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 뉴

(목록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 쌍계재공 소개

 2. 친필 소개

3. 그림 및 진본 관람기

 4. 거주지 조사

5. 안사연 거주지탐방

 6. 쌍계재 시문 종합

7. 거문고 관련 논문

 8. 우주두율 발문

9. 한백륜신도비명

10. 각종 문헌 내의 기록 자료 종합

 

본문

p11.png10. 각종 문헌 내의 기록 자료 종합

1)<서울600년 4권> (1996, 김영상)  (2002. 11. 2 주회(안) 제공)

 

琴軒의 雙溪齋 (금헌의 쌍계재)- 성균관 북쪽 운치 깃든 절경

성균관을 가운데 두고 그 동쪽과 서쪽으로 泮水(반수)가 흐른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동쪽 개울 위편이 경치 좋고 그윽한 터전이어서 한성 초기에 琴軒 ★金紐 (1420-?) 가 쌍계재 서옥, 곧 글방을 짓고 살았다. 여기에 사숙재 ★강희맹이 글로 <쌍계재賦>를 지어 일약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김유의 본관은 안동으로 --- (중략) --- 시와 글씨, 거문고에 뛰어나서 당대의 3絶이라 일컬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古蹟 조에

"쌍계재의 遺址가 성균관 泮水(성균관을 싸고 흐르는 개울) 동쪽에 있는데 ★김유의 옛 집터이다" 라고 적고 있다.

<용재총화>에도

"서울 성안에서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에서 삼청동이 가장 좋고 인왕동이 그 다음이다.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 쌍계동은 성균관 윗골(上谷)에 있는데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룬다. ★김유가 개천가에 초당(草堂)을 짓고 복숭아나무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강희맹이 글(賦)을 지었다." 라고 씌어 있다.

<쌍계재 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생략) ---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던 ★강희맹(1424-1483)은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문장이 당대의 으뜸이어서 죽은 뒤에 성종 임금께서 친히 서거정을 시켜 그의 유고를 편집하여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요사이 서울을 명소를 소개하는 글 가운데 지금의 이화동 근방에 있던 쌍계동과 이곳의 쌍계재를 혼동하는 예가 자주 눈에 띄나, 성균관 반수 위에 있던 쌍계재와 낙산기슭의 상계동은 전혀 별개의 명소였다.

(그림) 금헌 ★김유의 雪憔圖(설초도)

 

2) <한국서화가인명사전> (2000, 한문영, 범우사)]. p115.  (2002. 11. 2 주회(안) 제공)

 

 김유 (金紐) 조선. 1420(세종2)-?. 문관 서화가. 字는 자고(子固). 號는 금헌(琴軒), 취헌(翠軒), 쌍계재(雙溪齋), 관후암(觀後庵), 상락거사(上洛居士). 본관은 안동. 지돈녕부사 ★김충엄(金 淹)의 아들. 영의정 ★조준의 외손. 1464년(세조10) 문과에 급제, 호조좌랑 예문관직제학 대사헌 등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냈다.

젊어서 한때 방랑생활을 했으나 학문을 즐기고 문장에 능했다. 특히 행서 초서를 잘 쓰고 거문고도 잘 타, 시서금 삼절로 일컬어졌다. 성균관 북쪽, 지금의 성북동 골짜기에 쌍계당을 짓고 해마다 봄철이면 벗들을 초청하여 시와 술로 인생을 즐겼다. 만년에는 두 다리가 마비되어 기동할 수 없이 되었으나 태연히 담소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 그림도 잘 그렸다. <작품>雪中採樵圖

 

3)<한국회화사연구>. p578. (2001, 안휘준, 시공사). (2002. 11. 2 주회(안) 제공)

 

 <동자견려도>에 보이는 ★김시의 화풍은 후에 이경윤의 <사호위기도>, 김명국의 <설중귀로도> 등으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그런데 또 한가지 이 <동자견려도>와 관련하여 주목을 끄는 것은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필자미상 <설중채초도>이다. 이 <설중채초도>는 ★강희안과 동시대 사인화가였던 ★김유(金紐, 1420-?)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고, 또 양식적으로도 그렇게까지 올라갈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림의 왼쪽 하단부에 아홉 자의 백문방인이 있는데 훼손이 심하여 완전한 판독이 불가능하나 ★김유의 성명이나 字號와 유관한 글씨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또 저자의 과문 탓인지는 모르나 이 그림 이외에는 ★김유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이 없어 비교도 해 볼 수 없다.

그런데 화풍으로 보면 <설중채초도>는 명나라에서 ★김유보다 약 40여년 후에 ★오위, ★장로 등에 의하여 형성되었던 절파 후기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서 현재의 전칭보다 연대를 훨씬 낮추어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적인 구도, 산의 처리, 樹法, 필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 하시모토(橋本) 집안에 소장된 ★장로의 작품인 <도원순학도>와 유사하다. 倒懸의 주봉, 주봉의 허리에서 대각선을 그으며 흘러내리는 산의 능선, 병풍처럼 늘어선 원산으로 밀폐된 공간, 그 사이에 박힌 듯 서 있는 초가들, 긴 삼각형 잔가지와 잎들로 엉클어진 근경의 나무들, 이런 모든 요소들은 두 그림에서 유사하게 간취된다.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설중채초도>의 구도가 <도원순학도>의 그것을 뒤집어 놓은 격이라는 점일 것이다. 중국 절파의 후기 양식인 광태파의 화풍이 지체없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16세기 전반 이전으로는 올려보기 힘들 것이다. 이 그림은 아마도 김시의 <동자견려도>보다 연대가 다소 올라가는, 말하자면 김시에 약간 선행하는 16세기 전반경의 작품이 아닌가 추측되지만 확단은 할 수 없다.

 필자미상. <설중채초도> 16세기. 종이에 수묵, 112*56.6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4) 김뉴 선조님의 측량 관련 기록 (2003. 7. 19(익) 제공)

 

세조가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어 노래로 기념하였는데, 그 법은 구리를 주조하여 그릇을 만들어 24위(位)에 나열하고, 그 가운데를 비워 구리쇠 기둥을 세우며, 옆으로 구멍을 뚫어 그 위에 구리쇠 저울을 놓고 낮추고 올리면서 보게 하였으니, 규형(窺衡)이라 불렀다. 땅을 측량할 적에는 영구(靈龜 지남철)로 사방을 바로잡으니, 오시(午時) 초일각(初 一刻)이 어느 표에 멀고 가까운가를 알려면 먼저 묘시(卯時) 초일각이나 혹은 유시(酉時) 초일각에 표를 해서 엿보게 하고, 다시 묘시와 유시에 표한 곳을 이전에 방법으로 사방(四方)을 바로잡아 정오 초일각에 표한 곳을 어느 방위 몇 각(刻)으로 정한다. 이렇게 한 후에 명당(明堂)으로부터 끈으로 앞의 묘시 초일각까지 재어서 1천 1백 척에 표하면 세 곳의 오정(午正) 1각의 표가 3천 3백이 될 것이니, 이것으로 24위를 바로잡고, 가로 세로와 구부러지고 바른 것을 모두 이것으로써 바로잡았는데 옳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임금이 일찍이 신과 김유(金紐)ㆍ강희맹(姜希孟) 등을 불러서 이 법을 강의하시고 후원에서 시험하게 하였는데,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곧 영릉(英陵)ㆍ사산(四山)을 측량하였으며, 그 뒤에 또 경성(京城)의 지형을 측량하도록 명하였는데 모두 이 법을 쓰게 하였다. 그러나 경성은 민가가 즐비하여 측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신등의 어리석은 의견을 참작하여 쓰셨으니, 한 성안에 무릇 표를 세운 곳은 모두 이 법을 써서 원근(遠近)ㆍ고저(高低)ㆍ대소(大小)ㆍ평험(平險)에 이르기까지 역시 종이에 베끼고 그 속에 24위를 정하고, 이에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 하나를 측량하여 줄여서 작은 자로 하면, 다시 땅을 재지 않더라도 이 자로 땅 위에 그은 곳을 재어보면 번거롭게 걸으면서 재지 않아도 산하(山河)ㆍ천지(天地)ㆍ성곽(城郭)ㆍ실려(室廬)가 모두 제 곳을 떠나지 않고, 원근과 고저가 자연히 추호의 차이가 없게 되므로, 인자(印字)의 분명함이 그림으로 완성되어 임금님께 올리니, 대궐 안에만 두고 내놓지 않았다. 규형은 지금 관상감(觀象監)에 있다

 

  5) 간척 수리사업의 대가 김뉴(金紐) (2003. 8. 8.   윤만(문) 제공)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3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 는 (안정공파) 김뉴(金紐) 선조님의 행적을 보니,

(1)황해 평안도의 땅을 개간하고,

(2)도성 측량과 지도 작성,

(3)전라도 순천지방에 석보를 쌓고,

(4)함경도 회령과 마도달량어란 사이에 보를 설치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충렬공(휘 방경) 할아버지와 김자점(金自點) 선조와 더불어 간척 수리사업의 대가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6)[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뉴(金紐) (2003. 4. 12. 윤만(문) 제공)

 

▣ 제1권 p326-p329<한성부 고적(古蹟)>

--쌍계재(雙溪齋) : 옛 터가 성균관 반수(泮水) 동쪽에 있는데 참판 김뉴(金紐)의 옛 집이다. 쌍계재에 대한 기록은 본 홈페이지 게시판 4971 쌍계재-강희맹 부 (군)김태영 03. 4. 9.이 있으므로 생략합니다.

 

▣ 제3권 p433<안동대도호부 본조>

--김유(金紐) : 갑신년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또 중시(重試)와 등준(登俊) 두 과거에 뽑히었고 이조참판을 지냈다. 시(詩)에 능(能)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음률(音律)에 통달하게 알았다.

 

▣ 제5권 p20<함평현 제영(題詠)>

--어지러운 봉우리 푸른 곳에 바닷 구름이 깊다 : 김유(金紐)의 시에, “어지러운 봉우리 푸른 곳에 해운이 짙고, 가을 빛 멀리 푸르러 저녁 숲에 붙었네.” 하였다.

 

▣ 제5권 p73<강진현 불우(佛宇)>

--백련사(白蓮社) : 만덕산에 있다. 신라 때에 세우고 고려의 중 원묘(圓妙)가 중수하였고, 우리 세종 때에 중 행호(行乎)가 다시 중수하였다. 탑 비와 세 부도(浮屠)가 있으며, 또 만경루(萬景樓)·명원루(明遠樓)가 있다. --(중략)--○김유(金紐)의 시에, “명원루 높아 눈앞이 새로우니,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티끌없는 거울이네. 울 옆 긴대 바람에 소리내고 난간 앞의 그윽한꽃 눈속의 봄이라, 나그네 시읊어 시편(詩篇)은 흥겨운데 중은 다과를 내어 사람을 만류하네. 한나절동안 놀다 돌아오니, 이로부터 구름안개 꿈속에 자주드네.” 하였다.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1982>

7) 신동국여지승람제3권 한성부1-강희맹의 부(賦) 소개 (2003.4. 9. 태영(군) 제공)

 

신증 쌍계재(雙溪齋) : 옛터가 성균관 반수(泮水) 동쪽에 있는데 참판 김뉴(金紐)의 옛집이다.

강희맹(姜希孟)의 부(賦)에, "서울 왼쪽 경계요, 반궁(泮宮)의 북쪽 언덕이네. 풍운은 모여 흩어지지 않고, 동학(洞壑)은 아늑하고도 넓도다. 울창하게 많은 가지 아름다운 수목이요, 아롱지게 덮인 돌은 검푸른 이끼일세. 냇물이 갈려 흐르니 비녀 다리 인 듯, 돌에 고여 서려 있는 빗물 받으니 도는 듯. 잔잔한 소리 옥가락지 울리는 듯, 콸콸 흐를 제는 여러 사람 들레는 듯. 골 안에서 나온 지 얼마드냐. 글의 물결 윤색하여 인재를 기르도다. 범상하고 용렬한 자 흘겨보고 알지 못하여, 이 좋은 지역 풀 속에 묻혀 있게 하였네. 진정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겼음은, 어질고 준수한 이 기다려서 열어 주려 함이로세. 여기에 금헌(琴軒) 선생은, 높은 관원의 자손이요 화려한 집안의 맏이로세. 어지러운 세상 싫어하고 도를 즐기며, 정신이 명랑하고 기상이 빼어났다. 옛 책 읽기 즐겨하고, 역사를 섭렵하였네. 어찌 나이는 젊지만 그릇은 노성한가, 정말 덕이 온전하고 재주가 풍부하다. 흉금이 트였으니 개인 밤 달과 같고, 호방한 기운 뻗어나서 우주에 찼다네, 비단옷 옛 기습(氣習) 벗어나서, 천석(泉石)에 고질병 들었네, 관복을 두르고도 먼 것을 생각하며, 조시(朝市)에 젖어 있어 발길이 막혔어라. 그러므로 성중에서 살 곳을 찾아, 멀다고 여겨 찾지 않은 곳 없었다네. 반수(泮水)에 찾아보다가, 물 근원 다 가서야 이 자리 얻었다네. 남쪽을 앞으로 하고 북쪽을 등졌으니, 군자의 거처할 곳이로다. 이에 가시덤불 처 버리고 깊고 좁은 것 개척했네. 띠풀을 베고 재목을 모아, 설계하고 건축하기 시작했네. 따뜻한 방을 만드는데 밝고 맑게 하고, 바람 불어오는 격자창 성글게 사면으로 열었도다. 선생이 그 안에서 눕고 쉬며, 아침저녁 휘바람 불고 노래하네. 하늘 조화 자세히 관찰하며, 사시 변하고 바뀌는 경치 보노라. 봄철이 와서 화창한 볕이 공중에 가득하면, 언덕의 풀은 돋아나려 하고 땅은 처음으로 풀리며, 시냇가 누른 버들가지 흔들리고 동산의 복사꽃 붉게 타오른다. 풍연(風煙) 어두운 건 푸른 솔이로세. 글 읽는 소리[絃誦] 공자묘에서 들리는데 쌍계수(雙溪水) 깊고 맑게 흐름이여, 돌 여울로 내려오면서 영롱(玲瓏)하도다. 선생은 이때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예닐곱의 관(冠)을 쓴 어른과 동자를 데리고 스르릉 비파 울리어 정회를 펴면서, 기수(沂水)에 목욕하던 높은 자취를 사모하도다. 맑고 훈훈한 그 절기 되면 녹음 더욱 좋은데, 자색 제비 가벼운 바람에 날아들고, 누런 꾀꼬리 높은 언덕에서 노래한다. 어느 사이 뜨거운 햇볕 하늘에 있으면 붉은 구름 멈추고 가지 않는데, 쌍계수 맑고 차고 푸르며 구비 돌아 웅덩이지고 다시 흘러 버리도다. 선생은 이때 가는 베옷 풀어헤치고 바람을 쏘이며 서늘한 그늘 찾아 편안히 쉴 것이다. 매우(梅雨) 부슬부슬 내리고 그늘진 구름 덮여 있을 때면, 산앵도 타는 듯 붉게 익고 젖은 새는 갈 곳 없어 헤매는데, 쌍계수는 여러 골 물 받아 모아 형세 더욱 커져 공(空) 산에 메아리 치며 세차게 흐르도다. 선생은 이때면 청려장 손에 들고 짚신발에 신고, 근본이 있으면 멈추지 않고 근원이 없으면 마르기 쉬운 이치 생각하도다. 쇠소리 나는 바람 슬슬 불고 비취 같은 하늘 맑게 개였는데, 무서리 수풀에 뿌리면 진홍빛 현란하니 취한 듯하여라. 꽃다운 국화 언덕 위에 피어 있고, 연잎은 쓰러져서 찬 못에 덮여 있다. 상쾌하고도 쓸쓸함이여, 마음대로 멀리 찾고 그윽한 경치 더듬게 하도다. 쌍계수는 맑고 밝아 거울 같으며, 푸르고 깨끗하여 쪽[藍] 같도다. 선생은 이때 향기로운 두루미 열어 놓고 흐르는 물 보며 좋은 손님 맞아 즐기도다. 그러다가 매미소리 그치고 흰 달이 광채를 더하게 되면, 밤들어 산은 적적 사람 없는 것 같은데, 귀뚜라미 울음소리 뜰 안에서 목 매인 듯 들려온다. 쌍계수는 차고 찬데 달은 더욱 빛이 밝아 은물결 사방에 흩어졌도다. 선생은 이때 거문고 어루만지며 한 곡조 연주하니 산과 물의 깊은 뜻을 줄줄이 엮어낸다. 삭풍(朔風)이 울부짖으면 긴 수풀 모두 비는데 찬 기운 몸에 해로울까 걱정하여, 나무등걸 지펴니 따뜻하게 한다. 쌍계수 얼음 얼어 새겨놓은 듯 깎아놓은 듯 거문고 소리 딩둥댕둥 울리도다. 생은 이때 석양 주흥(酒興) 얼큰하여 붉은 털옷 걸치고서 남쪽 언덕에 서서 돌아갈 줄 모르니, 얼굴을 깎아내는 듯한 찬바람인들 아랑곳하리. 그리고 빽빽한 구름 잎사귀처럼 뭉치고 퍼붓는 눈 낙화처럼 날리는데, 공중에 흩어져서 노송나무를 덮고, 구렁을 메우고 언덕에 가득하다. 쌍계수 얼어붙어 소리는 없는데, 움틀꿈틀 은빛 뱀이 달리는 것 같아라. 선생은 이때 비단 휘장을 걷어올리며 창의 깁을 열고, 양고주(羊羖酒) 좋은 술 부어 가며 미인 시켜 거문고 뜯어 현묘(玄妙)한 곡조 들으며 즐기도다. 집안엔 봄철처럼 화창한 기운 덮이고, 사시의 차례 어지럽게 오고 가도다. 정말로 광경은 한이 없는데 세상 티끌 반걸음 저 밖이로다. 완연히 한 번 병 속에 들어간 것 같아라. 이야말로 땅의 영기가 기다렸다가 비장(祕藏)한 것 내어 준 것이냐. 가시덤불 베어내니 흙이 조강(燥剛)하도다. 뜰 안에서 말을 돌릴 만하니 객이 당에 오르도다. 집을 지어 안락하니 군자 여기서 편안하다. 군자 여기서 편안하여 천 년을 누리리라. 거듭 노래로 고하나니, 물소리 산을 두르고 산은 작은 집[蓬蓽] 가리웠네. 마음 편히 떨쳐가서 그윽하고 고독함 즐기노라. 무엇이 즐거운가, 성조(聖朝) 벗어나서, 어하(魚蝦)와 짝이 되고 미록(麋鹿)과 친구 되네. 내가 쌍계를 사랑함이여 강호도 산림도 아님일세. 몸은 비록 벼슬해도 마음만은 연하(煙霞)에 있네. 가서 따르고자 하였으나, 동부(洞府)가 깊고 깊었어라. 무엇으로 그대에게 주리오, 쌍남금(雙南金)이로다." 하였다.

 

 8) <대동금석서>에서--대동금석속목 (2002. 8. 30 주회(안) 제공)

p47 ★한계순비(한계순묘비), 재양주, ★김뉴 문, 이조참판 ★김수동 서 윤비(★윤여림지선묘비) 비음, 예조좌랑 ★김수동 서 p49 ★한백륜비(한백륜묘비) 재김포, ★김뉴 문, ★장말동서

 

 9) <한국서예사>에서 (1975, 김기승)   (2002. 8. 30 주회(안) 제공)

金紐의 書畵詩琴 (김뉴의 서화시금)

김뉴(1420- ? )는 본관이 안동, 김방경의 후손, 자가 子固(자고)요, 호가 琴軒(금헌), 翠軒(취헌), 雙溪齋(쌍계재), 觀後庵(관후암), 上洛居士(상락거사) 등으로 많았다. 그는 세조10년(1464)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호조좌랑이 되어서 [경국대전] 중의 [吏典]을  校(수교)하였다. 1466년에 발영시 급제, 동년의 등준시에도 급제하여 예문관직제학, 충청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書畵詩琴(서화시금)으로 이름이 높았다.

[四佳集(사가집)]에 의하면 ---(중략)--- 이라 하였다.

그가 초서와 행서를 잘 썼다는 사실은 [용齋叢話(용재총화)]에도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즉 ---(중략)--- 이하 하였다.

 

10) <화인열전1> (2000, 유홍준) p360   (2002. 8. 30 주회(안) 제공)

4) 畵史補錄 下

琴軒 이뉴 (李紐 : 金紐[1420-?]의 오기) 는 세조때 사람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올랐는데 그림을 잘 그렸다.

 

 11) <근역서화징> (오세창, 1928)  (2002. 8. 30 주회(안) 제공)

★김유(金紐)가 소장한 [팔경시(八景詩)] 발문에 쓰기를,

"우리집 외조모는 바로 익재의 손녀이시니, 그 분의 시문과 필적이 한 상자에 가득했었다. 내가 젊었을 적에 그다지 아낄 줄을 몰라서 쉽게 여기고 잘 보관하지 못했다. 아 슬프다. 자손으로서 경솔하여 제구실하지 못함이 이러했구나.

그런데 지금 ★자고(子固, 金紐) 가 보관한 8장의 그림을 보니 시체(詩體)도 진실로 따라갈 수 없으니 해서법이 어찌 쉽게 이루어지겠는가. 자고의 독실하게 좋아함이 없었다면, 내가 오늘날 어떻게 다시 그 진적을 볼 수 있었겠는가. 익성(益城)의 야로(野老)는 쓰노라 <해동명적>

 

*이씨(李氏)--본관은 경주. 익재 ★이제현의 손녀이며 좌의정 ★홍응의 외조모. ★홍응이

---金紐 (세종2, 1420- ?) :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 三絶.

---野老 : 노인의 별칭

 

12)<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있는 김뉴의 자료는 동명이인의 것   (2002. 8. 30 주회(안) 제공)

김뉴 書簡帖 s0649-01 s0649-02 s0649-03 s0649-04 s0649-05 s0649-06

-古文書 私人文書 書簡

-사자 0649

-(발급) 金紐 (수급) 鄭訓導

-成化 庚寅 10月 등 (1470)

-6(12), 한문, 첩:39.0×22.0cm

-촬영:1930. 1. 22.

-소장:慶北 高靈郡 雙洞面 合伽洞 金泰鎭

서간 4건(戊子 10月 母 朴氏가 아들 校理에게 보내는 것, 家人曹氏가 家翁 앞으로 보내는 것, 成化 庚寅 10月 아우에게 보내는 것, 庚辰 7月 紐가 鄭訓導 앞으로 보내는 것 등의 4건) 및 집안의 忌日 기록 1건, 집안 내의 각서 1건(父 前參奉 金과 長子 綸의 수결이 있다).

 

이 김뉴 서간첩은 慶北 高靈郡 雙洞面 合伽洞 金泰鎭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1930년 촬영한 것으로 동명이인인 김뉴(일선김씨)의 작품임.

 

 13)<연려실기술>내의 기록 내용 종합 (2003. 11. 11. 윤만(문) 제공)

 

 (1)▣ 연려실기술 제5권 세조조 고사본말(世祖朝故事本末) 덕종 고사 德宗故事 ▣

성종이 의경묘(懿敬廟)에 나아가 분황제(焚黃祭)를 행하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시책(諡冊)을 올렸으며,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선정전(宣政殿)에 나와앉고 성종이 또 백관을 거느리고 책보(冊寶)를 올렸다.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 정효종(鄭孝終) 등이 윤대(輪對)하는 자리에서 의경왕(懿敬王)을 종묘에 부묘하여야 함을 아뢰므로, 명하여 그 가부를 의논하게하였더니 영의정 정창손 등 여덟 사람의 의논은, " 황백고(皇伯考)주D-003라 일컬으면 부묘할 수가 없고, 황고(皇考)라 일컫는 예종(睿宗)에게 이미 황고라 한 이상 이중으로 황고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고 남원군(南原君) 양성지(粱誠之)의 의논에는, "당연히 예종 위에 부묘하여야 합니다." 하였고, 좌참찬(左參贊) 서거정 등 다섯 사람의 의논에는, "의논하는 자가 이르기를, '예종을 백고(伯考)라 칭하여야 한다' 하였으니, 예법에 불가한 일입니다." 하였고, 행호군(行護軍) 김 뉴(金紐)의 의논에는, " 소종(小宗)을 대종(大宗)에 합할 수 없을 것이며, 또 예종이 먼저 임금이 되었으니 회간(懷簡)을 그 위에 모실 수 없고, 이미 높여서 왕이 되었으니 월산대군(月山大君)이 봉사할 수는 없습니다. 사당을 따로 짓고 관원을 시켜서 치제하거나, 또는 임금께서 친히 제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친히 전교를 내려서 묻기를, "회간이 본시 적형(嫡兄)인만큼 예종의 위에다 부하는 것이 무엇이 해로우리오. 이르기를, '따로 사당을 세워야 한다.' 하나, 그러면 몇대를 지나서 끝나고 만다. 또 회간에 들어와 부묘하게 되면 공정(恭靖 정종)은 마땅히 옮겨야 될 것이 아닌가." 하였으므로 정창손의 의논에 이르기를, "이미 예종에게 황고라 일컫고 또 회간을 황백고라 한다면 이존(二尊)이 있게 될 것이니 만일 부득이하여 부묘한다면 당연히 예종의 윗자리에 모셔야 할 것입니다. 고대의 제도에는 형제는 함께 일실(一室)에 모시게 되었으니, 공정(恭靖 태종)과 공정(恭定)이 함께 일실이 되니 옮길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성종이 이르기를, "고려 성종(成宗)이 대종(戴宗)을 경종(景宗)의 위에 올렸더니 뒷날 명신 이제현(李齊賢)이 성종을 찬하여 어질다 하였거늘, 하물며 회간왕이 세자가 되었을 때 예종은 대군이었기에 군신의 분의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윗자리에 모시는 것은 노(魯)나라 민공(閔公)과 희공(僖公)의 경우에 비할 수는 없다." 라고 하였다. 《문헌비고》

 

  (2)▣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무오당적(戊午黨籍) ▣

 

[무풍정(茂豊正) 총(摠)]

무풍정(茂豊正) 이총(李摠)은 자는 백원(百源)이며, 태종대왕의 별자(別子)인 온녕군(溫寧君) 정(程)의 손자이다.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이며,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온 가족이 모두 멀리 절도(絶島)로 귀양갔다. 병인년 6월에 공의 아버지 우산군(牛山君) 종(踵)과 형인 용성정(龍城正) 원(援), 아우 한산부정(韓山副正) 정(挺)ㆍ화원부정(花原副正) 간(揀)ㆍ금천부정(錦川副正) 변(抃)ㆍ청양부정(靑陽副正) 건(揵) 등 여섯 부자가 동시에 화를 입었다.

 

○ 공은 시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탔다. 양화도(楊花渡)에 별장을 짓고 작은 배와 고기잡는 그물을 마련하여 항상 손수 어선을 저으며 시인들을 맞아 날마다 좋은 시를 모으니 무려 천백 편이 되었다.

 

일찍이 남효온(南孝溫)과 보제원(普濟院) 위에서 작별할 때 빈객들이 모두 춤추고 노래하는데, 공이 효온의 부채에다 시를 쓰기를,

 

서로 알고 지낸 8년 동안

만남은 적고 작별만이 잦네.

천리로 떠나는 손을 잡고서

눈물을 가리며 맑은 노래를 듣네.

하니, 좌중이 모두 붓을 놓았다고 한다. 《추강집》

 

공은 남효온(南孝溫)ㆍ김일손(金馹孫)ㆍ강경서(姜景叙) 같은 이들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일찍이 들에 있는 정자에서 거문고를 타는데 그 음율이 살성(殺聲)을 발하므로 다음 날 반드시 잡혀 갈 것을 짐작하였다. 〈족보(族譜)〉

 

공은 스스로 ‘구로주인(鷗鷺主人)’ 이라 부르며 고상ㆍ방종하여 구속받지 아니하였으니, 진(晋)나라 시대의 기풍이 있었다. 서사(書史)를 읽고 시문을 배우며 음률을 해득하였으니, 모두 그 묘경(妙境)에 이르렀다. 김뉴(金紐)가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찬탄하며 말하기를, “정말 궁중의 모란꽃이 개인 하늘 아래 난만하게 핀 것 같도다.” 하니, 이유추(李有秋)가 그 말을 듣고, “김(金) 재상이귀가 있구나.” 하였다. 서호(西湖)에 정자를 짓고 늘 고기잡는 배를 띄워 놓으니 시인과 문사가 강 위에서 놀기를 끊이지 않았는데, 속된 선비가 찾아오면 배를 저어 반드시 피하곤 하였다. 남효온의 시에, “왕손이 배를 저을 줄 안다.” [王孫解刺舟]는 것이 이것이다. 한 형과 네 아우가 모두 그럴듯한 인물이었고, 다섯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일시에 죽음을 받으면서도 웃고 이야기하며 태연하였다.《사우명행록》

 

  (3)▣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산천의 형승(形勝) ▣

 

서울[漢都] 성 안에는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에서 노닐 만한 곳은 삼청동(三淸洞)이 가장 좋고, 인왕동(仁王洞)이 그 다음이고, 쌍계동(雙溪洞)ㆍ백운동(白雲洞)ㆍ청학동(靑鶴洞)이 또 그 다음이다. 삼청동은 소격서의 동쪽에 있다. 계림제(鷄林第)로부터 북쪽에 어지럽게 서 있는 소나무 사이에는 맑은 샘물이 쏟아져 나온다. 물을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나무는 빽빽히 섰으며 바위로 된 골짜기가 깊숙하다. 몇 리를 못 가서 바위가 끊어져 낭떠러지를 이룬 곳이 있는데, 물이 낭떠러지의 허공에 뿌려져 흰 무지개를 드리운 것 같고 흩어지는 물방울은 구슬이 뛰는 것 같다. 그 아래에 물이 모여서 깊고 큰 못이 되었다. 그 곁은 평탄하고 넓어서 사람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높은 소나무들이 그 위에 엉켜 덮여 있고 바위 사이에는 모두가 진달래와 단풍잎으로 봄과 가을에는 붉은 그림자가 비치어 빛이 난다. 지위가 높고 점잖은 사람으로 와서 노는 이가 많다. 그 위로 두어 걸음 올라가면 연굴(演窟)이다.

 

인왕동은 인왕산 아래의 구불구불하고 깊은 골짜기가 복세암(福世庵)을 에워두른 곳인데, 골짜기의 물은 합류하여 시내를 이루고 있다. 서울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활쏘기를 한다. 쌍계동은 성균관의 웃골[上谷]에 있다.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루었는데 김뉴(金紐)자(字)는 자고(子固)이다. 가 개천가에 초당을 짓고 복숭아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진산(晉山)강희맹(姜希孟)이 여기에 대하여 글[賦]을 지었다. 김뉴의 문장과 풍류가 당시 세상에 드날렸으므로 호걸들이 그를 따라 노는 이가 많았다. 백운동은 장의문(藏義門) 안에 있는데 중추(中樞)이염의(李念義)가 이곳에 살았다. 시인들이 그의 유거(幽居)를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지은 것이 있으나 이염의는 글을 알지 못하였다. 청학동은 남학(南學)의 남쪽 골에 있는데 골이 깊고 맑은 개천이 있어서 활쏘기 장소를 차릴 만하다. 그러나 산이 민둥민둥하여 수목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성 밖에 놀 만한 곳은 장의사(藏義寺)의 앞 개천이 가장 좋은데 시냇물이 삼각산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다. 골짜기 안에는 여제단(厲祭壇)이 있고 그 남쪽에는 무이정사(武夷精舍)의 옛 터가 있다. 절 앞에는 겹쳐 포개진 돌들이 수십 길이나 되어 수각(水閣)을 이루었는데 절 밑 수십 보(步) 되는 곳에 차일암(遮日岩)이 있다. 바위는 매우 험하고 높아 냇물을 베고 있으며 바위 위에 장막을 쳤던 구멍이 있고, 바윗돌은 층층으로 포개져서 계단과 같다. 급한 물줄기가 어지럽게 쏟아져서 맑은 하늘에 우레가 우는 듯 귀를 시끄럽게 하는데 물은 맑고 돌은 희어서 완연히 속세를 벗어난 뛰어난 경치이므로 벼슬아치들이 와서 노는 이가 끊어지지 않는다. 물을 따라 몇 리를 내려가면 부처바위[佛岩]가 있는데 바위에 불상을 새겨 놓았다. 시냇물은 북쪽으로 꺾어져 곧게 서쪽으로 흐른다. 그 사이에 예전에는 물방아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다.

 

그 아래의 몇 리 되는 곳이 홍제원(洪濟院)이다. 홍제원의 남쪽에 작은 언덕이 있고 언덕에는 큰 소나무들이 가득한데 그 위에 예전에는 정자가 있었다. 중국 사신이 옷을 갈아 입던 곳이었는데 정자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이다. 사현(沙峴)의 남쪽에서 모화관까지의 사이에는 좌ㆍ우 양쪽에 키 큰 소나무 들과 밤나무 숲이 겹겹으로 서로 뒤섞이어 덮여 있다. 서울의 활쏘기 하는 이, 전송하는 이, 영접하는 이들이 많이 여기에 모인다. 그러나 쏟아지는 계곡의 급류도 맑게 흐르는 물도 없다. 목멱산(木覔山)의 남쪽 이태원(李泰院)의 들에는 고산사(高山寺)의 동쪽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으며 큰 소나무가 골에 가득하여 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하러 많이 간다. 서쪽으로 가면 진관사(津寬寺)ㆍ중흥사(中興寺)ㆍ서산사(西山寺)가 있고, 골[洞]의 북쪽에는 청량사(淸涼寺)ㆍ속개사(俗開寺) 등이 있으며, 골의 동쪽에는 풍양사(豐壤寺)가 있고, 남쪽에는 안양사(安養寺) 등이 있다. 모두 높은 산과 큰 시내가 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쉴 만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서울에서 가깝지 않기 때문에 놀러 오는 사람이 드물다.《용재총화》

 

 (4)▣ 연려실기술 제6권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임사홍(任士洪)의 현석규(玄錫圭) 배척 ▣

 

동중추(同中樞) 김뉴(金紐)가 소를 올리기를, “대간은 임금의 귀와 눈입니다. 하는 말이 전하에게 미치게 되면 전하께서 얼굴빛을 고치시고, 논하는 일이 의정부에 관계되면 재상도 처분을 기다리게 됩니다. 지금 석규는 군자인지 소인인지는 신이 모르겠습니다마는, 가령 석규가 군자인데 언신이 그를 가리켜 소인이라 했더라도 잘못 추측하고 고집한 데 불과할 뿐입니다. 하물며 석규가 갑자기 등급을뛰어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니 혁혁한 대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언신은 미관(微官)으로서 마음 속의 생각을 그대로 전하의 엄한 위엄 앞에 감히 다투었으니, 말은 비록 맞지 않았더라도 옛사람의 강직한 기풍이 있습니다. 마땅히 이를 포창하여 선비들을 권장해야 될 것이온데 도리어 죄를 주게 되니 신은 앞으로 대간의 마음을 풀어질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임금은 “언신이 스스로 극형을 받겠다고 말했으니, 내가 마땅히 알아서 결정할 것이다. 그대는 물러가라.” 하였다.

 

 14)  三灘先生集에서  (2004. 4. 8. 윤만(문) 제공)

  《출전 : 三灘先生集卷之九 詩》

題金參判子固紐雙溪齋

 

泉石膏肓未易醫。幽居更卜白雲陲。層巒疊疊橫空去。流水潺潺出壑遲。北牗淸風醒醉面。西山爽氣入詩脾。武陵佳景君須記。澗草岩花自四時。

洞府深深草木淸。晴峯當戶轉分明。東溪水入西溪落。上界雲連下界橫。久向市朝成大隱。晚尋丘壑樂餘生。山中宰相眞堪擬。不管人間寵若驚。

屋下淸溪屋上山。穿林小逕入雲關。輞川幽興風塵外。謝傅高懷水石間。恰有靑錢酬酒債。還將綵筆破天慳。琴書左右身無事。轉覺壺中日月閑。

園林瀟洒似禪房。更閘飛泉作小塘。夢裏應成春草句。坐來閑看露荷香。滿簾紅雨桃花落。羃地責煙柳綿長。白石蒼苔溪幾曲。不妨呼酒泛流觴。

一生洔酒任天眞。老去溪山入夢頻。嚼蠟已曾知世味。枕流還欲濯纓塵。蒼髥獨秀千岩雪。翠篠長流一塢春。歲晚結爲三益友。醉鄕長作大平民。

 

 15) 四佳詩集에서   (2004. 4. 8. 윤만(문) 제공)

 

▣ 寄雙溪齋桃花洞 ▣  

北嶽攢靑矗幾層。雙溪流水碧澄澄。桃花萬樹紅如海。未必桃源在武陵。

《출전 : 四佳詩集卷之五十一第 二十四 詩類》

 

16) 河西先生全集  (2004. 4. 8. 윤만(문) 제공)

 

▣ 雙溪齋。有接房禮會。得一絶以示。▣

紅綠嬌春澗壑深。踏靑高會總冠衿。旅窻寥落輕寒逼。獨望天涯思舊林。

《출전 : 河西先生全集卷之七 七言絶句》

 

 17) 三灘 李承召 墓誌  (2004. 3. 4. 윤만(문) 제공)

 

有明朝鮮純誠佐理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參贊兼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弘文館提學,陽城君贈諡文簡公墓誌。[金紐]

 

公諱承召。字胤保。姓李氏。陽城人。有諱沃。官至資憲留後司留後。諡靖節公。靖節生諱思謹。通政海州牧使。生諱蒕。是爲公考。肥遯不仕。以公勳。贈補祚功臣崇祿議政府右贊成。妣泰安李氏。通政,司諫院左司諫薈之女也。嘗夢龍異有娠。於永樂壬寅十二月戊子。生公。髫齔異凡兒。稍長。自知讀書。力學爲文辭。年十七。中進士試。歲丁卯春。及第。連魁三闈。世宗奇之。特授集賢殿修撰。秋。又擢重試。陞校理。遂拜應敎。轉司憲掌令,直集賢殿,世子弼善。轉成均大司成。進階通政。歷吏,戶,禮,刑四曹參議。己卯。如京師。庚辰。加嘉善,藝文提學兼成均司成,世子賓客。乙酉。觀察忠淸道。有惠政。丙戌冬。丁內外艱。服闋。拜禮曹參判,同知春秋館事,藝文提學。己丑冬。今上卽位。策勳賜純誠佐理功臣之號。封陽城君。辛卯。特階資憲。陞判書兼經筵。餘如故。自此常帶館閣。丁酉。入議政府。爲右參贊。明年。復長春官,弘文館提學。庚子。轉吏曹判書。國家將奏請中宮誥命。弓角新路。選重臣充使副使。拜辭日。副使以事被劾。上特命公代之。重其事也。復爲右參贊。及還。加正憲。辛丑。復長銓曹。壬寅夏。移刑曹。冬。特加崇政。拜左參贊。癸卯。遘疾。今成化甲辰正月戊戌。卒于家。享年六十三。訃聞。上悼甚輟朝。官庀喪事。遣使致祭。越三月廿七日甲寅。葬于果川縣治之北果谷洞坎坐離向之原。公狀貌端正。美鬚髥。莊重寡言。望之儼然。人一見。知其爲守道君子。而性溫仁淸簡。居官遇事。一循義理。不爲崖異。至於燕居。親朋至則必置酒酬酢。渾是一段和氣。人未嘗見其有喜慍之色。公少長於海州之三灘。釣魚養親。欲以終身。又念人子之道。莫急於顯揚。則乃出遊場屋。擢壯元。移孝於國。揚歷淸要。致位峻秩。雙親尙亡恙。紆金拖紫。萊舞於庭。親逝之後。臧獲財產。多分與諸弟。自取甚薄。宗族稱焉。博通經史。爲詩文。精深平淡。森嚴有法度。膾炙人口。累典貢擧。所得多聞人達官。再秉銓衡。門無雜賓。嘗以知禮。久在南宮。雖島夷野人。亦莫不起敬焉。公名高望重。爲世大相。而嗣子只以例補西班。旣歿。家無餘資。初公之病也。上遣中使問侯。御醫賜藥。交道不絶。公平生大節與夫哀榮終始。蓋如此。夫人鄭氏。嘉善同知中樞忠碩之女。生三男一女。長曰煕。司果。次煦。次晟。皆未娶。女適成均學正李孟思。司果娶郡守朴櫎之女。生三男一女。皆幼。學正生二男三女。皆幼。皇明成化二十年甲辰三月二十七日。嘉善大夫前吏曹參判金紐子固。略誌。

《出典 : 三灘集 三灘墓誌》

 

 18) 해동잡록에서 (2005. 3. 30. 태서(익) 제공)

 

김뉴와 김수녕 두 선조님의 만남

해동잡록 3 본조(本朝)

조혜(趙惠)는 자호(自號)를 시재(詩齋)라 하고 즐겨 시를 지었으나 잘하지 못하였다.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에게 주는 시에 이르기를,

노루는 도망쳐서 산 밖으로 가고 / 獐逃山外去

고기는 물속에서 깊이 잠겼구나 / 魚在水中沈

하였는데, 김금헌(金琴軒 이름 유(紐))이 참판(參判)김수녕(金壽寧)에게, “이 시 어떻소.” 하고 물었다. 때마침 가뭄이 들어 있었다. 김이, “《시재집(詩齋集)》을 불태워 버리면 비가 올 것이다.” 하였다.

 

 19) 쌍계재 금헌기(琴軒記) -김수온(金守溫)  (2005. 3. 31. 영환(문) 제공)

 

금헌기(琴軒記) ---김수온(金守溫)

무릇 선왕(先王)이 세상에 남기어 세운 교화는 찬란하고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대강령은 예(禮)와 악(樂)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에 대한 기록은 이대(二戴 대덕(戴德)ㆍ대성(戴聖)) 외에 무려 수천여 가(家)를 헤아릴 수 있으니, 그 연혁(沿革)도수(度數)의 변천에 있어서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되었는데, 악에 이르러는 전하는 기록이 아주 적다. 본시 예ㆍ악이란 두 가지가 서로 본말(本末)이 되고, 체(體)ㆍ용(用)이 되어 어느 한쪽도 폐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후세에 예ㆍ악을 말하는 이가 유독 예만 자상하게 하고 악은 빠뜨린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대개 악이란 성음(聲音)일 따름인데, 청탁(淸濁)ㆍ고하(高下)를 두고 이름이니, 이는 바로 성정(性情)을 체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청탁ㆍ고하의 빠르고 느림을 어찌 언어나 문자로 형용할 수 있으며, 성정의 발하는 묘리는 또한 바람을 잡고 우레를 따라 가는 것 같아서 비록 자유(子遊)ㆍ자하(子夏)나 반고(班固)ㆍ사마천(司馬遷)더러 글월을 지으라 해도 역시 그대로 똑같이 형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개 그 사람이 없어지면 성정의 도(道)도 따라서 없어지는 것이니, 옛 악(樂)이 오늘에 전하지 않는 것을 괴이히 여길 것이 없다.

 

무릇 악의 소리는 사(絲 현악(絃樂))보다 더한 것이 없고, 사의 소리는 거문고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거문고는 진실로 즐길 만한 것이다. 내가 다른 예술은 하나도 배울 겨를이 없었지만 유독 거문고에 있어서는 즐긴 적이 여러 해였다. 그러다 서울에 와서 김자고(金子固)군과 더불어 벗이 되었는데, 김군은 거문고에 능란하였다. 하루는 그 집을 찾아가니 김군은 술을 권하고 조금 있다가 빙긋이 웃으며 말하기를, “소생이 지금 선생의 듣고자 하시는 것을 들려드리기 위하여 한번 타 보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은갑(銀甲)을 손가락에 끼고 주휘(珠徽)를 죄어서 궁성(宮聲) 두어 가락을 타니, 봄 하늘의 구름이 뭉게뭉게 공중에 피어나는 듯하고 넘실넘실 훈훈한 바람이 들판을 스쳐가는 듯하다가, 갑자기 변하여 솟구쳐 올라서 빠른 뇌성과 소나기가 산악을 뒤흔드는 듯하고, 놀랜 파도와 큰 물결이 천지에 출렁거리는 듯하여, 대개 사람으로 하여금 뒤로 물러나서 머리칼을 꼿꼿이 서게 한다. 차차 음절(音節)이 분명한 채 여운을 남기어[皦如繹如]주D-001

 

한 곡조를 마치고 나면 또 바람이 잠잠하고 물결이 가라앉으며 하늘이 개이고 햇볕이 빛나는 것 같으니, 그 근심이 깊고    생각이 먼 것은 순(舜)ㆍ문왕(文王)ㆍ공자(孔子)의 유음(遺音)인 동시에 숭고하고 담박한 맛주D-002이 대개 당우(唐虞)시대나 삼대(三代)시대의 천지에 있는 듯하다. 아, 거문고의 도가 이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자고(子固)가 옛법에만 구애되지 않고 마음에 얻은 것이 손에 나타난 것이다. 이를테면 슬퍼해도 상(傷)하지 아니하고 즐거워도 음탕하지 않은 것은 또 내 마음의 성정의 바른 것에 근본하였기 때문에 그 성음(聲音)의 보(譜)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다. 어찌 처음부터 그 법이 어느 뉘게서 전해 받은 것이겠는가. 모두가 스스로 터득하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아, 예와 악은 한 곬이다. 예는 공경을 위주하고 악은 화평을 위주하는데, 그 화평과 공경은 바로 이 마음을 두고 이른 것이니, 예가 공경을 위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악이 화평을 위주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요순(堯舜) 이래로 크게는  조정에서 군신의 사이에, 작게는 부부사이에 어찌 하루인들 예을 떠날 수 있었겠는가. 누구나 앉고 서고 절하고 부복(俯伏)하는 데 있어 나는 문(文 절도(節度))을 있다고 말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지만, 이제(二帝)ㆍ삼왕(三王)이 예악으로 거룩한 정치를 이룬 것을 마침내 다시 볼 수 없는 즉, 어찌 예는 위의(威儀)도수(度數)의 말단에 나타나는 것이라 쉽고, 악은 정신 심술(心術)의 은미한 데 근본한 것이기에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예는 전하는 것이 많고 악은 전하는 것이 적게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자고씨에게 깊이 느낀 바 있다. 나는 비박(鄙薄)한 자질로 성균(成均)의 예(藝)를 맡아보고 있는데, 옛날엔 사도(司徒)가 주자(冑子)주D-003를 가르쳤으니 곧 악을 맡은 직이다. 그런즉 예ㆍ악의 성쇠에 있어 내가 어찌 막연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나의 한 말을 간추려 기록해서 자고의 금헌(琴軒)에 기(記)를 하는 바이다

 

[주D-001]분명한 …… 남기어[皦如繹如] : 《논어》 〈팔일(八佾)〉에 나온 말인데, 그 주에, “교여(皦如)는 음절(音節)이 분명하다는 말이고, 역여(繹如)는 음절이 서로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였다.

[주D-002]근심이 …… 담박한 맛 : 구양수(歐陽修)의 글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03]주자(冑子) : 즉 국자(國子)로,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자제를 말한 것이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기(夔)여, 너를 명하여 악(樂)을 맡게 하노니 주자(冑子)를 가르쳐라[夔命汝典樂 敎冑子].” 하였다

 

 20) 용재총화에서-쌍계재 나의 즐거움(쌍계재 김뉴) (2005. 4. 21. 영환(문) 제공)

 

전략

세조가 항상 재추(宰樞)와 문무사(文武士)를 불러 매일 치도(治道)를 강론하는 일을 일과로 삼았다. 하루는 임금이 오래 나오지 않아서 여러 신하가 경희루 밑에 나아가 명을 기다리 는데 최한량(崔漢良) 군이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말하기를, “오랫동안 역마를 타지 못하니, 마음이 답답하도다.” 하니, 정국형(鄭國馨)이 “군이 봉사(奉使)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였다. 최한량이 말하기를, “봉사의 즐거움이 많으나 이별하는 괴로움도 또한 깊다. 춘풍의 아름다운 계절을 당하여 준마를 타고 달려 명주(名州)로 들어가면 좌우의 긴 소나무와 높은 전나무는 큰 길에 그늘을 이루게 하여 십여 리를 연하였고, 팔뚝을 반쯤 내놓은 소매 짧은 푸른 옷 입은 나장(羅匠)이 쌍쌍으로 앞을 인도하고, 초금[笳]과 피리 소리가 어울리고, 말이 날뛰어 그치지 않으며 역마꾼이 고삐를 잡아 달리며 대문 밖에 이르러서는 소라처럼 머리 딴 계집[螺鬟] 수십 대(隊)가 길 왼쪽에 엎드려 혹은 머리를 쳐들어 우러러보는 자도 있다. 나는 이때에 보지 않은 체하고 말에서 내려 상방(上房)으로 들어가서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 하기를, ‘오늘밤에는 누구하고 짝하여 잘고.’하다가 기생이 과실 소반을 받들고 들어오면 나는 또한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가할까 아니할까.’하여 반신반의하다가 얼마 있다가 주관(主官)이 찾아와서 문안을 드릴 때, 동헌(東軒)에 앉아 술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술잔을 주고받고, 내가 일어나 술을 부어 돌리면 기생이 술을 받들고 들어오는데, 그 사람이 보기 싫게 생겨서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답답하고 탐탐치 않아 부끄러워서 읍의 산천이 모두 빛을 잃고 좌우의 사람을 볼 때 모두 몽둥이로 때리고 싶다. 그 사람이 아름다워서 마음에 들 것 같으면 주관의 거동이 모두 공황(龔黃)주D-008의 행위와 같아서 지붕 위의 새도 또한 영리한 뜻이 있는 것 같았다. 며칠을 머무는 동안 낮에는 술에 고단하고 밤에는 잠자리에 피곤하여 정신이 흐릿하고 분명하지 아니하여 가만히 스스로 생각하되, ‘이미 편안함이 없으니, 오래 머무르면 병을 얻을 것이다.’하여 이때야 비로소 떠날 마음이 생겨 팔뚝을 베고 흐느껴 울어 눈이 퉁퉁 붓게 된다. 주관이 문 밖에 자리를 펴고 아름다운 노래 몇 가락에 소매를 당겨 술을 권하여 전송할 때, 부득이 말에 올라타고 떠나면서 해를 우러러보면 노랗기만 하고 빛이 없다. 말 위에서 비몽사몽하는 사이에 그 사람이 웃으면서 훌쩍 나타나서 길가에 앉아 있는데, 눈을 문지르고 보면 누런 띠[茅] 숲이요, 그 사람이 또 길가에 앉았거늘 눈을 문지르고 보면 곧 밤나무 숲이요, 귀에 가득찬 바람 소리와 물 소리가 모두 노래하며 풍류 잡는 소리다. 날이 저물어 역(驛)에 투숙하면 연기가 쥐구멍에서 나고, 참새가 소나무 끝에서 지저귄다. 완악한 종이 농을 열어 자리를 펴면 나는 턱을 받치고 앉아서 만단수회(萬端愁懷)를 어찌 다 측량하여 헤아릴 수 있으리오.” 하였다.

 

정국형이 말하기를, “군이 봉사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아는구나. 남아가 이르는 곳마다 잘 놀고 즐겁게 지내겠거늘 하필 외방(外方)이겠느냐. 내가 겨울에 검은 돈피 갖옷을 입고, 푸른 모직으로 짠 모자를 쓰고, 훌륭한 말을 타고 은빛 나는 좋은 매를 팔뚝에 얹고, 누런 개 수대(數隊)가 따라오고, 뒤에는 기생을 태우고 가서 산에 올라 꿩을 조을 때 매가 꿩을 잡아 말 앞에 떨어뜨리면 사람들이 다투어 모인다. 골짜기 시냇가에 앉아서 마른 나무 가지를 태워 꿩을 굽고 계집이 은바가지로 술을 따라 마시기를 권할 때 아래로 종에 이르기까지 남은 것이 돌아가는지라, 날이 저물어 올 적에 날리는 눈[雪]이 얼굴을 치는데, 반은 취하여 고삐를 잡아당겨 돌아오니 이는 참으로 행락(行樂)의 즐거움이니라.” 하였다.

 

이수남(李壽男)군은 말하기를, “나는 관청 일을 마친 뒤에 친구가 잔치하고 즐기는 곳을 찾아 기생을 끼고 앉아서 실컷 희롱하다가 밤이 깊어서 먼저 나와 기생과 더불어 같이 돌아오되 혹은 기생의 집에 같이 가고, 혹은 아는 사람 집으로 가서 비록 이불과 베개가 없으나 둘이서 옷을 벗고 같이 누우면 그 즐거움이 얼마나 지극한고. 나날이 이와 같이 하되 항상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 만약 불법(佛法)으로 말하자면 내생에 호관(壺串) 수말[牡馬]이 되어 수십 마리 암말을 거느리고 마음대로 놀고 희롱하기를 바라니, 이것이 나의 즐거워하는 바이다.” 하였다.

 

김유(金紐)자고(子固)는 말하기를,

“나는 친구를 역방(歷訪)하려고 하지 않으니 내 집이 족히 손님을 모실 만하고, 나의 재산이 잔치를 차림에 족하여 항상 꽃 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에 아름다운 손님과 좋은 친구를 맞아 술통을 열고 술자리를 베풀어 이마지(李亇知)가 타는 거문고와 도선길(都善吉)의 당비파 (唐琵琶)와 송전수(宋田守)의 향비파(鄕琵琶)와 허오(許吾)가 부는 피리와 가홍란(駕鴻鑾)과 경천금(輕千金)의 창가로 황효성(黃孝誠)이 옆에서 지휘하고, 독주하기도 하고 합주하기도 하며 이때에 손님과 더불어 술을 부어 서로 주고받으며 마음껏 이야기하고 시 짓는 것이 나의 즐거워하는 바이다.” 하였다.

 

달성이 옆에서 듣고 말하기를, “최군은 방탕하고, 정군은 호걸이고, 이군은 음특(淫慝)하고 김군은 질탕(跌宕)하다.” 하고, 또 좌우에게 묻기를, “제군도 역시 즐거워하는 바가 있느냐.” 하니, 불기(不器)권호(權瑚)가 말하기를,

 

“나는 시골에서 생장하여 물고기 잡는 것으로 업을 삼았습니다. 서너 사람 친구와 더불어 시냇가에 가서 긴 그물로 시내의 위아래를 막고 옷을 벗고 짧은 고의만을 입고 손수 조그마한 물고기 그물을 가지고 이리저리 고기를 몰아 들어올릴 때마다 들기만 하면 은빛 비늘이 번득거려 그물 위에 빛납니다. 이때에 보리밭에 난 순무를 캐고 또 여뀌의 열매를 거두어 장을 끓이고, 겨자를 거르며 혹은 회(膾)를 만들고 혹은 끓이고 고기를 가득 차려내 주린 배를 잠깐 사이에 부르게 하는 것이 내가 즐거워하는 바입니다.” 하니,

 

달성이 말하기를, “한가하고 자적(自適)한 일이로다.” 하였다. 사예(司藝) 유희익(兪希益)이 마지막으로 대답하기를, “내가 즐기는 바는 여러분의 일과는 다릅니다. 해가 긴 여름철을 당하여 밤나무 그늘 밑에 앉아 맑은 바람이 스스로 불어올 때, 그 가운데 자리를 깔고 《주역》ㆍ《중용》ㆍ《대학》을 읽는 것이 내가 즐거워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달성이 말하기를,

 

“옳기는 옳은 일입니다만 남아가 세상에 나서 어찌 이와 같이 괴로워야만 되겠느냐.” 하니, 자리에 있던 사람이 모두 웃었다. 이때에 자순(子順)남제(南悌)가 전자(篆字)를 잘 쓰므로 불려와서 곁에 있다가 바야흐로 도전(圖篆)을 할 때 여성군 (驪城君)민발(閔發)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흰 구름과 같은 사후(射帿)를 청산 녹수 사이에 펴고 네 개의 화살을 끼고 들어가서 포장 과녁 쏘기를 갖다대는 것같이 하여, 해가 다하도록 살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의 능한 바요, 큰 멧돼지가 갈대 숲 사이에서 이빨 소리를 내며 울 것 같으면 말을 달려 들어가서 한 화살로 죽여 넘기는 것도 내가 또한 능한 바요, 몹시 더울 때에 누에 올라서 얼음을 밥에 섞고, 콩가루로 비벼서 한 주발을 거뜬히 다 먹어치우는 것도 내가 또한 능한 바이나, 이와 같이 글자 쓰는 묘한 재주는 백번 죽었다 깨나도 나는 할 수 없다.” 하였다

 

21) 사가집 속의 쌍계재공 관련 시문 (2007. 3. 10. 은회(익) 제공)

 

(1)사가시집 제 4 권 .  시류(詩類)    

금헌(琴軒). 상사(上舍) 김자고(金子固)를 위하여 짓다.

 

음악 감상은 정히 말을 완상하기와 같아서 / 賞音正如賞馬方

암컷 수컷 검고 누른 데에 있지 않거니와 / 不在牝牡不驪黃

평소의 가슴속엔 태고심을 간직했기에 / 生平胸中太古心

두 귀로 번화한 소리를 듣기 싫어했었네 / 兩耳厭聽繁華音

통월과 남훈은 멀어서 아득하기만 하고 / 洞越南薰夐以邈

대아는 사람이 없어 다시 짓지 못하는데 / 大雅無人不復作

김생은 통달한 이로 거문고의 명성 높아 / 金生達者以琴名

나를 위해 궁상의 소리를 한번 연주하니 / 爲我一鼓宮商聲

생각 깊고 뜻이 원대해 자연에 부합하여라 / 思深意遠合自然

득수 응심이라서 말로 전할 바가 아니요 / 得手應心非言傳

억양의 무궁한 변태가 하도 여유작작해 / 抑揚變態能裕如

남긴 소리 가냘퍼라 삼탄의 나머지로세 / 遺音嫋嫋三嘆餘

일생을 언건 뇌락한 나의 가슴속을 씻어주고 / 洗我百歲偃蹇磊落之襟期

만고에 희이 담박한 나의 먼 생각을 일으키네 / 起我萬古希夷淡薄之遐思

세간의 쟁적들은 얼마나 떠들어대는고 / 世間箏笛幾紛鬨

차마 개구리가 봉황 소리 어지럽히게 둘쏜가 / 忍使䵷黽亂鳳凰

공자는 어찌하여 고기의 맛을 몰랐던고 / 孔聖何爲肉不味

나도 이 곡조 듣고 소리 높이 감탄하노라 / 我聞此曲發高喟

아 기아가 한번 간 지 지금 그 얼마이던고 / 嗚呼期牙一去今幾日

거문고 줄 끊어져 아양 소리가 나질 않네 / 峩洋無聲絃斷絶

나에게 난교 삼백 냥이 있으니 / 我有鸞膠三百兩

그대 거문고 줄 이어 여운을 떨치게 하련다 / 爲君一續振餘響

 

(2)자고(子固)의 집에 소장한 화족(花簇)에 제하다.

대사의 온갖 꽃들은 여전히 번화하건만 / 百花臺榭舊繁華

시인은 자꾸 늙어감을 어찌한단 말인가 / 爭迺詩人老去何

꽃 속에 참다운 운치 있는 것이 반가워라 / 花裏喜逢眞韻在

풍류에 끌려 어느덧 오사모를 정제하였네 / 風流不覺整烏紗

 

(3)김 자고(金子固)의 초청을 받고 그의 집에 가니, 간단한 주연을 베풀어 대접하므로, 취한 뒤에 짓다.

좋은 날에 나는 여가가 많아서 / 勝日多餘暇

능히 자네 집을 찾아올 수 있었네 / 能來問子家

못의 연꽃은 비를 후북이 맞았고 / 池荷經雨足

시내 버들은 바람에 비끼었는데 / 溪柳受風斜

미친 나그네는 술 마시며 즐기고 / 狂客銜杯樂

미인들은 빽빽이 앉아 노래하누나 / 妖姬密席歌

내일 아침에 술이 다 깨고 나면 / 明朝醒已盡

이 흥취를 정히 어떻게 할거나 / 此興定如何

 

(4) 자고(子固)의 집에서 크게 취하여 돌아오다. 2수  

공명 위해 십 년 동안 장안을 분주하노라니 / 功名十載走長安

파리한 말 벌벌 떨어라 뼈가 올근볼근하네 / 瘦馬凌兢骨似山

해진 모자 가죽신 차림의 어느 곳 나그네가 / 破帽短靴何處客

또 가랑비 속에 소단의 집을 들렀단 말인가 / 又乘微雨過蘇端

집이 남당 길목 제오교의 근처에 있는데 / 家在南塘第五橋

지금 다시 명원의 영광된 초청을 받았네 / 名園今復見榮招

전신이 두보라고 사람들은 비웃지 마소 / 前身杜甫人休笑

먹 찍어 시 쓸 땐 술자리의 호걸이라오 / 點筆題詩酒半豪

 

[주D-001]해진 …… 말인가 : 두보의 우과소단(雨過蘇端) 시에, “첫닭이 울자 비바람이 몰아치니, 오랜 가뭄 끝에 비 또한 좋고말고. 지팡이 짚고 진흙탕 길에 들어라, 먹을 것 없는 게 날 일찍 일어나게 했네.〔鷄鳴風雨交 久旱雨亦好 杖藜入春泥 無食起我早〕”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초청을 받고 친구의주연에 참석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5) 앞의 운(韻)을 사용하여 또 자고(子固)에게 부치다.

덧없는 인생 허둥지둥 또 새해를 맞으니 / 浮生草草又新年

세상일 어그러지매 망연자실할 뿐이네 / 世事蹉跎只惘然

눈 빛은 인일 뒤에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 雪色全消人日後

매화는 상원 전에 벌써 움이 트려 하누나 / 梅花欲動上元前

새그물 칠 만한 문엔 누가 능히 이르랴만 / 門堪羅雀誰能到

종이엔 좋은 술 있어 손을 맞을 만하다네 / 樽有浮蛆客可延

불우한 내가 지금 무얼 얻은 게 있을까만 / 蹭蹬吾今何所得

좋은 시는 그래도 삼 년 가까이 얻었다오 / 好詩猶或近三年

 

(6) 김자고(金子固)를 방문하려면서 먼저 이 시를 부쳐서 노자반(盧子胖)을 맞이하여 함께 담화를 나누다.

인생이 누가 악의로 침범하는 일 있으랴 / 人生非意孰相干

이웃과 약속하여 왕래나 하고플 뿐이네 / 有約同鄰擬往還

열자가 어찌 남곽을 못 만날 것 있으리오 / 列子何須阻南郭

두릉은 이미 소단에게 기꺼이 들렀는걸 / 杜陵已喜過蘇端

한가함 보낼 계책은 바둑 두는 일이지만 / 供閑有策碁先拂

흥취는 풀 길 없으니 술이나 즐겨야겠네 / 遣興無媒酒可懽

또 묻노니 옥천은 함께 가지 않으려는가 / 且問玉川相就未

쪽지 받고 여기로 오는 것도 무방하련만 / 不妨折簡此追攀

 

[주C-001]노자반(盧子胖) :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가 자반인 노사신(盧思愼)을 가리킨다.

 

(7) 김자고(金子固)가 자기 집에서 바둑을 두자고 나를 초청하면서 먼저 시를 부쳐왔으므로, 즉시 차운하여 희롱하다.

세상일이 연래에 기교함은 새로워졌고 / 世事年來機巧新

예로부터 당국자가 오히려 헷갈렸었지 / 由來當局尙迷神

그대는 승패가 모두 운수소관이라지만 / 君言勝敗皆關數

나는 지고 이김이 사람에 달렸다 하노라 / 我噵輸嬴只在人

개보는 인연 따라 장난을 즐겼을 뿐이요 / 介甫隨緣聊作戱

사안의 별장 내기는 친함도 안 꺼리었네 / 謝安賭墅不嫌親

우연히 공사가 없어 내 의당 방문할 테지만 / 偶無公事宜相訪

바둑 소리가 온 이웃을 진동할 게 염려로세 / 只恐楸聲震四鄰

 

[주D-001]예로부터 …… 헷갈렸었지 : 옛 속어에, “곁에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은 세심하고, 직접 바둑을 두는 사람은 판단이 헷갈리게 된다.〔傍觀者審 當局者迷〕”고 한 데서 온 말이다.

 

(8)김자고(金子固)의 임당(林塘)에서 꽃을 완상하며 취하여 돌아오다.

숲 속의 연못이 참으로 절경이라 / 林塘眞絶勝

서로 마주해 한참 동안을 앉아서 / 相對坐移時

이미 석 잔 술에 거나히 취하고 / 旣醉三杯酒

또 한 판의 바둑까지 져버렸구려 / 還輸一局碁

석류꽃은 저물녘에 환히 빛나고 / 榴花明薄暮

연꽃 기운은 작은 못을 엄습하네 / 荷氣襲方池

다시 기쁜 건 같은 마을에 살면서 / 更喜同閭閈

다만 시로써 서로 교유함일세 / 交遊只有詩

 

(9) 다시 자고(子固)의 운에 차하다.

풍류 고상한 귀공자의 댁에서 / 風流公子宅

늙은이와 기약 없이 만난 때로다 / 邂逅老翁時

취하면 금술잔 휘둘기 좋아하고 / 醉愛揮金椀

한가하면 함께 바둑도 두었는데 / 閑同下玉碁

청담할 땐 불주로 먼지를 털고 / 淸談塵拂麈

묘한 시구는 풀이 못에 났었지 / 妙句草生池

비 올 땐 소단의 집 들르기 좋아 / 雨過蘇端好

노두의 시를 자주 읊조린다오 / 頻吟老杜詩

 

(10) 재차 자고(子固)에게 부치다.

새로 지은 화려한 정자는 특별히 서늘해 / 新構華亭特地涼

훈훈한 남풍이 자주 심장을 불어대겠네 / 南薰陣陣沃心腸

열 이랑의 연꽃들은 씻은 듯이 화려하여 / 荷花十頃明如拭

온종일 읊조리자면 향기가 코를 찌르리 / 盡日閑吟擁鼻香

 

맑게 서서 우뚝한 게 더없이 어여뻐라 / 淨植亭亭抵死憐

큰 놈은 항아리 같고 작은 놈은 돈닢 같네 / 大如甕盎小如錢

긴긴 날에 난간 기댄 흥취 한량이 없어 / 日長無盡憑闌興

다시 풍류 놀이로 화려한 배 띄우려 하네 / 更欲風流泛畫船

 

벽통을 누가 동이보다 크게 만들었나 / 碧筒誰使大於盆

맑은 술이 흡사 출렁대는 봄 물 같구려 / 有酒澄澄灩似春

이미 달 밝거든 나 불러 취하기로 했거니 / 已判月明邀我醉

몸 부축할 섬섬옥수가 또 없을 수 있으랴 / 可無纖手爲扶身

 

운금이 활짝 피어 푸른 못에 잠기었어라 / 雲錦離披蘸碧池

향기론 바람 가랑비가 시 짓기 꼭 좋구려 / 香風細雨恰成詩

엷고 짙은 화장을 아무도 알 사람 없으리 / 淡粧濃抹無人解

이게 바로 양 귀비가 말하려는 때이라네 / 政是楊妃欲語時

 

(11) 자고(子固)가 또 채자휴(蔡子休), 일암 상인(一菴上人)과 함께 용산강(龍山江)에서 놀자고 기약하므로, 기뻐서 짓다. 앞의 운을 사용하다.

인정이 하도 번복하여 권세만 붙조아라 / 人情翻覆逐炎涼

세상일이 맘에 걸려 창자가 녹으려는데 / 世事關心欲爛腸

몇 번이나 서린에서 나를 취하게 했던고 / 幾向西鄰謀我醉

무수한 연꽃들이 못에 가득 향기로웠지 / 藕花無數滿池香

 

서호의 뛰어난 경치는 가장 사랑스럽고 / 西湖勝槩最堪憐

명월청풍은 돈을 들여 살 것도 없거니 / 明月淸風不費錢

약속 있어 친구와 함께 흥겨웁게 가거든 / 有約故人乘興去

갈매기 푸른 산 벗 삼아 목란선을 띄우리 / 白鷗靑嶂泛蘭船

 

긴 하늘은 물 같고 달은 동이처럼 둥글어 / 長天如水月如盆

한수의 풍류 즐겼던 지난봄이 생각나네 / 漢水風流憶去春

천지는 끝이 없고 강물은 다하지 않거늘 / 天地無窮江不盡

일생 백년의 몸이 길이 부끄러울 뿐일세 / 一生長愧百年身

 

반드시 풍류가 습지보다 못할 것 없으리 / 不必風流讓習池

고승과 술 친구가 다 시에 능하니 말일세 / 高僧酒伴摠能詩

남궁의 나그네 늙은 것을 어찌 꺼릴쏜가 / 南宮有客何嫌老

춤추고 노래하면 한때의 도움이 될 걸세 / 妙舞狂歌助一時

 

[주D-001]인정이 …… 붙조아라 : 번복(翻覆)은 세인들의 교태(交態)의 반복무상함을 비유한 말이다. 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으면 구름이요 손 엎으면 비로다. 경박한 작태 분분함을 어찌 셀 거나 있으랴.〔翻手作雲覆手雨 紛紛輕薄何須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2) 모진 더위에 퇴청하여 연꽃 완상하는 흥취를 일으켜 자고(子固)에게 부치다.

뜨거운 해 붉은 구름이 풀무질한 화로 같아 / 烈日彤雲鞴火爐

조복을 벗자마자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라 / 朝衣纔脫汗翻珠

부채 바람은 무력하여 두 팔만 수고롭고 / 扇風無力勞雙臂

대자리 물은 서늘하여 한 몸을 의탁하니 / 簟水宜人托一軀

파리가 하도 들레서 잠은 편히 못 자지만 / 苦聒蒼蠅眠未穩

붉은 연꽃만 생각하면 기가 절로 소생하네 / 若思紅藕氣全蘇

문득 부러운 것은 서쪽 이웃 숨은 군자의 / 却羨西鄰隱君子

북창 아래 편히 누워 헌우를 오시함일세 / 北窓長臥傲軒虞

 

[주D-001]대자리 물 : 대자리의 무늬가 마치 물결의 무늬처럼 생긴 것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남당(南堂) 시에, “땅을 쓸고 향 피우고 문 닫고 자노라니, 대자리 무늬는 물 같고 장막은 연기 같네.〔掃地焚香閉閣眠 簟紋如水帳如煙〕”라고 하였다

 

(13) 어제 편지를 받고 인하여 한 절구를 지어서 자고(子固)를 희롱하고 또 자조(自嘲)하는 바이다.

젊은 시절 청루에서는 의기가 호탕하여 / 少日靑樓意氣豪

초궁의 섬세한 허리를 손바닥에 놀렸지 / 掌中纖細楚宮腰

문인은 번소 기를 줄을 스스로 알거니와 / 文人自解藏樊素

시객은 설도를 사랑함이 어찌 해로우랴 / 詞客何妨愛雪濤

무산의 운우가 마음 쓰임을 혐의치 마소 / 巫山雲雨休嫌惱

연못의 한 쌍 원앙이 한사코 불러주는걸 / 蓮沼鴛鴦苦見招

만년에 기녀를 둘 수 있다고 누가 말했나 / 誰道殘年能畜妓

동산은 적막하고 두 귀밑만 이미 셌는걸 / 東山寂寞已雙毛

 

[주D-001]초궁(楚宮)의 …… 놀렸지 : 《한비자(韓非子)》 이병(二柄)에, “초 영왕이 가는 허리의 미인을 좋아하여 국중에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楚靈王好細腰 而國中多餓人〕” 하였고, 또 한 성제(漢成帝)의 후(后) 조비연(趙飛燕)은 몸매가 아주 가냘파서 손바닥 위에서도 능히 춤을 출 수 있었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14) 11일 밤에 오 거사(吳居士), 채자휴(蔡子休)와 함께 자고(子固)의 집을 방문하여 상련(賞蓮) 연구(聯句)를 짓고 새벽에야 집에 돌아와서 다시 시를 지어 기록해서 오군(吳君)에게 보이고 아울러 자고에게 부치다.

 

같은 이웃과 약속하여 서로 손잡고 가니 / 有約同鄰携手來

연꽃과 달빛이 둘 다 아름답기만 했었지 / 荷花月色兩佳哉

누가 능히 염계의 설을 지을 줄 알런고 / 誰能解著濂溪說

나는 유독 태백의 술잔만 자주 기울였네 / 我獨頻傾太白杯

취한 뒤에 담론한 것은 옥가루가 날리고 / 醉後談論霏玉屑

앉았으매 천지는 온통 구슬집이었는데 / 坐來天地認瑤臺

정녕코 금곡에 의거하여 벌이 있을 터라 / 丁寧有罰依金谷

온 좌중이 시 짓기를 벼락 치듯 재촉했었지 / 滿座詩成霹靂催

 

어둑히 드리운 버들이 얼굴 차갑게 스칠 제 / 垂柳陰陰拂面寒

일시에 사람들은 옥난간에 기대 있었는데 / 一時人倚玉闌干

뉘 집인지 젓대 소리는 구름 위에 오르고 / 誰家長笛穿雲響

이곳의 혜금은 온 좌중이 다 좋아하였지 / 是處嵇琴滿座懽

대자리엔 바람 일어 용 비늘이 섬세한 듯 / 風生竹簟龍鱗細

연 줄기의 술잔은 코끼리 코가 구부정한데 / 酒酌荷筩象鼻彎

달 넘어간 깊은 밤 촛불 켜고 놀고자 할 제 / 月落四更將秉燭

풍류와 아름다운 흥취 줄어들지 않았었지 / 風流佳興不闌珊

 

[주D-001]염계(濂溪)의 설(說) : 염계는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의 호이고, 설이란 바로 그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을 가리킨다.

[주D-002]태백(太白)의 술잔 : 태백은 이백(李白)의 자인데, 이백이 주호(酒豪)였기 때문에 술을 즐겨 마신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3]옥가루 : 화려한 시문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4]구슬집 : 선경에 있다는 화려한 누대를 말하는데, 전하여 여기서는 정자 주위의 화려한 경치를 비유한 것이다.

[주D-005]정녕코 …… 터라 : 금곡(金谷)은 진(晉) 나라 때 부호로 유명했던 석숭(石崇)의 원명(園名)인데, 석숭이 일찍이 이곳에 빈객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을 때, 각각 시를 지어서 회포를 서술하게 하고 혹 시를 짓지 못하면 술 서 말을 벌주로 마시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만일 시를 짓지 못하면 금곡원의 주수에 따라 벌주를 마시게 하리라.〔如詩不成罰依金谷酒數〕”고 하였다.

[주D-006]뉘 집인지 …… 오르고 : 진(晉) 나라 때 혜강(嵇康)의 친구 상수(向秀)가 혜강이 이미 죽은 뒤에 그의 구택(舊宅)을 지나다가 그 이웃 사람이 부는 젓대 소리를 듣고는, 옛날 혜강과 서로 즐겨 노닐던 일을 추상(追想)하여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옛 친구를 그리는 뜻으로 쓰인다.

[주D-007]혜금(嵇琴) : 진(晉) 나라 때 혜강(嵇康)이 타던 거문고를 말한다. 혜강은 본디 음률에도 밝았었는데, 그가 일찍이 신인(神人)으로부터 성조가 뛰어난 금곡(琴曲) 광릉산(廣陵散)을 전수받았던 데서, 전하여 뛰어난 거문고 솜씨를 의미한다.

[주D-008]연 …… 구부정한데 : 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정각(鄭慤)이 삼복(三伏) 때마다 사군림(使君林)에 가서 피서를 했는데, 항상 큰 연잎에 술 서 되를 담고 연의 잎과 줄기의 사이를 비녀로 뚫어서 술이 줄기를 타고 내려오게 하여, 줄기를 마치 코끼리의 코처럼 구부려서 줄기 끝에 입을 대고 술을 빨아 마시면서 이를 벽통주(碧筒酒)라고 하였다.

 

 (15)지난해 6월 13일에 오 거사(吳居士), 채자휴(蔡子休)와 함께 자고(子固)의 집에서 연꽃을 완상했었는데, 오늘이 정히 6월 13일에 당했는지라, 지난 일을 추억하면서 두어 절구를 읊어 이루어서 기록하여 자고에게 보이다. 4수  

 

지난해 그대 집에 연꽃이 활짝 피었을 땐 / 去歲君家荷政開

연꽃과 달빛이 둘 다 하도 아름다웠었지 / 荷花月色兩佳哉

금년에는 이 흥취마저 또한 저버렸으니 / 今年此興還辜負

이웃 늙은이 우산 쓰고 오라고 불러주려나 / 肯喚鄰翁傘雨來

 

빽빽한 잎 일산처럼 기울인 걸 또 보아라 / 葉密且看傾似蓋

꽃 피어 배보다 큰 것도 일찍이 보았었지 / 花開曾見大於船

알아줄 사람 없으리 내 꽃 찾는 흥취가 / 無人識我尋芳興

염계의 애련설을 이으려고 하는 줄을 / 欲續濂溪說愛蓮

 

고상한 담론이 좌석 압도하는 오 거사요 / 高談傾坐吳居士

절묘한 시구가 사람 놀래키는 채 사군인데 / 妙句驚人蔡使君

그 당시 주인이 화려한 비파 타고 있을 때 / 當日主人彈錦瑟

동쪽 이웃 나그네는 홀로 술이 거나했었지 / 東鄰有客獨醺醺

 

연꽃이 지난해보다 더 많이 피었으니 / 荷開較比前年勝

달빛 또한 응당 이날 밤이 더 쌕쌕하리 / 月亦應從此夜新

옛 연못에서 좋은 모임을 열기만 한다면 / 若使舊塘拚勝會

쇠잔하나마 시 쓸 사람이야 어찌 없으랴 / 題詩落魄豈無人

 

[주D-001]꽃 …… 보았었지 : 한유(韓愈)의 고의(古意) 시에, “태화봉 꼭대기의 옥정에 자란 연은, 꽃이 피면 열 길이요 뿌리는 배만 하다네.〔太華峯頭玉井蓮 開花十丈藕如船〕”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내 …… 줄을 : 염계(濂溪)는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의 호인데, 그가 일찍이 애련설(愛蓮說)을 지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16)자고(子固)가 계집종을 보내와서 안부를 물으므로, 인하여 절구 한 수를 읊어서 부치는 바이다.

이웃끼리 사귀는 정이 날로 점차 성근해라 / 鄰里交情日漸勤

계집종을 늘 보내서 안부를 물어주네그려 / 女奴長遣問寒暄

너를 빙자해 통가의 정의를 말해주노니 / 憑渠爲說通家好

앞으로는 의당 부인께도 알리게 하련다 / 從此宜敎講細君

 

[주D-001]통가(通家) : 대대로 사귀어온 교분을 말하는데, 또는 인친(姻親)의 사이를 말하기도 한다.

 

 (17) 임오년 7월 16일에 채자휴(蔡子休), 김자고(金子固), 신경숙(辛敬叔)과 함께 광진(廣津)에 나가 노는데, 양 반자(楊半刺) 자순(子淳) 도 와서 참여하였다. 5수  

 

임오년 가을 칠월 십육일 광나루 머리서 / 壬秋七望廣津頭

전현을 이어 적벽의 놀이를 하려 하노니 / 擬續前賢赤壁遊

달빛은 정이 많아서 오늘 밤이 하 좋은데 / 月色有情今夜好

강물은 끝없이 흘러 어느 때나 그칠는지 / 江流無盡幾時休

높은 노래 젓대 소리엔 교룡이 응당 춤추고 / 高歌長笛蛟應舞

묘한 시구 호쾌한 담화엔 귀신이 시름하네 / 妙句豪談鬼自愁

천고의 영웅들은 아 아득하기만 하여라 / 俯仰英雄嗟渺渺

소선만 유독 풍류를 독차지하지 못하리 / 蘇仙不獨擅風流

 

백사장은 누인 베 같고 물은 기름 같은데 / 白沙如練水如油

경쾌한 말을 타고 와서 다시 배에 오르니 / 快馬歸來更上舟

돛 그림자는 가는 제비와 함께 펄럭거리고 / 帆影飛飛同去燕

노 소리는 삐걱삐걱 잠든 백구를 깨우는데 / 櫓聲軋軋起眠鷗

거센 바람은 새 가을 흥취를 미리 일으키고 / 長風剩借新秋興

작은 비는 저녁 시름을 약간 더하게 하누나 / 小雨纔添薄暯愁

강 언덕에 취해 누워 옷은 반쯤 젖었는데 / 醉臥江皐衣半濕

또 밝은 달 맞이하여 중류에 배를 띄우네 / 又邀明月泛中流

 

방종한 시인은 자첨의 뒤에 처지는데 / 跌宕詩人子瞻後

풍류 고상한 자사는 산간의 앞에 있네 / 風流刺史山簡前

한때의 성대한 일은 즐기는 이 마당이요 / 一時盛事懽娛地

동갑으로 친하던 때는 소장 시절이었지 / 同甲交親少壯年

세월은 그 얼만고 서로 모이고 헤어진 게 / 歲月幾何曾聚散

강산은 이와 같이 또 연련하게 하는구려 / 江山如此更留連

고금의 인물에 대해선 다 공론이 있으니 / 古今人物存公論

우리들의 명성을 함부로 전하게 마세나 / 我輩聲名莫漫傳

 

강정의 고목나무가 용 같은 몸을 드러내어 / 江亭老樹露龍身

열 이랑쯤 짙은 그늘은 만인이 앉을 만하네 / 十畝濃陰坐萬人

소매 가득 청풍에 모시옷은 펄럭이는데 / 滿袖淸風翻白紵

머리 돌려 석양엔 두건을 뒤로 젖혀 쓰고 / 回頭落日岸烏巾

소주 잔 기울이니 향기는 계피와 똑같고 / 盃傾燒酒香如桂

젓가락 밑의 생선회는 은실과 흡사하네 / 箸下纖鱗縷似銀

강산을 두루 바라보매 어제와 다르거니 / 擧目江山非昨日

자주로 잠시 완상하는 걸 사양치 마세나 / 暫時相賞莫辭頻

 

밤새도록 실컷 즐기며 잠을 못 이루어라 / 通宵樂極耿無眠

내일 아침에 또 취해 미칠 뜻이 있음일세 / 有意明朝復醉顚

종남산 바라보며 천천히 노를 옮겨 젓다가 / 望指終南移緩棹

한강 북쪽으로 거슬러 다시 배를 돌리어라 / 流沿漢北更回船

쑥대 깔고 잠깐 앉아 편평한 물을 보다가 / 搴蓬小坐平看水

뱃전 치면서 노래하며 하늘을 쳐다도 보네 / 扣枻高歌仰見天

정녕스런 약속 있으니 부디 기억하게나 / 有約丁寧須記取

명년 오늘 이 강가에서 또 놀기로말일세 / 明年此日此江邊

 

[주C-001]양 반자(楊半刺) : 반자는 주군(州郡) 장관(長官)의 속관(屬官)으로 장사(長史), 별가(別駕), 통판(通判) 등의 관직을 일컫는 말이다.

[주D-001]임오년 …… 하노니 : 여기서 말한 전현(前賢)은 곧 소식(蘇軾)을 가리킨 것으로, 소식이 일찍이 임술년 가을 7월 16일과 같은 해 10월 보름, 두 차례에 걸쳐 적벽(赤壁) 아래의 강에서 객들과 함께 선유(船遊)를 했던 데서 온 말인데,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전적벽부(前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었다.

[주D-002]높은 …… 춤추고 : 소식의 전적벽부에, “이에 술을 마시고 즐거움이 고조에 달하여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로, 맑은 물결을 치며 달빛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도다. 아득한 나의 회포여, 하늘 저 끝에 있는 미인을 그리도다.’라고 하자, 퉁소를 부는 객이 있어 노래에 화답하여 퉁소를 부니, 그 소리가 구슬퍼서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흐느껴 우는듯, 하소연하는 듯하고, 그 여운이 가냘프게 실낱처럼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니, 깊은 골짝에 숨은 교룡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배의 홀어미를 울릴 듯했다.〔於是飮酒樂甚 扣舷而歌之 歌曰 桂棹兮蘭槳 擊空明兮泝流光 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方 客有吹洞簫者 倚歌而和之 其聲嗚嗚然 如怨如慕 如泣如訴 餘音嫋嫋 不絶如縷 舞幽壑之潛蛟 泣孤舟之嫠婦〕”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8) 회포가 있어 자고(子固)에게 부치다.

 세상일로 분주하는데 세월은 유유하여 / 世事驅馳歲月悠

연꽃이 다 시들어 정원 가득 가을이로세 / 芙蓉零落滿園秋

누가 못 안의 물고기의 즐검이야 알랴만 / 誰知池上魚之樂

꽃 앞에서 나비를 시름하게는 말아야지 / 莫使花前蝶也愁

 

[주D-001]누가 …… 알랴만 : 장자(莊子)가 그의 친구 혜자(惠子)와 함께 호수(濠水)의 다리 위에서 노닐 때, 장자가 말하기를, “피라미가 나와서 조용히 노니,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일세.” 하자, 혜자가 말하기를,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19) 한상(韓相)의 막부(幕府)로 부임하는 김자고(金子固)를 보내다. 2수  

원수의 막하는 모두가 영웅호걸이거니 / 元戎幕下總豪英

자네 공명이 이번 길에 있음이 자랑스럽네 / 多子功名在此行

시험삼아 허리에 찬 석 자 칼을 볼지어다 / 試看腰間三尺劍

서로 만나거든 서생이라 말들을 말게나 / 逢人莫說是書生

 

장백산은 높다랗고 흑룡강은 맑디맑은데 / 長白山高黑水澄

되놈들 걱정어린 눈은 가을 매와 흡사하리 / 胡兒愁眼似秋鷹

밧줄을 청하는 게 본디 장부의 일이거늘 / 請纓自是丈夫事

나 같은 백발은 그리 못 한 게 부끄럽구려 / 白首如予愧不能

 

[주D-001]밧줄을 …… 일이거늘 : 한 무제(漢武帝) 때 종군(終軍)이 18세의 나이로 박사 제자(博士弟子)에 선발되고 이어 간대부(諫大夫)에 발탁되었는데, 그가 20세 때에 무제가 남월(南越)을 굴복시키기 위해 그를 사신으로 보내려 하자, 그는 긴 밧줄을 내려주면 남월왕(南越王)을 묶어오겠다고 무제에게 자청했던 고사에서 온 말인데, 그는 곧 남월왕을 잘 설득하여 사명을 완수했으나, 월상(越相)여가(呂嘉)의 반란에 의해 월왕과 함께 그곳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20) 한 원융(韓元戎)의 막하(幕下)로 부임하는 김자고(金子固)를 보내다.

오늘이 바로 남지일인데 / 今日是南至

북으로 가는 그대가 염려되누나 / 念君將北征

험난한 여정은 그 몇천 리이던고 / 關河幾千里

눈보라는 또 먼 길에 몰아치겠지 / 風雪又長程

옛말에 종군을 즐겁다고 했지만 / 古說從軍樂

송별의 정이야 어찌 감당하리오 / 那堪送別情

남아는 뜻을 크게 가져야 하거니 / 男兒當磊落

나도 또한 긴 밧줄을 청해볼라네 / 吾亦請長纓

 

[주D-001]옛말에 …… 했지만 : 삼국(三國) 시대 왕찬(王粲)의 종군시(從軍詩)에, “종군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으니, 누구를 따르는가만 물을 뿐이네. 내가 따르는 이가 무용이 뛰어나면, 어찌 종군의 노고를 오래 시키랴. 상공이 관우 지방을 정벌할 제, 크게 성내어 천위를 떨쳐서, 일거에 훈로를 섬멸하고, 재거에 강이를 항복시켰도다.〔從軍有苦樂 但問所從誰 所從神且武 焉得久勞師 相公征關右赫怒震天威 一擧滅獯虜 再擧服羌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1) 서북(西北)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부임하는 김자고(金子固)를 보내다.

김후는 바로 우리 서도의 주인이로다 / 金侯是我潟主

젊어서부터 문과 무를 다 좋아했었지 / 妙齡好文仍好武

서원의 문하엔 어진 이 얻었다 호칭했으니 / 西原門下號得賢

주리를 신은 문객이 삼천이나 되었는데 / 滿門珠履盈三千

그대는 붓을 던지고 종각을 사모하여 / 君乎投筆慕宗慤

녹록지 않게 모생의 송곳처럼 삐져나왔네 / 毛生穎脫非碌碌

이 때문에 막부의 상객 자리에 앉았으니 / 所以入幕居上頭

국사는 의당 국사로 보답해야 하기에 / 國士當以國士酬

한 밧줄로 항복한 오랑캐의 목을 묶어서 / 一索欲繫降虜頸

북방을 거울처럼 깨끗이 쓸어버리려 하네 / 淨掃朔漠明似鏡

아 장부는 뜻 세우는 걸 귀중히 여기나니 / 嗚呼丈夫貴立志

크나큰 공명을 이와 같이 세워야 하고말고 / 功名磊落當如此

일전의 공명이 만호후에 봉해질 터인데 / 功名一戰封萬戶

허리 사이의 말만 한 금인을 어디에 쓰랴 / 安用腰間印如斗

또 묻노니 지금의 대장이 그 누구던고 / 且問大將今是誰

송조의 위국공 한 태사 같은 분이로세 / 宋朝魏國韓太師

 

[주D-001]서원(西原) : 서원은 청주(淸州)의 고호로, 여기서는 곧 청주 한씨(淸州韓氏)인 한명회(韓明澮)를 가리킨다

 

  (22) 김자고(金子固)의 집에서 춘방(春坊) 연회를 열고 함께 마시자고 나를 초청했으나, 나는 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고 시로써 희롱하다.

 

춘방의 지난 일이 흡사 꿈속만 같아라 / 往事春坊似夢中

한때의 인물은 모두가 영웅이었으니 / 一時人物摠英雄

대궐에 은총 입음은 아침마다 달랐고 / 承恩北闕朝朝異

동궁을 시강하는 건 나날이 똑같았지 / 侍講東宮日日同

새 어른이 연회 베풂은 고사를 이은 것이요 / 新丈開筵傳故事

선생이 부름 받고 감은 남긴 풍도가 있거늘 / 先生赴召有遺風

좋은 연회에 병으로 참석 못 해 한스러워라 / 病餘恨不參高會

아마 사문들 기개가 무지개를 뱉어낼 텐데 / 想見斯文氣吐虹

 

[주D-001]아마 …… 텐데 : 담소를 나누면서 강개(慷慨)한 기개를 떨치거나, 훌륭한 문장을 지어내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23) 김자고(金子固)가 만두(饅頭)를 보내준 데에 사례하다.

 

붉은 통을 처음 열어보니 / 朱榼初開見

만두가 서릿빛처럼 희어라 / 饅頭白似霜

보드라움은 병든 입에 딱 알맞고 / 軟溫宜病口

달착지근함은 쇠한 창자를 보하네 / 甛滑補衰腸

항아리엔 매실 간장을 담았고 / 甕裏挑梅醬

쟁반엔 계피 생강도 찧어 넣었네 / 盤中搗桂薑

어느덧 다 먹고 나니 / 居然能啖盡

후한 뜻을 참으로 못 잊겠구려 / 厚意儘難忘

 

  (24) 김자고(金子固)가 은대(銀臺)의 여러 재상들을 맞이하여 주연(酒筵)을 베풀면서 나를 초청했는데, 나는 병으로 가지 못하고 절구(絶句) 두 수를 읊다.

핫옷을 입고도 아직 새벽 추위를 느끼어라 / 重裘猶覺曉寒生

도성 거리에 작은 비가 아직 안 갠 듯한데 / 小雨天街意未晴

앓고 일어나 봄이 저문 것도 미처 몰랐더니 / 病起不知春已暮

주렴 가득 붉은 꽃잎이 소리 없이 떨어졌네 / 滿簾紅雨落無聲

 

제공은 줄을 이어 화려한 연회엘 가는데 / 諸公袞袞赴華筵

병객은 수불 앞에 길이 재계만 하고 있네 / 病客長齋繡佛前

미인 보내서 갈고로 꽃 재촉케 하지 마소 / 莫遣佳人催羯鼓

응당 한낮의 단잠을 놀래 깨우고 말 걸세 / 也能驚起午時眠

 

[주D-001]병객(病客)은 …… 있네 :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신 소진(蘇晉)이 술을 매우 즐겨 마셨는데, 두보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소진은 수불 앞에서 장기간 재계를 했는데, 취중에는 가끔 좌선을 도피하기 좋아했다네.〔蘇晉長齋繡佛前 醉中往往愛逃禪〕”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5)  자고(子固)가 다시 초청하므로, 가서 장난삼아 절구 두 수를 주다.

삼월이라 온 장안에 꽃은 만발했는데 / 三月長安花滿開

남쪽 집 화려한 연회엘 오라고 초청했네 / 南鄰請赴綺筵來

내 전신이 일용임을 그대는 웃지 마소 / 前身日用君休笑

늙고 병들어 연래엔 술잔을 기휘한다오 / 老病年來諱酒杯

 

홀로 창 앞에 앉아서 그지없이 웃어대라 / 獨坐窓前笑不休

병든 나머지 때론 풍류를 짓기도 하는데 / 病餘時復作風流

계집애가 남쪽 이웃의 연회에서 배워와 / 小娃試學南鄰會

꽃가지를 꺾어다 내 백발에 꽂아주누나 / 爲折花枝揷白頭

 

[주D-001]내 전신이 일용(日用)임 : 일용은 고려 예종(睿宗) 때 시를 잘 짓기로 이름난 강일용(康日用)을 가리킨다. 예종이 일찍이 사루(絲樓)에 임어하여 모란(牡丹)을 완상하면서 문신 56인을 불러 각촉부시(刻燭賦詩)의 규정에 따라 모란시(牡丹詩)를 짓게 한 결과, 주부(主簿) 안보린(安寶麟)이 제일로 뽑혀 견(絹)을 수상하였고, 그 이하도 모두 차등 있게 수상했다. 이때 역시 시를 잘 짓기로 이름났던강일용(康日用)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왕이 그의 시 짓는 모습을 서서 보고 있노라니, 그는 촛불이 다 타가는 무렵에야 “백발의 취한 늙은이는 궁전 뒤에서 구경하고, 눈 밝은 늙은 유신은 난간 가에 기대 있구나.〔頭白醉翁看殿後 眼明儒老倚欄邊〕”라는 일련(一聯)만 겨우 지어 이 초고(草藁)를 소매 속에 넣고 어구(御溝)에 엎드려 있었다. 왕이 환관을 명하여 그 시를 가져다 보고는 탄상(嘆賞)하여 마지않으면서 이르기를 “옛사람이 이른바 ‘못생긴 여자는 얼굴 가득 화장을 하여도, 서시의 반쯤 단장한 얼굴만 못하다.〔臼頭花鈿滿面 不如西施半粧〕’라는 말이 이를 두고 말함이구나.”라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26) 자고(子固)가 단오(端午)에 부친 시에 차운하다. 2수  

창포주 마시고 아침에 약간 취하여 자는데 / 蒲酒朝來小醉眠

숲 너머 아녀들 그네 뛰는 소리가 요란하네 / 隔林兒女鬧秋千

둥근 부채 잠깐 저으매 맑은 바람이 일고 / 乍揮團扇淸風動

모시 적삼 입으니 가랑눈이 연한 듯하네 / 試著輕衫細雪聯

연못 가득한 연잎은 푸른빛이 깨끗하고 / 荷葉滿池新綠淨

비에 젖은 석류꽃은 붉은 송이가 선명쿠려 / 榴花浥雨睌紅鮮

금년에도 아름다운 명절을 즐기지 못하고 / 今年又負酬佳節

애오라지 바둑 두어 지상선이나 배운다네 / 聊復圍碁學地仙

 

연래엔 질병과 늙음이 서로 침범해 와서 / 年來病與老相尋

울적한 정회가 쉬 가슴속에 가득해지네 / 㪍鬱情懷易滿襟

절로 난탕이 있어 새로 머리를 감았거니 / 自有蘭湯新沐髮

창포김친들 없어 고인 마음 못 전할쏜가 / 可無菖歜古傳心

덧없는 인생은 천중절을 몇 번이나 지낼꼬 / 浮生幾度天中節

예전의 늪가에서 읊조림만 슬퍼할 뿐이네 / 往事空悲澤畔吟

인생이 출처를 뜻에 맞게만 하려 한다면 / 出處人生如適意

굳이 조시와 산림을 논할 것이 없고말고 / 不論朝市與山林

 

[주D-001]지상선(地上仙) : 땅 위에 사는 신선이란 뜻으로, 매우 한가로이 지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27) 자고(子固)의 시에 차운하다. 4수  

 

나의 면목이 참으로 이와 같으니 / 面目眞如此

두로를 이미 알 수 있었고말고 / 頭顱已可知

일은 의당 후회가 없어야겠지만 / 事當無後悔

맘은 이미 이전 잘못을 깨달았네 / 心已悟前非

인간 세상은 교교하고도 요요하고 / 人世膠還擾

공명은 교활함이 어리석음 같아라 / 功名黠似癡

어느덧 실의에 빠진 사람이 되어 / 居然成濩落

앉아서 괴로이 시만 읊을 뿐이네 / 正坐苦吟詩

 

게으름과 한가함이 서로 짝했는데 / 慵與閑相伴

병은 응당 늙은이가 스스로 안다오 / 病應老自知

인정은 염량세태가 있거니와 / 人情有炎冷

세상일은 옳고 그름이 없구려 / 世事無是非

시구 찾아 때론 삼매경에 빠지고 / 覓句時三昧

책 돌려줌은 또 한 어리석음일세 / 還書又一癡

굶주려도 글자는 먹을 수 없나니 / 飢來難煮字

유난히 시를 좋아할 것 없다마다 / 不用酷耽詩

 

무쇠는 백번 단련해야 하거니와 / 鐵須百經鍊

황금은 또한 넷이 알 수가 있다오 / 金亦四能知

이젠 연명의 옳음을 깨달았으니 / 今覺淵明是

장차 백옥의 그름도 알아야겠네 / 行知伯玉非

아이에게는 인각의 상서가 없고 / 兒無麟角瑞

아비는 호두의 어리석음만 있으니 / 翁有虎頭癡

스스로 조소하건대 생전의 낙은 / 自哂生前樂

오직 헐후시만 남아 있을 뿐일세 / 唯存歇後詩

 

홀연히 극로인이 되려는 건지 / 忽忽耄將至

깜깜하여 아무것도 모르겠네 / 悠悠昏不知

천 년 만에 돌아온 새도 있었지만 / 千年有鳥有

만사는 말이 아닌 것이 아니라오 / 萬事非馬非

믿는 것은 오직 나의 충심이거니 / 信我惟丹悃

남이야 백치라고 웃거나 말거나 / 從人笑白癡

곤궁하여 아무것도 가진 건 없고 / 窮居無一物

단지 백 편의 시만 있을 뿐이라네 / 只有百篇詩

 

[주D-001]두로(頭顱)를 …… 있었고말고 : 두로는 백발의 쇠한 머리를 말한다. 남제(南齊) 때의 은사(隱士) 도홍경(陶弘景)이 종형(從兄)에게 보낸 편지에 “전에 내가 나이 40세 전후에 상서랑이 되거든 즉시 관직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려고 기약했었는데, 지금 나이 36세에 비로소 봉청이 되었고 보면, 40세의 머리를 알 만하니, 일찍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昔仕宦期四十左右作尙書郞 卽抽簪高邁 今三十六方作奉請 頭顱可知 不如早去〕”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나이 40여 세에 이미 쇠한 것을 의미한다.

 

 (28) 김괴애(金乖崖) 장원(壯元)과 김자고(金子固) 동년(同年)의 구일 등고(九日登高)의 시에 차운하다.

 

그대는 등고할 적에 나는 휴가가 끝나서 / 君正登高我罷休

서산의 즐거운 놀이에 참여하지 못했네 / 西岑高會阻淸遊

용산의 기상으론 옛일을 이었거니와 / 龍山氣象追前事

남간의 풍류 또한 한 가을이 지났구려 / 藍澗風流又一秋

어느 곳 미인을 멀리 등만 바라보았던고 / 何處美人遙見背

당시에 좌객들이 번갈아 머리를 돌렸었지 / 當時座客錯回頭

백발의 오사모 바람에 날림을 꺼려 않고 / 休嫌白髮吹烏帽

웃으며 국화 가져다 좋은 술에 띄웠는데 / 笑把黃花泛碧酒

명절의 즐거운 놀이는 잇기가 어렵거니와 / 勝日懽娛難袞袞

좋은 시절이 적막하고도 지루하기만 했네 / 佳期牢落亦悠悠

희마대서 지은 시는 누가 사씨만 했으랴만 / 詩成戲馬誰如謝

고 자를 쓰지 않음은 유씨와 흡사했었지 / 字不題餻酷似劉

수유에게 당부하노니 길이 건재하거라 / 說與茱萸長健在

만년 내내 중구일마다 다시 볼 수 있도록 / 更看重九十千周

 

[주D-001]등고(登高) : 등고회(登高會)라는 뜻이다. 옛날 풍속에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는 사람들이 붉은 주머니에 수유(茱萸)를 담아서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菊花酒)를 마셔 재액(災厄)을 소멸시켰다고 한다. 주머니에 수유를 담은 내력은 비장방(費長房)의 고사에서 온 것으로, 그 사실은 대략 다음과 같다. 후한(後漢) 때 환경(桓景)이 일찍이 선인(仙人) 비장방에게 가서 학했는데, 하루는 비장방이 환경에게 이르기를 “9월 9일 너의 집에 재앙이 있을 것이니, 급히 가서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붉은 주머니에 수유를 담아서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국화주를 마시게 하면 이 재앙을 면할 것이다.”라고 하므로, 환경이 그의 말에 따라 9월 9일에 과연 온 가족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갔다가 저물녘에 내려와 보니, 계견우양(鷄犬牛羊) 등의 가축만 모두 일시에 다 죽어버리고 사람은 끝내 무사했다고 한다

 

 (29) 재차 앞의 운을 사용하여 괴애(乖崖), 자고(子固)에게 부치다.

 

공명에 분주함을 몹시도 그만두기 어려워 / 功名奔走苦難休

중양절의 즐거운 놀이를 하지 못했네그려 / 不作重陽爛熳遊

두목의 술병 휴대했던 좋은 날이 생각나네 / 杜牧携壺思勝日

더구나 맹가의 모자 떨어뜨린 청추절이랴 / 孟嘉落帽況淸秋

술잔을 되돌려 주느라 손을 멈출 새 없어라 / 金杯還送不停手

국화는 이미 피었으니 머리 가득 꽂아야지 / 黃菊已開須滿頭

북악산은 하늘에 치솟아 그림처럼 환하고 / 北岳揷天明似畫

기럭 그림자 비친 서호는 윤활하기도 해라 - 보내온 시에 주(酒) 자를 운(韻)으로 달았는데, 운서(韻書)를 두루 상고해 보았으나 그렇게 된 데가 없었고, 추(酋) 자가 조금 근사하여 전시(前詩)에서 대신 달아보았으나 그 또한 근거할 데가 없어 유(油)로 고쳤으니, 경망하고 참람함을 용서하기 바란다. - / 西湖涵雁滑如油

좋은 시절 좋은 경치는 등림하기에 좋고 / 良辰美景登臨好

고금 이래로 세월은 하 유유하기만 한데 / 古往今來歲月悠

시는 절로 청신하여 포유를 따라가고 / 詩自淸新追鮑庾

술은 곤드레 취하여 도류에 이르렀네 / 酒曾酩酊到陶劉

금년의 이런 모임을 아 나만 저버린 채로 / 今年此會嗟辜負

서글퍼라 좋은 시절 또 한 해가 지났구려 / 惆悵嘉期歲又周

 

[주D-001]두목(杜牧)의 …… 생각나네 : 두목의 구일제산등고(九日齊山登高) 시에 “강은 가을 그림자 머금고 기러기 처음 날 제, 손과 함께 술병 들고 산 중턱에 올랐네. 속세에선 담소 나눌 이를 만나기 어렵거니, 국화를 모름지기 머리 가득 꽂고 돌아 가리. 다만 곤드레 취하는 걸로 좋은 명절에 보답할 뿐, 높은 데 올라서 석양을 한탄할 것 없고말고. 고금 이래로 인생사가 이와 같을 뿐인데, 어찌우산탄의 눈물로 옷깃 적실 필요 있으랴.〔江涵秋影雁初飛 與客携壺上翠微 塵世難逢開口笑 菊花須揷滿頭歸 但將酩酊酬佳節 不用登臨恨落暉 古往今來只如此 牛山何必獨霑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30) 3월 3일에 써서 김자고(金子固)에게 보이다.

 

봄 강물은 처음 불어 쪽빛보다 푸르고 / 春江初漲碧於藍

꽃 버들은 향기롭고 햇빛은 화창도 해라 / 花柳芳菲日色酣

나는 백 년 중에 지금 반백 년을 살았는데 / 我在百年今半百

때는 삼월하고도 초삼일에 꼭 당했구려 / 時當三月正初三

천하 명필 장군은 일찍이 계사를 치렀었고 / 將軍筆妙曾脩禊

뛰어난 시인 공부는 옷을 전당잡히려 했지 / 工部詩豪欲典衫

풍류 고상한 인물은 고금에 다 있는 건데 / 今古風流人物在

또 좋은 명절 만나니 그 생각 어이 감당하랴 / 又逢佳節思何堪

 

[주D-001]천하 …… 치렀었고 : 장군은 곧 동진(東晉) 시대 명필로 일찍이 우군 장군(右軍將軍)을 지낸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키는데, 진 목제(晉穆帝) 영화(永和) 9년 늦은 봄에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서 왕희지(王羲之), 사안(謝安) 등 42인의 명사들이 모여 계사(禊事)를 행하고 이어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면서 성대한 풍류 놀이를 했던바, 이때 왕희지가 난정기(蘭亭記)를직접 짓고 쓰고 했으므로 이른 말이다

 

봄 강물은 처음 불어 쪽빛보다 푸르고 / 春江初漲碧於藍

꽃 버들은 향기롭고 햇빛은 화창도 해라 / 花柳芳菲日色酣

나는 백 년 중에 지금 반백 년을 살았는데 / 我在百年今半百

때는 삼월하고도 초삼일에 꼭 당했구려 / 時當三月正初三

천하 명필 장군은 일찍이 계사를 치렀었고 / 將軍筆妙曾脩禊

뛰어난 시인 공부는 옷을 전당잡히려 했지 / 工部詩豪欲典衫

풍류 고상한 인물은 고금에 다 있는 건데 / 今古風流人物在

또 좋은 명절 만나니 그 생각 어이 감당하랴 / 又逢佳節思何堪

 

[주D-001]천하 …… 치렀었고 : 장군은 곧 동진(東晉) 시대 명필로 일찍이 우군 장군(右軍將軍)을 지낸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키는데, 진 목제(晉穆帝) 영화(永和) 9년 늦은 봄에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서 왕희지(王羲之), 사안(謝安) 등 42인의 명사들이 모여 계사(禊事)를 행하고 이어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면서 성대한 풍류 놀이를 했던바, 이때 왕희지가 난정기(蘭亭記)를직접 짓고 쓰고 했으므로 이른 말이다

 

  22)<식우집(拭疣集)>에서 (2007. 5. 22. 태영(군) 제공)

 출전: 식우집(拭疣集-괴애 김수온의 문집)

자고(子固)의 여강정 시운을 따서 지음

 

말을 들으니 새로운 정자가 푸르게 흐르는 물을 굽어보아

한 구역의 풍경이 스스로 고고하다 하네.

삼추(三秋)에 농사가 익으니 항도(杭槄)가 풍요롭고

십무(十畝)의 못이 깊으니 가에다 버들을 심었구나.

주루(酒樓)에서 마시는 것을 끝내니 산은 창같이 둘렀고

서탑(書榻)에서 읽기를 마치니 달은 활 같으네.

관을 걸고 혹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 심은 늙은이가 된다면

시험해 묻노니 그대는 이미 돌아 갔으니 나를 허락해 줄 수 없겠는가?

 

次子固驪江亭韻

聞說新亭俯碧流 一區風景自高孤 三秋稼熟饒杭槄 十畝塘深種柳蒲

飮罷酒樓山似戟 讀殘書榻月如弧 掛冠倘作東蘺叟 試問君歸許我無

 

구월 구일에 자고(子固)와 더불어 모화관(慕華館) 서쪽에 올라

 

산은 보이는대로 기억 하였고

기록해 올리어 잊지 아니하게 하였네.

관사가 한가로워 그대와 내가 같이 하면서

걷다가 쉬다가 서쪽 고개에 올랐네.

잡아 당기어 성경의 유람을 만들었는데

*빠진 글자가 있어 적지 못함.

녹환(鹿寰)을 굽어보니 오직 같은 한기운이로구나

천우(天宇)를 우러러보니 정히 삼추(三秋)이고

누구의 집 작은 말이 청안(靑眼)을 싣고 올 것인가.

어느곳 공후(公候)의 문정에 백두(白頭)가 앉았으리

사향의 향기는 바람따라 선명한 소매에 나붓기도다.

비단옷 입은 이 들은 햇빛에 번쩍이면서 맑은 술을 따르는구나

문공(文公)의 절귀(絶句)는 다 정밀하고 간절한데

서상(徐相)의 가기(佳期)는 스스로 어긋나게 멀도다.

좌상(坐上)에서 웃고말하는 것은 석가와 노자를 통하였고

바라보는 가운데 도성 대궐로 늦으막에 돌아오는구나

*이하는 결손된 글자가 있음.

여자가 높은 산으로부터 따라와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소매를 날리면서 큰 길을 지나가는도다.

(윗 귀절에는 탈락된 글자가 있다.)

 

重九與子固登臨慕華西山因記所見錄呈不忘云

官閒君我共行休 西領躋攀作勝遊 俯視鹿寰唯一氣 仰看天宇正三秋

誰家細馬䭾靑眼 何處侯門坐白頭 香麝隨風颸蒨秞 綺羅耀日酌淸文

公絶句皆精切徐相佳期自謬悠坐上咲談通釋老望中城闕晩來歸女從高岳歌舞婆娑過道周

 

<주석>

1.녹환(鹿寰): 사슴이 노니는 세계.

2.청안(靑眼): 내가 좋아하는 눈으로 보는 친구.

3.문공(文公): 漢文公 愈를 말함.

4.서상(徐相): 당시의 정승으로 누구인지 알지 못함.

 

자고(子固): 김뉴(金紐)의 字

 

 23) 금헌기(琴軒記) (2007. 5. 27. 태영(군) 제공)

(출전: 식우집(拭疣集-괴애 김수온의 문집)

무릇 선왕들이 후세를 위하여 교육의 근본을 세웠는데 이 모두가 예악(禮樂)이란것에 불과 할뿐이다. 그런 예(禮)에 대해서는 이대(二戴)로부터 비교적 무수한 서적들이 많다고 하겠으나 악(樂)에 대해서는 논의한 서적이 별로 많치 않다고 하겠다.

 

예악(禮樂)이 두 가지는 서로 본말(本末) 관계가 된다 할것이다. 때문에 체(体)와 용(用)이 되는것이므로 그 가운데서 한가지라도 폐(廢)해서는 아니된다 할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후세로 오면서 예악(禮樂)을 논(論)한 사람들은 예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말하였으나 악(樂)에 대해서는 별로 말한 사람이 적은것이다.

 

대개 악(樂)이라는 것은 성음(聲音)을 말하는 것이고 그 청탁(淸濁)과 고하(高下)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악(樂)의 성정(性情)이 되는것이므로 그 청탁(淸濁) 고하(高下) 질서(疾徐) 관계를 문자(文字)로 표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라 하겠다. 더욱 우리 사람들의 성품과 감정의 발로(發露)가 하도 묘한 것으로서 어느 때는 바람이 부는것 같기도하고 어느 때는 번개를 쫒아 다니는것 같기도하여 비록 자유(子遊)와 자하(子夏)같은 사람들을 부릴지라도 또한 반고(班固)나 마웅(馬融) 같은 문장가를 시킬지라도 이것을 형용하여 글을 쓰기란 참으로 어렵다 할것이다.

그러므로 대개 이러한 재인(才人)들의 전통은 그 사람이 없어지면 그 기예(技藝)까지 세상에서 없어지는 안타까움이 있다고 하겠다. 옛날의 음악(音樂)이 오늘날에 전하여 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대개 음악의 소리는 거문고 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거문고 전체가 곧 거문고의 음악인 것이다. 나는 거문고에 대하여 배운바는 없다. 내가 경사(京師)에 잠시 있는 동안 김군자고(金君子固)와 더불어 수년동안 지냈기 때문에 거문고에 대한 상식(常識)이 좀 있다고 생각한다.

 

김군자고(金君子固)는 거문고에 대하여 명인(名人)이라고 생각된다. 그 옛날 내가 경사(京師)에 있을때 어느날 김군의 집을 지나게 되었는데 김군이 한사코 소매를 끌어 자리를 같이 하고 술잔을 기울인 일이 있었다. 이때 김군이 천연(天然)히 웃으면서 말하기를 제가 선생님의 심정 답답함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거문고를 한번 타 보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궁성(宮聲)으로 북소리를 한번 흘리어 유유(攸攸)히 거문고를 타는 데 그 소리가 마치 봄 하늘에 구름이 떠 있는것 같고 또한 훈훈한 바람이 대지(大地)를 어루 만지는것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가 변하여 큰 우레소리가 산악(山岳)을 흔드는것 같았다. 그러다가 또 소리가 변하여 마치 실꾸러미에서 실줄이 나오는듯 바람이 잔잔하여지고 파도 물결이 잔잔해 지면서 하늘이 다시 열리며 따듯한 기운과 밝은 빛을 내는것이 아닌가?

 

그 소리에 대하여 깊히 생각하여 본즉 이것이 곧 저 옛날 요순(堯舜) 문왕(文王) 공자(公子)같은 분들이 끼친 소리가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아주 순고(淳古)하고도 담박(淡泊)한 그 맛이 저 옛날 당우(唐虞)와 삼대(三代)의 하늘이 열리는듯 하였다.

 

슬프다 거문고의 도(道)가 과연 이렇게 지극했던 것인가? 대개 김공자고(金公子固)는 옛날 법에 묶여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으로 얻는 것이었으면 그 감정을 손으로 응(應)하는 것이다. 공부자(孔夫子)께서 말한 슬픈 감정을 느껴도 속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하고 즐거움을 느끼더라도 지나친 경지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우리들 마음의 성품과 감정의 바른것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 소리의 형태가 악보(樂譜)에 따라서 이와 같이 나오는 것이다.

 

만약 어떻한 법이 있다면 그 법은 처음에 어디서 나왔겠는가? 어떻한 창작자가 스스로 빚어 그러한 방법이 시작 되었을 뿐이라할 것이다.

 

오호(嗚呼)라 예악(禮樂)은 곧 하나인 것이다. 예(禮)의 근본은 곧 경(敬)인것이며 악(樂)의 근본은 곧 화(和)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에 있어서 그 근본을 화(和)로 삼지 않을수 없다고 할것이다.

 

때문에 요순시대(堯舜時代)로부터 크게는 국가의 군신(君臣)사이라던가 작게는 가정의 부부간 사이에서 하루의 생활이라도 어찌 예(禮)를 버릴수 있다 하겠는가? 그러므로 몸을 꾸부려 절을 하는등의 모든 문화가 우리들에게 구비(具備)되어 있는 것이다.

 

슬프다. 이제 삼왕(二帝三王)때의 예악정치(禮樂政治)가 참으로 훌륭했었는데 그러한 시대(時代)를 다시 보지 못하는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할것이다. 예(禮)라는 것은 형식적인 위의(威儀)이기 때문에 어떠한 점으로도 쉬운것이라 하겠으나 악(樂)이란 것은 그 정신이 마음 깊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예에 대해서는 많은 말들이 전하여 오고 있으나 악(樂)에 대해서는 그말이 그렇게 많이 전하여 지지 않고있다 하겠다. 우리 김공자고(金公子固)는 참으로 그 악(樂)의 느낌을 깊히한 사람이다 나는 옛날 성균관(成均館)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옛날에 사도(司徒)라는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 전악(典樂)을 관장하면서 나라에 세자(世子)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악(禮樂)의 관계를 우리가 어찌 막연(漠然)하게만 생각 하겠는가? 이에 잔소리 같은 나의 생각을 이렇게 기록하여 김공자고(金公子固)의 헌기(軒記)로 삼노라.

 

<주석>

1. 이대(二戴): 前漢時代 戴德이 二百餘篇의 禮記를 줄여 大戴記라고 했는데 형제들이 했기 때문에 二戴라고 말하는 것임.

2. 유하(遊夏): 孔子의 弟子인 子遊와 子夏를 말하는 것임.

3. 궁성(宮聲); 동양 음악의 五聲인 宮商 角 微羽에서 宮聲을 말하는 것임.

4. 당우(唐虞): 堯임금과 舜임금시대 兩代를 통칭하는 것임.

5. 삼대(三代): 중국의 고대 夏. 殷. 周 時代를 三代라 함.

6. 이제삼왕(二帝三王): 堯舜을 帝라하고 禹王. 湯王

 

괴애 김수온선생의 국역 식우집(拭疣集)에서 옮김.

 

<원문>

琴軒記

 

夫先王所以垂世立敎者。燦然備具。而其宏綱大節。則不過曰禮樂而已矣。然禮之爲之。自二戴之外。無慮數千餘家。而於沿革度數之變。殆無餘論矣。至於樂。其傳蓋寡。禮樂二者。相爲本末而體用。不可偏廢也。何後世之言禮樂者。獨於禮之詳而樂之缺如此乎。蓋樂者。聲音而已矣。而淸濁高下之謂也。是其體乎性情而爲之者也。淸濁高下之疾徐。豈言語文字之可載。而性情之發之妙。則又有如風之捕。如雷之追。雖使游,夏命文。班,馬操觚。亦不若之矣。蓋其人亡。則性情之道。亦隨而亡。而無怪乎古樂之不傳於今也。夫樂之聲。莫尙乎絲。而絲之聲。又莫尙乎琴。琴誠樂之者也。余於他藝。一不假矣。而竊於琴。樂之有年矣。朅來京師。得與金君子固爲友。金君則能琴者也。一日過其家。君命酒有間。乃囅然笑曰。小子今爲先生之癢。一枝之矣。於是。御銀甲促珠徽。爲鼓宮聲之數引。[油油乎若春雲之敷空。浩浩乎若薰風之拂野。忽然變之。揚而激之。則如迅霆驟雨。震蕩乎山岳。驚濤巨浪。蹴湧乎天地。]蓋使人辟易而毛豎也。然後皦如繹如。以至於一成。則又如[風恬而波定。天開而日曜。]其憂深思遠。則舜與文王孔子之遺音。而[淳古淡泊之旨。蓋在於唐虞三代之天矣。]噫。琴之道一至此乎。蓋子固之不數數於故法之拘。得之心。應之手者也。若夫哀而不傷。樂而不淫。則又本之吾心性情之正。故其形於聲音之譜者如此。初豈有其法之傳於誰某哉。其亦在乎自得而已矣。嗚呼。禮樂。一致也。禮本於敬。樂本於和。惟和與敬。卽此心之謂也。禮之不可不本於敬。猶樂之不可不本於和也。自堯舜而來。大而朝廷君臣之際。小而夫婦居室之間。何嘗一日而去禮樂哉。非不曰周旋拜俯。吾有文矣。然二帝三王禮樂致治之盛。終不復見。則豈非發於威儀度數之末者易爲禮。而本於精神心術之微者難爲樂乎。宜乎禮盛其傳。而樂傳之寡也。吾於子固氏。深有感也。余之椎鄙而得以司成均之藝。古者。司徒掌敎胄子。卽典樂之職也。於禮樂之汚隆。吾豈 然哉。因釐吾說而錄之以爲子固之軒記云。

 

 24) 題金子固牧牛圖後(제김자고목우도후) (2007. 7. 20. 태영(군) 제공)

題金子固牧牛圖後(제김자고목우도후)

金紐가 보관한 牧牛圖에 붙인 글. 수십 마리의 소가 매우 정교하게 그려진 것에 감탄하는 내용이다.

 

題金子固牧牛圖後

 

右牧牛圖一幅。雙溪老之所蓄也。牛大小無慮數十頭。有寢者訛者。降阿者。渡水者。依樹陰齕草者。倚涯欲渡者。沿流蹙浪者。昂首浮沈者。待隊反顧者。長林豐草間。若有若無。群聚而呞者不知其幾。童子數人。有騎背捶者。跨背立者。飛紙鳶者。弄雀雛者。千形萬狀。運動飛舞。筆意精到。豪髮盡備。非得於野外無窮之趣者。胡能若是。且乎溪老之寶玩而不能釋也。詩曰。東風吹雨搖平津。水生兩岸桃花春。桃花細浪涵靑蘋。頭楊柳蒼崖濱。烏犍斑特依原畇。麾之畢來性自馴。阿童倒騎凌淸淪。輕飆欲動波粼粼。中流 沫噴生唇。若跨龍去行逡巡。雲林杳靄蒙淸晨。際天草樹晴蓁蓁。聚角戢戢來相屯。不啻九十周家犉。筆奪造化妙入神。畫圖不辨贗與眞。流傳千載閱幾人。霜縑墨跡宛如新。雙溪愛畫誰比倫。愛之如寶千金珍。早投簪紱謝楓宸。煙波牧笛相爲隣。我今奔走東華塵。撫圖肝膽空輪囷。君恩報了乞此身。與子共作牧牛民。

虛白堂文集卷之九 男世昌編輯  題跋

 

김양진 [金楊震, 1467~153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풍산(豊山). 자 백기(伯起). 호 허백당(虛白堂). 1489년(성종 20)에 진사가 되고, 1497년(연산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부수찬(副修撰)으로 있을 때 연산군이 모비(母妃) 능묘(陵廟)의 호를 추존(追尊)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여 예천(醴泉)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형조좌랑이 되고, 이조참판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1520년(중종 15)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공조참판 때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비위에 거슬려 산직(散職)으로 좌천되었으나, 중종 때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되고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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