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성립(金誠立)1562(명종17)∼1592(선조25)--(서). 허난설헌

(목록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 서당공 소개

2. 주요 사진 자료 소개

3.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4. 배위-허난설헌 소개

 1) 허난설헌

 2) 생애

 3) 친정 가계

 4) 일간지 기고내용

 5) 서울 거주지 자료

 6) 영정

 7) 친필 서화

 8) 묘소

 9) 시비소개

10) 생가 탐방

11) 규원가 소개

12) 신간도서소개

13) 오페라 소개

14) 일화(서당공과 난설헌) 소개

15) 허난설헌집 위작설 모음

16) 허난설헌작품 모음집

17) 허난설헌집 종합 소개

18) 연극 공연 관람기(안사연)

19) 고문헌(백옥루산량문) 경매 입수기

20) 허난설헌 창작소설 소개

21)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22) 허난설헌의 삶을 통한 여성들의 삶

 

본문

p11.png 4. 허난설헌 소개

21)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종합

 

(1) <견한잡록>에서 (2003. 7. 9. 태서(익) 제공)

○ 부인(婦人)으로 문장에 능한 자를 말하자면 옛날 중국의 조대가(曹大家)와 반희(班姬), 그리고 설도(薛濤) 등 이외에도 많이 있어 이루다 기재하지 못하겠다.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기이하다 하겠다. 문사(文士)김성립(金誠立)의 처(妻)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ㆍ허균(許筠)의 여동생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文集)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백옥루(白玉樓) 상량문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고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문사 조원(趙瑗)의 첩(妾) 이씨(李氏)와 재상 정철(鄭澈)의 첩 유씨(柳氏) 또한 이름이 났다.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酒食)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美行)이 아니다.” 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출전 소개 : 견한잡록(遣閑雜錄) 심수경이 쓴 것이다. 그의 호는 청천당(聽天堂)이다. 종중 계묘년(서기 1543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명종 병오년에 문과에 장원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직제학에 승진, 8도 감사를 거쳐 청백리에 등록되었고, 선조 경인년에 우의정이 되니, 나이 75세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 84세에 죽었다. 이 책은 아마 75세 이후 벼슬을 내놓은 다음에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수록된 이야깃거리는 총 69편으로 담적기는 신이(神異)한 것을 많이 쓴 것에 반하여 사실에 치중한 점이 있다

 

 (2)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2003. 6. 11. 태서(익) 제공)

 

경번당(景樊堂)에 대한 변증설    

세상에서, 허초당(許草堂 이름은 엽(曄))의 딸 난설헌(蘭雪軒)을 저작랑(著作郞) 김성립(金誠立)의 부인이라 하는데, 약간 재주가 있고 시(詩)에 능하여 《난설헌집(蘭雪軒集)》1권이 세상에 전해지며, 그 서문(序文)은 명(明) 나라의 사신이었던 난우(蘭?)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이 때문에 그 시집(詩集)이 중국에 들어가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세속에서,

"허씨(許氏)가 부군(夫君)의 사랑을 받지 못한 때문에 '인간에서는 어서 김성립과 사별하고, 지하에 가서 영원히 두목지를 따르리.[人間願別金誠立 地下長隨杜牧之]'라는 시를 짓고 이어 호(號)를 경번당이라 하였으니, 이는 번천(樊川 당(唐) 나라 두목(杜牧)의 호)을 사모한 것이다."

고 전해지고, 우산(虞山) 전겸익(錢謙益)의《열조시선(列朝詩選)》, 어양(漁洋) 왕사진(王士?)의《별재집(別裁集)》, 주죽타(朱竹?)의《명시종(明詩綜)》ㆍ《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서당(西堂) 우동(尤?)의《서당잡조(西堂雜俎)》등에도 다 허씨를 경번당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천하에서 다 허씨를 경번당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허씨에게 있어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선현(先賢)들이 그렇지 않음을 많이 변론하였다.

폐상(廢相) 강산(薑山) 이서구(李書九)의《강산필치(薑山筆?)》에,

"허씨는 그런 사실이 없는데, 사람들이 억지로 끌어대어 괜히 그런 누명을 받게 된 것이다."

해명하였고, 우리 조부의《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에,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 전당(錢塘)의 추루(秋●) 반정균(潘庭筠)이 '귀국(貴國)의 경번당은……어찌 다행이 아니냐?' 묻자 담헌이 '지하에 가서 영원히 두목지를 따르리.'라는 시구를 인용 대답했다."

하였고, 이어 나의 조부 형암공(炯庵公)이,

"듣건대, 경번당은 허씨의 자호(自號)가 아니라 천박하고 경솔한 사람들이 침해하고 조롱하는 말이라 하는데, 담헌 같은 이가 어찌 이를 해명하지 않았던가. 만약 난공(蘭公 반정균의 자)이 시화(詩話)를 편찬할 때 담헌의 이 대답을 기재하게 된다면 허씨에게 어찌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내가 그 본집(本集)을 살펴보면 그 곡자시(哭子詩)에 '거년엔 귀여운 딸애를 잃고 금년엔 귀여운 아들을 잃었다.[去年喪愛女 今年喪愛子]' 하였으니, 부군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말은 허위이다. 내가 평소에,

"젊은 부녀가 아무리 부군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손 치더라도 어찌 다른 세대의 남자를 사모하여 경번당이라 자호까지 할 수 있겠느냐."

생각하며 세속에 전하는 풍설을 늘 불만스럽게 여겨 오다가 신돈복(辛敦復)의《학산한언(鶴山閑言)》에,

"난설헌이 경번당이라 자호한 데 대해 세상에서, 두번천(杜樊川)을 사모한 때문이라 하는데, 이 어찌 규중(閨中)의 부녀로서 사모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당 나라 때에 선녀(仙女) 번고(樊姑)가 있었는데 호(號)는 운교부인(雲翹夫人)으로 한(漢) 나라 때 상우령(上虞令)이었던 선군(先君) 유강(劉綱)의 아내였다. 그는 선격(仙格)이 매우 높아 여선(女仙)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이름도《열선전(列仙傳)》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난설헌이 바로 그를 흠모하여 경번당이라 칭한 것이다."

는 대문을 보고서야 무릎을 치며 통쾌하게 여겼다. 이 어찌 억울한 누명을 깨끗이 씻어 줄 수 있는 단안(斷案)이 아니겠는가. 또 본집(本集)도 허씨의 친저(親著)가 아니므로 다음과 같이 그 사실을 열거한다.

지봉(芝峯) 이수광(李?光)의《유설(類說)》에,

"허난설헌의 시는 근대 규수(閨秀)들 가운데 제일위이다. 그러나 참의(參議) 홍경신(洪慶臣)은 정랑(正郞) 허적(許●)과 한집안 사람처럼 지내는 사이였는데 평소에 '난설헌의 시는 2~3편을 제외하고는 다 위작(僞作)이고,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도 그 아우 균(筠)이 사인(詞人) 이재영(李再榮)과 합작한 것이다.' 했다."

하였고, 신씨(申氏)의 《상촌집(象村集)》에도,

"《난설헌집》에 고인(古人)의 글이 절반 이상이나 전편(全篇)으로 수록되었는데, 이는 그의 아우 균이 세상에서 미처 보지 못한 시들을 표절 투입시켜 그 이름을 퍼뜨렸다."

하였고, 전우산(錢虞山)의 소실(小室)인 하동군(河東君) 유여시(柳如是)도《난설헌집》에서 위작(僞作)들을 색출하여 여지없이 드러냈으니, 난설헌의 본작(本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성립의 후손인 정언(正言) 김수신(金秀臣)의 집이 광주(廣州)에 있는데, 어느 사람이,

"간행된《난설헌집》이외에도 혹 책상자 속에 간직된 비본(?本)이 있느냐?"

고 묻자,

"난설헌이 손수 기록해 놓은 수십 엽(葉)이 있는데, 그 시는 간행본과 아주 다르다."

대답하고 이어,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간행본은 본시 난설헌의 본작(本作) 전부가 아니라 허균의 위본(僞本)이다."

하였다. 그 후손의 말이 이러한 것을 보면 아마 그 집안 대대로 내려 오는 실전(實傳)일 것이다. 지봉의 실기(實記)와 상촌의 정론(定論)과 후손의 실전이 낱낱이 부합되므로 쌓였던 의혹이 한꺼번에 풀린다. 내가 평소에《동관습유(?管拾遺)》를 편찬하면서 우리나라 규방(閨房)의 시들을 모아 이 책을 만들었는데, 경번당의 사실이 매우 자상하게 수록되었으니 함께 참고하는 것이 좋다.

  

           출전;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2

 

(3) 허난설헌 가문과 안동김문과의 관계--밀접한 겹사돈 관계 (2003. 1. 7. 윤만(문) 제공)

* 교산 허균과 안동김씨

1) 11세(1579, 선조 12년) : 누이인 허난설헌이 김성립과 결혼하였다.

2) 17세(1585, 선조 18년) : 의금부 도사를 지낸 김대섭(金大涉)의 차녀와 결혼하였다.

3) 18세(1589, 선조 19년) : 허균은 이해 봄 처남인 김확과 함께 백운산에 있던 둘째형에게 글을 배우러 찾아 갔다. 그곳에서 한퇴지와 소동파의 고문을 배웠다. 금각을 만나 함께 배웠으며 그 해 여름 봉은사에서 둘째형의 벗인 사명당을 만났다.

4) 24세(1592, 선조 25년) : 허균은 4월 14일 소서행장의 군대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임진왜란으로 홀어머니 김씨와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피난길을 떠났다. 덕원에서 함경도 곡구를 거쳐 7월 7일 단천에 이르렀으며 만삭 부인은 첫 아들을 낳고 임명역으로 거쳐를 옮겼다. 몸조리를 못한 부인은 7월 10일 저녁 박논억의 집에서 산후병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 허균은 짐을 싣고다니던 소를 팔아서 아내의 장례를 임시로 치르고 북쪽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첫 아들도 젖을 먹일 수 없어 죽었다. 그의 아내는 15세에 시집와서 8년간 허균과 함께 살다가 22세의 짧은 나이로 전란에 생애를 마쳤다. 이 때 허균은 심한 충격을 받고 영동역. 수성역. 함경도를 피난하며 지내다가 그 해 가을 9일동안 배를 타고 강릉에 도착하였다.

5) 27세(1595, 선조 28년) : 허균은 낙산사에서 내려와 부인 김씨의 묘를 단천에서 강릉 외가인 애일당 쪽으로 이장을 하였다.

6) 32세(1600, 선조 33년) : 3월에 부인 김씨의 묘를 어머님을 따라 원주 서면 갈대 숲에다 마지막으로 관을 묻었다. 이 언덕은 선영의 왼쪽에 있었는데 동북쪽을 등지고 서남쪽을 바라보는 곳이다.

(주) <허난설헌과 강릉 P40/강릉시/장정룡/1998>에 난설헌의 친정 어머니 김씨 부인은 허균과 함께 여행을 다니다가 1601년 8월 14일 전주에서 사망했다. 김씨 부인은 설익은 감을 먹은 것이 체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균은 형조참의에 올라 "원주 법천사 북쪽 10리쯤에 양천 허씨 선영에 어머니를 모셨고 해마다 한차례씩 성묘를 했다'(성소부부고 권6, 遊原州法泉寺記)고 하였다.

7) 41세(1609, 광해군 1년) : 허균의 죽은 아내에게도 숙부인의 직첩이 내려졌다.

8) 50세(1618, 광해군 10년) : 8월 17일 허균도 기준격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잡히기 전날, 자기의 문집인 "성소부부고" 초고와 문집에 실리지 않은 원고를 딸집으로 보냈다.

- 허균은 죄목을 알리는 결안도 없이 8월 24일 그의 심복들과 함께 서시에서 책형 당하였다. 마지막 으로 허균은 "할 말이 있다"며 외쳤다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하였다.

 

- 허균은 15세인 김씨부인과 결혼하여 혈육으로 딸이 한 명 있다. 딸은 진사 이사성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들이 허균의 유일한 후손이다. 이사성의 외아들인 이필진은 외조부의 유고를 간직하였다. 허균이 무오년(1618년)에 마지막으로 감옥에 갔을 때 풀려 나오지 못할 것으로 미리 알아 자기가 엮은 [성소부부고] 를 외손인 이필진의 집으로 보냈다. 이필진은 현종 11년(1670년)에 자기의 발문을 붙여서간행했고 정조의 관심으로 규장각에서도 필사하여 보관한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한다.

           【출전 : 평전 허균과 허난설헌/장정룡/허균. 허난설헌 선양사업회/1999】

 

 (4) <조선일보 홈페이지> 기록 내용 (2002. 4. 10. 주회(안) 제공)

 

[다시 읽는 여인열전] (5) 개혁적 문필가 허난설헌 (2002.04.09)

 

허난설헌(1563∼1589)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었다.

첫째, 이 넓은 세상에서 왜 하필이면 조선에 태어났을까?

둘째, 왜 하필 여자로 태어나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서러움을 지니게 되었을까?

셋째, 수많은 남자 중에서 왜 김성립(金誠立)의 아내가 되었을까?

이 세 가지 한은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란 말로 압축할 수 있다. 동인(東人) 영수 허엽(許曄:1517∼1580)의 셋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8세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삼종지도의 나라’ 조선에서 여성의 재능은 불필요한 혹일 따름이었다.

그녀는 오빠 허봉(許封)의 주선으로 삼당시인(三唐詩人) 이달(李達)에게 글을 배웠다. 여성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당시에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한 유년시절은 결혼과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조혼 풍습에 따른 14세의 결혼은 불행한 미래에의 초대장이었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집을 떠나 과거공부에 전념했는데, 그런 시절의 일화가 전한다. 함께 과거공부를 하던 친구가 “성립이 기생집에서 놀고 있다”는 말을 지어내자, 여종이 이를 난설헌에게 말했다.

그녀는 도리어 술과 안주를 마련해 “낭군께선 이렇게 다른 마음 없으신데/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간질을 시키는가”라는 시와 함께 보냈다.

‘상촌집’(象村集) 작자 신흠은 이를 보고 “허씨는 시에도 능하고, 기질도 호방함을 알게 되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조선여성에게 호방한 기질은 불행의 씨앗일 뿐이었다. 그녀는 시를 통해 부부관계를 한 차원 높게 승화시키려 했으나 이 또한 비난의 대상이 됐다.

‘강남에서 독서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寄其夫江含讀書)란 시에서 “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님은 오시질 않네”라고 노래하고, 시 ‘연꽃을 따며’(采蓮曲)에선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 던지고/행여 누가 봤을까 한나절 얼굴 붉혔네”라고 남편에 대한 수줍은 애정을 노래했다.

하지만 훗날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이 두 작품은 그 뜻이 음탕한 데 가까우므로 시집에 싣지 않았다”고 평했다. 사부곡(思夫曲)까지 음탕으로 몰아부치는 조선에서 여성의 모든 적극성은 비난받았다. 게다가 과거에 거듭 낙방한 김성립은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허난설헌은 이런 왜곡된 현실과 맞서기 위해 시를 무기로 선택했다. 난설헌은 “누가 술 취해 말 위에 탔는가/흰 모자 거꾸로 쓰고 비껴 탄 그 꼴”이라는 ‘색주가의 방탕한 사람에 대한 노래’(大堤曲)’로 남편을 풍자했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부차적 존재가 된 것이 문제의 근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생의 운명이란 엷고 두터움 있는데/남을 즐겁게 하려니 이 내 몸이 적막하네”라고 읊은 시 ‘한정(恨情)’은 그런 인식의 표현이다.

그녀가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어머니에게 미움 받은 그녀가 의지할 곳은 두 아이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 비극이 잇달았다.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더니/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슬프고 슬프구나 광릉(廣陵:아이들 묻힌 곳) 땅이여/두 무덤 마주보고 서 있구나”(자식을 애곡함·哭子)라는 시는 불행이 거듭되는 운명에 대한 통곡이었다.

 

그녀는 시로써 조선의 사대부를 조롱하고 모순된 사회에 저항했다. 또한 여성에 대한 억압과 빈자에 대한 불평등을 동일시하는 강한 개혁지향성을 드러냈다.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고루(高樓)에선 노래 소리 울렸지만/가난한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려/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느낌을 노래함·感遇)란 시는 가난한 백성들의 질곡에 대한 분노였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는데/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손으로 싹둑싹둑 가위질하면/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

시 ‘가난한 여인을 읊음’(貧女吟)’은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간파한 완벽한 소외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를 통한 현실 변혁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녀의 분노는 시로 쓰여지는 것 이상의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현실을 넘어 피안의 세계로 다가간다. 도교의 세계였다. 장시 ‘신선이 노니는 노래’(遊仙詞)나 ‘꿈에서 광상산에서 시를 지으며 노닌 이야기’ 등이 그런 글들이다.

그녀가 남긴 시들이 허균에 의해 ‘난설헌집’(蘭雪軒集)으로 간행되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중국에서 출간되면서 “이 넓은 세상에서 왜 하필이면 조선에 태어났을까”란 첫 번째 한은 풀렸다.

훗날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규중 부인으로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외국(조선)의 한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사대(事大)의 나라 조선의 남성들은 명나라를 통해 역수입된 그녀의 명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1711년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시집이 간행됐다. 그녀가 남긴 시들은 여성 차별의 왕국, 조선의 영역을 넘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모순으로 가득찬 사회에 대한 그녀의 승리이기도 했다.

 

[다시 읽는 여인열전] 허난설헌-허균 남매 (2002.04.09)

 

허난설헌이 조선 여인으로서 호를 남긴, 이례적 인물이 된 데에는 동생 허균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난설헌이 요절하자 허균은 친정에 흩어져있던 누이의 시와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를 모아 ‘난설헌집’를 펴냈다.

 

이 때 여러 사람의 발문을 받았는데, 유성룡은 “이상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라는 감탄을 남겼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도 발문을 받았는데 그녀의 시에 감탄한 주지번은 “‘유선사’ 등 여러 작품은 중국 시의 전성기였던 당나라 시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라는 극찬과 함께 이를 중국에서 출간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조선인 역관 허순과 중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한 소녀는 이 시집을 보고 ‘난설헌을 사모한다’는 뜻의 경란(景蘭)으로 이름을 바꾸고 “내가 바로 난설헌이 다시 태어난 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심취했다.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고 나중에는 천주교 기도문을 가져올 정도로 정형화된 사고를 거부했던 허균이기에 ‘난설헌집’을 남기고 ‘홍길동전’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특출한 성격때문에 광해군 10년(1618)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말았다. 박제된 삶을 거부한 남매의 비극이자, 조선의 비극이었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5) <허난설헌의 아우 허균의 처 숙부인 김씨의 행장 및 제문>  (2003. 9. 17. 윤만(문) 제공)

 

▣ 망처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의 행장(行狀) ▣

 

- 부인의 성(姓)은 김씨(金氏)니 서울의 대성이다. 고려조 정승 방경(方慶)의 현손(玄孫)인 척약재(惕若齋) 구용(九容)은 고려 말에 이름을 떨쳤고, 벼슬이 삼사(三司)의 좌사(左使)에 이르렀다. 그 사대손(四代孫)인 윤종(胤宗)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도사였고, 그 아들 진기(震紀)가 경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별제(別提)로 첫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휘(諱) 대섭(大涉)을 낳으니 또한 계년 사마시에 합격, 도사(都事)로 첫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고 관찰사(觀察使) 심공(沈公) 전(銓)의 딸에게 장가드니 부인(夫人)은 바로 그 둘째딸이다.

- 융경(隆慶) 신미년(선조 4, 1571)에 낳아, 나이 열다섯에 우리집에 시집왔다. 성미가 조심스럽고, 성실하고도 소박하여 꾸밈이 없었으며 길쌈하기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고, 말은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을 섬기기를 매우 공손하게 하여,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몸소 문안드리고, 음식을 드릴 때 꼭 맛을 보고 드렸다. 철을 따라 제 철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 종들을 다루기를 엄격히 했지만 잘못을 용서해 주었고 욕지거리로 꾸짖지 않으니 모부인께서 칭찬하시되, "우리 어진 며느리로다." 하셨다.

 

- 내 한창 젊은 나이에, 부인에게 압류(狎遊)하기를 좋아하였지만 싫은 기색을 얼굴에 나타낸 적은 거의 없었으며, 어쩌다 조금이라도 방자하게 굴면 문득 말하기를,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엄중해야지요. 옛사람은 술집ㆍ다방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던데, 하물며 이보다 더한 짓이겠어요?" 하였으므로, 내 듣고 마음으로 부끄러워, 더러 조금이나마 다잡힘이 있었다. 그리고 항상 내게 부지런히 글 공부하기를 권하여, "장부가 세상에 나서 과거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고, 제 몸에 이롭게 하는 이도 또한 많습니다. 당신은 집이 가난하고, 시어머님은 늙어 계시니, 재주만 믿고 허송세월하지 마십시오. 세월은 빠르니 뉘우친들 어찌 뒤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임진년(선조 25, 1592) 왜적을 피하던 때에는 마침 태중(胎中)이어서 지친 몸으로 단천(端川)까지 가서 7월 7일에 아들을 낳았다. 이틀 후에 왜적이 갑자기 닥치자, 순변사(巡邊使) 이영(李瑛)이 물러나 마천령(磨天嶺)을 지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대를 이끌고서 밤을 새워 고개를 넘어 임명역(臨溟驛)에 이르렀는데, 그대는 기운이 지쳐 말도 못하였다. 그때 동성(同姓)인 허행(許珩)이우리를 맞아 같이 해도(海島)에 피란하였으나 머물 수가 없었다. 억지로 산성원(山城院) 백성 박논억(朴論億)의 집에 이르러 10일 저녁 숨을 거두매, 소 팔아 관을 사고, 옷을 찢어 염(斂)을 하였으나, 오히려 체온이 따뜻하므로 차마 묻지를 못하였는데, 갑자기 왜적이 성진창(城津倉)을 친다는 소문이 들리므로, 도사공(都事公)이 급히 명하여 뒷산에 임시로 묻으니 그때 나이 스물둘로 같이 살기는 여덟 해였다.

-  아! 슬프다. 그 아들은 젖이 없어 일찍 죽고, 첫딸은 자라 진사 이사성(李士星)에게 시집가서 아들ㆍ딸 하나씩을 낳았다.

-  기유년(광해 1, 1609)에 내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직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임명되니 예에 따라 숙부인(淑夫人)으로 추봉케 된 것이다. 아! 그대 같은 맑은 덕행으로, 중수(中壽)도 못한데다가, 뒤를 이을 아들도 없으니, 천도(天道) 또한 믿기 어렵다. 바야흐로 우리 가난할 때, 당신과 마주 앉아 짧은 등잔심지를 돋우며 반짝거리는 불빛에 밤을 지새워 책을 펴 놓고 읽다가 조금 싫증을 내면 당신은반드시 농담하기를,"게으름 부리지 마십시오, 나의 부인첩(夫人帖)이 늦어집니다." 하였는데, 18년 뒤에 다만 한 장의 빈 교지를 궤연[靈座]에 바치게 되고 그 영화를 누릴 이는 나와 귀밑머리 마주 푼 짝이 아닐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당신이 만약 앎이 있다면 또한 반드시 슬퍼하리라. 아, 슬프다. 을미년(선조 28, 1595) 가을에 길주에서 돌아와, 또한 강릉 외사(外舍)에 묻었다가, 경자년(선조 33, 1600) 3월에 선부인을 따라 원주 서면 노수(蘆藪)에 영장(永葬)하니, 그 묘는 선산 왼쪽에있으며 인좌(寅坐) 신향(申向)이다. 삼가 행적을 쓰노라.

 

《출전 :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 행장 行狀》

▣ 망처(亡妻)의 제문 ▣

 

오직 부인은 본성이 공경스럽고 정성스러웠고/惟靈性惟恭恪

 

그 덕은 그윽하고 고요하였네/德則幽閑

일찍이 시어머니 섬길 때/早事先姑

시어머니 마음은 몹시도 기뻤다네/姑志甚驩

죽어서도 시어머니 따라/死而從姑

이 산에 와 묻히는구려/來窆玆山

휑덩그레한 들판 안개는 퍼졌는데/荒野煙蔓

달빛 쓸쓸하고 서리도 차구려/月苦霜寒

의지 없는 외론 혼은/孑孑孤魂

홑 그림자 얼마나 슬프리까/悲影之單

십팔 년을 지나서/踰十八年

남편 귀히 되어 높은 벼슬에 오르니/夫貴陞班

은총으로 추봉하라는/恩賁追封

조서가 내려졌네/紫誥回鸞

미천할 때 가난을 함께 하면서/賤時共貧

나의 벼슬 높기를 빌더니만/祈我高官

벼슬하자 그댄 벌써 죽어 없으니/及官已歿

추봉(追封)의 은총만 부질없이 내려졌네/寵命徒頒

어찌하면 영화를 같이 누릴꼬/焉得同榮

내 마음 하염없어라/我懷漫漫

아마도 그대 넋 알음 있다면/想魂有志

그대 또한 눈물을 줄줄 흘리리/其亦汍瀾

녹으로 내린 술 한잔 들구려/一酌官醪

서러움에 눈물만 줄줄 흐르누나/悲來涕潸

《출전 :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 제문 祭文》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대하여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許筠)의 시문집.

--구분 : 필사본

--저자 : 허균

--시대 : 1611년

--소장 : 규장각

 

[내용]

-  필사본. 8권 1책. 규장각 도서. 1611년(광해군 3)에 저술하였다. 부록인 〈한정록(閑情錄)〉은 은둔(隱遁)·고일(高逸)·한적(閑適) 등 16부문으로 나누고, 그 밖에 시(詩)·부(賦)·잡문(雜文)과 병화사상(甁花史觴)·서화금탕(書畵金湯) 등은 권말에 덧붙였다. 저자가 모반의 혐의로 처형되어 간행을 보지 못한 채 초본(抄本)으로 몇 종류가 전해 오다가 1961년 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大東文化硏究院)에서 영인(影印)해 소개하고, 그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 출간하였다.

【출전 : 야후 백과사전】

- 허균은 15세인 김씨부인과 결혼하여 혈육으로 딸이 한명 있다. 딸은 진사 이사성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들이 허균의 유일한 후손이다. 이사성의 외아들인 이필진은 외조부의 유고를 간직하였다.

- 허균이 무오년(1618년)에 마지막으로 감옥에 갔을 때 풀려 나오지 못할 것으로 미리 알아 자기가 엮은 [성소부부고]를 외손인 이필진의 집으로 보냈다. 이필진은 현종 11년(1670년)에 자기의 발문을 붙여서 간행했고 정조의 관심으로 규장각에서도 필사하여 보관한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한다.

【출전 : 평전 허균과 허난설헌/장정룡/허균. 허난설헌 선양사업회/1999】

 

(6) <허난설헌집>의 뒤에 제하여(題蘭雪齋後) (2004. 4. 8. 발용(군) 제공)

許家有女最淸秀,  

蘭雪詩如語鬼神.

繡句縱驚文士耳,

不如蠶織奉南蘋.

 

허씨 집안에 여인이 있으니 가장 맑고 빼어나,

난설헌의 시는 마치 귀신을 말하는 듯.

비단 같은 구절 비록 문사들의 귀를 놀래 키지만,

옷을 지어 남편을 봉양함이 더 나으리.

<출전 : 시서유고(市西遺稿)>

 

김선(金璇)

1568(선조 1)∼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광산. 자는 이헌(而獻), 호는 시서거사(市西居士) 또는 지서자(之西子). 전라남도 나주출신. 아버지는 상호군(上護軍) 부성(富成)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하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한탄하여 나주로 내려가 두문불출하였다.

1615년(광해군 7) 강진사람 이정언(李廷彦)·윤유겸(尹惟謙) 등이 그가 영창대군을 옹호하였다 하여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나오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참봉·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양명학에 조예가 깊은 장유(張維)·임담 등과 친밀히 교유하였다.

저서에 《초당한람 草堂閑覽》이 있다.

 

(7)<국정 브리핑>속의 자료 (2006. 1. 22. 발용(군) 제공)

 

 * 재평가 아쉬운 허난설헌 작품 세계

 출전 : 국정브리핑 2005-11-29 21:25

허난설헌 시비(詩碑)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시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난설헌 허 초희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허난설헌의 문학과 삶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그녀가 잠들어 있는 곳을 찾아가보고 싶었다.

관련 서적과 인터넷을 뒤져도 주소 이외에는 찾아가는데 도움이 될만 한 정보가 없었다. 해당 자치단체인 광주시 문화체육과에 전화를 걸었다. 허난설헌 묘를 찾아가야 하는데 위치 설명을 부탁드린다고 했더니, 허난설헌이라는 호칭에 낯설어 한다.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담당자라는 사람이 설명해주는데 관내 거주민이나 알아들을 수 있는 지역 명칭을 섞어가며 안내해 준다.

 

길 모르는 나그네가 쉽게 찾아갈 수 있었으면

장황한 길 안내 끝에 홈페이지에 나와 있으니 찾아보란다. 길을 묻는 나그네에겐 나그네의 입장에서 나그네가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자상한 행정 서비스가 아쉬웠다.

 

도로표지판. 허난설헌 묘 가는 길도 표시했으면 좋겠습니다.  

홈페이지를 뒤졌다. 세계 도자기 엑스포나 분원 붕어찜 축제 그리고 퇴촌 토마토 축제, 유서 깊은 노거수 등은 명승지로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반해 허난설헌에 관한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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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찾지 못하고 다시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포토뱅크에 있단다. 찾아들어갔더니 2002년도에 찍어서 올린 허난설헌 시비(詩碑) 사진 한 장이 달랑 있다.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이것이 오늘 현재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을 보는 이 시대의 시각이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동성동본 금혼이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남녀평등 시대에 여류시인 허난설헌을 바라보는 태도가 이러한 데  지금으로부터 440년 전. 숨소리마저 제대로  내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야했던 남성우위의 조선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난 허 초희가 시(詩)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기방(妓房)문학은 있지만 규방(閨房)문학은 없다는 남존여비의 조선사회에서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한 많은 생을 접은 허난설헌이 잠들어 있는 곳을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라는 지명이 있으니까 찾을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중부고속도로에 올라갔다.

 

20여분 달린 후 경안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좌회전 무조건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시내에서 몇 사람을 붙잡고 허난설헌을 물으니 모른단다. 허난설헌이라는 물음 자체가 생경스럽다는 반응이다. 그렇다면 지월리는 어디냐고 물으니까 이쪽으로 저쪽으로 해서 다리를 건너가면 지월리란다. 지월리에 진입하여 제일 큰 부동산에 차를 세웠다.

 

영양가 없는 질문은 귀찮다는 부동산 업자

 

“지월리에 허난설헌 묘가 있다는데 어디쯤 될까요?”라고 물었더니 자기들도 서울 사람이어서 잘 모른단다.

 

하, 그렇구나. 경기도 광주에도 투기바람이 불어 떳다방들이 몰려와 있구나. 그제서야 자세히 살펴보니 무슨 무슨 컨설팅, 무슨 무슨 부동산이라고 씌여진 간판들이 즐비하다. 길을 모를 때 복덕방에 가서 물으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이 통하지 않은 투기의 열풍지대였다.

 

“그런 것은 우리는 잘 모르니 개울건너 마을회관에 가서 물어 보슈.”

 

"몇 억원을 가지고 있는데 마땅한 땅이 있어요" 라는 달콤한 얘기는 환영하지만 허난설헌은 돈이 되지 않는 상담이고 귀찮은 질문이라는 뜻이다.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길을 물었다. 나이 지긋한 마을 주민 몇 분이 계셨지만 역시 모른단다. 지월리만 들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걱정으로 바뀐다.

 

"여기에서 이 길로 1.5km 정도 가면 신토불이 라는 오리구이 식당이 있는데 그 집 주인이 그런 것은 조금 아니까 거기 가서 한번 물어보세요.”

 

식당에 도착하여 주인을 찾았더니 시내에 볼일 보러 나가고 자리에 없단다. 막막하다. 주위를 살펴보니 사당도 갖추고 그런대로 괜찮게 가꾸어 놓은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 일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약간 경사진 구릉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10여분 올라가 확인해보니 아니다. 허탈감과 함께 등에서는 땀이 흐른다.

 

내려와 식당에 들렀더니 마침 주인이 와 있었다. 허난설헌 묘를 찾아 가는데 여기에서 잘 아실 거라고 소개받고 왔다 하니 그 역시 모른단다. 아득했다. 지월리만 들어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난감해 하는 모습이 안 돼보였는지 잠깐 기다리라며 어디엔가 전화를 건다. 통화를 마친 후 손가락을 가리키며 설명해준다.

 

“여기에서 차를 돌려 2km 정도 되돌아 나가면 다리가 있어요. 그 다리를 건너서 삼육재활원을 지나면 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가 파헤쳐져 있을 거예요. 그 땅이 바로 전 부총리 이 아무개씨를 자리에서 내려오게 한 바로 그 땅이거든요. 그 고개를 지나면 동네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좌회전하여 한참 가다보면 고속도로가 나와요. 그 고속도로 지하통로 앞에서 좌회전하면 거기에 있어요.”

 

너무 너무 친절하다. 자기가 모르는 곳인데도 다른 곳에 전화하여 이렇게 자세하게 일러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얕은 수익만이 생활화된 현대사회에서 자신에겐 아무런 이익이 없으면서 자기 통화료 지불하며 위치 파악하여 이렇게 자세하게 가르쳐 준다는 것은 너무 고마운 일이다. 그 순수한 친절에 감사를 드린다.

 

차를 돌려 식당주인이 가르쳐준 길을 찾아가니 고속도로 지하통로가 나온다. 통과하지 말고 좌회전하라는 식당 주인의 말을 떠올리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바로 옆 풀 섶에 높이 50cm정도의 허난설헌묘 입구라는 비석이 잡초와 쓰레기더미에 묻혀 있다. 주위를 살펴보니 가로 세로 50cm 정도의 입간판이 전봇대에 매달려 있다.

 

일곱 살 어린 소녀가 상상속의 하늘의 황재가 살고 있다는 백옥루를 연상하며 그 궁전을 건축하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 白玉樓 上樑文)을 지어 그녀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고, 우리나라 규방문학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지는 규원가(閨怨歌)를 지어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긴 허 초희의 오늘날의 위상이다.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응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 나가며 남존여비를 당연시 하는 조선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는 작품과 환상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비단결 같은 불후의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한ㆍ중ㆍ일 동양 3국에서 우뚝 선 여류 시인으로 추앙 받던 한국최초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오늘의 현주소다.

 

묘역에 들어서니 가파른 계단이 눈앞을 가로 막는다. 계단을 올라서니 허난설헌 시비가 우뚝 서 있다. 전면에는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가슴에 묻은 어미의 슬픔을 노래한 곡자(哭子)가 한글로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실재하지 않은 환상의 세계를 노래한 그녀의 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전문이 원문과 한글로 음각돼 있다.

 

사랑하는 딸을 지난해 보내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고 슬픈 강릉의 땅이어/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있구나/ 백양나무 가지에 소소히 바람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반짝이는데/ 지전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부르며/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영혼아/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자식을 가슴에 묻은 지어미의 슬픔이 절절히 배어있다. 그녀의 시 곡자(哭子)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땅에 묻을 때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을까? 더구나 친정아버지 허 엽을 경상도 땅 상주에서 비명횡사로 여의고 딸을 가슴에 묻은 다음 해 아들 희윤이 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게 되니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홀로 남동쪽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의 묘 바로 옆에 애기 무덤 두 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그녀의 딸과 아들 희윤이의 무덤이다. 지하에서나마 자식을 가슴에 품고 있는 듯하다.

 

묘비에는 허난설헌에게 가장 큰 문학적 영향을 끼친 스승과도 같은 오빠이며 당대의 문장가인 허 봉이 조카 희윤이를 기리는 '피어 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로 시작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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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삼구타 라는 구절이 뚜렷하게 새겨진 시비  

 

허난설헌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허 초희는 자연인으로 대접받아야

 

묘역을 나서면서 시비에 새겨진 그녀의 시를 다시 살펴봤다. 그녀의 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이다.

부용삼구타(芙蓉三九朶)라는 구절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나이 27살 되던 삼월 열아흐레 날. 깨끗이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금년이 삼구에 해당하니 서리 맞은 연꽃이 붉게 되었구나' 라며 눈을 감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삼구는 이십칠, 바로 그녀의 나이 27세가 아닌가.

 

광상산은 바로 난설헌이 살고자 했던 이상세계였는지 모른다. 여기 잠들어 있는 그녀는 아직도 상상의 세계를 배회하며 환상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응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 나가며 살아야 했기에 비난을 감수해야 했으며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했던 허 초희.

 

죽은 이후에도 남성 사회의 본류 조선 선비들로부터 폄하와 비판으로 얼룩진 그녀의 작품은 위작과 표절로 매도되었다. 416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녀의 작품과 인간 허난설헌은 완전한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묘역에선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재실 공사가 한창이지만 하루 빨리 허난설헌 그녀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고 자연인 허 초희가 대접받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국정넷포터 이정근(k30355k@naver.com)

※ 국정넷포터가 쓴 글은 정부 및 국정홍보처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7) 몽유광상산시서 (2005. 4. 19. 정중(도) 제공)

 

碧海侵瑤海 푸른바다는 구슬바다에 젖고

靑鸞倚彩鸞 푸른난새는 채색난새에 기대누나

芙蓉三九朶 스물입곱송이 아름다운 연꽃

紅墮月霜寒 달밤 찬서리에 붉게 떨어지네

 

● 23세의 나이, 상을 당해 외삼촌 집에 머물러 있을 때, 꿈에서 환상의 산 광상산 무릉도원을 노닐며 아릿다운 두 연인과 대화를 나눈다. 그곳엔 아름다운 풀과 꽃, 새들이 춤추는데, 맑은 큰 못에 푸른 연꽃이 서리를 맞아 반쯤 시들어 있었다 한다. 두 여인은 난설헌에게 '이 일을 어찌 시로 기록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에 난설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시를 읊었다 한다고 산문으로 기록되어있다. 난설헌 27세의 나이에 붉은 꽃송이가 떨어짐을 예감하였으니 '부용삼구타' 가 이것을 증험함이다

 

몽유광상산시

(夢遊廣桑山詩:꿈속에 광상산에서 노닐며)

 

을유년 봄, 내가 상을 입어 외삼촌 댁에 머물고 있을 무렵,

하룻밤의 꿈에 바다 가운데 있는 산에 올랐다.

산은 온통 구슬과 옥으로 모든 봉우리가 첩첩으로 포개져 있었는데,

흰 구슬과 푸른 구슬이 반짝반짝 빛나 눈을 들어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무지개 같은 구름이 그 위에 서려, 오색이 곱고 선명하며

구슬같은 물이 흐르는 폭포 두 줄기가 벼랑 사이로 쏟아져 내리면서 부딪쳐

옥을 굴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두 여인이 나타났는데, 나이는 모두 스물 남짓하였다.

얼굴은 절세 미인으로 한 명은 붉은 노을 옷을 입었고,

다른 한 명은 푸른 무지개옷을 입었다.

손에는 금빛 호로병을 들고, 발은 나막신을 신고서 사쁜히 걸어와

나에게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였다.

졸졸 흐르는 물굽이를 따라 올라가니 기이한 풀과 이상한 꽃이 여기저기 피었는데,

모두 이름 부를 수 없었다. 난새, 학, 공작, 비취새들이 좌우에서 날면서 춤추는데,

온갖 향기가 나무에서 풍기고 있었다.

마침내 정상에 오르니 동남쪽의 큰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전부 파란데,

붉은 해가 돋으니 파도에 해가 목욕하는 듯하였다.

봉우리위에는 큰 못이 있어 맑기가 그지 없고 연꽃은 푸르고,

잎은 커다랗지만 서리를 맞아 반쯤은 시들어 있었다.

두 여인이 말하길

'여기는 광상산입니다. 신선들이 사는 십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당신이 신선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감히 이곳에 이르렀으니,

어찌 시로써 이를 기록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곧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두 여인이 손뻑을 치면서 크게 웃으며

'글자마다 모두 신선의 말씀입니다'

라고 하였다. 조금 있으니 한 떨기 붉은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봉우리 위에 걸리고,

북치는 소리를 냈다. 취한 듯 꿈을 깨보니,

베개 맡에는 아직도 아지랑이 기운이 맴돌았다.

모르겠네. 이백의 천모산 놀이가 여기에 미칠 수 있는지. 다만 이것을 적어 보리라.

그 시는 이러하다.

 

푸른 바다는 구슬 바다에 젖고,

푸른 난새는 오색 난새에 기대네.

스물 일곱 송이 아름다운 연꽃,

달밤 찬서리에 붉게 떨어졌네.

 

碧海浸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우리 누님이 기축년(1589) 봄에 돌아가셨으니, 그 때 나이가 27세였다.

그의 시에 '삼구홍타'(스물 일곱 꽃송이 떨어지다)란 말은 곧 이것을 증험함이다].

 

8) <풍수강의>에서 (2004. 12. 14. 윤만(문) 제공)

 

<고제희의 풍수강의 중 우리 집안관련 재미있는 글이 있어 퍼왔습니다>

(1) 나의 어머니

 

허난설헌의 어린 자식

 

응~애, 응~ 애.

 

저와 누나의 이승 나이는 갓난 얘이지만, 저승의 나이로는 4백살이 넘는 어른이라고요. 저는 우리 엄마와 아빠의 ‘부부싸움’과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려고 해요.

불쌍한 우리 엄마! 저의 엄마는 시인으로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이어요. 신동으로 소문이 났던 엄마는 이달 선생에게서 시를 배우고, 15살 때 시집을 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벼슬이 없던 아버지[김성립]은 다재다능하고 똑똑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허구헌 날 기방에만 출입하셨어요. 그러자 할머니는 며느리가 잘못 들어 와 집안을 망쳤다며 엄마를 마구 구박했어요. 엄마는 얼마나 슬펏겠어요.

 

우리 엄마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외할아버지(허엽)의 외동 딸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고 해요. 하지만 굴종만이 강요되는 숨막히는 시집살이는 엄마에게 고통 그 자체였어요. 엄마는 슬픈 마음을 시로 달랬어요. 그런데 어린 누나가 먼저 죽고 또 나까지 병들어 죽자, 엄마의 슬픔은 극에 달했습니다. 엄마는 우리를 끔찍히 사랑했어요. 어린 우리의 무덤을 나란히 만들어 놓고는 애끓는 슬픔을 피눈물로 곡을 했을 정도여요.

 

지난해 귀여운 딸을 여이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을 잃었네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불고/ 도깨비불 숲 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사를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

이제 또 다시 아기를 갖는다 해도/ 어찌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나/ 애끓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그런데 더 큰 슬픔이 몰려 왔어요, 외할아버지와 큰외삼촌이 연이어 객사한 거여요. 엄마는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고 격한 슬픔을 시로만 달래며 살았어요. 숨은 쉬고 있으나 마치 저 세상 사람 같았습니다.

조선 봉건사회가 짓누르는 구속과 억압 속에서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엄마여요. 또 아빠의 외도, 할머니와 집안 사람들의 학대와 질시가 한꺼번에 몰려 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뱃속에 있던 제 동생이 유산되고 또 막내 외삼촌[허균]까지 귀양을 가게되자, 엄마는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아빠는 정말 나빠요. 아무리 엄마가 똑똑한 척을 했어도 어떻게 엄마가 죽자마자, 남양 홍씨를 새로 얻어 장가를 갈 수 있어요? 그리고 돌아가신 뒤에는 엄마가 아닌 작은 엄마와 함께 묻힐 수 있어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에는 안동 김씨의 선영이 있어요. 맨 아래에는 엄마의 예쁜 무덤이 있고, 그 옆에 저와 누나의 무덤이 마치 쌍분처럼 다정해요. 죽어서도 저희들을 지켜주는 엄마의 모습 같아 눈물이 나요. 아빠는 바로 위쪽에 모셔져 있어요.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는 죽어서도 혼자여요. 형님, 누나들 많아 찾아와서 우리 엄마의 외로운 혼을 달래 주세요. 여기 아래로는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가 너무너무 시끄러워요. 밤새 한 잠도 못 잤어요. 아~함, 졸려. 그만 들어가 잘께요.

 

(2) 똑똑한 아내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의 변  저는 김성립(金誠立)입니다.

명문 안동 김씨의 후손으로 28세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이 홍문관 저작(著作, 정 8품)을 지냈지요.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31살의 아까운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나왔느냐고요? 저는 시인으로 유명한 허초희(許楚姬:허난설헌)의 남편으로, 제 자식이 엄마만 감싸고 아비와 할머니를 욕해 화가 나 나왔습니다.

 

15살에 시집 온 허초희는 정말 철부지였어요. 양천 허씨 집안에서 귀엽게만 자랐고, 또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칭찬만 들어 버릇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부덕(婦德)을 모르는 여자였어요. 마치 지독한 공주 병이 걸린 사람 같았어요. 몇 번을 타이르고 얼렀으나 고집불통에 막무내였어요. 영 사는 재미가 있어야지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기방을 출입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랬더니 마누라가 저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원컨대 이승에서 김성립과 이별을 하고 죽어 길이 두보를 따르리라.”

 

와! 생각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아요. 물론 제가 밖으로 나도니까, 시어머니가 타일렀지요. 남편 말을 잘 따르고 살림도 잘하라고요. 그런데 도통 자기 비관만 하고 말을 듣지 않았어요. 똑똑한 마누라하고 사는 것보다 더 지겹고 신물나는 일은 없어요. 또 있어요. 처갓집에 우환이 끊이지 않으니까 마누라는 친정 생각만 하는 거여요. 마치 우울증에 걸린 환자 같았어요. 애교를 떨며 눈웃음까지 쳐주길 바라지는 않았어요. 이건 완전히 고집불통에 오만쟁이여요. 비록 시는 잘 지었는 줄은 몰라도 아내로서, 며느리로서는 빵점이어요, 빵점. 그런데 자식들이 이유없이 연달아 죽고 장인과 처남들이 죽자, 스스로 강물에 빠져 죽은 거여요.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저는 마누라가 미웠지마 그래도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마누라의 모습이 떠올라 후하게 장사를 지내 주웠어요.

 

저는 마누라를 생각해 홀아비로 늙을려고 했으나, 대가 끊어진다며 온 집안이 새 장가를 가라고 성화였어요. 그래서 남양 홍씨를 얻어 새 살림을 차렸지요. 왜, 있잖아요. 혼자 살겠다고 독신을 선언한 여자들이 어느 날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핑게를 대며 결혼해 버리는 거요. 새 장가를 가자 정말 사는 재미가 났어요.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도 급제했지요. 봐요. 남자는 다 여자 하기 나름 아니여요. 그런데 기막힌 일이 생겼어요. 이제야 좀 살맛이 난다 했더니 난리가 난 거여요. 관리로 있던 저는 나라를 구하고자 전쟁 터로 나갔고, 운이 나빠 그만….

 

남자로 태어나 똑똑한 마누라 데리고 살기는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이여요. 부부는 그저 조금 모자라는 사람끼리 서로 보완하며 도와주고 살아야 제 맛이지요. 그래야 행복해요. 그래도 저는 첫 부인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 사람 때문에 당대의 문인, 학자, 풍류객들이 이 외진 곳을 찾아와 술을 부어 주잖아요. 그 술 냄새가 너무나 좋아요. 본래 그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 바로 위쪽에 있는 저에게 가져오세요. 저는 무지무지 좋아해요. 냄새만 맞고 있자니 정말 죽겠어요.

허난설헌을 찾아오시거든 계단으로 올라와 저에게도 술을 부어 주세요. 꼭 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9) 난설헌집 발문 (2002. 10. 20. 태영(군) 제공)

<난설헌집> 발문(跋文)

 

내 친구 허봉(許 竹+封)은 세상에서 보기드문 재주를 가지고 있었는데,불행히 일찍 죽었다. 나는 그가 남긴 글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칭찬해 마지 않았다. 하루는 그의 아우 허균이 죽은 누이가 지은 <난설헌고>(蘭雪軒藁)를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다. 나는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구나, 이건 여자의 글이 아니다.어떻게 해서 허씨의 집안에만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나는 시학(詩學)에 관하여는 잘 모른다. 다만 보는바에 따라서 평한다면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하는 솜씨가 허공의 꽃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았다.환히 속까지 들여다 보이고 아롱아롱 해서 손에 쥐고 즐길수는 없었다.

 

그 울리는 소리는 형옥(珩玉)과 황옥(璜玉)이 서로 부딪치는 것 같았다.남달리 뛰어나기는 숭산(嵩山)과

 

(華山)이 서로 빼어 났다고 다투는 것 같았다. 가을 연꽃은 물위에 넘실거리고 봄 구름이 하늘에 아롱졌다. 경지가 높은 시는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여러 시인들 보다 뛰어나고 그 나머지도 성당(盛唐)의 시와 같다. 사물을 보고 정감을 불러 일으키며 세태를 염려하고 풍속을 근심하는 마음은 열사(烈士)의 기풍과도 같다. 조금도 세속에 물든 자국이 없으니,

 

10) 허난설헌의 무덤에 띄우는 엽서 - 신영복 -  (2002. 8. 30. 태영(군) 제공)

출처: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기획연재-중앙일보 컬러기획), 신영복

허난설헌의 무덤에서 띄우는 엽서

- 신영복 - 1995년 12월05일【4회】

강원도 명주군 사천리에 있는 애일당(愛日堂) 옛터를 다녀 왔습니다. 이곳은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서 그리고 소설「홍길동」의 작자로서 널리 알려진 교산(蛟山) 허균이 태어난 곳입니다. 지금은 작은 시비 하나가 그 사람과 그 장소를 증거하고 있을 뿐이지만 시비에 새겨진 누실명(陋室銘)의 한 구절처럼 정작 허균자신은 그곳을 더없이 흡족한 처소로 여기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환로(宦路)에서 기방(妓房)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두량 넓은 학문의 세계로부터 모반의 동굴에 이르기까지 그가 넘나들지 않은 경계는 없었습니다. 당대사회의 모순을 꿰뚫고 지나간 한줄기 미련없는 바람이었습니다. 비극적인 그의 최후에도 불구하고 양지바른 언덕과 시원하게 트인 바다 그 어디에도 회한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애일당 옛터에서 마음에 고이는 것은 도리어 그의 누님인 허허난설헌의 정한(情恨)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태어난 것을 한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던 그녀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허허난설헌의 무덤을 찾을 결심을 한 것은 오죽헌을 돌아 나오면서였습니다. 오죽헌은 당신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율곡과 그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를 모신 곳입니다. 사임당은 마침 은은한 국화향기속에 앉아 돌층계위 드높은 문성사(文成祠)에 그 아들인 율곡을 거두어 두고 있었습니다. 율곡선생은 이조 최대의 정치가이자 학자로서 겨레의 사표임에 틀림이 없고 그를 길러낸 사임당역시 현모의 귀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봉건적 미덕의 정점을 확인케 하는 성역이었습니다. 극화(極化)된 엘리뜨주의는 곧 반인간주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곳은 분명 어떤 정점이었습니다.

 

나는 교산을 찾아보고 오리라던 강릉행을 서둘러 거두어 서울로 돌아온 다음 오늘새벽 일찍이 난설헌 허초희(許楚姬)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자욱한 새벽 안개속을 물어 물어 찾아왔습니다. 오죽헌과는 달리 허난설헌의 무덤은 우리의 상투적이고 즉각적인 판단이나 신빙성이 있어보이는 판단에서 한발 물러나 그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당신이 힘들게 얻어낸 결론이‘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철폐는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일과 직접 맞물려 있다’는 것이라면, 그리고 한 시대의 정점에 오르는 성취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에 얼마만큼 다가서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애를 읽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도 와야 합니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존경했던 스승 이달(李達)의 좌절,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사임당의 고아한 화조도(花鳥圖)에서는 단 한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봉건적 질곡의 흔적이 난설헌의 차거운 시비(詩碑)에는 곳곳에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의 진실이 그대로 역사의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연마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대리현실을 창조하는 문화속에서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만날 수 있기는 갈수록 더욱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가 해체되고, 자신은 물론 자식과 남편마저 <상품>이라는 교환가치형태로 갖도록 강요되는 것이 오늘의 실상이고 보면 아픔과 비극의 화신인 난설헌이 설 자리를 마련하기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시대를 고뇌했던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가 청산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항상 역사서의 둘째권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죽헌을 들러 지월리에 이르는 동안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역사의 다음 장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의심스러워집니다.

 

시대의 모순을 비켜간 사람들이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당신의 실망을 기억합니다. 사임당과 율곡에 열중하는 오늘의 모정에 대한 당신의 절망을 기억합니다. 단단한 모든 것이 휘발되어 사라지고 디즈니랜드에 살고 있는 디오니소스처럼 <즐거움을 주는 것>만이 신격의 숭배를 받는 완강한 장벽 앞에서 작은 비극 하나에도 힘겨워하는 당신의 좌절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지월리로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남매의 무덤앞에 냉수 떠놓고 소지올려 넋을 부르며“밤마다 사이좋게 손잡고 놀아라”고 당부하던 허초희의 음성이 시비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가 선포되고 과거와 함께 현재의 모순까지 묻혀져가는 오늘의 현실에 맞서서 진정한 인간적 고뇌를 형상화하는 작업보다 우리를 힘있게 지탱해주는 가치는 없다고 믿습니다.

 

중부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이 쉴새없이 귓전을 할퀴고 지나가는 가파른 언덕에 지금은 그녀가 그토록 가슴아파했던 두 아이의 무덤을 옆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정승 아들을 옆에 거두지도 못하고, 남편과 함께 묻히지도 못한 채 자욱한 아침 안개속에 앉아 있습니다.

 

열락(悅樂)은 그 기쁨을 타버린 재로 남기고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준다던 당신의 약속을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서 지켜야 합니다.

 

11) 허난설헌 관련 자료 종합 (2002. 3. 18. 주회(안) 제공)

 

서운관정공파 유연재 김희수 - 동고 김로 - 남봉 김홍도 - 1김첨 (2김수) - 김성립 - 김진 으로 이어지는 家系는 6대 연속 문과급제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6대 모두 詩書畵로 일가를 이루었고, 또한 김성립의 처 허난설헌은 시와 그림으로 이름을 날리어 신사임당과 더불어 조선시대 여류시인을 대표하는 분입니다.

 

양천허씨와 우리 안동김씨와의 인연을 살펴보면

허균은 (문온공파) 김대섭의 둘째 사위입니다. 즉 김대섭의 둘째 딸이 허균의 첫째 부인 김씨입니다. 임진왜란시 피난길에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분으로, 이들 사이에 낳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 딸이 홍길동전을 잘 보관하여 전해왔다고 합니다.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은 (서운관정공파) 김성립에게 출가하였고,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과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은 같은 당파(남인)로서 교유가 많은 사이였다고 합니다.

 

김성립의 처 허난설헌(許蘭雪軒) 은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릉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봉20)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입니다.

허난설헌은 15세경에 안동김씨 김성립에게 출가하여 27세에 요절하기까지 아들 딸을 잃고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등 불운한 결혼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주옥같은 수많은 시작을 남겨 조선조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시집이 발간되었습니다.

 

허난설헌의 필적은 [초희, 허난설헌] 훔페이지 (http://kenji.chungnam.ac.kr/my/chohee/)에 보면

친필 1점과 그림 2점 《앙간비금도》 《묵조도》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보면

허난설헌의 묘는 문화재로 (경기도기념물 제90호) 지정되어 있습니다.

종 목 시도기념물 90호

명 칭 허난설헌묘 (許蘭雪軒墓)

분 류 묘

수 량 1기

지정일 1986.09.07

소재지 경기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29-5

소유자 안동김씨서운관정공파종중

관리자 안동김씨서운관정공파종중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의 묘이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뛰어났으며, 8살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으로 일컬어졌다.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하였는데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였으며, 친정집에 옥사(獄事)가 있는 등 연속되는 불운에서 오는 고뇌를 시를 쓰며 달래다가 선조 22년(1589) 27세에 생을 마쳤다. 그녀는 섬세한 필치로 여성 특유의 감상을 노래하여 애상적인 독특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작품의 일부는 허균에 의해 중국에 전해져『난설헌집』으로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허난설헌의 묘는 현재의 위치에서 약 500m 우측에 있었으나 1985년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문인석을 제외한 묘비·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상석·망주석·둘레석은 근래에 만들어졌다. 묘비의 비문은 이숭녕이 지은 것이며, 묘의 우측에는 1985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시비(詩碑)가 서있다. 시비에는 허난설헌의 곡자시(哭子詩)가 새겨져 있으며 시의 대상인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묘 좌측 전면에 나란히 있다.

 

문화재명 허난설헌묘(許蘭雪軒墓)

이곳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의 여류(女流) 시인(詩人) 허난설헌(1563∼1589)의 묘이다. 자(字)는 경번(景樊), 호(號)는 난설헌(蘭雪軒), 본관(本貫)은 양천(陽川)이다.

 

안동(安東) 김씨(金氏) 김성립(金誠立)의 아내로 천품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용모로 타고나 8세 때에는 광한전(廣寒殿) 백옥루(白玉樓) 상량문(上樑文)을 지었고, 한시(漢詩)에 능하여 『난설헌집(蘭雪軒集)』을 남겼다. 선조(宣祖) 22년(1589) 3월 19일 27세로 요절(夭折)하였다.

 

▣ 디지털 한국학 홈페이지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릉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봉20)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일부를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 閨怨歌〉와 〈봉선화가 鳳仙花歌〉가 있으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蘭雪軒詩集(國立本)

許筠全集(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81)

女流詩人 許蘭雪軒考(朴鍾和, 成均 3, 成均館大學校, 1950)

許楚姬의 遊仙詞에 나타난 仙形象(金錫夏, 國文學論叢 5·6合輯, 檀國大學校, 1972)

허난설헌연구(문경현, 도남 조윤제박사고희기념논총, 1976)

역대여류한시문선(김지용편역, 대양서적, 1975). 〈高敬植〉

 

▣ 국역 석릉세적 (1996)

西堂공 휘誠立의 기록

[지봉유설]에 휘誠立에 대하여는 부인 허난설헌과 비교하여 너무 격하시킨 기록이 전하여지고 있으나, 서당공께서는 문과급제자로서 [성소부부고]에도 휘誠立께서 [策文]을 잘 짓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국조인물고]에 휘魯, 휘弘度, 휘 의 비문이 다른 명현들과 함께 전하여 지고 있고, [해동역대명가필보]에는 우리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의 혈맥을 있게 하여준 휘自行의 외조부 徐甄(서견)의 필적이 전하여지고 있다.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 김성립(金誠立)

1562(명종 17)∼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여견(汝見) 또는 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 아버지는 교리 첨(瞻)이며, 부인은 허엽(許曄)의 딸인 난설헌(蘭雪軒)이다.

158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에 이르렀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죽었다.

당대에 문명이 높았다.

참고문헌 號譜, 槿域書畵徵. 〈金東洙〉

 

문과방목

김성립(金誠立) 선조22년 증광시에 입격한 김성립(金誠立)의 성명(姓名)

김성립(金誠立) 인조13년 증광시에 입격한 김진(金振)의 부(父)

김성립(金誠立) More Info.

선조(宣祖)22년(1589년), 증광시(增廣試) 병과10(丙科10)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62년, 임술   자(字) 여현(汝賢)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첨(金瞻)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홍도(金弘度)   증조부(曾祖父) 김노(金魯)   외조부(外祖父) 송기수(宋麒壽)   처부(妻父) 허엽,홍세찬(許曄,洪世贊)   자(子) 김진(金振)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82(임오) 생원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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