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학공파(익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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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2.png 3. 기타 행사 소개

p05.png 6) 07년 추향과 16회 총회

               (2007. 12. 김항용 작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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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시 : 2007. 11. 4. 10:00시--14:00시

  2)장소 :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02번지 세덕사  

  3)참가자 : 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 문중회 종친 및 일반 종친 제위

  4)내용 : 비안공(휘仁甲) 외 16위 선조님 시제 봉행 및 제16회 정기총회  

 

1. 16년의 감회

 

지난 2007년 11월 4일, 제16회째 맞이하는 제학공파(提學公派) 비안공문중회(比安公門中會)의 합동 시제(時祭) 봉행(奉行) 및 정기총회가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세덕사(世德祠)에서 있었다. 재실 숭모재(崇慕齋)의 초석(礎石)을 다지고 사당(祠堂) 세덕사를 완성한 뒤 문중회를 조직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벌써 16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본 문중회에 초창기부터 깊숙이 관여해 온 나로서는 실로 감회가 컸다.  

 

지난 1990년, 양덕공(휘 時說) 종가(宗家)인 우리 집 단독의 판단과 출자로 사당(世德祠)과 재실(崇慕齋)을 건립하던 단계에서부터 본 문중회는 시작되었다. 이 토지(800여평)는 본래 양덕공(휘 時說)을 모시기 위한 위토(位土)였다. 경제적 여유가 별로 없던 우리 집 형편으로 그 엄청난 건축 공사를 진행하자니 많은 무리가 따랐다. 2년여에 걸쳐 엄친(泰燮-양덕공 13대 종손)께서는 많은 고통을 감내(堪耐)하시면서도 굳은 신념으로 건축 일을 진행시키셨다. 또한 부친께서는 자식들인 나와 우리 형제들에게도 재실과 사당 건립에 대한 경제적 제공과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셨다. 아마도 부친께서는 정대(正大)하고 보람 있는 일이요, 종가(宗家) 제례(祭禮)의 기본인 이 일의 추진은 후손된 우리 모두의 사명이요 의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리라. 나는 이런 아버님께 기쁘고 적극적인 마음과 자세로 보좌(補佐)해 드렸다.  

 

이 기간 일요일이면 자주 괴산엘 내려갔다. 그리고 방학때면 약 10여일씩 머물면서 건축일을 도와 드렸다. 빠듯한 봉급으로 살아가는 나의 살림살이에서도 일부를 잘라 건축비에 보태기도 했다. 건축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가자 각 건물에는 이름을 정하고 현판도 붙였다. 재실명인 <숭모재>(崇慕齋)는 유명 서예가 손경식(孫敬植-海淸)님에게서 서예를 받았고, 부친의 호를 딴 <청담정거>(靑潭靜居)는 서예사전에서, 사당명 <세덕사>(世德祠)는 한석봉 서첩에서 집자(集字)하여 현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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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숭모재 현판, 海淸 孫敬植님의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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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 사랑채-청담정거 현판, 靑潭은 부친(태섭)의 호임>

 

각고(刻苦) 끝에 재실은 1년만인 1991년에 완성되었고, 사당은 이듬해인 1992년 초가을에 완성되었다. 총 공사비 7500만원이 들었다. 아버님의 끈질긴 집념과 정열의 소산(所産)이었다.  

 

1992년 7월, 완성된 괴산 재실에서 부친과 좌랑공(휘 時訓)대표 효식(涍植)님, 충익공(휘 時讓)대표 상천(相天)님이 모여 문중회 구성을 위한 발기 회의를 가졌다. 모두 대찬성이었다. 나는 곧 문중회 조직을 위한 구체 작업을 서둘렀다. 제일 먼저 종친들의 주소를 찾아 나섰다. 족보(제학공파보. 1990년 간)를 기초로 전국에 산재해 있는 종친들의 주소를 수소문했다. 전화에 매달린 지 3개월 만에 250여 명의 주소를 확보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문중회 조직과 시제 봉행을 알리는 우편물을 보냈다.

 

이 해 11월 15일 11시, 드디어 낙성식과 함께 첫 제례가 있었다. 이 날 총 48명(종친-19명, 근친-4명, 지역 유림-25명)의 참예 및 축하객이 모였다. 큰 감동으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의식은 ‘개회사-선조님에 대한 묵념-경과보고-종손인사-축사-현판 개봉식-위패봉안’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제학공파 원로이신 상철대부님(한학자. 1988년 한중일 한시백일장 장원. 생원공 휘 壽眞 15대손, 1918-2002)께서는 축사를 통해 ‘전통이란 역사 진행과정에서 각 시대의 환경에 따라 발전적으로 변하는 것이며, 제례의식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신 뒤 세덕사 창건(創建)에 대해 큰 찬사(讚辭)를 아끼지 않으셨다. 뒤이어 현판 개봉식(開封式)을 한 뒤 위패(位牌) 봉안(奉安)을 했고 이어 첫 시제를 봉행하였다. 이 날은 양덕공(휘 時說)과 그 이하 후손 9위에 대한 시제를 봉행하였다. 시제 봉행 후 정식으로 문중회 창립 총회를 가졌다. 이 때 제1대 문중회 임원을 선출하였다. (회장-명식(좌), 부회장-태섭(양), 총무-영회(양), (  )는 약호로 좌-좌랑공파, 양-양덕공파, 충-충익공파) 그리고 회칙을 제정하고 통과시켜 문중회 조직을 마쳤다.  

이날 제수와 음식은 우리 집 전식구(모친, 며느리, 출가한 누님과 여동생들)가 총동원되어 준비해야 했다.  

 

이 날 이후 나는 더욱 바빠졌다. 모든 일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준비하고 정리해 나갔다. 문중회 조직과 운영, 제례를 위한 도구 준비 등 모든 일들이 고스란히 나의 몫이 되었다. 부친께서는 연속하여 나에게 정성을 다한 준비를 요구하셨다. 일복을 타고 난 모양이다. 그렇게 첫 해는 감동 속에서 시제와 창립총회를 마쳤다. 여러 곳에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내년의 발전된 행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일지에 기록해야 했다.  

 

이듬해인 93년에는 8위(비안공, 충익공, 합천공, 사휴제공, 안주공, 통덕랑공, 정광공, 동길공)의 위패를 추가 봉안하고 시제를 올렸다.  

 

95년엔 제2대 임원이 탄생되었다.  

회장-태섭(양), 부회장-용달(좌), 정회(양), 두응(충), 남응(충), 감사-태걸(양), 원흥(충), 총무-영회(양)

그 후 각종의 커다란 문중사가 급물살을 타면서 차근차근 진행되어 갔다.  

96년엔 충익공파에서 1천만원을 출자하여 남은 건축 공사인 사당 담장과 대문, 재실의 솟을대문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대문에는 <安東金氏提學公派比安公門中宗會>란 현판도 걸었다. 이제야 모든 공사가 마무리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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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

 

  98년엔 제3대 임원이 구성되었다.  

 

회장-태섭(양,유임), 부회장-용달(좌), 달응(좌), 인회(양), 원응(충), 준응(충), 감사-태걸(양), 상천(충), 총무-영회(양)

이때부터 본격적인 문중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우리 문중의 제일 큰 숙제는 제학공파의 가장 대표적 선조님이신 충익공 하담선조님(휘 時讓)의 유고문집 <충익공하담선생유고>(忠翼公荷潭遺稿)의 국역 사업이었다. 지난 1987년, 36세인 나는 전설처럼 회자(膾炙)되고 있던 이 비밀스러운 문집이 너무도 보고 싶어 제천의 종손(濟應)댁을 상천(相天)대부님과 함께 찾아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책은 보지도 못하고 황당한 인상만 받고 헛걸음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97년, 충익공 문집의 야사류(野史流-부계기문, 자해필담, 하담파적록)를 일부 국역하여 재편집한 아동 교육용 도서  <대동야승1>(김종오 엮음. 1981. 민추위 간) 책 한 권을 선물로 들고 다시 제천 종손댁엘 찾아 갔다. 그러나 겨우 <문집>만 구경했을 뿐 나의 복사 요구는 거절당했다. 그러자 함께 동행했던 상춘대부님께서 자신의 집에 있는 <충익공 유고> 필사본을 빌려 주셨다. 날 듯 기뻤다.  

 

서울로 돌아와 즉시 이를 복사하여 번역해 보려했다. 그러나 한학(漢學)에 단문(短文)한 나에게 이 국역작업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2년 전 상석대부 소개로 알게 된 충익공 13대손이신 익수(제주의 한학자, 문화재위원)아저씨께 이 사실을 말씀 드리고 번역을 간청드렸다. 고맙게도 동의해주시어 이제부터 본격적인 국역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종손(제응)의 아우님이신 두응대부님을 이해시켜 이듬해인 1998년, <하담문집발간 추진회>를 정식으로 구성하여 본격적인 번역과 윤문 및 편집 작업에 들어갔다. 그제제야 제응종손께서도 마음을 바꾸어 원본 복사를 허락했고, 이를 토대로 번역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 동안 국역 작업은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어 갔다. 서울에서 약 10여 회의 편집회의가 있었고, 나(서울)와 익수아저씨(제주) 사이에는 수많은 우편물과 이메일이 오고 갔다. 6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량의 타이핑 작업은 나를 꽤나 힘들게 했고, 40여 회에 이르는 원고 교정작업은 참으로 힘들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발간작업은 서서히 진행되어 갔다. 드디어 3년만인 2001년 11월,세덕사 시제 때 발간식을 가지게 되었다. 익수아저씨의 헌신적인 국역 작업과 두응회장님의 발간비 모금활동, 그리고 우매(愚昧)한 나의 편집과 윤문작업 및 추진회 운영 등이 혼연 융합이 되어 대 성과물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발간 후 이 책은 전국의 국공립 도서관과 주요 대학에 무료로 배부되었고 종친들에게는 판매되었으며, 서점(교보문고)에도 판매용으로 일부가 보내졌다. 감격의 순간들이었다. 충익공 묘소에 가서는 헌정 고유제도 올렸다. 그리고 이 해 정기총회에서 비안공문중회 창립 1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도 만들어 배부하였다. 이때 제4대 임원이 구성되었다.  

회장-두응(충), 부회장-용달(좌), 달응(좌), 인회(양), 태영(양), 좌응(충), 감사-주식(좌), 태현(양), 총무-항용(양)

 

2003년엔 충익공파 위토인 괴산읍 능촌리 갱고개의 묵은 밭을 충익공 종손 제응님과 회장 두응님의 출자로 개간 보수하여 경작지로 활용토록 하였다.  

2004년 시제때엔 문중 중요 유물 116점에 대한 전시 및 해설 행사가 있었고 제5대 임원개선이 있었다.  

회장-두응(충), 부회장-용달(좌), 진응(좌), 경회(양), 상환(양), 상천(충), 규동(충), 감사-주식(좌), 태호(양), 총무-항용(양), 부총무-상석(양), 태선(양)

 

2005년 4월엔 우리 문중의 숙원사업인 비안공(휘 仁甲) 묘비 건립(찬자-시양, 역자-항용, 서자-태국) 행사가 열렸다(약 70명 참석). 이 비안공 묘비는 비안공 위토의 일부가 공공용지로 수용되면서 받은 보상비로 건립하게 되었다. 이에 맞추어 양덕공파 종가에서도 단독 출자하여 양덕공(휘 時說) 묘비(건립자-태섭, 찬자-항용, 서자-태국)와 문관석을 건립하였고, 안주공(휘 繁) 묘비(건립자-상석, 찬자-항용, 서자-태국) 등이 건립되는 등 큰 사업들이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6년 4월엔 연속하여 충익공 후손들의 공동 모금으로 이루어진 충익공(휘 時讓, 찬자-두응, 서자-문응), 합천공(휘 穀, 찬자-두응, 서자-문응), 사휴제공(휘 徽, 찬자-항용, 서자-문응), 도사공(휘 秋萬, 찬자-두응, 서자-문응), 밀양공(휘 鳳至, 찬자-두응, 서자-문응)의 묘비와 각종 석물 건립 및 사초 작업이 이루어졌다(약 60여 명 참석). 정말 놀라운 사업들이 여러 종친들의 합심 협력으로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제 16년의 세월이 지나자 숭모재와 세덕사도 나이가 들었는지 장마철이 되면 재실과 사당 건물 이곳저곳이 누수되고 지붕 기와 도색이 산화되었다. 이에 금년(2007년) 초가을에 충익공파와 양덕공파에서 모금한 4백만원(각 2백만원 씩)으로 재실과 사당 및 대문 등을 보수하고 기와 도색 작업도 하였다. 그렇게 16년의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고 내 나이도 40대 초반에서 이제 50대 중반을 넘고 있다.   

 

2. 정해년(2007년) 시제 준비

 

여름이 지나자 서서히 금년 시제를 준비해야 했다. 매년 있는 일이지만 시제와 정기총회 행사를 원만히 치루려면 2달 전인 8-9월 경 부터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일할 아주머니들을 구하는 일이 제일의 과제였다. 시제 2일전에 1명, 1일전과 당일엔 각각 3명이 필요했다. 모친께서는 2년 전부터 몸이 편찮으셔서 17년간의 괴산생활을 접고 서울로 오시어 병원에 다니고 계신다. 할 수 없이 모든 제수 장만을 아주머니들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그런데 최근 늦가을에 일할 아주머니들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괴산의 가을 특산물인 절임배추공장에 모든 아주머니들이 동원되기 때문이었다.  

지난 9월 추석 때, 괴산에 내려가 동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부탁을 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래서 이번엔 전문 제수 맞춤집에 위탁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김장 절기가 늦어지자 절임배추 공장 일정도 뒤로 밀려 그동안 써왔던 아주머니들을 다시 쓸 수가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어쩔 수 없이 전문 맞춤집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20일 전이 되자 문중회 전 종친들에게 시제를 알리는 제첩(祭牒)을 우편엽서로 보냈다. 시제일을 <매년 음력 9월 마지막 일요일>로 정하다 보니 해마다 시제일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또 이를 상기시키기 위해 매년 전 종친들에게 통보해야 했다. 약 200여 매의 우편엽서를 발송했다. 번거로운 일이나 꼼짝없는 총무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250여 매 쯤 되던 것이나 점점 줄어들었다. 빈약한 문중회 재정 형편이기에 총무에게는 급료도 없었다. 그러나 난 늘 행복했다.  

 

15일 전이다. 각종 서류를 준비해야 했다. 정기총회 회의 서류는 약 20여 쪽으로 늘어났다. 2년 전부터 실시하고 있는 문중 역사 학습 자료가 첨부되었기 때문이다. 또 지난 1992년부터 기록해 온 16년 동안의 문중사 일지도 확인 점검했다. 감사자료도 준비했다. 감사는 총회 전일 괴산에서 실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영수증 철도 정리했다. 위토를 경작하는 분들에게는 묘소 벌초 여부와 위토 도지비납부 여부도 확인해야 했다.  

 

홀기와 축문도 다시한번 손질했다. 국한문 혼용식으로 현대화한 홀기는 제례의 간소화 방향에 따라 거의 매년 고치고 다듬기를 반복해 왔다. 특히 이 홀기는 A3 용지에 제작 코팅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축문도 같은 방법으로 준비하여 매년 바뀌는 간지(干支)와 헌관명만 색연필로 썼다가 지우고 재기록하는 편리성을 택했다.  

 

1주일 전이다. 괴산의 부친과 전화통화가 잦아졌다. 제수비 송금, 제수 준비 과정의 문제들, 아주머니 구하기, 예상 참석인원 등을 협의했다. 회장님과 자주 통화하며 각종의 과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주요 인사들에게는 전화로 참석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충익공파는 회장님이, 양덕공파는 내가 각 종친들에게 연락하기로 하고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전화를 걸었다. 특히 내자(內子), 자녀들과 동반해오시기를 간청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참예(參詣) 인원이 자꾸만 줄어든다. 걱정이다. 숭조의식, 책임의식, 역사의식 등이 점점 아쉬워져 간다. 인문(人問)이 죽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는데---

 

며칠 전 상석대부는 40여 명이 이용할 만한 수량의 접이식 야외 식탁과 의자를 괴산 세덕사로 보냈다. 그동안 점심식사를 할 때 마다 재실 잔디밭 위에 비닐을 깔고 앉다보니 바닥 자리가 차가워 불편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용히 기증한 것이다. 참으로 감사했다.  

 

처는 안타깝게도 16년만에 처음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지난 12월 발병하여 금년 1월 대수술을 받은 후유증 때문이다. 앞으로는 아무래도 무리한 일은 어려울 것 같다. 작은 형수님도 지난해 대수술을 받아 참석할 수 없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부친께서 혼자 모든 것을 준비하셔야 했다. 고초가 많으시리라. 동반 내자분들이 적어 당일 작은 일을 도와줄 일손들이 부족할 것 같아 걱정이다. 우리 문중회의중요한 당면 과제다. 회장단과 총무단 여러분들에게 전화하여 전일 괴산에 모여 각종 준비를 도와 달라고 요청하였다. 충익공파 규동부회장님과 부총무이신 상석대부님이 나와 함께 전일 만나 준비하기로 했다.  

 

2일 전이다. 서울에서 준비한 각종의 준비물들을 빠짐없이 챙겼다. 홀기, 축문, 도기록, 정기총회 서류, 통장, 감사서류, 영수증철, 카메라, 명찰, 문중회 일지, 문중회 주소록, 문중 세계표, 시제 제수 준비방법 및 설찬도, 봉행시 집사 행동 요령 자료 등 모든 것을 준비하고 제기(祭器)도 몇 가지 더 샀다.  

 

1일 전이다. 직장의 오전 근무를 마치자마자 곧 괴산으로 향했다. 고속도로는 만추(晩秋)의 자연 경치를 즐기려는 단풍객들로 다소 정체되었다. 영동고속도로에서 내륙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산야는 온통 붉은 단풍들로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 속을 달리다가 괴산 IC를 빠져 나오며 상석대부에게 전화를 하니 이제 막 내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나와 약 20분 가량 차이가 있었다. 오후 4시가 돼서야 괴산에 도착했다. 출발한지 3시간만이다. 괴산 시내의 한 모텔에 들러 방 하나를 예약했다. 오늘 오시는 분들의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또 대형 마트에 들려 소주 1박스를 샀다. 매달 뵐 때마다 1박스씩 아버님께 사 드리는 나의 기쁨이다. 그런데 1달이 지나고 나면 모두 없어지고 달랑 한 병만을 남겨 놓으신다. 갑자기 찾아 오는 손님을 위해서이리라. 85세이시지만 건강하신 아버님께 감사했다.  

 

몇 가지 시장을 보고 집에 도착하니 규동부회장님과 태진형님, 한용형이 와 있었다. 금새 상석대부님도 도착했다. 그리고 아주머니 3분이 작업하고 있었다. 곧 규동부회장님과 태진형님은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청주로 돌아가셨고, 아주머니들도 저녁식사를 짓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부터 상석대부와 나와의 본격적인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다. 사당 안의 전 제수물들을 설찬(設饌圖)도에 따라 하나하나 점검하며 진설했다. 데우지 않는 제수는 오늘 모두 진설해야 했다. 각종 준비해야 할 것들이 의외로 많았다. 다식은 미처 준비하지 못해 내일 아침 일찍 사와야 했다. 떡집에 맞춘 떡과 약식은 내일 아침 8시에 오기로 되어 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모든 준비가 끝났다.  

 

기다리던 태선 부총무는 몸이 좋지 않아 못 온다고 하며, 태호감사님도 내일 오신다고 전화가 왔다. 상석대부와 함께 시내로 나가 포장마차에서 간단히 밤참을 하며 내일을 계획한 뒤 예약한 모텔에서 잠을 잤다. 내일 시제 봉행은 잘 이루어져야 할텐데---, 종친들은 많이 오시려나?---

 

3. 시제 봉행

아침 6시에 일어나 집으로 가니 벌써 아주머니들이 와 계셨고 한용형은 헛간에 설치된 가마솥에 탕국을 끓이고 있었다. 마당의 천막치기, 식탁과 의자 놓기, 사당 앞에 스티로폴과 자리 깔기, 세수기와 수건 놓기, 자갈 위에 조각 카페트 깔기, 대문청소하기, 제수물 재점검하기, 마이크와 앰프시설 확인하기, 기타 소도구 준비 등으로 또 바빠졌다. 상석대부와 함께 손을 맞잡으니 일이 한결 쉬웠다.  

9시가 되자 제일 먼저 옥천의 태호감사님이 도착했다. 전 장부를 감사하실 수 있도록 내드렸다. 제복을 입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야외 파라솔 아래에서는 커피물도 끓였다. 천막 안에는 도기록(到記錄), 명찰, 분정판(分定版)을 내놓았고 <보감>(寶鑑)이란 제목을 붙인 커다란 파일첩도 내 놓았다. 이 속에는 수년간 준비해 왔던 약 30여 점의 문중 중요 역사 유물 사진들이 해설문과 함께 들어 있다. 오시는 분들에게 문중 역사를 큰 사진으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 했듯이 관심도와 이해도가 금새 빨라졌다.  

 

10시가 되자 점점 종친 여러분들이 많이 도착하셨다. 오늘 축관은 참봉공(휘 友甲) 후손이신 명년(名年-榮항)대부님이 해주시기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급한 사정이 생겨 못 오신다고 한다. 축관은 규동부회장님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옆에서는 독축 예행연습이 시작되었다. 좀 있으려니 멀리 경북 성주와 대구에서 경회부회장님과 태기아저씨, 창회님, 진식아우 등이 도착했다. 먼 데 계신 분들이 일찍도오셨다.  

 

천막 아래 접수대에서 상석대부는 도기 작성과 회비 접수, 명찰 배부 등을 했고, 나는 분정표를 작성했다. 비안공 초헌관은 양덕공파와 충익공파가 번갈아 가며 담당하기로 되어 있다. 분정은 회장단이 결정하기로 되어 있기에 각 파 부회장들은 직계 선조님들에 대한 헌관을 분정했다. 한 선조님 당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3분을 정한다. 가능하면 모든 분들께 헌작의 기회를 고루 드리자는 취지에서다. 따라서 17위에 대한 헌관은 총 51명이 필요하나 대체로 통덕랑공(휘 남채) 이하 9위는 2분이 담당하므로 헌관 30명, 축관 1명, 집례 1명, 응창 1명, 좌상 집사 2명, 우상 집사 3명 등 총 40명이 있어야 제례가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간혹 참예자가 적을 때는 한 헌관이 여러 선조님들께 잔을 올려야 했다.  

 

분정 배정이 끝나면 곧이어 축문을 작성했다. 그리고 모든 제례자는 제복을 입도록 했다. 고문이신 부친께서는 도착하는 종친마다 제복을 입혀 주며 착용 요령을 일일이 설명해 주신다.  

 

10시 50분,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즉시 재실에 연락하여 메와 탕국을 뜰 것과 집사들은 이를 사당으로 옮긴 뒤, 좌집사들은 제수 진설의 최종 점검을, 우집사들은 향로에 숯불을 피워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참사자들에게 제례 봉행 예고를 하고 나는 분정판과 홀기, 축문을 들고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간단히 제례 봉행전 유의사항을 알렸다. 사당을 들고 날 때의 동입서출법(東入西出法), 안경은 허용 되나 선글라스 착용 금지, 핸드폰 끄기, 공수법(拱手法), 절하는 법, 제례 도중 일체의 잡담 금지, 정숙유지 등을 당부드렸다. 이어 분정을 발표하였다. 분정표는 다음과 같다.  

 

*헌관

比安公-慶會, 陽德公-泰鎬, 忠翼公-斗應, 陜川公-奎翰, 監司公-泰基, 安州公-相煥, 判書公-宅應, 承旨公-瑩會, 副護軍-長應, 通德郞公-玉會, 鼎光公 이하-政應, 東吉公이하-漢鏞

*祝官-奎東, *應唱-泰燮, *執禮-恒鏞, *執事-相錫, 奎成, 進植, 慶植

 

이제 홀기(笏記)에 따라 본격적인 제례가 시작되었다. 집사들과 헌관들은 모두 손을 씻고 사당 안으로 들어와 신위 앞에 섰다. 나는 우측에서 창홀(唱笏)을 하였고 부친께서는 좌측에서 응창(應唱)을 하셨다. 창홀은 한문과 국문을 겸용하였다. 전통 한문식으로 먼저 창홀한 뒤 다시 간략하게 우리말로 행동요령을 일러주는 방식으로 우리 문중에서 특수하게 행하는 선도적, 창의적 방법이다. 제례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개독-강신례-참신례-초헌례-아헌례-종헌례-유식례-진다례-사신례-폐독감-고예성-분축-복음례-철상-예필

 

먼저 개독, 강신례, 참신례, 초헌례를 올렸다.   

제례는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창홀 소리는 사당과 재실 전체를 은은하고 고아(高雅)하게 감쌌다. 모든 참사자들은 경건한 자세로 창홀(唱笏)에 따라 감사(感謝)와 기원(祈願)을 담아 공손하게 시제를 올렸다. 처음 독축(讀祝)하시는 규동부회장님의 굵고 단아(端雅)한 목소리는 선조님들께 우리의 뜻과 바램을 간절히 고(告)하는 듯했다.  

 

약 50분간 진행되는 제례는 엄숙하고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다. 제례 봉행의 마지막 단계인 철상을 하였다. 처음 해 보는 집사들이 많아 몇몇 곳에서 시행착오가 있었다. 되풀이 되는 반성이지만 적어도 집사와 축관들은 전일 예행연습을 꼭 해야 하리라. 아무래도 내년 여름에는 모임행사를 갖고 1박 2일간 창홀법, 독축법, 제례 절차, 집사 예행연습 등을 연수해야 할 것 같다.  

곧 이어 모두 사당에 다시 앉아 제16회 정기총회 행사를 가졌다. 총무인 나의 개회사로 시작되었다.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개회사-경과보고-회장님인사-전년도 총회 의결사항 보고-금년도 주요 활동과 행사 보고-감사보고(태호 감사)-결산보고-안건 상정과 토의 및 의결-신임 임원 선출-기타사항 의결-문중역사 자료 학습(제3회-호칭과 항렬자에 대하여)-공지사항 전달(취묵당 문화재 지정, 하담 신도비 문화재 지정 진행과정 소개, 주요 시제일 안내)

 

이어 제6대 임원 개편이 있었다. 회장으로 영회(양덕공파)님이 선출되었다. 문중회 창설 초기에 총무직을 맡으신 분이다. 비안공 문중 회장은 충익공파와 양덕공파가 번갈아 맡기로 묵계(?契) 되어 있다. 감사는 규성(충익공파)님이 선출되었다. 부회장은 각파에서 2명 씩 추천하기로 되어 있어 좌랑공파는 유임되어 진응, 용달님이, 양덕공파는 태현, 태호님이, 충익공파는 규동, 태진님이 위촉되었다. 나는 오랫동안의 총무직을 면직시켜 달라고 요청드려 총무는 부총무였던 상석대부님이 맡기로 했다. 나는 일을 계속 맡아 달라는 주문에 따라 상임부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점심식사는 마당 잔디밭 천막 아래에서 정담(情談)과 함께 진행되었다. 천막 2개조는 3년 전에 회장단에서 기증한 것이고, 야외 의자와 접이식 식탁은 상석대부님이 금년에 기증한 것이다. 모두 감사한 맘으로 사용했다. 작년까지는 식사 후 개인 봉송(奉送)을 싸드렸는데 금년부터는 생략하기로 했다. 시제 음식량도 줄었고 봉송 싸는 일손도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단체 촬영도 했다.  

 

식사를 마치자 곧 성묘를 갔다. 이번엔 모두 괴산읍 능촌리로 갔다. 새로 조성한 개향산(開香山) 묘원 아래의 계단 입구에는 <柏峴墓苑>(백현묘원)이란 표석이 새로 세워져 있었다. 개향산을 바라 보니 정말로 잣나무가 많았다. 옛날엔 이 고개에 방앗간(연자방아)이 있어서 마을 이름도 방아재라 불렸던 곳이다.  

 

작년에 새로 조성한 묘역엔 새로 돋은 잔디가 더욱 보기 좋았다. 맨 위 참판공(휘 彦?)부터 영상공(휘 錫), 비안공(휘 仁甲) 묘소를 순서대로 참배해 내려왔다. 참배하는 사이 상천대부님과 나는 간단한 해설을 덧붙었다.  

 

안주공 묘소와 하담신도비 앞을 지나 충익공묘소, 합천공 묘소를 참배한 다음 일행은 이번에 문화재로 새로 지정된 취묵당(醉?堂)으로 갔다. 유유히 강물(괴강)을 바라보며 충민사 옆 언덕 위에서 한 마리 학처럼 날개를 펴고 날아갈 듯이 서 있는 절경(絶景)의 정자(亭子)였다. 나는 이곳이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취묵당>의 현판이 없어진 구전담(口傳談), 주련(柱聯)에 새겨져 있는 시 <용호>(龍湖) 등을 해설하였다. 그런데 주련 한 구가 없어져 안타까웠다.    

 

용호(龍湖)-용산 앞의 한강을 말함

고목한운리(古木寒雲裏) : 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

추산백우변(秋山白雨邊) : 가을 산엔 소낙비가 들이친다

모강풍랑기(暮江風浪起) : 저문 강에 풍랑이 일자 (없어진 주련 부분)

어자급회선(漁子急回船) : 어부는 급히 뱃머리 돌리네

 

4. 시제를 마치고  

이제 모두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취묵당 답사를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능촌리 충익공 신도비 앞에서 내년을 약속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다시 세덕사로 돌아와 아버님과 뒷정리를 하고 난 뒤 서울로 향했다. 빨리 서둘렀으나 벌써 4시이다. 마지막까지 뒷정리를 함께 한 상석대부와 함께 두 대의 차가 나란히 서울로 향했다. 단풍 관광 차량들과 합쳐 상행길은 고생 좀 되리라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택했다. 음성-일죽-양지-용인-분당-성남으로 상경하는 도로는 나의 비로(秘路)였다. 상석대부와는 저녁 식사도 함께 못하고 용인쯤에서 헤어졌다. 이번에 고생이 참 많으셨다.  

 

서울에 도착하니 7시 30분이다. 3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고속도로보단 나았으리라. 괴산의 아버님께 도착 전화를 드리고 나서 저녁 식사 후 다리를 펴니 곧 잠이 쏟아져 내렸다.  

 

이튿날 각 지방의 종친님들에게 도착 안부전화를 했다. 고속도로를 이용해 상경하시는 분들은 모두 큰 고생을 했다고 한다. 구, 신회장님께 행사 뒷마무리가 잘 끝났음과 전 종친들이 무사히 귀가했음을 전화 드렸다. 또 오늘 불참하신 종친들께서 통장으로 보내온 향촉비 내용을 정리하고 그 분들께도 감사의 전화를 했다. 행사의 모든 내용을 일지에 기록했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또 홀기와 축문을 수정하고 코팅도 다시 했다.  

 

한 일이 끝나면 쉴 새 없이 새로운 일과 행사들이 앞을 막아선다. 앞으로는 젊은이들과 내자(內子)분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 행사를 벌이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관리사옥 신축문제에 대한 장단기 계획도 수립해야 한다. 내년부터 위탁할 제수 전문 업체도 결정해야 한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사당 청소 및 제례행사도 이젠 문중회 일로 삼아 담당자를 정해야 한다. 여름에는 친목 행사를 겸해 독축법, 창홀법 등의 제례 예행연습과 문중 역사 연수 실시, 문중의 장단기 중요 사업 계획 등도 수립해야 하리라. 그동안 준비해 온 <세덕사> 책자 발간도 서둘러야 했다. 비안공 묘소 정비 사업에 대한 구체 계획도 수립해야 하고 여러 묘소들의 불량한 잔디 관리 대책도 강구해야 한다. 끊임없이 문중회와 관련한 사업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총무직을 마치면서 그동안의 문중회 경과과정을 겸한 세덕사 시제 봉행기를 작성하기로 했다. 16년이 지난 오늘이 있기까지 본 문중회를 위하여 노심초사(勞心焦思) 애쓰신 전 ? 현직 회장님들과 부회장님들, 그리고 감사 및 임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올린다. 님들의 높은 철학과 숭조정신, 헌신적 활동들이 계셨기에 오늘이 있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고스란히 문중역사에 기록되어 길이 남을 것이며 우리들의 마음속에 큰 원동력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나와 앞으로의 신세대들은 본 문중회가 유지 발전되는데 최선을 다할 것임을 굳게 다짐하고 또 믿는다.  

        2007년 12월 2일 호산재(湖山齋)에서 金恒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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