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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10. 30. 발용(군) 제공)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김방경) -박재우
한영우선생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편 | 돌베개 | 2003년 12월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에 충렬공 전기를 쓰던 서울대학교 박재우교수의 김방경(삼별초 평정과 일본 정벌을 이끈 고려군 최고 지휘관) 이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김방경
삼별초 평정과 일본 정벌을 이끈 고려군 최고 지휘관
박재우(서울대학교 규장각 선임연구원)
머리말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은 안동 김씨로 경순왕(敬順王)이 후손이다. 증조 김의화(金義和)는 사호(司戶), 즉 읍사의 호장으로서 향리였는데, 할아버지 김민성(金敏成)이 장야서승 직사관을 지내면서 중앙관료로 진출했고 아버지 김효인(金孝印)은 병부상서 한림학사가 되었다. 더구나 큰아버지 김창(金敞)은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가 되었으니 김방경은 무신 정권기에 향리에서 성장해 중앙관료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셈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장한 김방경은 삼별초(三別抄) 난(1270~1273)을 평정하고 원나라의 일본 침략에 동원된 고려군 최고 지휘자관으로 활약했고, 이를 발판으로 성장해 원나라의 간섭이 시작된 충렬왕 초반에는 수상이 되어 정치를 이끌어갔다. 그리고 김방경의 출세를 계기로 그의 가게는 많은 재추(宰樞)를 배출해 권문세족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므로 김방경은 무신들의 지배와 몽고의 침략, 당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던 강화, 예상했던 원나라의 간섭, 그리고 측근정치가 행해졌던 시대를 두루 거치면서 형성된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좋은 사례가 된다.
김방경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열전과 연대기 기록이 있고, 안동 김씨가 편찬한 족보에 「김방경 묘지명」과「김방경 행장」이 있으며,『양촌집』(陽村集)의「동현사략」(東賢事略)에 열전이 있다. 문집은 남기지 않았지만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에 편지가 한 통 남아 있고,『동문선』(東文選)에 시가 한편 수록되어 있다.
1. 성장과 정치적 입장
김방경은 삼한공신(三韓功臣) 일긍(日兢)의 음서(蔭敍)로 관직에 입문해 처음에 양온사동정이라는 산직(散職: 일정한 자리가 없는 벼슬)을 받았다가 차대정에 임명되어 정식으로 진출했고, 이러 태자부견룡·산원 겸 식목녹사를 차례로 역임했다.
이러한 성장 배경으로 김창과 김효인의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형제가1206년(희종 2)과 1208년(희종 4)에 차례로 과거에 급제했고 이를 계기로 최씨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최씨 정권은 문신 우대책을 시행하면서 자신들과 가까운 좌주(座主)를 통해 급제자들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여 이들의 행정 능력을 이용해 세력 기반을 넓히려 했다.
최씨 정권 때 좌주를 역임한 인물은 여럿 있었지만 특히 임유(任濡)와 금의(琴儀)가 이름을 떨쳤다. 임유는 문벌인 문하시중 임원후의 아들로 문하시랑평장사까지 올랐는데, 형 임부의 딸이 최충헌(崔忠獻)과 혼인했고 자신의 아들 임효명이 최충헌의 딸과 결혼해 최씨 정권과 중혼을 맺었고, 이를 계기로 네 차례에 걸쳐 좌주를 역임했다. 금의는 문벌 배경은 없었지만 최충헌에게 발탁되어 세 차례에 걸쳐 과거를 관장했다.
이들의 문생(門生)은 임유와 금의를 통해 최씨 정권과 연결되어 커다란 혜택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최씨 정권 당시에 과거를 관장해 다시 문생을 선발할 만큼 매우 번성했다. 그런데 김창은 임유의 문생이고 김효인은 금의의 문생이었다.
특히 김창은 최우(崔瑀) 정권 때 두드러졌다. 1225년(고종 12)최우는 처음 정방(政房)을 설치하고 김창에게 맡겼다. 정방은 인사기록부인 정안(政案)을 토대로 인사이동이 필요한 관직에 사람을 선발하는 기구로 최우가 인사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 설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담당자는 개인적인 역량이 뛰어나야 함은 물론 최씨 정권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인물이어야 했다. 김창은 수만 명에 달하는 인사 대상자에 관한 기록을 한번만 보면 모두 기억했고 또 인물을 선발할 때는 일일이 최우의 의견을 물어 결정에 따랐다고 하므로 적임자였음을 알 수 있다. 김방경은 이들 김창, 김효인의 정치적 진출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김방경이 이들의 후광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신은 최씨 정권과 밀착하지 많았다. 오히려 김방경은 무반 출신임에도 최씨 정권의 측근 무신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치 활동을 했는데, 이는 그가 최씨정권의 측근 무신들처럼 삼별초를 이끌거나 최씨 정권의 문객이나 가노(家奴) 출신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물론 김방경이 최씨 정권과 직접 연결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창이나 김효인을 통해 최씨 정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외가 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관직 생활 중에도 그러한 기회가 있었다. 특히 그는 식목녹사 시적에 식목도감(拭目都監)의 장관인 문하시중 최종준(催宗峻)에게 상당한 신임을 받았는데 최종준은 최우와 인척관계였다, 즉 최종준의 누이가 정숙첨(鄭叔瞻)의 부인인데, 정숙첨의 딸이 최우의 부인이었다. 그러므로 김방경은 최종준을 통해 얼마든지 최씨 정권과 연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김방경은 그러한 관계를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방경은 최씨 정권의 정치 운영에 비판적이었다. 김방경은 산원겸 식목녹사를 역임한 뒤 나가 서북면 병마녹사가 되었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별장(別將)이 되었다. 이어 낭장(郎將)으로 승진하면서 감찰어사를 겸했는데 이때 김방경은 우창(右倉)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우창은 국가 재정을 맡은 관부(官府)로서 미곡을 보관했는데 미곡을 지급하는 과정에서 부정이 많아 국고의 낭비가 심했다. 그런데 김방경은 우창을 감찰하면서 청탁을 들어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한번은 어떤 재상이 청탁을 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최우에게 “이번 어사는 지난 번 어사만큼 일을 잘 처리하지 못 합니다”하며 호소했다. 마침 김방경이 오자 최우가 김방경을 꾸짖었다. 그러자 김방경은 “지난번 어사처럼 일을 하려고 한다면 저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국고를 든든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지 못 합니다”라고 하여 최우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 일화는 단순히 김방경이 강직한 인물이었음을 뜻한다기보다 그가 최씨 정권의 재정 운영 방식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향은 견룡행수(牽龍行首) 시절에도 확인된다. 김방경은 서북면 병마판관을 지내고 국왕의 측근 무반인 견룡행수가 되었다. 무신난 이후 집권자들은 사병집단인 문객(門客)을 형성했고 최씨 정권도 무반이나 군인들을 끌어들여 도방을 만들었다. 특히 이들 무반은 중앙군의 장교로 근무했을 뿐만 아니라 최씨 정권의 이해에 따라 도방(都房)의 지휘를 맡았다. 그 결과 이들의 지휘는 최씨 정권과 연결되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무반과 군인들이 최씨 정권과 연결하기 위해 애썼고 이러한 사정은 금위군(禁衛軍)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김방경이 견룡행수로 재직했을 당시 왕실을 호위하던 무반들은 대부분 최씨 정권과 연결되어 사병활동에 주력함으로써 원래의 직무를 등한시했다. 이는 금위군을 약화시켜 왕권을 무력하게 만들고자 했던 최씨 정권의 의도와 맞물려 생겨난 상황이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관행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신하 된 사람의 의리가 이럴 수는 없다”라며 동료 박기성과 함께 자신들만은 근무에 충실하자고 약속했다. 그러고는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비록 병이 나도 휴가를 내지 않을 정도로 근무에 열중했다. 이것 역시 최씨 정권의 군사기반이 중앙군 및 금위군을 무력화하여 결국 왕권이 약화되는 현실에 대해 김방경이 상당히 비판적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김방경이 비록 무반으로 진출하기는 했지만 최씨 정권의 측근 무신들과는 정치적 입장에서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 김방경은 좌금중지유 섭장군으로 승진하면서 급사중과 어사중승을 겸했다.『고려사』김방경전의 평가를 보면, “어사중승으로 옮겨 법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 풍모와 절개가 의연했다”고 하는데, 이는 감찰어사 시절의 태도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그가 최씨 정권의 정치 운영에 비판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최씨 정권의 정치 운영에 비판적이었던 김방경은 몽고와의 전쟁에서도 강화론을 견지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강화론이 등장하는 정황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살리타이(徹禮塔)의 1차 침략이 있자 최씨 정권은 정규군을 파견해 몽고군을 막으려 했으나 안북성 에서 패배함으로서 고려군의 열세가 확인되었다. 당시 최우는 자신의 안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몽고군이 개경 인근까지 진출하자 성곽을 방비하는 군사들은 늙고 약했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반면, 자신은 잘 훈련된 가병으로 호위하게 했다. 그리고 곧장 강화를 추진하고 다른 한편 천도를 준비했다.
당시 개경을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 우세했으나 성을 지킬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 야별초(夜別抄) 지유(脂油) 김세충(金世沖)을 처형함으로써 반대론을 억누르고 천도를 단행했다. 이렇게 무리한 천도를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최우가 강력한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뒤 최우는 자신은 강화에 안전하게 있으면서 야별초를 보내 유격전을 펼치거나, 지방관이나 방호별감의 지휘 아래 군사와 백성들이 산성이나 섬에 들어가 성을 지키는 입보(立保) 전술을 쓰게 했다.
그런데 2차 침략 때 처인성(處仁城)에서 살리타이가 고려군의 화살에 맞아 죽고 또 강화에 궁궐과 관청이 조성되면서 최우는 강화 천도로 사직을 보호했다는 명분을 얻었다. 다시 탕구(唐古)가 3차 침략을 감행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고려가 국왕의 친조(親朝)를 약속해 강화가 이루어졌다. 이후 몽고 에서도 황위 계승 분쟁이 있어나 한때 고려 침략이 불가능해지자 그동안 최씨 정권은 강화 천도의 이익을 고스란히 누렸다, 아무간(阿毋侃)의 4차 침략이 있었지만 국면을 전환시킬만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우가 죽고 최항(崔伉)이 집권하면서 최씨 정권의 항전 정책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최항은 기생의 아들로 권력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항전 정책을 계승하기는 했지만 전처럼 강력할 수 없어 강화론이 다시 등장했다. 몽고의 헌종이 즉위해 개경 환도와 국왕의 친조를 요구해왔을 때, 재추와 문무 4품 이상이 모인 회의에서 이들은 국왕의 친조는 곤란하지만 태자의 친조는 가능하다고 입장을 피력했다.
당시 김방경은 좌중금지유 섭장군으로 급사중과 어사중승을 겸한 4품 관료였다. 그러므로 김방경도 이 논의에 참여해 강화론을 주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씨 정권의 정치 운영에 비판적이었던 김방경의 행보로 볼 때 무리한 추정은 아니다. 이는 최우 정권 당시 김방경의 행적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김방경은 전쟁으로 피해가 컸던 서북면에 두 차례 부임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재임한 시적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아무간의 몽고군이 침략하자 최우는 북계병마사 노연(蘆演)에게 백성을 이끌고 섬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고, 김방경 또한 명령에 따라 향리와 주민을 이끌고 위도(葦島)에 들어갔다.
하지만 식량이 문제였다. 마침 위도는 바닷가에 넓고 평평한 땅이 10여리나 되었는데, 바닷물이 넘나들어 아무도 파종할 생각을 못했다. 김방경은 식량이 해결되지 않으면 입보책이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을 시켜 둑을 쌓고 개간하여 파종했는데 이런 김방경의 지략은 몽고군이 장기 주둔하면서 빛을 발했다. 위도의 향리와 백성들은 추수해 이를 식량으로 삼았으므로 장기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위도는 물도 부족했다. 김방경은 백성들을 시켜 제방을 만들어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빗물이나 이슬을 저장해 큰 연못을 만들었다, 그 결과 여름에는 급수를 할 수 있고 겨울에는 얼음을 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김방경은 서북면의 백성에게 상당한 신임을 얻었다.
이러한 김방경의 태도는 최씨 정건의 측근들이 백성들의 생계에 대한 아무런 대책 없이 입보책을 무리하게 추진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특히 최항 정권 이후 무리하게 입보를 재촉해 백성들이 굶어 죽는 일이 속출했는데, 이로써 볼 때 최항 정권의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해 김방경이 비판적이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재추 및 4품 이상의 관료들이 대책회의를 열 때마다 김방경은 강화론을 적극 주장했을 것이다.
김방경이 강화론을 주장했을 것이라는 또 다른 근거는 강화파(講和派)의 동향과 관련이 있다. 예꾸(也窟)와 자랄타이(車羅大)가 차례로 5차와 6차 침략을 감행해오자 고려는 커다란 곤경에 빠졌다. 특히 1254년(고종 41) 자랄타이의 공격으로 고려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해에 몽고군에게 끌려간 남녀가 무려 2만 6천8백여 명이나 되는데, 『고려사』에 “(몽고군이) 거쳐 간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군의 침입이 있은 뒤로 이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고 기록되었을 정도이다.
최항이 죽고 최의가 집권한 뒤에도 항전 정책은 계속되었지만 역량은 현저히 떨어졌다, 자랄타이의 파상적인 공격이 계속되어도 고려 지배층은 별 다른 대책이 없었다. “그때 안팎이 텅 비어 마무 계책이 없이 다만 부처와 신령에 기도할 뿐 이었다”는『고려사절요』의 기록은 당시의 절박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이때 몽고군이 국왕의 출륙(出陸)과 왕자의 조회를 요구해오자 재추회의에서 최자(崔滋), 김보정(金寶鼎) 등 강화파들이 고종에게 힘껏 건의해 왕자의 조회를 허락받았다. 그런데 최자는 이규보(李奎報)의 천거에 힘입어 최씨 정권과 연결된 인물로 전쟁 말기에 강화론을 주장했는데, 문제는 그라 김방경의 아머지 김효인과 함께 금의의 문생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효인은 비록 최씨 정권의 후광에 힘입어 성장했지만 최항 정권 이래로 강화론을 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방경도 강화론을 지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258년 (고종45) 최의의 측근 무신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김준(金俊)이 유경(柳璥)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왕정을 복구했다. 이때 그동안의 무리한 입보책에 대한 반발로 동북면의 조휘와 탁청이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항복하자 몽고는 이곳에서 쌍성총관부를 설치했고 고려는 영토를 상실했다. 이는 고려 지배층에게 더 이상 강화를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강화파의 지지를 받은 태자가 강화를 맺기 위해 몽고로 갔고 결국 쿠빌라이(世祖)를 만나 강화를 체결했다.
이러 출륙을 준비하면서 김방경이 대장군으로서 출배별감에 임명되었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그동안 김방경이 강화론의 입장을 견지해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는 고종이 사망한 상태에서 태자가 몽고에 있었으므로 후대에 출렬왕이 되는 태손이 김방경을 출배별감에 임명 한 것인데, 이는 뒤에 김방경과 출렬왕을 연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삼별초와 일본 침략
몽고와 강화는 맺었지만 곧바로 개경 환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쿠빌라이가 개경 환도 시기를 고려의 편의대로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허락한 데다 김준이 최우의 천도를 높이 평가하면서 권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씨 정권 몰락 뒤부터 왕권도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당시 원종은 태자 시절에 외교 능력을 발휘해 몽고와 강화를 맺었고, 즉위 직후에는 쿠빌라이에게서 고려의 의관과 풍속을 지할 수 있도록 인정받았다. 그러면서 몽고와의 외교가 왕권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현실을 인식한 원종은 1264년(원종 5) 쿠빌라이의 요구를 받아 친조(親朝)를 행했다. 이러한 원종의 행보는 강화를 추진해왔던 강화파 에게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 결과 원종의 왕권은 상당히 신장 되었다.
이 시기에 김방경은 지형부사, 지어사대사를 거치면서 꾸준히 성장해갔다. 1265년 (원종 6) 김방경이 대장군으로서 광평공(廣平公) 순(恂)과 함께 몽고에 사신으로 다녀온 것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 사행(使行)은 원종이 친조했을 때 받은 몽고의 배려에 감사하는 뜻으로 보낸 것으로, 이는 김방경이 강화론을 계속 견지하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방경이 항전을 표방한 김준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음은 당연했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상장군에 임명된 김방경이 중방에서 업무 관계로 장교를 매질한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반주(班主)인 전빈(田?)의 미움을 샀다. 이에 전빈이 권신, 곧 김준에게 말해 김방경을 남경 수령으로 폄출(貶黜)시켰는데 이는 김방경과 김준 정권의 관계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김방경은 남경에 부임한 지 사흘 만에 다시 돌아와 1268년(원종 9) 판예빈성사 북계병마사에 임명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서북면은 오랫동안 몽고와 격전한 지역인 관계로 피해가 심각했고 그 결과 고려의 지배력이 취약해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이어서 40여 개의 성에서 글을 올려 위도를 개척한 뒤로 서북면에서 인심을 얻고 있던 김방경을 보내 정세를 안정시켜주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김방경이 서북면에 부임한 직후에 쿠빌라이는 김준과 이장용(李藏用)의 조회를 명령했다. 위기를 느낀 김준은 몽고 사신을 죽이고 깊은 바다로 도망하자고 건의했으나 원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김준은 원종을 폐위할 생각까지 했다. 이에 원종은 김준과 갈등 관계에 있던 야별초의 지휘관 임연(林衍)의 도움을 받아 환관 강윤소, 최은, 김경 등을 동원하여 김준을 제거했다.
김준을 제거한 뒤 상황은 임연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임연은 야별초를 동원해 김준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최은, 김경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영향력을 확대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이들도 제거했다. 나아가 임연은 그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을 원종의 계책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원종을 폐립(廢立)하고 안경공(安慶公)창(?)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 몽고에 갔던 세자, 곧 충렬왕이 고려로 돌아오다 원종의 폐립 소식을 듣고 다시 몽고로 들어가 몽고군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임연을 제거하고 원종을 복위시키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몽고는 먼저 사신을 보내 국왕과 세자를 해치는 자가 있으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원종을 후원했다. 임연 정권은 위기에 몰렸다.
이러한 임연 정권에 커다란 타격을 입힌 것은 최탄(崔坦), 한신(韓愼) 등이 임연 제거를 명분으로 일으킨 반란이었다. 더구나 최탄 등이 몽고에 투항했으므로 임연의 타격은 더욱 컸다. 이때 몽고는 흑적(黑的)을 보내 원종과 안경공 창, 임연이 함께 조회해 폐립 사건에 대해 밝히라고 명했다,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원종은 복위하자 즉시 사신을 보내 조회하겠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1270년(원종 11) 세자가 요청한 몽가독(蒙哥篤)의 몽고군이 서경에 도착했다. 1260년(원종 1)에 철수했던 몽고군이 고려 왕실의 요청으로 10년 만에 다시 고려의 영토로 들어온 것이다. 이는 사병과 삼별초를 장악하고 있던 임연 정권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고려 왕실의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이었다.
그런데 군량미가 문제였다. 원종을 폐립시킨 임연이 고려에 주둔한 몽고군에게 군량미를 제공할 가능성은 없었다. 군량미를 안정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임연과 연결되지 않은 믿을 만한 인물이 필요했는데 이는 몽고군이 출발하기 전에 이미 논의되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이장용은 김방경을 추천했다. 김방경은 몽가독의 군대와 대동하면서 그들의 영향력을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 그들이 대동강을 넘지 못하도록 요청하고 몽고의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서경에 그들의 발을 묶어 두었다. 이를 계기로 김방경은 정치적으로 크게 부상했다
한편 원종은 몽고에 친조해 폐립사건의 전말을 보고하고 자신이 직접 몽고군을 대동하고 가서 권신을 제거하고 개경으로 환도하겠다고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연이 죽고 그 아들인 임유무(林惟茂)가 교정별감이 되었지만 실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에 원종은 두연가(頭輦苛)의 몽고군을 대동하고 국경을 넘어오면서 황제의 명이라 하며 출륙을 명했다. 다급해진 임유무는 입보책을 명령하면서 야별초를 보내 두연가의 몽고군을 막게 했다. 원종은 임유무의 매부 홍문계(洪文系)를 회유하고 홍문계는 송송례(宋松禮)와 상의해 임유무를 제거했다. 재추들이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논의하고 날짜를 정하자 이에 반발한 일부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켰다.
김방경의 생애에서 삼별초와의 관계는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고려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활동해 정치 군사의 중심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삼별초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할 것 같다.
알다시피 삼별초는 최우가 나라 안의 도적을 잡기 위해 야별초를 설치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정권의 수탈에 저항했던 백성들이었다. 이들이 최우에게 위협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농민들의 반란을 사병으로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개경 수비와 경찰 임무를 맡고 있던 경군(京軍)이 와해된 상황이어서 이 임무를 수행할 군사력이 필요했고 이에 야별초를 설치했다. 그러므로 야별초가 치안을 담당하는 공병으로 창설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때의 치안은 최씨 정권에 저항하는 백성에 대한 진압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최우가 처음부터 사적인 의도로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몽고가 침략하자 야별초는 몽고에 대한 항전이라는 새로운 임무를 맡았다. 항전이 정권 연장에 필수적인 전술임을 생각한다면 야별초의 항전 영시 최씨 정권의 이해와 관련 있는 황동임을 알 수 있다.
야별초와 달리 신의군(神義軍)은 1254년(고종 41) 이후에 설립되었다. 당시는 강화론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최항이 무리하게 입보책을 고집하던 때였다. 수세에 몰린 최항은 몽고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군사들을 모아 신의군을 결성하고 항전의 고삐를 당겼다.
이처럼 삼별초는 치안과 항전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가의 공병이면서 동시에 무신 정권의 사적인 목적에 기여하던 삼별초가 어떻게 최의, 김준, 임유무 등과 같은 무신 집권자들을 제거하는 데 동원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는 삼별초의 지휘체계와 관련이 있다.
삼별초의 단위부대 지휘관은 도령과 지유인데 이들은 대부분 낭장과 별장으로 임명 되었다.즉 삼별초는 20명 단위의 단위부대들로 구성된 군대였다. 중요한 것은 삼별초가 공병이었기 때문에 지휘관이 무신 정권과 밀착하면서도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 단위부대는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실제로 최의, 김준, 임유무 등을 제거할 때 동원된 삼별초는 삼별초 부대전체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임유무를 제거할 때 참여했던 삼별초는 송송례의 아들 송분이 지휘자로 있던 신의군 부대와 일부 야별초였다. 당시 이들과 달리 몽고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임연이 경상도에 보낸 삼별초 부대와 임유무가 교동에 파견한 삼별초 부대가 따로 있었다.
이로 본다면 삼별초의 난에 참여한 부대도 삼별초 전부는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별초의 난이 평정된 뒤의 포상 기록에는 역적을 토벌한 경별초(京別抄), 곧 삼별초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보아 삼별초의 항전이 삼별초 전체의 입장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된 것은 전쟁 말기에 더 이상 대책 없는 정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강화파의 입장을 삼별초 부대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강화가 체결되고 전쟁이 끝난 뒤 독자적으로 몽고에 항전한 삼별초 부대가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일부 삼별초가 갑자기 항전을 표방한 것은 원종이 삼별초를 해산시키고 명부를 압수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런데 당시 원종이 삼별초를 해산한 것은 그들이 몽고에 항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원종의 입장에서 볼 때 삼별초가 임연 정권의 수족이 되어 왕권 확립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부를 압수한 것이 실수였다. 삼별초는 오랜 기간 항전을 이끌어왔던 그들의 명부가 몽고에 알려질까 두려웠다. 당시 몽고군은 고려와 전쟁을 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몽고의 힘을 빌려 임연 정권을 몰락시키려 했던 원종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삼별초는 이것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1270년(원종 11)의 일이다.
그들의 구호는 “오랑캐 군사가 크게 도착해 백성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자는 모두 모이라”는 것이었다. 삼별초는 몽고에 항전하자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 나라가 잿더미가 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강화를 체결했는데. 전쟁이 끝난 지 11년 만에 다시 항전을 표방하며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결코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없다.
강화를 추진했던 고려 왕실과 관료들, 특히 또 다른 상당수의 삼별초 부대가 항전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들은 강화가 몽고의 정치·경제·군사적 압박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강화의 역사적 의미를 손상시키려 하지 않았다. 몽고와의 강화는 전쟁 말기에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당시 김방경은 무신 정권 휘하의 장수 출신이 아닌 인물의 대표적인 존재로 원종 폐립 사건으로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고려군의 지휘관으로는 적임자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강화론을 지지해온 김방경의 입장에서 삼별초의 난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고 이는 강화파 전체의 입장이기도 했다.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 데 김방경의 활약은 매우 컸다. 송만호(宋萬戶)의 몽고군 1천 명이 강화를 떠나는 삼별초를 쫓아가자 원종은 김방경을 역적 추토사로 삼아 길을 안내하게 했다. 삼별초가 영홍도에 정박하는 동안 김방경은 그들을 공격하려 했으나 송만호는 1천여 척의 삼별초 함대를 보고 겁을 먹고 말렸다. 그동안 삼별초는 진도로 내려갔고, 송만호는 삼별초의 협박에 못 이겨 끌려갔던 1천여 명의 백성들이 도망해 나오자 이들을 적당이라고 끌고 귀환했다.
삼별초가 진도에 거점을 정하고 전라도에서 활동하는 사이, 신사전(申思佺)을 보냈는데 그가 싸워보지도 않고 개경으로 돌아오자 다시 김방경을 보냈다. 김방경은 아해(阿海)의 몽고군 1천 명과 함께 내려갔는데, 마침 삼별초가 나주와 전주를 함락시키려 했으므로 단기(單騎)로 내려가면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전주로 가니 군량미를 준비하라는 첩문을 보내 전술상 전주를 안심시켜 삼별초의 공격을 막아내게 했다. 이후 아해가 겁을 먹고 돕지 않는 가운데 김방경은 삼별초와 전투를 벌였고, 비록 승패를 가늠하진 못했지만 전투 역량은 단연 돋보였다.
1271년(원종 12) 아해를 대신해 흔도(?都)가 파견되면서 삼별초에 대한 공격이 다시 시작됐는데, 당시 삼별초는 기세를 올리던 차에 수비를 소홀히 하다 흔도와 김방경이 이끄는 연합군의 전술에 말려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김통정(金通精)은 남은 삼별초를 데리고 제주로 도망했다. 김방경은 그 공로로 중서시량 평장사에 임명되었다.
제주에 들어간 삼별초는 전열을 정비한 뒤 다시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으로 영향력을 확장했다. 이러한 활동은 꽤 위협적이었지만 산발적인 공격에 불과해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1273년(원종 14) 원나라는 제주 공격을 명령했고 김방경은 중군행영병마원수(中軍行營兵馬元帥)로 참여했다. 연합군의 전술과 압도적인 화력에 삼별초는 버티지 못하고 패퇴했고 김통정은 부하를 데리고 산으로 도망했으나 결국 죽음을 당했다. 김방경은 중군(中軍)을 인솔해 승리로 이끈 공로로 문하시중이 되었다.
삼별초의 평정은 몽고와의 항전을 표방하며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이 사라지고 대신 강화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수용한 세력이 고려 사회를 주도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남은 과제는 원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동안 몽고는 고려에 정기적인 공물 외에 칭기즈 칸 이후 복속국들에게 강요해온 6사(六事)를 부담 시켰다. 6사란 첫째 인질을 보내고, 둘째 군사를 징발하고, 셋째 군량미를 보내고, 넷째 역참을 설치하고, 다섯째 호구를 조사하고, 여섯째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고려는 전통적으로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등과 사대 외교를 맺으면서 조공을 바쳐왔으나 그것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따르는 의례적인 것이었을 뿐 6사와 같은 요구를 받은 적은 없었다. 원종과 쿠빌라이 사이에 최종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 쿠빌라이는 “ 의관은 본국의 풍속을 따라 모두 고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몽고군과 다루가치를 철수시키자, 고려와 몽고 사이에는 고려 전기와 같은 사대 관계가 정착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일본 침략에 고려의 군사와 군량을 이용하려는 것이 몽고의 기본 입장이었으므로 파병에 대한 부담은 불가피했다.
사실 임연의 원종 폐립 사건과 삼별초의 난은 고래에 대한 몽고의 영향력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종 폐립 사건으로 몽고군이 들어왔고 삼별초 난이 몽고군의 개입으로 평정되었으므로, 이제 원나라는 일본 침략에 고려를 좀더 본격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1274년(원종 15)이 되자 원나라는 침략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침략군은 몽고군과 한군을 합쳐 2만 5천명, 고려군 8천 명 그리고 여진군 약간 명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몽한군이 주력군이었다. 그밖에 고려는 사공과 수수(水手: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의 선원)6천7백 명과 전함 9백 척을 부담했고 이들을 먹일 군량을 보급했다. 그러므로 제1차 일본 침략 때 고려가 전쟁 비용을 일방적으로 부담했음을 알 수 있다. 김방경은 고려군의 지휘관으로 중군 도독사를 맡아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은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자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쓰시마섬(對馬島), 이키 섬(壹岐島)을 거쳐 하카다(博多) 지역으로 진격해 승리를 거두었으나, 회군하자는 홀돈(忽敦)의 주장과 계속 싸우자는 김방경의 주장이 맞섰는데 유복형(劉復亨)이 부상을 당한 것을 계기로 회군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회군하다가 폭풍을 만나 전함들이 파손되었다. 이는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아니지만 커다란 손실이었다.
3. 측근정치와 여원관계
전쟁 이후 김방경의 정치적 지위는 절정에 달했다. 1276년(충렬왕 2) 김방경이 원나라에 갔을 때 충렬왕은 원나라 중서성에 글을 보내 김방경의 공로를 포상해 호두금패(虎頭金牌: 원나라에서 장수에게 주었던 호랑이 머리 형태의 금으로 만든 패)를 지급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김방경은 원에서 상당한 예우를 받았는데 귀국했을 때도 충렬왕이 직접 맞이했다. 이러한 김방경의 성장은 강화파의 정치적 성장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고려 전기와 같은 사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므로 충렬왕의 입장에서도 이들과 힘을 합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방경은 무고 사건을 당한다. 1276년(충렬왕 2) 다루가치 석말천구(石抹天衢)의 관사에 익명서가 날아들었다,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사랑을 받지 못하자 무녀를 시켜 제국대장공주(帝國大長公主)를 저주했다는 것과, 김방경이 제안공 숙, 이창경,이분희, 박항, 이분성 등 43명과 함께 반란을 도모해 강화로 들어가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정화궁주는 김방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원래 정화궁주는 충렬왕의 왕비였는데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결혼 관계가 맺어져 충렬왕이 공주와 결혼하자 밀려난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국대장공주와 정화궁주 사이에 긴장이 없을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정화궁주가 제국대장공주를 저주했다는 익명서가 날아들자 정화궁주를 가두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근거 없는 무고임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김방경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도 근거가 없어 사건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다.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된 인물들은 정치적 입장이 상당히 다른 사람들이어서 이들이 반란을 목적으로 규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더구나 이 사건은 익명서로 고발된 것으로 고발자 조차 알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타격을 입은 것은 김방경 같은 강화파 신료였다. 이때 유경이 제국대장 공주를 찾아가 눈물로 탄원해 사건이 해결된 것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국내 정치를 주도하려 하던 충렬왕이나 고려 전기의 사대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강화를 추진했던 강화파로서는 일본 침략 이후 고려에 남아 있던 원나라의 원수부나 다루가치 그리고 고려인 부원배를 몰아내는 것이 고려의 국가적 독자성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충렬왕도 이 사건의 국문을 맡은 다루가치가 국내 정치의 주도권을 차지할까봐 염려스러워 사건을 조기에 종결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1277년(충렬왕 3)에 김방경은 또다시 무고 사건을 겪었다. 이번에는 전대장군 위득유(韋得儒), 중랑장 노진의(盧進義), 김복대(金福大)가 김방경이 반란을 계획한다고 흔도에게 고발한 것이다. 충렬왕은 무고하고 생각했지만 고발장이 들어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경, 원부 등에게 명령해 흔도, 석말천구와 함께 국문하게 했다.
국문 과정에서 위득유 등의 고발은 무고임이 밝혀졌다. 사실 이들 고발자들은 삼별초 난과 일본 침략에 참여했다가 김방경의 지휘와 논공에 불만을 품고 무고한 것이었다. 충렬왕은 한희유(韓希愈) 등 12명이 무기를 반납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 곤장을 때리고 모두 석방해 사건을 종결지었다. 처음부터 무고였으므로 다른 죄목을 찾을 수 없었다. 이번 사건도 흔도와 석말천구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염려한 충렬왕에 의해 조기에 종결되었다.
하지만 1278년(충렬왕 4) 사건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비화되었다. 부원배 홍다구(洪茶丘)가 김방경 사건을 듣고 중서성(中書省)에 요청해 직접 와서 국문을 맡은 것이다. 또 흔도 역시 위득유의 입장에 근거해 아뢰니 황제가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함께 국문하라고 명령했다. 국문은 봉은사에서 이루어졌는데 특히 홍다구의 심문이 매우 잔혹했다.
홍다구가 개입한 뒤 이 사건의 본질은 분명해졌다. 홍다구는 김방경이 원나라에 모반하려 했다는 진술을 하게 해 고려를 위기에 빠뜨려 국가의 독자성을 침해하려 했던 것이다. 김방경도 이러한 속셈을 알고 있었기에 결코 거짓 자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건은 뜻밖에도 고려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 되었다. 쿠빌라이는 홍다구를 원나라로 소환하고 충렬왕이 직접 와서 사정을 아뢰도록 명했다. 이에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 세자 등과 함께 원나라로 갔고, 이어 김방경도 명령을 받고 노진의, 위득유 등과 함께 대질심문을 받기 위해 원나라로 갔다. 그런데 노진의는 연경(燕京)으로 가다가 죽었고, 위득유는 원나라 중서성의 심문을 받았으나 조리가 맞지 않아 웃음거리가 되어 무고가 명백해졌다. 위득유도 며칠 있다가 죽었다. 또다시 김방경은 무고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충렬왕과 고려 지배층에게 원수부, 다루가치 그리고 특히 부원배가 고려 국정에 개입하는 상황을 계속 용납하면 고려의 독자성이 큰 침해를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인식시켜주었다. 그래서 충렬왕은 쿠빌라이를 만나 이러한 여원 관계의 외교 현안에 대한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일본 정벌을 자청했다. 이어 홍다구 군대의 소환 및 고려의 내정을 다른 간섭 없이 자이 직접 관장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뜻밖에도 쿠빌라이는 흔도의 군대도 소환하고 다루가치도 파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다루가치의 소환은 매우 획기적인 조치로, 이는 그동안 원나라가 강요해오던 6사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즉 고려왕이 원나라의 직접적인 간섭 없이 내정을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쿠빌라이가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은 고려가 더 이상 원나라에 반역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원나라 세력과 부원배의 직접적인 국정 간여를 막고자 했던 충렬왕의 외교적 목적이 달성된 셈이었다.
그런데 국내 정치 상황은 김방경 같은 강화파의 멋대로 되지 않았다. 충렬왕이 정치를 주도하기 위해 측근세력을 양성하고 그들을 통해 정치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충렬왕은 즉위하기 전에 원나라에 있을 때 함께 따라갔던 신료들을 중심으로 측근세력을 형성했다. 즉위 뒤 홀치(忽赤:왕실을 호위하는 일을 담당한 군사 조직)라는 친위군 조직을 성립하고 시종(侍從)했던 신료들을 배치했다. 특히 시종 신료 중에는 역관이나 내료(內僚)들이 많았는데, 충렬왕은 통문관(通文官)을 설치해 역관을 양성하고 또 원래 7품까지만 관직을 받을 수 있도록 제한된 내료에게는 고위 관직을 주어 이들을 측근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원나라에 바칠 중요한 공물인 매 사육을 담당한 응방(鷹坊)의 인물이나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를 따라온 공주의 비서격인 게링구(怯怜口)도 측근세력이 되었는데, 특히 이들 게링구는 공주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충렬왕은 이들 측근세력에게 고위 관직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패(賜牌)를 주어 많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원래 사패는 전쟁 이후 황무지가 되어버린 토지를 경작할 목적으로 지급한 것이었는데 충렬왕은 이것을 측근세력에게 줌으로써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해주었다.
그런데 여원 외교의 성과를 바탕으로 정치 주도권을 확보한 충렬왕은 측근정치를 한층 강화해갔다. 이번 행차에 따라갔던 신료들 가운데 신분에 흠이 있는 자들과 내료들이 한품(限品)을 뛰어넘어 벼슬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비칙치(必?赤)와 신문색(申聞色)이라는 측근 기구까지 두었다. 이렇게 되자 국정 운영 방식을 놓고 다른 신료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김방경도 귀국해 첨의중찬 상장군 판감찰사사에 복직했다. 그동안 찬성사 판전리사사 유경이 수상으로 있었는데 다시 김방경이 수상이 된 것이다. 얼마 뒤 유경이 은퇴하자 김방경은 판전리사사도 겸직했다. 원래 도병마사는 대외적인 군사 문제를 논의하는 기구였으나 이 시기에 김방경 등 재추들이 모여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는 기구로 변했고 명칭도 도평의사사로 바뀌었다. 김방경은 이곳에서 다른 재추들과 함께 측근들의 불법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힘을 쏟았고, 이 때문에 측근들과 상당히 대립되었다.
원래 경기8개의 현의 토지는 관료들의 녹과전(祿科田)으로 지정된 곳이었으나 측근들이 사패를 받아 점유했으므로, 1279(충렬왕 5) 김방경은 도병마사를 통해 모두 녹과전에 충당해야 한다고 청해 허락을 받았으나 송분(宋?)등 측근들의 반발로 무효가 되었다. 응방의 운영과 관련된 대립은 더욱 심했다. 도병마사는 응방의 불법적 형태 때문에 여러 차례 그 폐지를 건의했지만 윤수(尹秀) 등 측근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응방을 공식화해버렸다. 게다가 1280(충렬왕 6) 원나라 사신 탑납이 고려에 들어오다가 응방의 폐해를 보고 비판하자 김방경 등 재상들이 그 폐해를 없앨 것을 건의했으나 충렬왕은 극렬히 거부했다.
이러한 측근들의 폐단이 계속되는 가운데 원나라 사신 야속달(也束達)이 경상도에서 돌아와 중앙에서 파견할 별감들의 폐단을 재추에게 말하므로 그제야 김방경이 아뢰어 정역별감 이영주, 안렴사 귄의 등을 파면했다.
측근정치에 대한 일반 신료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감찰사의 간쟁이 많았는데, 1280년(충렬왕 6) 감찰사의 잡단 진척, 시사 심양, 문응, 전중시사 이승휴 등이 충렬왕이 자주 사냥을 가는 것과 홀치와 응방이 앞 다투어 연회를 여는 것에 대해 간쟁을 했다가 고문과 파직, 유배를 당했다. 『고려사』는 이 때문에 “마침내 언로가 막혔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국내 정치의 갈등 속에서 제2차 일본 침략이 이루어졌다. 앞서 충렬왕이 약속한 일이었다. 1280년 전쟁 준비가 급진전되는 가운데 김방경은 69세로서 관행에 따라 사직을 청했으나 충렬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고려는 병선 9백 척, 군사 1만 명, 사공과 수부 1만 5천 명, 군량 ·11막 석등을 확보한 상태였다. 전쟁 준비에 대한 대가로 충렬왕은 역대의 중국왕조와 고려의 관계에서 고려왕이 중국 왕조의 재상에 임명되던 관례를 상기시키면서 자신에게 원나라의 재상 관직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원나라의 지배 질서 속에서 고려왕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이에 세조는 충렬왕을 개부의동삼사 중서좌승상 행중서성사에 임명하였다.
이에 더하여 고려의 관료들에게도 원나라 관직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김방경은 중선대부 관령고려국도원수에. 박구(朴球)와 김주정(金周鼎)은 소용대장군 좌우부도통에 임명되었고, 그 밖의 고려 관료들도 탈탈화손, 천호, 총파 등의 관직을 받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2차 일본 침략은 혼도 및 홍다구 등과 대등한 지위를 가진 고려 지배층의 참여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김방경은 다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대신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쿠빌라이에게 상당한 환대를 받았다. 1281년(충렬왕 7) 원정을 하례하는 의례에서 김방경은 4품 이상만 전(殿)에 올라 잔치를 벌이는 자리에 참여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쿠빌라이는 김방경을 승상 다음 자리에 앉히고 특별히 음식을 내려주었다. 사흘간 잔치를 벌이고 돌아올 때 활, 화살, 칼, 백우갑옷을 주었고, 활 1천, 갑주 1백, 군복 2백을 주어 동정(東征)에 참여하는 장사들에게 나눠주게 했으며, 동정을 위한 전략 전술을 보여주었다. 김방경에 대한 쿠빌라이의 우대가 일본 침략에 이용하기 위한 것임이 확실해졌다. 이어 귀국한 김방경은 만호 박구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로 떠났다. 이때 원나라에서 파견된 흔도, 홍다구가 고려에 도착했다.
한편 충렬왕은 부마국왕 선면 정동행중서성의 인장을 받았는데 특히 부마라는 칭호는 충렬왕이 특별히 요청한 것이었다. 이러한 충렬왕의 시도는 전쟁 과정에서 혼도와 홍다구에 비해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효과는 단번에 나타났다. 충렬왕이 흔도, 홍다구와 전쟁에 관해 논의하는데 충렬왕은 남향으로 앉고 흔도, 홍다구는 동향으로 앉아 지위가 명뱅히 구분되었다. 그동안 고려왕은 원나라에서 파견된 인문들과 항상 동서로 않았는데 이번에 부마국왕이 되면서 흔도, 홍다구도 동등한 예전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는 『고려사』의 설명은 당시 고려 지배층의 처지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이번 일본 침략은 지난번과 사정이 달랐다. 결국 다자이후(太宰府) 공략이 실패한 뒤 나중에 도착한 만군들도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마침 태풍이 불어 만군 대부분이 익사해 군사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흔도, 홍다구, 범문호는 원나라로 돌아갔는데 돌아가지 못한 군사가 10만여 명이 넘었고, 고려의 군사도 7천여 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 이후 김방경은 개인적으론 최상의 지위를 누렸지만 측근정치가 계속되면서 정치적 입지는 점점 위축되어갔다. 김방경도 그들과 계속 대립할 수만은 없어 외손 조대간(趙大簡)을 국왕 측근인 차신(車信)의 딸과 결혼 시켰다. 당시 충렬왕은 일본 정벌의 대가로 원나라로부터 다시 부마국왕의 인장을 받았고, 응방, 게링구, 내료, 천류 등 측근들은 사패전을 많게는 수 백결, 적게는 30~40결씩 받아 챙겼다. 이들은 자신들이 받지 낳은 인근 토지의 세금도 불법적으로 거두었는데 수령들이 금지하려 하면 왕에게 참소해 죄를 받게 했다. 재상도 이들을 탄핵할 수 없었으니 김방경 또한 위축될 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방경은 1283년(충렬왕 9) 추충정난정원공신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로서 은퇴했다. 하지만 은퇴한 뒤에도 김방경의 정치적 위상은 조금도 낮아지지않았다. 1295년(충렬왕 21) 충렬왕의 측근정치에 불만을 품은 세자가 일시 정치를 담당하자 김방경에게 상락군 개국공의 작위를 주고 이어 식읍(食邑) 1천 호와 식실봉(食實封) 3백 호를 준 것은 김방경과 세자의 입장이 상통했기 때문이다. 이후 세자와 충렬왕 측근세력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말년을 보내던 김방경은 1300(충렬왕 26) 개경 백목동 앵계리에서 사망했다. 89세였다.
4. 역사적 평가
김방경은 무신 정권의 지배와 몽고의 침략 및 항전, 당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던 강화, 예상했던 원나라의 간섭, 그리고 측근정치를 경험하면서 기본적으로 무신 정권을 배경으로 성장한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강화파의 입장을 견지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고려 전기와 같은 사대 관계를 유지 하면서 고려 왕조의 국가적 독립성을 유지하려 해 원나라의 간섭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고려 왕조를 수호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국내 정치에서는 무신정권의 정치 운영에 비판적이어서 국왕의 주도권을 인정하면서도 측근정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김방경은 향리에서 관료 집안으로 성장한 가계에서 태어나 수상까지 되었고 그의 출세를 계기로 아들과 사위 그리고 후손들이 다수 재추에 임명됨으로써 가계는 권문세족의 반열에 올라다.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왕실과 결혼할 수 있는 가문인 재상지종(宰相之宗)을 선발했을 때 안동 김씨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김방경의 출세를 계기로 안동 김씨가 권문세족의 반열에 진출했음은 분명하다. 나아가 김방경의 후손 김사형(金士衡)은 조선 건국에 참여해 공신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김방경은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정치적 입장이나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좋은 사례가 된다.
김방경에 대한 연구는 문집이 남아 있지 않아 사상이나 정신세계를 알기가 어려워,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대부분 삼별초의 난이나 일본 침략에 참여한 활동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몽고와의 강화, 삼별초의 난, 일본 침략, 여원 관계와 측근정치 등과 같은 중요한 사건을 거친 인물이므로, 고려 후기 역사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김방경의 생애에 대한 이해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ㆍ원자료
『高麗史』 『高麗史節要』『動安居士集』『陽村集』『東文選』『氏族源流』
ㆍ논저
민기.「김방경(1212~1300) 몽구를 극복한 용장」.인물한국사 2 박우사 1965 이상철.「김방경 연구」.청주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986 민현구.「몽고군ㆍ김방경ㆍ삼별초」. 한국사시민강좌 8. 1991 윤애옥.「김방경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석사학위논문. 1993 류선영.「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 활동과 그 성격」. 전남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993 권선우.「고려 충렬왕대 김방경 무고 사건의 전개와 그 성격」. 인문과학연구 5. 동아대학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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