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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자 :김발용 제공일 : 2003. 03. 11. 펴낸날 : 2001년 9월 28일 1판 1쇄 엮은이 : 민족문화추진위 글쓴이 : 여성구 그린이 : 최경락 펴낸이 : 황근식 펴낸곳 : (주)아침나라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김방경
김방경의 어머니가 그를 배었을 때, 구름과 안개를 들이마시는 꿈을 자주 꾸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아이는 신선이 내려와 잉태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김방경은 어릴 때 자기 뜻에 맞지 않거나 화가 나면 길거리에 드러누워 울곤 했는데,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청렴 결백했던 관리
김방경은 고종 때 열여섯 살의 나이에 음직으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그 때 고려에는 관리가 되는 방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에 나아가는 음직 또는 음서 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5품 이상의 벼슬을 하는 사람의 자손들 중 한 사람을 벼슬길에 나갈 수 있도록 했던 제도였습니다. 그 뒤 김방경은 감찰 어사가 되어 나라의 곡물을 보관하던 창고 관리를 맡았습니다. 당시 세력가들은 창고 관리들과 짜고 곡물을 빼돌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부정과 부패는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습니다.그래서 가끔 대신들이 청탁을 해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늘어갔습니다. 그들 중 한 대신이 그를 꾸짖으면서 말했습니다.
"자네는 지난번 어사처럼 맡은 일에 충실하지 않는 것같군." "먼저 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나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나는 나라 창고의 곡식을 더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당신과 같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그 대신은 매우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그 후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 판관이 되었을 때, 몽골군이 침공해 왔습니다. 그는 여러 고을에 전하여 위도라는 섬에 들어가 난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관청을 그 곳으로 옮겨 세우고 백성들을 보호했습니다. 한편 바닷물이 들어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자, 방파제를 쌓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은 처음에는 이것을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의 풍성한 곡식을 보자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또 섬에는 우물이나 샘이 없어서 항상 육지에 나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는데, 그는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물 걱정을 없애도록 했습니다. 그 뒤 김방경이 그 곳을 떠나 서울에 올라와 벼슬을 했습니다. 그런데 서북면의 여러 고을에서 왕에게 글을 올려 그를 다시 보내 줄 것을바랐습니다. 그러자, 남경(지금의 서울)으로 부임한 지 겨우 사흘만에 다시 서북면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삼별초의 난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피난 갔던 고려 조정은 끝내 몽골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강화도에서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몽골군과의 싸움을 이끌었던 삼별초는 이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등 3군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군 배중손 등은 조정 관리들의 무능력을 나무라는 한편, 강화도에서 백성들을 끌고 진도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몽골과 싸울 것을 알렸습니다. 그리하여 왕은 김방경에게 몽골군과 함께 삼별초를 토벌(무찔러 없앰) 하도록 했습니다. 김방경이 진도로 향하던 중에 영흥도에서 정박한 반란군의 배들을 보고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몽골군 송만호는 겁을 내고 시간을 끄는 바람에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한편, 토벌군의 총책임을 맡은 신사전 또한 토벌에 뜻이 없었습니다.
“내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반란군을 토벌한다고 하여 그 이상의 벼슬을 얻겠는가?”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신사전은 나주에 이르러 반란군들이 육지로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로 달아났습니다. 전주 부사도 성을 포기하고 도망해 버렸습니다. 이에 김방경이 신사전 대신에 토벌군을 총 대장 추토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몽골 장군 아해와 더불어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토벌하게 되었습니다. 반란군은 나주성을 포위하고. 또 전주를 공격했습니다. 나주 사람들은 전주 사람들에게 함께 항복하자고 했으나 전주 사람들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 김방경이 전주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아무 날에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전주성으로 갈 것이니 군량을 준비하고 기다리라.”
반란군들은 이 말을 믿고 마침내 포위를 풀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김방경이 아해와 더불어 진도가 건너다 보이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 그 때, 그를 시기하던 무리들이 그가 반란군과 내통한다고 모함했습니다. 그래서 철쇠에 묶여 서울(개경)로 끌려가는 그를 본 백성들이 모두 원통해 했습니다. 그러나 곧 모든 사실이 밝혀져 풀려나서 상장군으로 임명되어 다시 진도로 내려갔습니다.
반란군은 늘 전투에 나갈 때 깃발이 무수히 꽂힌 배에 올라 먼저 징과 북을 치면, 그것을 맞아서 성 위에서도 북을 울리며 서로의 기세를 북돋아주곤 했습니다. 괴상한 모양의 동물들을 그린 배와 군함들이 빽빽이 바다를 덮었고, 마치 날아다니는 듯 빨라서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기세에 눌린 몽골 장군 아해는 겁을 먹고 배에서 내려 나주성으로 물러나려고 했습니다. 그 때, 김방경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만일 후퇴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약점을 보여 주는 셈이오. 그래서 적들이 승승장구하면 그 누구라도 당해낼 수 없을 것이오. 또 황제가 이 사실을 듣고 책임을 묻는다면 어떻게 변명하겠소?”
그 말을 들은 아해는 함부로 물러날 수가 없었습니다.그러나 반란군의 공격을 받자 몽골군은 모두 퇴각했고, 김방경이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싸워야 했습니다. 김방경이 장병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승패를 결정할 때이다. 모두 명심하고 최선을 다하라!”
그러나 전세는 반란군 쪽으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적들이 그가 탄 배를 포위하여 자기 진영으로 몰아갔기 때문입니다. 김방경과 군사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화살도 돌도 다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많은 군사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김방경이 탄 배가 포위된 채 진도의 기슭에 닿게 되자, 반란군이 칼날을 번득이면서 배 안에 뛰어들었습니다.
“차라리 고기 밥이 될지언정 어찌 저들의 손에 죽겠느냐?” 그리고는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병사들이 붙잡고 말렸습니다. 부상당한 군사들은 김방경이 위급한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면서 일어나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이때 장군 양동무가 전함을 타고 돌격해 와서 겨우 포위를 뚫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에 아해가 비겁하게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은 몽골의 황제는, 아해를 파면하고 대신 흔도를 임명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김방경이 흔도와 더불어 전략을 짜 진도를 공격했습니다.
“모든 장군들은 이번 출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오. 다음 명이 있을 때까지 각자 대기하시오. 그럼, 모두의 건투를 빌겠소.”
3군으로 나뉜 토벌군은 백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집결지로 향했습니다. 집결지에 도착한 후 얼마 안되어 출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한편 반란군은 여러번 싸워 그 때마다 이기자, 토벌군을 가벼이 여기고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토벌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반란군들은 모두 아내와 자식들을 버린 채 탐라(제주도)로 도망쳤습니다. 이에 김방경이 쌀 4천 석과 많은 전리품을 모두 서울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반란군들에게 억지로 항복했거나 따랐던 강화도의 선비들과 여인들,그리고 양민들을 모두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탐라에 들어간 반란군들은 성을 고쳐 쌓고 육지로 나와 노략질을 했습니다. 바닷가 지방이 다시 시끄럽게 되었는데 그들은 더욱 대담해져 경기 지방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이에 왕은 토벌군을 다시 조직케 하고 김방경을 중군 책임자로 명했습니다. 김방경은 수군과 함께 만여 명을 거느리고 몽골군 흔도, 홍다구와 함께 반란군의 본거지인 탐라로 떠났습니다. 김방경의 함대가 추자도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탐라로 향했습니다. 멀리 탐라가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갑자기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어져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김방경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크게 소리쳐 말했습니다.
“나라의 안녕과 위태로움이 이번 토벌에 달려 있으며, 또한 일의 성패는 나에게 있지 않는가! 하늘이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러자 신기하게도 풍랑이 멎었습니다. 토벌군은 지친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사방으로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반란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김방경은 소리를 높여 병사들을 격려했고, 장교 고세화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적진에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이에 여러 병사들이 그 기세를 따라 서로 늦을세라 돌진했으며,장군 나유는 정예병들을 이끌고 곧 뒤따라 쳐들어가서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습니다. 반란군은 기세에 몰려 성 안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이에 불화살을 쏘니 성 안은 연기와 불꽃이 가득 찼으며, 반란군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때 반란군 대장 김통정은 그 일당인 70여 명을 이끌고 산중으로 도망해 들어가고, 나머지는 자신의 죄를 달게 받겠다는 표시로 옷을 벗고 항복해 왔습니다. 김방경이 여러 장군들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 안의 사람들은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을 본 김방경이 말했습니다.
“다만 반란군 우두머리들만 잡으라! 모든 백성들은 겁내지 마시오! 모두 전처럼 평안히 안심하고 살도록 할 것이오.”
마침내 오랫동안 끌어오던 삼별초의 난이 김방경이 이끄는 군사들로 해서 토벌되었습니다. 이 때, 김방경은 항복한 반란군 1천 3백 명을 배에 싣고 서울(개경)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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