네슘이 풍부하게 함유된 온천수로 만지면 미끈덕 미끈덕한 것이 기분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온천과 저녁을 마치고 부근의 이자카야를 들렀다. 아무래도 일본이 초행이 많은 일행들에게 다른 곳은 몰라도 가장 대중적인 이자카야의 분위기 정도는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친절하게도 박사장의 누님이신 추자씨께서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우중인데도 불구하고. ▲ 우레시노의 봉야호텔. 마그네슘이 풍부한 온천물이 일품이다. 피부 미용에 좋아 여성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 호텔 부근의 이자카야
▲ 이자카야의 내부. 우리나라의 실내포장마차와 분위기가 흡사하다.
- 잇키섬의 무쿠리·고쿠리(蒙古·高麗)에 대한 기억
전날 늦게 도착하였지만, 잇키섬의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호텔을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앞으로의 일정은 잇키섬을 답사하고, 하루 숙박을 하고 다음날 후쿠오카로 돌아와 귀국을 하는 것이었다. 전날 우리를 우레시노로 안내했던 기사가 하카다항까지 인도하였다.
제트호일이라고 하는 쾌속선이 우리 일행을 잇키섬으로 안내했다. 1시간이 조금 더 지난 거리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잇키섬의 아시베항이었다. 잇키섬에서 외부와 여객선이 닿는 곳은 아시베와 우라노코의 두 항구다. 우리를 마중 나온 차량과 안내인 유키코(由紀子)가 기다리고 있었다.
▲ 잇키여행사의 안내원 유키꼬(由紀子)씨
우리가 도착한 아시베항(芦辺港)의 선착장은 입구부터 여몽연합군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의 영웅이라고 하는 쇼니(少貳資時)의 동상이 크게 만들어져 있었다. 쇼니는 19세로 여몽연합군의 2차 공격때 전사한 인물이다. 이 곳에서 쇼니는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것 같다.
▲ 아시베항 배머리에 세워진 쇼니 쓰케도키의 동상. 여몽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19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잇키섬에는 그의 무덤 및 그와 관련된 표석이 많이 존재한다.
아시베항구는 가까운 곳에 잇키신사가 있다. 잇키신사는 마치 원구에 대한 반감을 고무시키고자 하는 그런 분위를 연출하고 있었다. 먼저 입구에 서 있는 도리이와 바람에 펄럭이는 일장기의 행렬이 새삼 일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 유끼고는 이미 우리가 가야할 곳을 지도에 표시해 가지고 있었다. 답사지의 순위를 조절 중.
▲ 잇키신사 돌기둥(도리이)
▲ 잇키신사 내부 모습
잇키신사는 두차례의 여몽연합군의 일본 공격시에 초토화되었던 격전지였다. 고전장(古戰場)이라는 표석이 여기 저기 보이고, 바다에서 건졌다고 하는 여몽연합군의 군선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닷으로 사용한 큰 돌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이 닷돌들이 고려의 땅에서 출토된 것이라는 설명은 아무데도 없다.
▲ 잇키신사 위 해안에 전시해 놓은 닷돌(碇石). 2차 일본정벌 당시 침몰한 여몽연합군의 함선에서 인양한 것이다.
▲ 쇼니 쓰케도키의 묘 잇키섬은 대륙에 대한 반감이 아주 극심하다. 이곳에는 무쿠리와 고쿠리에 대한 아주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무쿠리는 몽고, 고쿠리는 고려를 말하는데 이들이 잇키섬에 대하여 잔혹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로 깎아 만든 무쿠리·고쿠리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잇키섬에는 울던 아이에게 ‘무쿠리고쿠리가 온다’라고 하면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우리가 ‘애비가 온다’라고 하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애비는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잘라간 조선인의 이비(耳鼻)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본어의 비참하다는 뜻의 단어인 ‘무고이’의 무는 무쿠리에서, 고는 고쿠리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이다. 여몽연합군에 대한 좋지 않은 역사적 정서가 남아 있는 것이다.
- 천인총에서의 고유제
잇키섬에는 천인총이라는 이름의 돌무덤들이 여럿 있다. 문자 그대로 1천명의 무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만인이 죽어서 만인의총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ㄷ 이 천인총의 안내문은 거의 동일하다. 그 가운데에는 원정군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였고, 코와 귀를 베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 했다. 여성을 한 곳에 모아두고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새끼로 엮어 끌고 다니며 즐겼다. 그리고 군선에 묶어두어 익사시켰다’는 내용들이 나온다. 여몽연합군의 잔학성을 알려 반감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한 천인총 가운데 하나가 잇키신사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이곳에서 고유제를 지냈다. 충렬공의 후손들은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해왔다. 가로로 길게 늘인 현수막과 간단한 제의에 필요한 용기와 물품들을 준비해 온 것이다. 고유제가 끝나자 선조의 은총을 함께 하는 음복의 순서도 빠질 수 없다.
충렬공 일본정벌 유적지 탐방 고유문
단기4342년 2월 21일 충렬공실기간행위원회 일동은 충렬공께서 일본정벌하실 때 거쳐 가셨던 유적지 탐방길에서 삼가 간단한 제를 올리고자 하옵니다.
충렬공께서는 몽고의 무자비한 침략에 항거하시면서 사직을 지키시려고 노력하신 당대의 영웅이었습니다. 당시 몽고는 전 세계의 삼분지 일을 지배하는 초강대국 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집정자들은 정권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숨어들었고 내륙에서는 몽고군에 의한 무자비한 침략과 약탈로 인하여 도탄에 빠져 국가와 백성이 백척간두에 서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충렬공께서는 오직 백성을 구하고 사직을 구하려고 모진 고문을 견디면서 항거하시었습니다.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원나라의 간섭이 시작되니 부원배들에 의한 농단에도 부단히 저항하시면서 오로지 민족과 국가의 안위에 전심전력하시었으니 이는 후세에 길이길이 빛날 업적이십니다. 또한 원나라와 함께 일본정벌이라는 거대한 전쟁을 고려도원수로서 지휘하여 두 번이나 단행하시었으나 원나라 도원수와의 갈등으로 인하여 두 번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는 말합니다만 만약 충렬공의 계획대로 실행되었더라면 세계사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때 일본정벌이 성공하였다면 고려는 동아시아의 해상패권국이 되었을 것이며 일본은 아마도 역사상 소멸하였거나 쇠약하여 그 후 300여년 후에 있는 임진왜란이나, 650여년 후에 있는 치욕적인 일제강점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이겠습니까? 영도자의 탁월한 판단이 국가의 흥망의 갈림길에서 흥하느냐, 망하느냐는 중요한 고비가 되는 것을 후세를 사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충렬공께서 탄생하신지 800년이 지난 지금 안동김씨사이버학술연구회가 주관이 되어 할아버님의 실기를 집대성하여 편찬하려고 [충렬공실기간행위원회]를 조직하여 진행 중에 있습니다. [충렬공실기]를 정성껏 능력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충렬공 탄생 800주년 즈음하여 발간하려고 하옵니다. 할아버님에 대한 자료가 그동안 오랜 세월 속에서 산실되었지만 이제라도 그동안에 찾고 밝힌 자료를 모으는 중입니다. 그 일환으로 오늘 이곳 충렬공께서 740여년전에 일본정벌의 실전을 겪으셨던 현장에서 할아버님의 숨결을 느끼고 유적과 기록을 찾아내고자 고려사의 석학이신 이재범교수를 모시고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밝히지 못했던 자료를 찾을 수 있는 영광을 주시옵고 오늘의 답사가 우리 후손들에게 큰 밑거름이 되기를 기원하오니 할아버님께서도 굽어 살피시어 도와주시기를 앙망하면서 맑은 술 한잔과 간단한 안주를 올리오니 흠양하시옵소서. 아울러 일본정벌당시 이름 없이 고혼이 되신 여러 혼령께도 흠양하시기를 바랍니다.
2009년 2월 21일 충렬공실기간행위원회 충렬공21대손 영환 삼가 지음
천인총을 지나서 찾은 곳은 피신굴이다. 잇키섬의 주민들이 여몽연합군을 피하여 숨을 곳을 찾았는데,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서 잇키섬의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죽였다고 한다. 아이들이 울기라도 하면 ‘무쿠리고쿠리’에게 발각이 되어 몰살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일본에 갖는 좋지 않은 감정 그 이상으로 이 일대에 유전된 대륙에 대한 이질적 정서는 이토록 강렬하다는 것이 씁쓸하기 조차 했다. ▲ 산이 많은 대마도와는 달리 평야가 많은 잇키섬에서는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야산 숲속에 구멍을 파고 숨었다.
- 금강산도 식후경이지만, 음식값은 치루어야
이 세상 여러 말 가운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아무리 좋은 것도 제 목숨이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아닐까? 조상의 발자취를 쫓는 것도 이쯤 했으면, 먹을 것은 먹고 다녀야 하는 법. 유키코씨가 안내한 식당으로 향했다. 아열대풍의 아담한 식당이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일본식 정식이다. 생선회 몇점과 튀김 두어조각, 그리고 미소시루와 함께 지리를 곁들인 점심이다. 걱정했던 날씨가 파란 기운을 뿜으며 풍치를 더하니 천인총, 피신굴 등 살벌한 전장만을 답사하고 있었지만, 그런데로 정신적인 휴식공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리고 못내 아쉬어서 도열하다시피 배웅을 나온 식당 주인과 종업원들에게 보이지 않을 까지 손을 흔들며 잠깐의 만남에서 헤어짐을 아쉬어 했다.
▲ 유끼꼬의 요청으로 식당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유끼꼬의 휴대폰으로 찍힌 이사진이 잇키일일신문(壱岐日々新聞)에 기사로 나왔다.
그런데 익 웬일인가? 호사다마가 바로 이것이다. 총무를 너무나 꼼꼼이 하던 태영씨가 갑자기 난색을 표명한다. 잘먹은 점심값을 지불하지 않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버스를 돌려 다시 그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일본인에 대한 촌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왜 식대를 받지 않고도 그렇게 오랫동안 손을 흔들고 있었을까하는데 대한 의문이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아마도 그 중 누군가가 받았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든 우리로서는 상당한 실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 우리에게 그들은 또 다시 손을 끝까지 흔들며 배웅을 해주었다. 알 수 없는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아무도 불쾌해 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신성(新城)고전장과 고려교를 찾았다. 잇키섬에 상륙했던 주력은 고려군이었다. 그래서인지 고려라는 명칭이 지명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고려군이 이곳에 상륙했다면 김방경 장군의 지휘소도 이 부근 어디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러한 추정을 하면서 이 일대의 유적들을 확인하였다.
▲ 문영의 역 고전장 안내판. 일본에서는 1차 일본정벌을 '분에이노에키' 문영의 역(文永의 役)이라 부르고, 2차 일본정벌을 '고안노에키' 홍안의 역(弘安의 役)이라 부른다.
▲ 고려교 표석. 아쉽게도 부근에서 고려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 고려교 표석 부근에 산재한 석축들.
이어서 잇키의 향토관과 하르노쯔지유적을 답사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잇키의 향토지에서 기자가 방문을 하였다. 이들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이 날의 마지막 일정인 안국사를 향했다. 그러나 안국사에 도착을 하자 너무 날이 늦었다. 안국사에는 고려초에 제작된 『고려판대반야경』이 보관되어 있다. 현재 일본국가지정문화재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해서 이곳으로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유래는 잘 알 수가 없다.
이제 3박4일의 마지막 방을 이곳 잇키섬에서 보내게 되었다. 잇키섬의 숙박처인 보성장으로 향했다. 보성장은 온천은 없었고, 그 대신 대중탕이 있었다.
- 잇키 향토박물관을 거쳐 후쿠오카로
전날의 여흥이 아침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나도 정신이 들어보니 룸메이트인 우회씨의 발 밑에 나둥그러져 자고 있는 것이다. 내 스스로도 지나쳤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떡이 되도록 마시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모두 제 시간에 출발하는데 늦지를 않았다. 유키코씨는 여전히 밝게 웃으며 우리를 안내했다. 잇키섬의 또다른 항구인 코노우라항에 도착하자 잇키의 신문사에서 다시 인터뷰를 요청한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다시 배가 멀리 떠나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는 유끼꼬씨와 신문사의 기자를 뒤로하고 다시 후쿠오카로 향하였다.
▲ 잇키의 신문기자와 인터뷰 중인 우회님
후쿠오카에서 우리가 처음 답사한 곳은 원구방루였다. 첫날 하코자키에 있는 원구방루의 유적에 실망하기도 했던 일행들은 서남학원대학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일본이 여몽연합군의 1차 공격때에 얼마나 많은 위협을 느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비록 일부분이었지만, 그 너비가 2미터 이상이고 높이가 3미터는 되어 보임직한 돌덩어리들이 쌓인 형상은 난공불락으로 여길만하였다.
▲ 서남학원대학 안에 있는 방루. 대학 신축 당시 발견되어 건물의 구조가 바뀌었다.
원구방루 다음으로 찾은 곳은 소하라(조원)의 지휘소였다. 이곳 지휘소는 아마도 김방경장군의 발길이 닿은 곳임은 거의 확실하다고 하겠다. 당시 전황으로 보면 제1차 원정때에 여몽연합군은 이곳을 사령부로 삼아 태재부로 재차 진격을 하려다가 의견에 충돌에 생겨 군선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 고려군은 내친 김에 공격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몽고군은 이를 미온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는 폭풍으로 대손실만 입은 채 퇴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군이 이곳 소하라를 지휘소로 하였을 것이고, 그 사령관의 한 사람이었던 김방경장군의 발길이 이곳에 머물렀던 것은 틀림없는 일일 것이다.
소하라 지휘소는 지금은 공원이었다. 700여년전, 운명을 결한 접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던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커다란 오석에 새겨진 글자 몇 개만이 역사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둘러보니 정말 지휘소로는 안성맞춤인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하라산이라고 하지만, 얕으막한 동산에 불과한 이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이른바 감제고지라고 하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절감했다.
▲ 여몽연합군의 지휘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하라 공원 정상의 평지
김방경장군을 생각하며, 당시 함께 했을 고려군을 상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어쩌면 이번 여행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후쿠오카시립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을 최종 목적지로 삼은 것은 여행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시립박물관은 부지도 넓고, 정원에는 브로델의 조각들이 들어서 있는 예술적 분위기를 띠었지만, 관람객도 많지 않고 전시된 유물도 많지 않았다. 우리의 관심사였던 원구(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와 관련된 내용도 소락하였다. 그러나 이곳 서점에서 귀중한 자료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고 자위하는데 그쳐야 했다.
▲ 후쿠오카박물관 전경
▲ 조선통신사의 모습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
▲ 풍신수길주인장(豊臣秀吉朱印狀) . 임란당시 조선에 출병한 왜장에게 내리는 풍신수길의 명령서
- 아쉬움을 남기고
점심을 후쿠오카 시립박물관 식당에서 일본식 도시락으로 하였다. 이제 긴장이 풀어졌는지 사뭇 움직이기 싫어하는 눈치들이다. 결국 공항으로 바로 가기로 했다. 몇몇은 후쿠오카 시내 구경 겸 쇼핑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으나, 다수가 미리 공항에서 여유있게 기다리다 가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3박4일의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을 따라 나선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돌이켜 보니 3박4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하루마다가 강행군이었다. 어느 하루도 석양이라도 보는 여유를 가지며 숙소로 향한 적이 없었다. 겨우 마지막날, 조금 일찍 공항에서 대기한 것 이외에는 너무도 빠듯한 일정이었다.
그런데도 무척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역(異域)에서 숨진채 돌아갈 고향을 떠도는 많은 고려인들의 영혼이 혹여 이 부근 어디에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서였다. 선물로 하려고 했던 일본술을 따서 마시는 일행도 있었다. 몇몇은 공항 로비에 있는 스낵바에서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유사 이래 최고의 환율을 기록했던 시기에 그나마 쉴 틈없이 강행군을 해야만 덜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강풍과 폭우를 무릅쓰면서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히라도성에 올라갔던 열정을 되새겨 보게 되었다.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들과 함께 한 3박4일 일본 큐슈 답사, 여몽연합군의 전적지를 찾아간 답사는 문자 그대로 충과 열이 함께 한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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