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2003. 12. 4. 윤만(문) 제공) * 출전 : <중국정사조선열국전>(동문선.김성구. 1996) #元史卷208-列傳第95-高麗-58/29
⊙八月, 世子<桲>至朝, 奏本國臣下擅廢<㰡>立其弟<安慶公><璯>事. 詔遣使臣<斡朶思不花>·<李棍>等至其國詳問之. 九月, 其樞密院副使<金方慶>奉表從<斡朶思不花>等入朝. 樞密院御史臺奏, 世子<桲>言: [朝廷若出征, 能辦軍三千, 備糧五月, 如官軍入境, 臣宜同往, 庶不驚擾.] 帝然之. 詔授世子<㰡>特進·上柱國, 眻<桲>率兵三千赴其國難. 命<抄不花>往征其國, 以病不果行, 詔遣<蒙哥都>代之.
▣ 元史 卷二百八 列傳 第九十五 外夷一 高麗 ▣
23[麗-58/29]
8월(☞원 지원 6년, 고려 원종10년, 1269년)에 세자 심(愖)이 조정에 이르러 본국의 신하들이 제멋대로 식(식)을 폐하고 그 아우 안경공 창(淐)을 세운 일을 아뢰었다. 조서를 내려 사신 알타사불화(斡朶思不花)와 이악(李諤) 등을 그 나라에 파견하여 상세하게 알아보게 하였다. 9월에 그들의 추밀원사 김방경(金方慶)이 표를 받들고 알타사불화 등을 따라 들어와 예방하였다. 추밀원(樞密院)과 어사대(御史臺)에서 아뢰기를, 세자 심(愖)이 「조정에서 만약 출정을 하여 능히 군사 3천을 갖추고 군량 5개월분을 준비한다면 관군이 국경으로 들어갈 때 신이 응당 같이 들어감으로써 백성들이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고 하니, 제(帝)께서 그럴 것이라 여겼다. 조서를 내려 식(식)에게 수여하는 특진·상주국의 작위를 세자에게 주고, 심(愖)에게 칙서를 내려 군사 3천을 거느리고 그 나라의 난적에게로 달려가게 하였다. 초불화(抄不花)에게 명하여 그 나라로 가서 정벌하게 하였으나 병으로 결국에는 가지 못하자 조서를 내리고 대신하여 몽가도(蒙哥都)를 파견하였다.
《출전 : 중국정사조선열국전/동문선/김성구/1996, pp744~745》
▣ 元史 卷二百八 列傳 第九十五 外夷一 高麗-58/41] ▣
13년(☞원 세조 지원, 고려 충렬왕 2년, 1276년) 7월에 심(愖)이 그들의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을 보내 표를 받들어 올리며 송나라를 평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11월에 심이 그들의 판비서사사 주열(朱悅)을 보내 표를 받들어 올리며 이름을 춘(賰)이라 고친 것을 아뢰어 왔다.
▣ 元史 卷二百八 列傳 第九十五 外夷一 高麗-58/42] ▣
14년(☞원 세조 지원, 고려 충렬왕 3년, 1277년) 정월에 김방경 등이 난을 일으키자 심(愖)에게 명하여 그를 다스리게 하였으며, 거듭 흔도와 홍다구에게 명하여 군사를 단속하고 방비하게 하였다.
▣ 元史 卷二百八 列傳 第九十五 外夷一 高麗-58/43] ▣
15년(☞원 세조 지원, 고려 충렬왕 4년, 1278년) 1월에 춘(賰)이 달로화적 석말천구(石抹天衢)는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아직 교체되지 않았다 하여 다시 3년을 머므르게 할 것을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동정원수부에서 말을 올려 아뢰기를 「고려의 시중 김방경(金方慶)이 그의 아들 수(수)·선(愃)·순(恂) 그리고 사위 조변(趙抃) 등과 함께 은밀히 결사대 4백명을 기르고, 갑옷과 병장기 등 무기를 은익하며 전함을 건조하고, 식량을 비축하여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자 하였기에 김방경 등을 체포하여 조사한 바 사실임이 들어나 이미 여러 바닷섬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고려가 우리를 붙조은 초기이기에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일본을 정벌하러 갔다가 돌아온 사졸 2천7백명을 징발하여 장리를 설치하고 충청과 전라 등지에 주둔하게 함으로써, 바깥 오랑캐들을 진정시키고 어루만져 그로써 그 백성들을 편안케 하며, 다시 사졸들에게 영을 내려 소를 준비하고 농기구를 쌓아두어 다음해의 둔전(屯田)에 대한 계책으로 삼음이 옳을 것입니다」하였다. 7월에 부마 고려왕의 인장을 다시 주조하여 춘(賰)에게 하사하였다.
《출전 : 중국정사조선열국전/동문선/김성구/1996, pp754~755》
▣ 新元史 卷二百四十九 列傳 第一百四十六 外國一 高麗-65/21] ▣ 11년(☞원 세조 지원, 고려 원종 15년, 1274년) 봄에 임연(林衍)이 등창이 나서 죽자 홍문계(洪文係)와 송송례(宋松禮) 등이 그의 아들 유무(惟茂)를 주살하였다. 식(식)이 돌아가서 예전대로 왕경에 도읍하니 그들의 궁인과 비빈들 역시 강화(江華)로부터 도착하였다. 두연가국왕(頭輦哥國王)이 타라알(朶라歹)을 파견하여 군사 2천으로 강화에 이르렀다. 식(식)이 들어가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타라알이 말을 듣지 않고 군사를 풀어 놓아 크게 약탈하였다. 이 때는 궁실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아 식(식)이 그의 군신과 더불어 모두 막사를 열지어 놓고 거처하였다.
6월에 장군 배중손(裵仲孫)이 반란을 일으켜 삼별초(三別抄) 등을 거느리고 승화후 온(溫)을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삼별초는 진도(珍島)로 들어가 자리하며 막아 지켰다. 김방경(金方慶) 장군이 몽고 원수 아해(阿海)와 군사로서 그를 토벌하였다. 아해는 겁이 많아 감히 싸우려 하지 않았으며, 김방경이 적에 의해 포위되자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그를 원조하여 비로소 포위가 풀렸다. 세조가 아해를 소환하여 면직시켰다. 이듬해에 흔도(忻都)와 사추(史樞)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배중손이 흔도에게 사자를 보내 비밀히 논의할 것이 있다고 하며 잠시 진도(珍島)로 들어와 줄 것을 청하자 흔도가 이르기를 「내가 황제의 명을 받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들어갈 수 있는가?」라며 주청하여 말하기를 「반신 배중손은 견고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고 있으니, 홀림적(忽林赤) 및 왕국창(王國昌)과 더불어 길을 나누어 그를 토벌할 것을 청합니다」하므로 제께서 그대로 따랐다. 4월에 흔도와 홍다구 및 김방경이 진도(珍島)에서 적을 크게 패퇴시키고 왕온(王溫)의 머리를 베니, 도적의 일당인 김통정(金通精)이 탐라(耽羅)로 달아났다.
▣ 新元史 卷二百四十九 列傳 第一百四十六 外國一 高麗-65/22] ▣
13년(☞원 세조 지원, 고려 충렬왕 2년, 1276)에 세자 심(諶)이 들어와 예방하였다. 돌아갈 때에 변발에 오랑캐 복장을 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세조가 탐라(耽羅)를 토벌할 계책을 홍다구(洪茶邱)에게 물으니 상주하여 아뢰기를 「김통정(金通精)의 잔당이 왕경에 많이 있으니 그를 불러보고 따르지 않으면 군사를 쓰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홍다구가 김통정의 조카 김찬(金贊) 등을 보내 그에게 유시하게 하였으나 통정이 항복하여 들지 않았다. 식(식)이 제께서 세자 심(諶)의 혼인을 허락하였다 하여 대방후 징과 간의대부 곽여필을 들여보내 사례하였다. 흔도가 김방경과 더불어 탐라에 이르니 적들이 패하여 허물어지므로 군사를 머무르게 하여 그 땅을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5월에 세자 심(諶)이 황제의 여식 홀도게리미실공주(忽都揭里迷失公主)에게 장가를 들었다. 6월에 식(식)이 세상을 떠나니 재위 15년에 나이가 56세였으며, 순효왕(順孝王)이라 시호하고 후에 충경(忠敬)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 때 심(諶)이 막 들어와 알현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모든 신하들이 멀리서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8월에 심(諶)이 돌아갔다.
10월에 김방경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원수 홀돈(忽敦)을 따라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일기도(一岐島)에서 일본의 군사를 패퇴시키고는 군사가 적다하여 이끌고 돌아왔다. 홀도게리미실공주가 도착하자 심(諶)이 공주와 더불어 함께 연(輦)을 타고 성(城)으로 돌아가니 늘은이들이 서로 축하하며 다시 태평세월을 볼 것이라 여겼다.
달로화적이 와서 힐책하며 이르기를 「‘선지(宣旨)’라 일컫고 ‘짐(朕)’이라 일컬으며 ‘사(赦)’라고 일컫고 있으니, 어찌 이다지도 참람될 수 있습니까?」하니 심(諶)이 김방경을 사자로 보내 대답하여 이르기를 「감히 참람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왕실 대대로의 옛것을 따르고자 할 뿐이었소」하였다. 그리하여 선지(宣旨)를 고쳐 ‘왕지(王旨)’라 하고 짐(朕)을 고쳐 ‘고(孤)’라 하였으며, 사(赦)를 고쳐 ‘유(宥)’라 하고, 주(奏)를 고쳐 ‘정(呈)’이라 하였다.
▣ 新元史 卷二百四十九 列傳 第一百四十六 外國一 高麗-65/23] ▣
15년(☞원 세조 지원, 고려 충렬왕 4년, 1278)에 제께서 홀라알(忽라歹)을 파견하여 심(諶)과 공주를 불러들여 예방하게 하였는데, 익명의 투서가 있어 정화궁주(貞和宮主)가 공주를 저주한다고 무고하여 일러바치며, 또한 제안공 숙(淑)과 김방경 등 42명이 장차 반역을 도모할 것이라 말하였다. 그리하여 정화궁주와 숙 그리고 방경 등을 가두었는데 유경(柳璥)이 눈물을 흘리며 극력으로 간하자 공주가 느껴 깨닫고 모두 석방하였다.
《출전 : 중국정사조선열국전/동문선/김성구/1996, pp801~803》
▣ 新元史 卷二百四十九 列傳 第一百四十六 外國一 高麗-65/24] ▣
16년(☞원 세조 지원, 고려 충렬왕 5년, 1279)에 위득유(韋得儒) 등이 김방경(金方慶)이 반역을 한다고 무고하였다. 심(諶)이 흔도(忻都) 및 홍다구(洪茶邱)와 함께 그를 국문하였으나 김방경이 죄를 시인하지 않으므로 김방경을 대청도(大靑島)로 유배를 보냈다.
심(諶)이 공주와 더불어 들어와 예방하며 향하(香河)에 행차를 머무르니, 제께서 황자 탈환(脫歡)을 보내고 황후는 황녀 망가알(忙哥歹)과 아이가적대왕비(阿伊哥赤大王妃)를 보내어 30리 밖까지 와서 맞이하였으며, 또 큰 궁려(穹廬)를 개평부(開平府)의 동문 밖에 설치하여 그들을 대접하였다.
7월 갑신일에 심(諶)이 알현하여 주청하여 이르기를 「섬 오랑캐 일본은 험난함을 믿고 궁궐의 정원에 들지 않으며 감히 천자의 군대에 항거하고 있습니다. 신이 스스로 생각하건대 은덕에 보답할 길이 없기에, 원하건대 배를 건조하고 곡식을 비축하였다가 그 죄를 세상에 알리고 토벌하고자 합니다」하였다. 제께서 이르기를「왕이 돌아가면 재상과 계책을 깊이 논의하고는 사람을 보내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또 상주하여 이르기를 「폐하께서 공주를 내려주시고 성은으로 어루만져 주시니, 작은 아랫나라 백성들은 비로소 삶을 노닥거릴 희망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구(茶邱)가 있어서는 신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다구와 같은 자는 다만 군대의 일만을 처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인데, 나라의 정치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음대로 처단하고자 하니 신이 알지 못할 바입니다. 윗 나라에서 만약 군대를 작은 아랫나라에 두고자 한다면 차라리 달달(達達)이나 한인(漢人)을 둘 뿐 다구의 군대와 같은 것을 오직 소환하시기를 바랍니다」하였다. 제께서 이르기를 「그것은 쉬운 일일 뿐이다」하였으며, 그러고는 이르기를 「생각건대 요(堯)와 순(舜) 및 우(禹)와 탕(湯)만이 능히 제왕의 도를 행하였을 뿐 그 후로는 임금은 약하고 신하가 강하여 입거리와 먹거리를 모두 신하에게 의존하였었다. 예전에 한 임금이 양고기를 먹음에 그의 신하가 그에게 주면 곧 먹고 주지 않으면 곧 먹지를 못하였다. 송(宋)나라의 도종(度宗)은 여기에 있는 어린애의 아비인데, 고사도(賈似道)가 권력을 마음대로 하며 도종으로 하여금 그의 애첩을 내치라고 하자 부득이하여 그 말을 따랐다 하니, 어찌 임금으로서 신하가 두려워 그가 총애하는 첩을 떠나보내는 자가 있을 것인가? 왕의 부친 역시 임연(林衍)에 의해 폐립당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었다. 짐이 듣건대 왕 역시 재상의 말에 하는대로 맡긴다 하니, 이와 같으면서도 능히 나라를 다스린다면 진실로 좋을 것이나 그렇지 못하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하였다. 대답하여 이르기를 「다구(茶邱)의 망언입니다」하였으며, 심(諶)이 또 상주하여 이르기를 「요즘 간사한 사람이 김방경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흔도에게 고하여 흔도가 군사를 이끌고 왕경에 들어와 그를 잡아서 심문하였더니, 다름이 아니라 단지 동쪽으로 정벌을 나갔던 장수와 사졸들 가운데 병장기를 관아에 들여놓지 않은 자가 있었던 것일 뿐입니다. 신은 그가 일에 등한하고 게으른 것을 나무라며 바닷섬에 유배를 보냈는데, 그러나 이는 방경에게 감정이 있는 자가 참소하여 있게 된 일입니다. 이후로 이와 같은 일이 있으면 신이 청컨대 그를 벌하고자 합니다」하니 제께서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하고 또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속히 다구를 소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심(諶)이 또 평장정사 합백(哈伯)에게 말하여 왕경의 달로화적은 임기가 되었으니 낭가알(郎哥歹)로 그를 대신하기를 청하였다. 합백이 상주하여 아뢰니 제께서 이르기를 「달로화적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낭가알은 하찮은 소인인데 역시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제께서 심(諶)에게 해청(海靑) 하나와 부마(駙馬)의 금인(金印) 및 안장을 채운 말을 하사하니 심(諶)이 하직하고 돌아갔다. 9월에 왕경에 이르렀다. 이번 행차에는 무릇 그 나라의 불편하였던 일을 모두 주청하여 덜게 되었기에 나라 사람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12월에 심(諶)이 다시 예방하기를 바라니 제께서 멸망한 송나라의 보물인 봉황이 새겨진 병과 옥으로 된 젓대 등 90가지를 하사하고, 또 심(諶)과 그를 따라온 신하들에게 채색 비단을 하사하였다. 16년 2월에 심(諶)이 돌아가자 제께서 말 1백50필을 하사하고 낭가알(郎哥歹)에게 명하여 그를 호송토록 하였다.
《출전 : 중국정사조선열국전/동문선/김성구/1996, pp804~805》
▣ 新元史 卷二百四十九 列傳 第一百四十六 外國一 高麗-65/25] ▣
17년(☞원 세조 지원, 고려 충렬왕 6년, 1280)에 교위 정지연(鄭之演)을 보내와 환도(環刀) 3백78자루를 바쳤다. 여름에 또 중랑장 간유지(簡有之)를 보내와 토사물을 바쳤다. 평장정사 아합마(阿合馬)가 미녀를 요구하자 전직 장인경(張仁冏)이 그의 여식으로 보낼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인경(仁冏)에게 중랑장(中郞將)을 제수하였다. 아합마는 고려의 이름있는 족벌이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
8월 심(諶)이 상도(上都)에 들어가 예방하였다. 이보다 앞서 심(諶)이 박의(朴義)를 사신으로 보내 주청하여 이르기를 「동쪽으로 정벌가는 일로 신이 들어가 예방하여 교지를 받고자 청합니다」하니 제께서 그것을 허락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심(諶)이 일곱가지 일을 아뢰기를 「첫번째는 고려의 군사로서 탐라를 지키는 자로 동방정벌의 군사로서 보충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고려에 있는 한인(漢人) 군대를 줄이고 도리질목아(闍里迭木兒)로 하여금 몽고군을 더욱 징발하여 나아가는 것이며, 세 번째는 홍다구의 임무를 더 늘려 주지 말고 그가 공로를 이루기를 기다렸다가 상을 주어도 늦지 않을 것이며, 네 번째는 소국의 군관 모두에게 훈장을 하사하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바다에 연하여 사는 한인(漢人)들로 선박의 키잡이나 사공으로 충원하는 것이며, 여섯 번째는 안찰사(按察使)를 보내어 백성들의 질병과 고충을 물어 살피는 것이며, 일곱 번째는 신이 몸소 합포(合浦)에 이르러 변경의 군대를 열병하는 것입니다」하였다. 제께서 후한 조서로써 그에 답하였다.
9월에 심(諶)이 돌아가서 장군 조인번(趙仁璠)의 여식을 아합마(阿合馬)에게 시집보냈다. 알마지 않아 김방경(金方慶)이 일본인과 싸워 3백급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싸웠으나 홍다구가 크게 패하였고, 범문호(范文虎) 역시 전함 3천5백척으로 와서 참전하였으나 큰 바람을 만나 패하여 몰락하였다. 이로부터 누차 심(諶)에게 조서를 내려 군량을 준비하고 전함을 건조하여 다시 거사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소모되는 비용이 셀 수도 없었기에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출전 : 중국정사조선열국전/동문선/김성구/1996, pp806》
▣ 新元史 卷二百五十 列傳 第一百四十七 外國二 日本-18/10] ▣
11년(☞원 세조 지원, 고려 원종 15년, 1274) 정월에 일본의 군주 귀산천황(龜山天皇)이 자리를 그의 태자에게 전하여 준우다천황(俊宇多天皇)이라 부르고 건치(建治)라 개원하였다. 3월에 제께서 봉주경략사 흔도(忻都)와 고려군민총관 홍다구(洪茶邱) 등에게 주둔군과 여진(女眞)의 군대 및 수군을 합쳐 모두 1만5천명 및 전함 9백척을 거느리고 7월로 기약하여 일본을 공격하게 하였다. 또 고려에 명을 내려 군사 1천6백 명을 징발하여 돕도록 하였다.
8월에 원수 홀돈(忽敦)과 부원수 홍다구(洪茶邱) 및 좌부원수 유복형(劉復亨)이 고려에 도착하였다. 고려는 도독사 김방경(金方慶) 등에게 삼익(三翼)의 군대 총 8천명을 거느리고 홀돈 등과 함께 합포(合浦)를 경유하여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게 하였다. 일본의 장수 윤종조국(允宗助國)이 8천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막으며, 통역인을 시켜 배 위로 올라와서 건너온 까닭을 물었으나 홀돈 등이 답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육지로 올라 일본군을 공격하자 윤종조국은 싸우다 죽었다. 홀돈 등이 방향을 돌려 일기도(壹岐島)를 공격하며 해안으로 올라 붉은 깃발을 세웠다. 일본의 장수 평경고(平經高)가 패하여 달아나 성을 닫아 걸고 굳게 지켰다. 다음날 성이 함락되자 평경고는 죽었으며, 홀돈 등이 연이어 세 섬을 격파하고 살육을 자행하며 부녀자를 잡아들여 밧줄로 손바닥을 관통시켜 배의 측면에 매달았다.
일본인들이 크게 놀라며 그들 주변에 예속되어 있던 군사 10만2천여 명을 징발하여 달려와 구원하였다. 홀돈 등이 일본과 박다(搏多)에서 싸울 때 모든 장수들이 높은 소리로 울리는 북에 의지하여 병사들을 지휘하며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을 북소리에 맞추도록 하여 적이 공격의 진영에 빠지면 곧 에워싸서 공격하였으며, 또 철포(鐵砲)를 발사하여 섬멸한 적병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인들이 패하여 달아나자 홀돈 등이 나아가 금진(今津)의 좌속(佐屬)에 이르러 일본 장수 국지강성(菊池康成) 등과 적판(赤坂)에서 싸웠으며, 또 소이각혜(少貳覺惠)와 백도원(百道原)에서 싸워 모두 그들을 패퇴시켰다. 소이각혜의 아들 경자(景資)는 말타고 활쏘기에 뛰어났는데 유복형(劉復亨)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렸다. 홀돈 등이 진영을 소나무 숲에 벌여 놓자 일본의 장수 대판뢰강(大坂賴康)이 와서 겨루었으나 또 패하여 달아났다.
마침 날이 저물어 모든 장수들이 차례대로 배에 오르자 김방경이 홀돈과 홍다구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군사가 비록 적지만 이미 적의 경계 안으로 들어 왔으니 사람마다 스스로 싸움을 치를 것이므로, 이는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운 것, 그리고 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을 친 것과 같은 계책이 되니 청하건대 다시 결전을 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홀돈이 이르기를 「적은 숫자의 무리일지라도 견고하다면 많은 숫자의 무리를 생포할 수 있다 하였으니, 피로한 군사를 적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책략은 완벽한 계책이 아닐 것이며,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는 것만도 못할 것이오」하였다. 유복형(劉復亨)은 상처가 위중하여 거느리던 부대를 이끌고 먼저 돌아갔다. 그날 밤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관군의 전함이 해변의 바위에 부딪쳐 많이 파괴되자 홀돈 등이 밤을 틈타 물러나왔다.
《출전 : 중국정사조선열국전/동문선/김성구/1996, pp833~834》
▣ 新元史 卷二百五十 列傳 第一百四十七 外國二 日本-18/13] ▣
16년(☞원 세조 지원, 고려 충렬왕 5년, 1279) 6월에 송(宋)에서 투항한 장수인 범문호(范文虎)와 하귀(夏貴)가 주복(周福)과 난충(난忠) 및 일본 승려 영과(靈果)와 통사 진광(陳光)으로 하여금 서신을 가지고 일본에 닿게 하였으나 모두 일본인들에 의해 박다(搏多)에서 참수되었다. 7월에 송의 옛 신하가 서찰을 보내 일본에 고하기를 「송 왕조는 이미 몽고에 의해 멸망되었으니 거듭 그 위험이 일본에 미칠까 염려되어 감히 와서 아뢰는 것이오」하였다.
17년 2월에 제께서 비로소 일본이 사자를 죽인 일을 듣게 되었다. 흔도와 홍다구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갈 것을 청하자 제께서 유시하여 그 일을 잠시 늦추도록 하였다. 8월에 고려의 왕 춘(暙)이 들어와 예방하며 탐라(耽羅)에서 수자리를 서고 있는 고려의 군사로 동방 정벌의 군대에 보충시키고자 청하자 제께서 허락하였다. 이 때 흔도와 홍다구가 모두 황제의 책략계획을 받았는데, 홍다구가 이르기를 「신이 만약 일본을 도모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폐하를 다시 뵙겠습니까」하며, 마침내 약속하여 말하기를 「홍다구와 흔도는 몽고와 고려 및 한인(漢人)의 군대 4만여 명을 거느리고 합포(合浦)를 출발하고, 범문호의 만인(蠻人)의 군대 10만 명으로 강남(江南)을 출발하여 모두 일기도(壹岐島)에서 모이는데, 두 군대가 모두 집합하면 곧장 일본의 성(城) 아래로 나아가 반드시 그들을 깨뜨릴 것이다」하였다.
이에 제께서 아라한(阿라罕)을 좌승상(左丞相)으로 삼고, 범문호와 흔도 그리고 홍다구를 중서우승(中書右丞)으로 삼고, 이정(李庭)과 장발도(張拔都)를 참지정사 겸 행중서성사로 삼았다. 9월에 야속달아(也速達兒)와 최인저(崔仁著)를 파견하여 수달달(水達達) 가운데 개원(開元)과 북경(北京) 및 요양(遼陽)에 있는 자들을 동녕부(東甯府)로 옮겨 배치시키고 일본을 정벌하는 전쟁에 나가게 하였다. 10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개원로(開元路) 등지의 군사 3천 명을 모아서 인솔하여 가게 하였으며, 군사 10만이 되자 범문호에게 명하여 그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12월에 고려의 왕 춘(暙)이 개부의동삼사·중서좌승상·행중서성사로 삼고, 김방경은 고려도원수로서 맡아 다스리게 하고, 박구(朴球)와 김주정(金周鼎)은 소용대장군좌우부도통으로 삼아 모두에게 호부(虎符)를 주었으며, 조인규(趙仁規)는 선무장군왕경단사관으로 금부(金符)를 주었으며, 조변(趙抃) 등 10명은 소신교위관군총파로 삼고, 김중성(金仲成) 등 20명은 충현교위군총파로 삼았다.
《출전 : 중국정사조선열국전/동문선/김성구/1996, pp836~837》
▣ 新元史 卷二百五十 列傳 第一百四十七 外國二 日本-18/14] ▣
18년(☞원 세조 지원, 고려 충렬왕 7년, 1281) 봄 3월에 제께서 아라한(阿라罕) 등을 불러 함께 훈계의 유시를 받게 하였으며, 장규(張珪)와 이정(李庭)은 후방에 머무르게 하고, 흔도와 홍다구에게 명을 내려 고려의 육로를 따라가게 하며 이를 동로군(東路軍)으로 삼았는데, 그 군대는 실제로 배를 이용해 움직였다. 범문호가 말 2천필을 독실홀군(禿失忽軍)에게 지급할 것과 회회포(回回砲)의 장인(匠人)을 요청하였으나 제께서 이르기를 「수전(水戰)에 어찌 이러한 것이 필요한가」하며 따르지 않았다.
3월에 정동행성(征東行省)에서 활을 잘 쏘는 자들과 고려의 병초(兵鈔) 4천 정(錠)을 주고 탐라(耽羅)에서 건조한 선박을 홍다구에게 맡겼으며, 죄수로서 사형을 감면한 자들을 흔도에게 맡겨 군사로 삼게 하였다. 제께서 범문호 등에게 유시하기를 「저들이 우리의 사신을 억류하여 돌려 보내지 않기에 경들로 하여금 이번 출행을 하게 한다. 짐이 한인(漢人)들의 말을 듣건대, 다른 사람의 국가를 거두어들여 백성과 토지를 얻고자 하면서 만약 백성들을 남김없이 살해한다면 그 땅을 얻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하나의 일을 짐이 실로 우려하고 있으니, 경들이 화목하지 못할까 두려울 따름이다. 만약 저들 나라의 사람이 와서 경들과 함께 논의할 것이 있다고 하면 마땅히 마음을 같이하여 협력하고 책략을 세워, 마치 한입에서 나오는 말과도 같이 그들에게 답해야 할 것이다」하며 거듭 엄한 군율을 펼칠 것을 당부하며, 옷과 갑옷 및 활과 화살 및 해청부(海靑符)를 주었다. 이 때 흔도와 홍다구는 앞서 출발하여 이미 고려에 닿았으며, 고려의 왕 춘(暙)은 영을 내려 사졸들로서 비록 부모의 상(喪)을 당한 자라 할지라도 15일이 지났으면 곧 군대를 따르게 하였다.
5월에 흔도와 홍다구 및 김방경과 박구와 김주정 등이 몽고와 고려 및 한군(漢軍) 4만 명과 전함 9백척으로 합포(合浦)를 떠나 병진일에 일본의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壹岐島)를 공격하여 섬의 백성 3백여 명을 살해하였으며, 섬의 백성 가운데 산 속에 숨은 자들은 군사들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번번이 찾아 살해하였다. 일본 장수 소이자시(少貳資時)와 용조사이시(龍造寺李時) 등이 군사 수만 명과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일기도의 뇌포(뇌浦)에서 싸웠으나, 대군이 화포를 발사하자 일본인들이 패주하여 달아났으며 그들의 장수 소이자시는 죽었다.
6월 기사일에 다시 축전(筑前)하여 지하도(志賀島)에서 싸웠는데 홍다구가 거의 일본인들에게 사로잡히려 할 때 비장 왕만호(王萬戶)가 그를 구출하여 홍다구가 겨우 모면하였다. 경오일에 다시 싸웠으나 또 승세를 잃었으며, 이 때 군대에 역질이 크게 나돌아 병으로 죽은 자가 이미 3천여 명이 되자 모든 장수들이 나아가 종상해(宗像海)에 이르렀다. 북조시종(北條時宗)은 그들의 장수 추전성차랑(秋田城次郞) 등을 보내와서 원조하였다. 대군이 전함을 연결시켜 둥글게 두르고 진영의 바깥으로 큰 선박을 나열하고 석노(石弩)를 설치하였다가 가까이 접근하여 공격하기를 기다려 발사하였다. 일본의 전함은 작아서 능히 대적하지 못하여 연이어 공격하여 온 자들은 모두 패하여 물러났다. 나라 안의 인심이 흉흉해지고 시장에는 판매할 쌀이 없었다. 일본의 군주가 친히 팔번사(八幡祠)에 이르러 기도하였으며, 또 태신궁(太神宮)에서 명을 선포하며 자신의 몸으로 나라의 어지러움을 대신하고자 하였다.
《출전 : 중국정사조선열국전/동문선/김성구/1996, pp838》
▣ 新元史 卷二百五十 列傳 第一百四十七 外國二 日本-18/15] ▣
이보다 앞서 모든 장수들이 서로 약속하기를, 흔도와 홍다구는 고려를 경유하여 바다를 건너 일기도(壹岐島)에 이르고, 범문호(范文虎)와 이정(李庭) 등은 경원(慶源)을 경유하여 평호도(平戶島)에 도착하기로 하였었다. 평호도는 주위가 모두 물이기에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으므로 먼저 이 섬에 자리잡은 뒤 사람을 시켜 가벼운 배로 일기도에 가서 흔도와 홍다구를 불러 군사를 합치고 함께 진격하고자 하였다. 6월 보름 전에 평호도에 모이기로 하였으나 마침 아라한(阿라罕) 군대의 행차가 경원(慶元)에 머무르다 (아라한이) 병으로 죽었다. 제께서 좌승상 아탑해(阿塔海)에게 명하여 대신 군대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으나, 미처 도착하지 않아 문호와 정은 이미 출발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흔도와 홍다구 등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기를 「지난번 약속하기를 강남군(江南軍)이 동로군(東路軍)과 더불어 일기도(壹岐島)에서 모이기로 하였었다. 지금 남군은 시기를 놓쳤고 우리 군대가 먼저 도착하여 큰 싸움만도 몇 차례하였기에 전함은 파괴되고 삭량은 고갈되었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는가?」하였으나 김방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10여일이 지나 또 그것을 말하자 방경이 이르기를 「명을 받들어 석 달분의 식량을 가지고 왔으며 이제 한 달이 지났으니 식량은 아직 있소이다. 남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힘을 합쳐 공격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오」하니, 모든 장수들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범문호와 이정이 전함 3천5백 척과 군사 10만여 명으로 차능도(次能島)와 지하도(志賀島)에 도착하자, 흔도와 홍다구가 관할 부대를 거느리고 그들과 회합하여 배의 이물과 고물을 서로 맞부딪치며 진격하였으나, 누차 일본인들에 의해 퇴각하였다. 초토사 홀도(忽都)와 합사(哈思) 등이 싸우다 몰락하고 모든 장수들이 누차 승세를 잃었다. 이에 비전(肥前)의 응도(鷹島)로 옮겨 갔으나 산 그림자에 떠있는 파도를 보고 바다 입구에 암초가 있는 것이라 의심하여 감히 근접하지 못하였는데, 마침 푸른 규룡이 물 위에 나타나고 바닷물에서 유황의 기운이 일어나는 등 괴이한 일이 백출하자 군사들의 마음이 두려움에 떨렀다.
8월 초하루 갑자일에 돌풍이 크게 일어나 전함이 모두 파괴되고 전복되어 좌부도원수 아라첩목아(阿라帖木兒) 이하 익사한 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시체가 조류를 따라 흐르다 포구로 들어와 쌓인 것이 마치 언덕과도 같았다. 표류하자 죽음을 면한 자들이 그래도 수천 명은 되었는데, 응도에 이르러 파괴된 선박을 수리하고 도망하여 돌아오려 하였으나 모두 일본인들에게 살해되었다. 범문호(范文虎)와 이정(李庭) 등의 선박 역시 파괴되어 정(庭)은 선박의 판자를 안고 표류하다 해안에 닿아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고려를 경유하여 북쪽으로 돌아왔다.
《출전 : 중국정사조선열국전/동문선/김성구/1996, pp839~8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