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본문

p11.png 8.<각종 문헌의 문영공 관련 기록 내용>

(2001.  .주회(안) 제공)

  1)<근역서화징>의 기록 내용

   성품이 너그럽고 후했으며, 예서에 뛰어났다. 기예인(技藝人)을 두고 날마다 음악으로 소일했다. (고려사) (1298)에 세운 동화사 홍진국존비 비는 김훤이 짓고 밀직승지 김순이 썼으니 대구 팔공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2)<신고한국서예사>에서

   "그는 천성이 寬厚하며 隸書를 잘 썼고 聲技를 집에 두고 絲竹으로 낙을 삼았다" 고 그의 서예와 풍류취미를 전하고 있다. (고려사). 그의 書蹟이 대구팔공산의 동화사홍진국사 탑비에 남아있다. 동 비문은 김훤(金小宣)이 지었다 (金石評)

 

  3)<元代麗史資料集錄>에서

   金承用(휘방경의 1남 휘 선의 2남)의 장인인 元瓘(원관)과 관련된 원나라 시대의 기록중에 [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 는 閔漬(민지,1248-1326)가 撰하고 중대광상락군 金恂이 書幷題하여 元祐元年2月日 한 것으로, 1314년(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이다.

   (典據 : <李者羽 著, 玉 山今)  山惠因高麗華嚴敎寺志>7 )

 

  4)불교에 관련된 기사 <高麗國大藏移安記 (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

  閔漬가 撰하고, 봉익대부밀직사부사 判비서寺事문한학사 金恂 書하여 大德 10年 丙午 9月 日 記한 것으로, 1306년 (충렬왕26, 대덕10) 고려인 민지가 찬한 대장경 이안기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鐵山(紹)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또 劉喜海의 海東金石存攷(고) 26에는 "大德10年9月閔漬撰 金恂書 在江原道淮陽府金剛山"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 26, p19514)  

  (典據 : <周南瑞 編, 천하동문> 전갑집 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 1366책)의 <천하동문집>7 )

  參考문헌 :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p706-717, 1986.

 

  5)고려국대장이안기(高麗國大藏移安記) (2005. 1. 22. 은회(익) 제공)

 

 선수 조열대부 한림학사(宣授 朝列大夫 翰林學士) 겸본국 광정대부 자의도첨의사사사 연영전대학사 동제수사 판문한서사(兼本國 匡靖大夫 咨議都僉議使司 延英殿大學士 同提修史 判文翰署事) 민지(閔漬)지음.

 옛날에 감저씨(甘庶氏 : 석가를 가리킴)가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고 두루 살펴보니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지만 망상에 집착하여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큰 자비심을 일으켜 부처의 지견(知見)으로 (이러한 사실을) 보이고 (중생들이)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중생들의) 근기가 크게 차이나서 하나의 가르침으로 제도할 수가 없었으므로 넓고 큰 혀를 내어 여러 가지의 가르침을 베풀었다. 49년 동안의 말하지 않은 말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가득 차니 모두 다 병에 맞춘 묘약이 아님이 없었다. 이로서 경전[經]과 계율[律]이 있게 되고, 현교(顯敎)와 밀교(密敎)가 있어, 나누면 다섯 가지 가르침이 되고 합하면 하나의 가르침이 되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심에 미쳐서 여러 성인들이 이어서 출현하여 (경전의) 깊은 뜻을 드러내고 글로 지어 논서[論]들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삼장(三藏 : 경(經), 율(律), 론(論) 등 불교의 세 가지 종류의 문헌들을 총괄하여 이르는 말)이 한(漢)나라 명제(明帝) 이후로 동쪽 중국에 전해졌으니 여러 가지 전기(傳記)들과 합하여 무려 6천여 축(軸 : 두루마리)이며 이것이 이른 바 대장경(大藏經)이다. 용궁(龍宮)에 소장되어 있는 것에 비한다면 수미산 중의 티끌 하나와 같고 큰 바다의 한 방울 물에 불과할 뿐이다. 불교의 전승에서는 바닷 속 용궁(龍宮)에 수 많은 경전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 세상에 전하는 불경은 그 중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르침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바람이 모두 이루어지며, 모든 인간세계 및 하늘세계의 부귀와 크고 작은 열반 등이 모두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총칭하는 것으로 모든 존재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포괄한다)의 커다란 보물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이것보다 큰 것은 없을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오로지 불법의 힘에 의지하여 나라를 열고 대통을 세웠으며 역대의 왕들도 모두 전대의 모범을 열심히 본받아서 오늘의 훌륭함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대장경을 베껴서 만든 것으로는 금으로 쓴[금자(金字)] 대장경, 은으로 쓴[은자(銀字)] 대장경, 먹으로 쓴[묵자(墨字)] 대장경 등이 있으며, 인쇄하여 만든 것으로는 요나라[요본(遼本)] 대장경, 송나라[송본(宋本)] 대장경, 우리나라[향본(鄕本)] 대장경 등이 있다. 우리나라 대장경은 현재 유행하는 판으로서 내외의 이름난 절에는 없는 곳이 없다.

남악(南嶽)의 철산(鐵山)화상은 해동의 산수가 뛰어남을 충분히 들으시고 한번 둘러보려고 생각하시었으며, 우리나라의 승려와 속인들이 그 높은 풍모를 우러러 보려고 생각한 것도 여러 해 되었다. 지난 번 대덕(大德 : 원(元)나라 성종(成宗)의 연호, 1297~1307년까지 사용) 8년 갑진년(충렬왕 30, 1304) 가을에 여러 공들의 요청을 받아서 배를 타고 오시니 온 나라사람들이 모두 마치 부처님을 보는 듯 존숭하였다. 스님이 머무시는 곳에는 수레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각기 자신의 근기에 따라서 모두 큰 은혜를 입었다. 만일 옛 부처님이 임시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스님이 돌아다니며 교화하시던 중에 강화도 보문사(普門社)에 이르셔서 대장경 3질을 보고 그 유래를 물어보니 두 질은 옛날의 임금과 신하가 안치한 것이고 한 질은 현재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군부판서 상호군(奉翊大夫 知密直司事 軍簿判書 上護軍)인 허평(許評)과 서원군부인(瑞原郡夫人)인 염(廉)씨 요인(了因)이 바친 것이었다. 스님이 크게 탄식하면서 “옛날의 뜻은 빼앗을 수 없지만 지금의 뜻은 혹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비유컨대 100 척(尺) 깊이의 우물을 팠는데 굳게 닫아 두고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다면 우물에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또 여의주를 얻었는데 깊이 감추어 두고서 이용하지 않는다면 구슬에 무슨 덕이 있겠는가. 지금 이 대장경은 비록 때로 펼쳐보기는 하지만 널리 읽히지 못하는 듯하니 닫힌 우물이나 감추어둔 구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저 (중국) 강서(江西) 지방의 의춘현(宜春縣) 대앙산(大仰山)의 개산조(開山祖 : 산문(山門)을 처음 개창한 조사)는 작은 석가모니라고 하는데, 옛날에 인도 승려가 와서 조사에게 예를 갖추고서 ‘내가 동쪽에 와서 문수보살에게 예를 갖추려 하였는데 도리어 작은 석가모니를 보게되었다’ 고 말한 것에서 그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조사께서 일찍이 예언하시기를 ‘이 산에서 1기(紀 : 12년)를 주석하는 사람은 곧 내가 다시 온 것이다’ 고 하였는데 설암(雪?) 흠공(欽公)께서 1기(紀) 이상 주석하였으니 과연 그 지혜로운 예언에 부합되었다. 내가 일찍이 나의 일로 찾아 뵈었을 때 가르침을 보여주셨고 또 ‘모인 구름을 들어내니 봉우리 위에 달이 있고(拈起集雲峰上月), 사람 앞에 던져 놓으니 백가지 꽃의 공이다(人前抛作百花毬)’ 라는 게송을 제시해 주셨다. 지금은 비록 고인이 되셨지만 살아 계신 것처럼 생각난다. 지금 주석하고 있는 사람도 또한 흠공의 제자로서 땅이 신령하고 경치가 뛰어나며 대대로 훌륭한 사람이 없지 않다. 다만 절이 화재[회록(回祿) : 불의 신으로 화재를 의미한다]를 당하여 법보(法寶 : 불경을 가리킴)에 누락된 것이 있다. 만일 이 곳의 것을 하나 덜어서 저 곳의 누락된 것을 보충하여 준다면 어찌 여덜 갈래의 큰 길에서 우물을 열어 놓고, 여의주를 전륜성왕의 손에 두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허(許)공이 듣고서 큰 가르침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면서 해를 가리키며 장차 돌아가시는 배에 실어 보내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리고는) 이 일을 저 산과 같이 영원토록 전하고자 하여 나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재주가 없고 또 병이 있다고 사양하자 이어서 화상이 글을 부탁하는데 말씀과 뜻이 간절하였다. 나는 스님의 계향(戒香)을 하루동안 쐰 적이 있으므로 할 수 없이 병을 참으며 붓을 쥐고 겨우 그 일을 드러낸다. 아아! 보문사는 큰 허공 속의 작은 티끌 한 점일 뿐인데 여기에 소장된 법보(法寶)는 대천세계 만큼의 경전들이다. 지혜의 눈으로 밝게 보아 티끌을 깨뜨리고 경전을 꺼내지 않았다면 허(許)공의 아홉 길이나 되는 공덕이 저 산의 한 보물의 빠짐을 메울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저 대앙산은 석가께서 다시 오신 땅이라고 일컬어지며 또한 중국의 신령스러운 산이다. 우리 스님은 설암 스님의 적통 제자로서 또한 석가여래의 큰아들이다. 그 말로 말미암아 이 경전을 그 땅으로 옮기게 되니 영취산에서의 모임이 오늘에 다시 이루어 진 것이다. 그 이익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진실로 이와 같으니 허(許)공이 얻을 뛰어난 공덕을 어찌 또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비록 보고들은 사람들도 또한 기뻐할 것이다.

대덕(大德) 10년 병오년(충렬왕 32, 1306) 9월 일 적음.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판비서시사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判秘書寺事 文翰學士) 김순(金恂)이 씀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국학대사성 숭문관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國學大司成 崇文館學士) 윤보(尹珤)가 전액(篆額)을 씀

고려국 금강산 성불난야 호송대장경 백실사문(高麗國 金剛山 成佛蘭若 護送大藏經 白室沙門) 석(釋) 일목(一牧)이 돌을 세움

선수 강서도 원주로 의춘

현 대앙산 당대주지(宣授 江西道 袁州路 宜春縣 大仰山 當代住持) 전법허곡대선사(傳法虛谷大禪師) 희릉(希陵)

 

  6)금강산 관련 문영공 선조님 자료  (2003. 9. 22. 주회(안) 제공)

 1306년 민지 찬, 문영공(김순) 서로 세운 <고려국대장이안기>가 금강산 서쪽 회양부 라는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국대장이안기>는 1306년 민지(1248-1326) 撰, 김순(1258-1321) 書한 大藏經 移安記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철산경 (소경)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원나라 주남서 편 <천하동문> 전갑집7에 기록되어 있고, <사고전서> 총집 천하동문집7에도 실려 있다.

 청나라 유희해의 <해동금석존고>에는 ---대덕10년9월 민지 찬 김순 서 재강원도 회양부 금강산--- 라 하여 이 비가 금강산 서쪽 지역인 회양부에 있음을 확인하고 있으며 <석각사료신편> 26에도 실려 있다.

 <고려국대장이안기>는 현재 일본의 정가당문고에 소장되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에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706-717, 1986) 와 <원대여사자료집록> (1997, 장동익)에서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고려국대장이안기> ---원대여사자료집록 (1997, 장동익) 에서 옮김

<高麗國大藏移安記> : 주남서 편 <天下同文> 전갑집7 (閔漬 作)

 

○ 著者 閔漬(1248-1326)는 고려 충렬왕대의 대표적인 문신으로서 충선왕이 세자시에 元에 宿衛할 때 정가신(?-1298)과 함께 수종신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충선왕에게 학문을 전수하면서 자주 元 세조의 부름에 응하여 고려의 사정에 대해 자문하기도 하였고, 교지정벌에 대한 獻議를 올려 원의 한림직학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에서 <천추금경록> <세대편년절요> <본국편년강목>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이들이 현존하지 않아 그의 학문적 성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이제현 <민지 묘지명>,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 1991)

그 외 민지의 저술로 전해지는 것으로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금강산 시병서> <풍악산 장안사 사적기발> <보개산 석대기> 등이 김탄월 편 <유점사 본말사지> (유점사, 1942)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본 자료는 민지의 문학적 역량과 학문적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典據 <天下同文> 전갑집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1366)의 천하동문집7

○ 校勘 이 자료는 元의 周南瑞(주남서) *86)가 편찬한 <天下同文>에 수록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에도 본문이 축소된 채 수록되어 있다.

*주남서(?-?) : 강서행성 길안로 안성인으로 자는 경수이고 향공진사 출신으로 <天下同文>44권을 편찬하였다.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 서문) 또 劉喜海(유희해)의 <海東金石存攷>26에는 "대덕10년9월 민지찬 김순서 재강원도 회양부 금강산"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26, p19514

<천하동문>과 <천하동문집>의 내용과 글자에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는 데, <천하동문>의 것이 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곧 <천하동문집>에는 모두에 찬자인 민지의 구체적인 관직 및 말미의 비문의 서자, 전액자, 입석자 등에 대한 기록이 모두 빠져 있다.

이러한 점을 보아 <천하동문>은 본문이 碑石에 새겨진 후에 이 비문을 수습하여 수록한 것을 알 수 있고, <천하동문집>은 천하동문을 바탕으로 모두와 말미를 삭제한 채 轉載하였던 것으로 짐직된다.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06년 (충렬왕32, 대덕10) 고려인 閔漬가 찬한 大藏經 移安記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철산경 (소경)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려의 大藏經이 元으로 수출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예로는 다음의 자료 2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봉화상 명본이 고려의 <금서법화경>을 구득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 외 이 시기에는 대장경의 수출만이 아니라 고려의 사경승들이 대거 원에 진출하여 수많은 대장경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 參考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706-717, 1986)

 

 7)<한국 문헌 설화>내의 문영공 선조님 설화  (2003. 8. 31. 항용(제) 제공)

   가) 출전 : <한국문헌 설화>(맹원재,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8.) 93P

   나) 원전 : <역옹패설> 前2

 

 조간(趙簡)이 시험관일 때 제 1인자로 과거에 합격했다. 조간이 늙어 목에 종기가 나서 치료할 수가 없었다. 묘원(妙圓)이란 스님이 와서 종기의 뿌리가 뼈에 박혔으니 긁어내야 한다고 하면서 참을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면서 참기로 하고 살과 뼈의 상한 부분을 긁어내니  조공은 2일간 눈을 뜨고 가만히 있었다.

 

 김순이 가서 문 앞에 앉아 슬피 우니 조간이 눈을 크게 뜨면서

  “속으로 좋으면서 겉으로 슬픈 체 하지 말라”

하고 사람을 시켜 일렀다. 김순이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임을 말하니까 조공은,

  “내가 죽으면 네가 제1인자가 되니 어찌 기쁘지 않느냐”

하고 일러 주었다.

이 말을 들은 김순이 눈물을 거두고 웃으면서

  “노인이 아직 죽지 않았구나”

하고는 돌아갔다.

 

 김순은 진심으로 애도하러 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간이 인간 심리 저변에 잠재해 있는 경쟁 본능을 노골적으로 노출시켰을 때, 그 상황에서 배신감과 모욕감을 느끼는 것이 보통의 인간이다. 하지만, 이때 김순이 취한 행동은 정말 대인(大人)다운 데가 있다.

 

 8) 문영공 친필 유묵 관련 자료 종합 (2002, 8, 26. 주회(안) 제공)

 

  가)근역서화징 (1928, 오세창)

자는 귀후. 본관은 안동. 상락공 김방경의 아들. 벼슬은 밀직부사

성품이 너그럽고 후했으며, 예서에 뛰어났다. 기예인을 두고 날마다 음악으로 소일했다. <고려사>

충렬왕24 戊戌 (1298)에 세운 동화사 홍진국존비는 金暄(김훤)이 짓고 밀직승지 김순이 썼으니 대구 팔공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나)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김순의 동화사 碑書>

김순(1258-1321)의 본관은 안동. 자는 귀후. 고려 명장 김방경의 아들이요 김효인의 손자이다. 그래서 3대 書家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 되었다.

<고려사 세가35>에 의하면 "그의 천성이 寬厚하고 隸書를 잘 썼고, 聲技를 집에 두고 絲竹으로 낙을 삼았다"고 그의 서예와 풍류취미를 전하고 있다.

또 <金石評>에는 그의 書蹟이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 홍진국사 탑비에 남아 있다. 동 비문은 김훤이 지었다."

 

  다)원대여사자료집록 (1997, 장동익)

<高麗國大藏移安記> : 주남서 편 <天下同文> 전갑집7 (閔漬 作)

○ 著者 閔漬(1248-1326)는 고려 충렬왕대의 대표적인 문신으로서 충선왕이 세자시에 元에 宿衛할 때 정가신(?-1298)과 함께 수종신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충선왕에게 학문을 전수하면서 자주 元 세조의 부름에 응하여 고려의 사정에 대해 자문하기도 하였고, 교지정벌에 대한 獻議를 올려 원의 한림직학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에서 <천추금경록> <세대편년절요> <본국편년강목>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이들이 현존하지 않아 그의 학문적 성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85)

*

  라) 이제현, <민지 묘지명>,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 1991)

그 외 민지의 저술로 전해지는 것으로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금강산 시병서> <풍악산 장안사 사적기발> <보개산 석대기> 등이 김탄월 편 <유점사 본말사지> (유점사, 1942)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본 자료는 민지의 문학적 역량과 학문적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典據 <天下同文> 전갑집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1366)의 천하동문집7

○ 校勘 이 자료는 元의 周南瑞(주남서) *86)가 편찬한 <天下同文>에 수록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에도 본문이 축소된 채 수록되어 있다.

 

  주남서(?-?) : 강서행성 길안로 안성인으로 자는 경수이고 향공진사 출신으로 <天下同文>44권을 편찬하였다.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 서문)

또 劉喜海(유희해)의 <海東金石存攷>26에는 "대덕10년9월 민지찬 김순서 재강원도 회양부 금강산"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26, p19514

 

<천하동문>과 <천하동문집>의 내용과 글자에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는 데, <천하동문>의 것이 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곧 <천하동문집>에는 모두에 찬자인 민지의 구체적인 관직 및 말미의 비문의 서자, 전액자, 입석자 등에 대한 기록이 모두 빠져 있다.

이러한 점을 보아 <천하동문>은 본문이 碑石에 새겨진 후에 이 비문을 수습하여 수록한 것을 알 수 있고, <천하동문집>은 천하동문을 바탕으로 모두와 말미를 삭제한 채 轉載하였던 것으로 짐직된다.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06년 (충렬왕32, 대덕10) 고려인 閔漬가 찬한 大藏經 移安記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철산경 (소경)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려의 大藏經이 元으로 수출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예로는 다음의 자료 2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봉화상 명본이 고려의 <금서법화경>을 구득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 외 이 시기에는 대장경의 수출만이 아니라 고려의 사경승들이 대거 원에 진출하여 수많은 대장경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 參考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706-717, 1986)

 

  마)<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이?, 옥금산혜인고려화엄교사지6)

○ 著者 閔漬 (1248-1326)

○ 典據 <옥금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7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14년 (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인데, 이의 찬자는 민지, 서자는 김순(1258-1321)으로서 이들 두 사람은 <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도 찬,서를 함께 하였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주1)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주1) 이천동선찰 : 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

이에 나타난 元瓘(?-?)은 첨의중찬 元傅의 아들로서 1298년 (충렬왕24, 대덕2) 11월에 지밀직사사 판도판서에 임명되었고, 1308년 (충선왕 복위년) 10월에 宰臣으로서 왕을 수녕궁에서 饗宴(향연)한 인물이지만(고려사열전20, 원부) 고려측의 자료에서는 그의 행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려사 세가31 충렬왕24년 11월 경술, 세가33 충선왕복위년 10월 갑진, 고려묘지명집성 <박거실처원씨 묘지명>, <원충 묘지명>

이 자료 및 다음의 자료를 통해 볼 때 그의 호가 退翁임을 알 수 있고, 충선왕의 퇴위 이후 왕을 수종하여 元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인해 그의 아들 元忠이 충선왕으로부터 賜姓받게 되었을 것이다.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원충묘지명)

아울러 강남 지역에 진출하여 강절행성 경원로 >현에 위치한 천동사(주2) 및 항주의 고려혜인사에 대장경의 인본과 토지를 시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2)천동사 : 후일 충선왕이 임백안독고사의 무고를 피해 피신한 사찰이다.

 

  바) 동화사 홍진국존비 (1298, 김순 書)

비석 실물 현재 소재 불명

홍진국사의 부도로 추정하고 있는 달성도학동 석조부도(보물 601호)는 원래 도학동의 내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동화사 안으로 옮긴 것으로 볼 때

1)홍진국존비도 도학동의 내학 부락에 석조부도 옆에 세워져 있다가 어느 시기엔가 도궤되었다고 볼 수 있음. 도학동 내학 부락 어디엔가 비편이라도 묻혀있을 가능성이 있음

2)진각국사 부도는 송광사 광원암에 비는 월남사지에 있는 경우와 같이, 홍진국사 부도는 도학동 내학 마을에 비는 동학사 내 또는 홍진국사와 관련된 주변의 어느 절에 (은해사 홍진국사 중창) 있었을 수도 있음

 

  사)문화재청 홈 -- 종목 보물 601호

명칭 달성도학동석조부도(達城道鶴洞石造浮屠)

분류 부도 수량 1기 지정일 1975.08.04

소재지 대구 동구 도학동 산30 시대 미상 소유자 국유 관리자 동화사.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동화사 안에 세워져 있는 이 부도는 원래 동학동의 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긴 것으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基壇)과 탑신(塔身)이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인터넷 검색>

도학동 석조부도 : 금당선원 입구에 외로이 서 있다. 이 부도은 원래 동화사에서 1㎞ 정도 떨어진 도학동의 내학부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와 복원한 것으로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없다. 일명 홍진국사 부도라고도 한다. 팔각원당형 부도로 높이는 1.72m이다. 상대석에 연꽃 16송이가 새겨져 있다.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601호 지정되어 있다.

 

 <디지털한국학 홈>

혜영(惠永) : 1228(고종 15)∼1294(충렬왕 20). 고려 충렬왕 때 국존(國尊), 유가종의 고승. 성은 강씨(康氏). 혜영(惠永)은 이름이다. 문경 출신. 한림원 자원(子元)의 아들이다. 11세에 출가하여 남백월산(南白月山)의 수좌(首座) 충연(#충01淵)의 제자가 되었고, 17세에 왕륜사(王輪寺) 선불장(選佛場)에 합격하고, 흥덕사(興德寺)에 머물렀다. 1259년(고종 46) 삼중대사(三重大師), 1263년 수좌가 되었다.

1267년(원종 8) 속리사(俗離寺)에 이주하였으며, 1269년 승통(僧統)이 되었다. 1274년 통도사에서 사리 여러 매를 얻어 항상 좌우에 두었더니 많은 분신사리(分身舍利)가 생겨났으며, 이를 구하는 사람에게 주었다. 이해에 중흥사(重興寺)로 옮기고, 왕명에 의하여 9년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1285년(충렬왕 11) 유가사(瑜伽寺)로 옮겼고, 1290년 사경승(寫經僧)100명을 데리고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를 만나자 경주사(慶州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만안사(萬安寺) 당두(堂頭)의 청으로 《인왕경 仁王經》을 강의하여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이듬해 금니(金泥)로 대장경을 사(寫)하여 귀국하였다. 1292년 국존에 봉해져 보자(普慈)라는 법호를 받았고, 또한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어 동화사의 주지를 맡았다.

1294년 1월 미질(微疾)이 있었는데, 24일 단정히 앉아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을 읽다가 입적하였다. 시호는 홍진(弘眞), 탑호(塔號)는 진응(眞應)이다. 문인에는 금산사주지 승통 효도(孝棹) 등이 있다. 저서로 42세 때 유경(柳璥)의 청으로 지은 《백의해 白衣解》 1권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金石總覽,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金相鉉〉

 

  아) 탁본 실물--全面탁본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

- 소장기호 : 4046-2 (구 2198) - 연대 : 1298 (고려충렬왕 24)

- 소재 : 서울 柳正秀 藏 舊탁본 - 규모 : 154.5×84.8

 

  자)탁본첩1

대동금석서에 실려있는 탁본 1점은 비석 말미에 적는 銘 부분 탁본으로 장서각 소장 탁본의 4조각중 좌측 아래 조각과 대동금석서 탁본 우측 위 4-5글자는 같은 부분임

 

  차)탁본(법)첩2

조속의 금석청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실려있는 탁본 1점은 비명제목6자(弘眞國尊碑銘)를 1행에 3자 2행에 3자, 두칸으로 나누어 제작, 비문 중앙의 일부분을 6행 11열로 총 60자로 제작

 

  카)탁본첩3

장서각소장탁본자료집1에 탁본 1점이 있는데 비편 4점을 모아 1장으로 탁본한 것임

 

    *☞추진사항

   동화사 문의- 달성 도학동 석조부도를 도학동 내학부락에서 동화사 안으로 옮긴 당시의 기록이 있는지?

   은해사 문의- 홍진국사와 관련된 유적 유물 기록이 은해사에 있는지?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하고 있는 동화사홍진국존진응탑비 탁본 실물 열람

   도학동 내학마을- 현지 답사하여 석조부도가 있던 위치 확인 및 혹 묻혀 있을 수 있는 비편이나 비의 흔적 확인

 

  파) 고려국 대장이안기 (1306, 김순 書)

    *소재 불명

고려국 대장이안기는 문헌에 강원도 회양부 금강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를 찬한 閔漬(민지)라는 분이 금강산 유점사와 장안사에 관련된 기록을 많이 남겼으므로 이곳중 한 곳에 있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으나 남북 분단으로 현재 확인하지 못하고 있음

고려국 대장이안기는 현재 일본의 정가당문고에 소장되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에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탁본인지 기록인지 확인하지 못했음

 

   *학문적 연구동향

허흥식의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1986,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706-717)

 

  하)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1314, 김순 書)

소재 불명.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이라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했음

 

※원공은 김순의 조카인 김승용의 장인 원관이라는 분임

김방경-김선-김승용

김방경-김순

 

 9)역옹패설(櫟翁稗說)속의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문영공의 대화 내용 (2002. 8. 15. 태영(군) 제공)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은 문량공(文良公) 조간(趙簡)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방(榜)에서 첫째 자리는 문량공이 차지하였다. 문량공이 늙었을 때 악성 종기로 어깨와 목을 거의 분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의원은 손을 쓸 수 없었는데, 묘원(妙圓)이란 중이,

"이 종기는 뼈에 뿌리를 박고 있어서 뼈가 반은 썩었을 것인데, 그 썩은 뼈를 긁어내지 아니하면 치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뼈를 긁어낸다면 그 아픔을 참아내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문량공이,

"죽기는 마찬가지니 시험해 보라."

하였다. 중은 드디어 예리한 칼로 살을 베어내니 과연 뼈가 썩어 있었다. 그 썩은 뼈를 긁어내고 약을 바르니 문량공은 기절하여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었다.

문영공이 이 말을 듣고 문병을 가서 문에 앉아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니, 문량공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공이 나를 슬퍼함이 이와 같을 줄 몰랐다. 어찌 마음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슬퍼하는가."

하였다. 이에 문영공이 말하기를,

"허, 이게 무슨 말인가. 40년 동안 동년급제(同年及第)로서의 교분(交分)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문량공이,

"내가 죽으면 같은 방 안에서는 공(公)을 앞서는 자가 없기 때문일세."

하였다. 문영공이 눈물을 거두고 웃으며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죽지는 않겠다."

하고 돌아갔다.

  <역옹패설(櫟翁稗說)/이제현(李齊賢)/前集2, pp100>

 《출 전 : 한국의 사상대전집5/동화출판공사/1972》

 

 10)항주고려혜인사대장경희사기(杭州高麗慧因寺大藏經喜捨記) (2005. 1. 22. 은회(익) 제공)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

 

한림원직학사 조열대부 본국중대광 수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선부사 치사 민(閔)□□ 지음.

중대광 상락군 김순(金恂)이 글씨와 제액(題額)을 씀.

 

진리의 참된 모습으로 보면 텅 비어 있고 공적(空寂)하여 이름도 없고 형상이 없으며, 본래 중생이 없고 부처님도 없다. 어찌 생겨나고 없어짐, 즐거움과 괴로움이 그 속에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 생명 있는 것들이 참된 것을 저버리고 허망한 것으로 나아가면서 태어나고 죽고 오고 가는 것이 저절로 있게 되고 그로부터 죄와 복이 생겨나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여기에서 나오게 된다. 죄와 복이 생겨남에 다시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있고, 그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이 나오는 것이 사람 몸에 그림자가 따르는 것과 같다. 이에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당 등 여러 윤회의 세상이 뒤섞여 생겨나니 이것이 이른 바 중생이다. 괴로움은 지옥보다 괴로운 것이 없고, 즐거움은 천당보다 즐거운 것이 없다. 그러나 천당의 과보가 다하게 되면 또한 다섯 가지 쇠퇴함[五衰]의 괴로움이 있게되며 자기 업보를 따라 아래세상으로 떨어져 세 가지 나쁜 세상[三途]을 면할 수 없게된다. 그러므로 천당의 즐거움은 자만할 것이 못된다. 그런 가운데에 한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 중생이면서 큰 자비심을 일으키고, 큰 자비심으로 인해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내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으로 평등하고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니 곧 부처님이시다. 부처님은 평등하고 큰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들을 다 같은 아들로 보시지만 중생들은 근기가 같지 않아서 하나의 가르침으로 구제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근기에 맞추려고 하여 3승(三乘)과 12분교(十二分敎), 8만 4천의 경전 등이 있게 되었으니 세상의 훌륭한 의사가 여러 병자들을 낫게 하기 위하여 천여 가지의 약을 쓰고 만 종류의 처방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일부러 많은 약을 쓰고 처방을 넘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에 따라 약이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가르침을 베푸심에 녹야원(鹿野園)에서 시작하여 쌍수(雙樹) 아래에서 열반하실 때까지 77년 동안 설법하신 법문(法門)이 적지 않게 되었다. 1천 년 뒤에 그 가르침이 동쪽으로 전해지게 되니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금인(金人)을 본 이래로 인도의 범본(梵本 :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불경)이 중국말로 번역된 것이 무려 5천여 권이나 되었다. 경(經)과 율(律)은 모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론(論)은 모두 여러 보살들이 지은 것이니『역경(易經)』에 대하여 십익(十翼)을 지은 것과 같고『춘추(春秋)』에 대하여 삼전(三傳)이 있는 것과 같다. 여러 경전들이 가지고 있는 공덕을 간략하게 들자면 어떤 경전은 그 이름이나 두 구절의 내용을 듣기만 하여도 칠보(七寶)만으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것보다 뛰어나며, 또한 반 구절의 게송만 이해하여도 100 항하사(恒河沙 : 갠지스 강가의 모래의 수)만큼의 중생들을 가르쳐서 아라한과(阿羅漢果 : 진리를 깨달아 열반에 든 성인의 경지)를 얻게 하는 것보다 뛰어나다. 그 중에 밀교(密敎)에서는 그림자가 경전을 읽는 것을 지나가기만 하여도 이익이 있다고 하며 혹은 (경전) 한 글자의 공덕으로 능히 죄를 없애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며, 계율은 하루만 지켜도 능히 부처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만일 능히 1권의 경전을 만들고, 한 구절의 뜻을 듣고, 한 글자의 공덕에 의지하고, 하루동안 계율을 지키는 것이 족히 천 번 태어나고 만겁(萬劫)이 지나도 만날 수 없는 큰 행복이 될 것이다. 하물며 대장경을 만들어 해마다 펴서 읽는다면 어찌 앞에서 이야기한 공덕의 만만배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큰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데, 세상의 부귀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재물을 모음에 만족할 줄 몰라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는 열심이지만 착한 일을 하는 데에는 게으르다. (땅이) 네 산에 미치고 다섯 집안의 재산을 합하였다고 하여도 서로 다투고 빼앗은 후에는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설혹 분양(汾陽)과 같이 부자가 된다고 하여도 도대체 죽은 후에 무슨 이익이 될 것인가. 지금 세상에서 홀로 초연하여 세상을 벗어난 밝은 앎을 가지고 계신 분은 오직 우리 퇴옹(退翁) 원(元) 상공이 계실 뿐이다. 상공은 벌열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과거에 합격하셨고 명예롭고 중요한 관직을 거쳐 재상의 지위에 오르셨다. 관직에서 물러나신 후[急流] 노담(老聃 : 노자(老子)의 이름)의 만족함을 알라는 가르침을 생각하고 좋은 인연을 깊이 믿으며 사령운(謝靈運)이 집에서 승려처럼 지낸 것을 흠모하였다. 일찍이 돌아가신 첨의중찬 안(安)공과 함께 정성스러운 서원을 세워 대장경 1부를 만들어 사명산(四明山 : 중국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 남쪽에 있는 산)에 있는 천동선사(天童禪寺)에 봉안하였는데, 그러고도 아쉬움이 있어 이제 다시 비용을 계산한 후 재산을 모두 들여 대장경 1부를 찍어 대각국사(大覺國師)께서 세우신 도량에 봉안한다. 땅이 뛰어나고 사람이 훌륭하며 법보(法寶 : 대장경을 가리킴)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도 만일 매년 이를 펼쳐 읽어서 그 행복과 이익을 불러오지 않는다면 좋은 밭을 많이 사고 좋은 씨앗을 멀리서 구하고서도 밭을 갈 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에 매년 대장경을 읽을 수 있는 비용을 아울러 희사하니 훌륭하고 전에 없던 일이다. 바라는 바는 오직 황제폐하의 성수(聖壽)가 만만세(萬萬歲)에 이르고 황태후께서 억년 만년 사시며, 심왕(瀋王 : 충선왕을 가리킴)과 국왕(당시의 고려국왕인 충숙왕을 가리킴)께서도 각기 오래 사시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극락에 피어있는) 보배 연꽃에 오르시는 것, 그리고 사생(四生)과 육도(六道)의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모두 혜택을 입어 함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크도다, 그 마음이여. 만든 대법보장(大法寶藏)을 이 땅(고려를 가리킴)에 두지 않고 저 곳(중국을 가리킴)에 봉안하는 것은 자기와 남,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커다란 공덕을 짓고서 먼저 임금님과 부모님께 바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과 효성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비록 자신의 이익을 뒤로 돌린다고 하여도 복록(福祿)이 어찌 공에게 우선하여 오지 않겠는가. 나머지 공덕이 있어 자손에게도 또한 나머지 경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공과 같이 과거에 합격하여 일찍부터 서로 잘 알고 있는데 공이 직접 글을 써주기를 부탁함에 나는 늙고 병들어서 할 수 없다고 굳게 사양하였다. 하지만 거듭하여 부탁하므로 할 수 없이 보고 알게 된 것을 거칠게 쓰는 바이다.

 

연우(延祐) 원년(충숙왕 1, 1314 ) 2월 일

 

공덕주(功德主)는 대광 첨의찬성사 판총부사 치사(大匡 僉議贊成事 判總部事 致仕) 원관(元瓘)이고, 성해자조명종대사(性海慈照明宗大師) 화엄종주(華嚴宗主)로 항주로 고려혜인교사(杭州路 高麗惠因敎寺) 주지인 승려 혜복(慧福)이 비를 세움.

 

 11)<고려사, 고려사절요 내 기록 내용> (2003. 11. 13. 항용(제) 제공)

  가) <고려사절요 제22권>  충렬왕 4  무술 24년 (1298), 원 대덕 2년  

 

○ 김혼(金琿)을 첨의중찬으로 삼아 곧 치사하게 하고, 송분(宋?)을 첨의시랑찬성사 판감찰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監察司事)로, 한희유(韓希愈)를 찬성사 판판도사사로, 원관(元瓘)을 지밀직사사로, 김변(金?)을 동지밀직사사로, 설경성(薛景成)ㆍ김부윤(金富允)ㆍ김순(金恂)을 모두 밀직부사로 삼았다.

 

  나)<고려사절요 제22권 > 충렬왕 4  무술 24년 (1298), 원 대덕 2년  

 

○ 8월에 유비(柳庇)를 판밀직사사로, 박전지(朴全之)를 밀직부사 중경유수로, 김순(金恂)을 삼사좌사로, 허평(許評)을 동지자정원사로 삼고, 이승휴(李承休)를 밀직부사 감찰대부(密直副使監察大夫)로 삼고 그대로 치사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승휴는 판비서로 있다가 바로 동첨자정원사(同僉資政院事)에 승진되었는데, 글을 올려 아뢰기를, “본조의 제도에 나이 70이 넘어서 높은 관직에 제수된 자가 없었는데, 소신으로 말미암아 선왕의 제도를 고친다면 신의 죄가 큽니다. 청컨대, 은명(恩命)을 거두어 주소서.”하니, 왕이 웃으며 이르기를, “선생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처지가 아니다.”하고 관직에 나오기를 재촉하였다. 승휴가 억지로 부임했다가 겨우 10여 일 만에 글을 올려 은퇴하기를 간절히 청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이를 들어 주었다.

 

  다) <고려사절요 제23권 > 충선왕(忠宣王)  임자 4년(1312), 원 인종(仁宗) 황경(皇慶) 원년  

 

 ○ 6월 1일 을축에 일식이 있었다.  ○ 원 나라에서 제(制)를 내려 행성을 두는 것을 폐지하였다. 애초에 홍중희가 중서성에 호소하여 행성을 설립하려고 하므로 왕이 조종때부터 신하로 복종한 공을 서술하여 아뢰어서 폐지하게 하였던 것이다.  ○ 모든 사람에게 자모법(子母法)을 쓰지 않고 사채를 추징하는 것을 금하였다.

 ○ 김순(金恂)을 상락군(上洛君)으로, 김자흥(金子興)을 계림군(鷄林君)으로, 권한공을 첨의평리로, 최성지(崔誠之)를 동지밀직사사 대사헌으로 삼았다.

 

  라) <고려사절요 제24권 > 충숙왕(忠肅王) . 신유 8년, 원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

 

 ○ 봄 정월에 원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 와서 연호를 고치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 찬성사 권한공, 평리 김정미, 평강군(平康君) 채홍철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 영양군(永陽君) 이호(李瑚)를 원 나라에 보내어 절일(節日)을 축하하고, 양성군(陽城君) 이천(李?)에게 동녀를 바치게 하였다. ○ 원 나라에서 왕에게 입조(入朝)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 김이용을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으로, 김순(金恂)을 판삼사사로, 오잠ㆍ박허중(朴虛中)을 첨의찬성사로, 조련(趙璉)ㆍ김태현을 평리로, 김원상(金元祥)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임명하고, 박려(朴侶)ㆍ조연수(趙延壽)를 삼사사로, 백원항(白元恒)을 밀직사로, 진양필(秦良弼)ㆍ한악(韓渥)을 지밀직사사로, 윤석ㆍ이백겸(李伯謙)을 동지밀직사사로, 전영보ㆍ유유기(柳有奇)ㆍ임서(任瑞)를 밀직부사로 삼았다. 서(瑞)는 주면(朱冕)의 집종으로서, 백안독고사의 아우이다.

 

  마)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 忠肅王 . 신유 8년, 원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

 

○ 여름 4월, 정묘일에 왕이 원 나라에 갔다. 4경(更)에 양선문(陽善門)으로 나갔으므로, 조정의 모든 관원들은 미처 전송하지 못하였다. 유청신ㆍ오잠ㆍ원충ㆍ한악(韓渥)ㆍ윤석ㆍ유유기(柳有奇)ㆍ안규(安珪) 등이 따라갔다. 내수(內?) 대호군 박인평(朴仁平)이 간사하고 교활한 행동으로 총애를 얻었고, 몰래 조적(曹?)과 결탁하였다. 적의 양자인 환자 양안길(楊安吉)이, 그때 황제의 곁에 있으면서 권세를 부렸다. 그의 누이가 남에게 시집간 지 오래 되었는데, 왕이 안길(安吉)에게 후원을 얻고자 하여 그의 남편을 내쫓고 인평에게 시집보냈다. 이때에 인평이 먼저 심왕(瀋王)의 처소에 이르러, 조적ㆍ양안길과 입술[唇]과 이[齒]와 같은 관계가 되어 왕을 배반하고 도리어 국가의 비밀스런 일을 가지고 심왕에게 호소하였다. 또 유청신ㆍ오잠을 유인하여 서로 입술과 이처럼 되었으며, 조련(趙璉)ㆍ조연수(趙延壽)ㆍ김원상(金元祥) 등이 은밀히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왕의 시종은 모두 이반(離叛)하여 호종하는 자가 없었다. ○ 삼사사 김순(金恂), 밀직사 백원항(白元恒), 밀직부사 윤석(尹碩)ㆍ전영보(全英甫)와 감찰 언부관(?部官)에게 명해서, 권한공ㆍ채홍철에게 장형을 가하여 먼 섬에 귀양보냈다. 한공은 상왕이 소중히 여기는 신하였다. 그때 임해군(臨海君) 이진(李●)이 교외에서 전송하니, 한공이 말하기를, "천지가 비록 넓고 크나 한 몸을 감출 데가 없습니다." 하였다. 진이 말하기를, "뒷간이 좋다." 하니, 한공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한공ㆍ홍철ㆍ광봉(光逢)ㆍ정지(廷芝) 등이 섬에 들어가지 않고 홍주(洪州) 지경에 모여서 백성들에게 끼친 폐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2) 문영공의 산수도에 씌여진 시문 소개 (2003. 12. 26. 영환(문) 제공)

 

문영공(金恂)께서 갖고 계신 산수도에 씌여 있는 달전사의 운을 차운하여 홍애(홍간)선생께서 지으신 시가 있어 소개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珣으로 되어 있으나 고려시대 인물의 한자는 변이 틀린 경우가 허다하고 홍애선생과 문영공과는 동시대 인물이므로 여기에 김순은 문영공선조이심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출전 : 동문선 제6권. 칠언고시(七言古詩)

상서 김순이 가진 산수도에 쓴 달전사의 운에 차운하여[金尙書珣所畜山水圖達全師韻]

 

     홍간(洪侃)

 

일천 봉우리는 푸른 하늘 위에 반쯤 들어갔는데 / 千峯半入靑天上

그 밑에 긴 강이 있어 강물이 맑다 / 下有長江江水淸

차가운 푸른 빛이 몇 천 거듭인가 / 空翠生寒幾千里

골짝마다 우렁찬 솔바람 소리일네라 / 颼飀萬壑松風聲

보일락말락하는 그윽한 사람은 어디로 향해 가는가 / 幽人隱見向何處

짐 실은 저는 나귀 가는 강 길이 밝다 / 䭾着蹇驢江路明

벼랑이 무너지고 시냇길 끊겨 끝없이 바라보노니 / 崖崩澗絶望不極

한 쪽 성긴 비에 돌아가는 구름이 검다 / 一邊疏雨歸雲黑

돌아가는 구름 끊어진 곳에 누대 있는데 / 歸雲斷處有樓臺

붉은 해 곁에서 부는 옥퉁소 그 소리가 사무치네 / 吹徹玉簫紅日側

그대는 청련거사 적선옹주D-001을 보지 못하였는가 / 君不見靑蓮居士謫仙翁

한 마리 학이 어찌 여러 닭들과 어울리랴 / 一鶴肯與群鷄同

여러 방백들이 초청해도 머리도 끄덕이지 않았고 / 列岳結軌不點頭

세상 밖에서 홀로 동계공주D-002을 짝하였네 / 物外獨伴東溪公

 

[주 D-001] 청련거사 적선옹 : 이백(李白)은 촉(蜀)나라의 청련산(靑蓮山) 아래 살았으며, 장안(長安)에 왔을 때 하지장(賀知章)이 그를 만나, “자네는 천상(天上)에서 잠깐 인간(人間)에 귀양살이로 온 신선이다.” 하였다.

[주 D-002] 동계공 : 이백의, “동계공(東谿公)의 유거(幽居)에 제(題) 한다.”는 시가 있다.

 

홍간(洪侃)

?∼1304(충렬왕 30).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자운(子雲) 또는 운부(雲夫), 호는 홍애(洪崖). 본관은 풍산(豊山). 지경(之慶)의 아들이다.

1266년(원종 7)에 민지(閔漬)가 장원하였던 과방(科榜)에 함께 등제하였다. 벼슬이 비서윤(#비58書尹)을 거쳐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지제고(知製誥)에 이르렀다. 뒤에 원주의 주관(州官)으로 나갔다가, 언사(言事) 때문에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시문에 능하였고, 시체가 청려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제현(李齊賢)은 《역옹패설 #역10翁稗說》에서 “그가 시 한 편을 지어 낼 때마다 어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그 시를 좋아하여 서로 전해가며 외웠다.”고 하였다. 그의 시가 뛰어나서 당시에 널리 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허균(許筠)도 《성수시화 惺#수04詩話》에서 그의 시가 “아름다우면서도 맑고 곱다.”고 평하였고, 홍만종(洪萬宗)도 《소화시평 小華詩評》에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허균이 뽑아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선집을 밤새워 읽고 “이인로(李仁老)와 홍간의 시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특히, 당시에는 모두 송나라 시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시를 배운 것이 높이 평가되는데, 허균은 “〈나부인 懶婦引〉·〈고안행 孤雁行〉 등의 작품이 매우 뛰어난데, 성당의 작품과 같다.”고 하였으며, 홍만종은 “당조(唐調)를 깊이 얻어 송나라 사람의 기습(氣習)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저서에 12대손 홍방(洪滂)이 여러 시선집에 전하는 것을 모아 편찬한 《홍애집》이 있다.

 

 13) 문영공의 중국관련 자료 (2005. 1. 11. 주회(안) 제공)

 

충렬공의 셋째아들 김순 선조님은 중국(원나라)에 다녀오신 기록은 없지만 원나라와 관련된 그의 필적 2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1306년 9월 書하신 <高麗國大藏移安記 (고려국대장이안기)>의 기록이 元의 周南瑞(주남서)가 편찬한 <天下同文>에 수록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에도 본문이 축소된 채 수록되어 있다.

 

이 비는 민지 찬, 김순 서로 만든 것으로, 비의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鐵山(紹)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劉喜海의 海東金石存攷(고)에는 "大德10年9月閔漬撰 金恂書 在江原道淮陽府金剛山"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1314년 2월 書하신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의 기록이 <옥금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에 수록되어 있다.

 

이 비는 1314년 (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으로 민지 찬, 김순 서로 만든 것이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참고로 김순 선조님의 막내사위는 원나라 사람으로 별리가불화 임.

1321년 원나라 좌승상 아홀반의 아들인 사인 별리가불화

1332년 王人 별리가불화 절강성 참지정사

1339년  김영후는 그 매부 별가불화(別哥不花)가 당시 원나라 평장사(平章事)였으며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의 원관은 (김선-)김승용의 처부임

 

원부---★원관---원정  

 

■ 요약

 

●<高麗國大藏移安記 (고려국대장이안기)>

 

閔漬(1248-1326)가 撰하고, 봉익대부밀직사부사 判비서寺事문한학사 金恂(1258-1321) 書하여 大德 10年 丙午 9月 日 記한 것으로, 1306년 (충렬왕26, 대덕10) 고려인 민지가 찬한 대장경 이안기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鐵山(紹)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또 劉喜海의 海東金石存攷(고) 26에는 "大德10年9月閔漬撰 金恂書 在江原道淮陽府金剛山"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 26, p19514)  

(典據 : <周南瑞 編, 천하동문> 전갑집 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 1366책)의 <천하동문집>

 

參考문헌 :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p706-717, 1986.

 

●<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

 

元瓘(원관)과 관련된 원나라 시대의 기록중에 [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 는 閔漬(민지,1248-1326)가 撰하고 중대광상락군 金恂이 書幷題하여 元祐元年2月日 한 것으로, 1314년(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이다. *원관은 金承用(휘방경의 1남 휘 선의 2남)의 처부임

 

( 典據 : <李者羽 著, 玉 山今)  山惠因高麗華嚴敎寺志>7 )

 

■ <元代麗史資料集錄> (1997, 장동익)

●<高麗國大藏移安記> : 주남서 편 <天下同文> 전갑집7 (閔漬 作)

 

○ 著者 閔漬(1248-1326)는 고려 충렬왕대의 대표적인 문신으로서 충선왕이 세자시에 元에 宿衛할 때 정가신(?-1298)과 함께 수종신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충선왕에게 학문을 전수하면서 자주 元 세조의 부름에 응하여 고려의 사정에 대해 자문하기도 하였고, 교지정벌에 대한 獻議를 올려 원의 한림직학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에서 <천추금경록> <세대편년절요> <본국편년강목>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이들이 현존하지 않아 그의 학문적 성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85) *이제현, <민지 묘지명>,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 1991)

 

그 외 민지의 저술로 전해지는 것으로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금강산 시병서> <풍악산 장안사 사적기발> <보개산 석대기> 등이 김탄월 편 <유점사 본말사지> (유점사, 1942)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본 자료는 민지의 문학적 역량과 학문적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典據 <天下同文> 전갑집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1366)의 천하동문집7

 

○ 校勘 이 자료는 元의 周南瑞(주남서) *86)가 편찬한 <天下同文>에 수록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에도 본문이 축소된 채 수록되어 있다. *주남서(?-?) : 강서행성 길안로 안성인으로 자는 경수이고 향공진사 출신으로 <天下同文>44권을 편찬하였다.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 서문)

 

또 劉喜海(유희해)의 <海東金石存攷>26에는 "대덕10년9월 민지찬 김순서 재강원도 회양부 금강산"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26, p19514

 

<천하동문>과 <천하동문집>의 내용과 글자에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는 데, <천하동문>의 것이 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곧 <천하동문집>에는 모두에 찬자인 민지의 구체적인 관직 및 말미의 비문의 서자, 전액자, 입석자 등에 대한 기록이 모두 빠져 있다.

 

이러한 점을 보아 <천하동문>은 본문이 碑石에 새겨진 후에 이 비문을 수습하여 수록한 것을 알 수 있고, <천하동문집>은 천하동문을 바탕으로 모두와 말미를 삭제한 채 轉載하였던 것으로 짐직된다.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06년 (충렬왕32, 대덕10) 고려인 閔漬가 찬한 大藏經 移安記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철산경 (소경)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려의 大藏經이 元으로 수출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예로는 다음의 자료 2에서 보이는 것처럼 중봉화상 명본이 고려의 <금서법화경>을 구득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 외 이 시기에는 대장경의 수출만이 아니라 고려의 사경승들이 대거 원에 진출하여 수많은 대장경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 參考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706-717, 1986)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이?, 옥금산혜인고려화엄교사지6)

 

○ 著者 閔漬 (1248-1326)

 

○ 典據 <옥금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7

 

○ 內容槪要 이 자료는 1314년 (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인데, 이의 찬자는 민지, 서자는 김순(1258-1321)으로서 이들 두 사람은 <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도 찬,서를 함께 하였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 *69)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는 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

 

이에 나타난 元瓘(?-?)은 첨의중찬 元傅의 아들로서 1298년 (충렬왕24, 대덕2) 11월에 지밀직사사 판도판서에 임명되었고, 1308년 (충선왕 복위년) 10월에 宰臣으로서 왕을 수녕궁에서 饗宴(향연)한 인물이지만 *70) 고려측의 자료에서는 그의 행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려사열전20, 원부, 고려사 세가31 충렬왕24년 11월 경술, 세가33 충선왕복위년 10월 갑진, 고려묘지명집성 <박거실처원씨 묘지명>, <원충 묘지명>

 

이 자료 및 다음의 자료를 통해 볼 때 그의 호가 退翁임을 알 수 있고, 충선왕의 퇴위 이후 왕을 수종하여 元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71)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인해 그의 아들 元忠이 충선왕으로부터 賜姓받게 되었을 것이다. (김용선, 고려묘지명집성, 원충묘지명)

 

아울러 강남 지역에 진출하여 강절행성 경원로 >현에 위치한 천동사 *72) 및 항주의 고려혜인사에 대장경의 인본과 토지를 시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천동사는 후일 충선왕이 임백안독고사의 무고를 피해 피신한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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