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본문

p11.png 김응하(金應河)

p05.png 13.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종합

23) <귀록집>에서

(2009. 8. 13. 은회(익) 제공)

출전 : 歸鹿集

歸鹿集卷之一.  詩

深河。吊金將軍。

 

烈烈遼東伯。桓桓勇冠軍。威名趙頗牧。忠義漢飛雲。死被中朝奬。生丁北虜狺。狂啚逞猾夏。明詔助征。善射推猿臂。孤軍領乕賁。遂從元帥後。遙渡混河濆。陣氣橫燕塞。兵聲壓楚氛。飛騰思翦獍。隳突孰摧豶。奮劒雙眸裂。張弓十指皸。寧辭尸褁革。無奈髮懸斤。含璧人如狗。盟天女死蚊。長懸爭日義。何必勒鍾勳。氣作三韓重。名傳萬國聞。亡年帝降綍。戰處客停幩。往跡悲河柳。寒聲聽塞枌。折鋩猶血色。遺鏃已苔紋。日暮神鴉噪。天陰鬼火紛。風塵滿幽薊。文物化膻葷。宇宙今無士。泉㙜倘起君。椒觴再拜奠。流淚濕余裙。

 

 * 작자 귀록 조현명(趙顯命) 소개 (2009. 8. 25. 항용(제) 제공)

1690(숙종 16)∼1752(영조 2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 도사(都事) 인수(仁壽)의 아들이다.

1713년(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하여 있던 왕세제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으며, 이후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부제학, 이조·병조·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군액(軍額)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 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하였던 정치가이면서, 한편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환수, 결포제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縉紳)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송인영·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는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b00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