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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괴산 수리의 참봉공(휘 友甲) 후손 世居地 탐방기 (2003. 1.1. 항용(제) 탐방, 제공)
가) 일시 : 2003. 1. 1. 14:0-18:00 나) 장소 : 충북 괴산군 沼壽面 壽里2구(일명 숫골, 壽洞) 일대 다) 탐방자 : 泰燮(恒鏞의 嚴親), 恒鏞(제) 라) 방문자 : 1)萬應(제학공파 20대손) (1)가계 : 錫(제학공 6대손)-友甲(3자)-紀(3자)-鼎興(3자)-允之-來徵-龍著-範一-致健-由顯-箕年-寅浩-相天-萬應.(휘 鼎興의 10대 종손) (2)거주지 : 수리 2리 500번지 (3)전화 : 043)832-8059 2)瀅植(형식, 제학공 22대손) (1)가계 : 錫(제학공 6대손)-友甲(3자)-紀(3자)-鼎臣-允孚-海徵-礪著-구(옥구슬 구)-天健-由岳-學年-履浩-相一-鏞應-泰珪-瀅植(2자). (2)거주지 : 수리 2리 495번지. <부자 독립운동 공적비> 옆 김진사 고가 (3)전화 : 043)832-3828 마) 탐방기 새 해 첫날이다. 날씨가 맑다. 서울이 아닌 고향 괴산에서 맞는 아침 공기는 차긴 했어도 더없이 신선해서 좋다. 금년은 오늘처럼 맑고 깨끗한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 어제 우리 홈페이지(안동김씨-andongkimc.kr)의 대화방에서 오늘 아침 일찍 주회님과 충민사에서 만나 구인사와 청천에 있는 서봉 김사달박사 묵적비를 탐방하기로 했으나 갑자기 취소 되었다. 오전에는 조용히 묵상하며 한 해 계획을 세워 보았다. 할 것이 많았다. 그러나 욕심 내지 않기로 했다. 우리 안사연을 생각하면 든든하고, 힘이 솟고, 미래의 희망이 보이고, 보람이 보였다. 오후에는 아버님과 함께 평소 가고 싶었던 제학공파 내 소파인 참봉공(휘 友甲-龜巖公 휘 忠甲의 3弟) 후손들의 세거지인 숫골을 갔다. 괴산읍 우리집에서 승용차로 불과 6분만에 도착했다. 익히 다니며 보던 길이요 주변 모습이라 낯설지 않았다. 괴산에서 소수면 소재지에 진입하기 직전 약 1.5Km 전에 우측으로 들어가는 갓바위 푯말을 지나 500m를 들어가니 불정으로 가는 푯말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우회전하여 약 500M를 가니 마을 입구에 <수리 2구>라고 쓴 간판이 있다. 좌회전하여 마을로 들어가니 꽤나 큰 마을이 나온다. 곧바로 경노당으로 갔다. <萬應>대부님을 찾으니 오늘은 나오지 않으셨단다. 댁의 위치를 물어 찾아갔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현관 문을 열고 만응 대부님께서 막 나오고 계셨다. 평소 괴산에서 크고 작은 문중사로 부친과는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지만 이렇게 집에서 갑자기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미리 전화 예약도 하지 않았다. 만응대부님과 부친께서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들어 갔다.
만응 대부님은 약 70세쯤 되어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 단아한 얼굴이셨고 고요한 음성을 가지셨다. 방의 벽에는 열심히 붓글씨 연습한 한지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하신 용모와 잘 어울렸다. 거실에는 만응대부님의 노모님께서 누워 계셨다. 노환이 중하신 것 같았다. 잠시만 대부님이 보이지 않으면 알 듯 모를 듯한 발음으로 아들을 연거푸 부르신다. 그때마다 연방 부드럽게대답해 주신다. 부름과 대답 속에 많은 대화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마치 주고 받는 음악 같고 오페라를 보는 것 같다. 닫고 있던 방문을 열어 놓자 노모님은 우리 쪽을 누워 아무 말씀없이 바라 보시며 이젠 부르지 않으신다. 아드님의 정성어린 효성을 금새 읽을 수 있었다.
이곳의 현 지명인 수리(壽里)는 일명 '숫골'이라고 했다. 그런데 본래 '숯을 많이 생산하는 곳'이었기에 '숯골'로 불리던 것이었는데 '숫골'로 와전되고 드디어 전혀 다른 뜻인 수리(壽里)로 변천되었다고 한다. 슻굽는 삶보다는 오래 사는 것이 더 좋았던 모양이다. 이 마을 입향조인 참판공(휘 紀)은 1587년(선조 20)에 父 참봉공(參奉公 휘 友甲)의 2子 중 長子인 시량(時亮)의 3子로 태어났다. 1616년(광해 8. 30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참정사훈첨사(參靖社勳僉使)를 역임하고 1640년(인조 18)에 몰하셨으며 병조참판에 추증되신 분으로 묘소는 마을 뒤 金鳳山에 있다. 그 아드님은 부호군공(휘 鼎臣)으로 1609년(광해1)에 태어나 1699년(숙종 25. 수 99)에 몰하시고 嘉善大夫 副護軍을 壽職으로 받으신 분이시다. 그 후 약 13대 가량을 이 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이어온 일가들이었다.
옛날 이곳에는 우리 안김이 총 100 여호 중에 90 여 호나 되어 마을 전체를 다 차지하고 살았는데 현재는 약 10 여 호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난 명인으로는 독립운동가요 한말 학자인 김용응 진사, 그 아드님인 독립운동가 태규님, 김태동 교통부장관, 김학응 충남지사. 현 홍성산업 대표이신 金泰震님, 전 군수였던 金泰秀님, 전 괴산군수였던 金瀚植님(참판공 휘 紀의 13대 종손) 등이 있으며, 가까운 일가로 철학박사이며 전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을 지내신 김태길 박사 등이 있다. 만응 대부님의 8대조께서는 이곳에서 청주(현 비행장 자리)로 이사가서 그곳에서 고조부까지 사셨는데 이때는 큰 부호로 살았다고 한다. 그 후 고조모께서 증조부를 데리고 다시 이곳으로 들어와 오늘날까지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8대부터 5대조 까지의 묘소를 비행장 건축 시 이장공고를 보지 못해 안타깝게도 강제 훼철되어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고 하며 애통해 하셨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의 집에 대대로 내려오는 문서가 있다고 하며 오래 묵은 한지 묶음을 펼쳐 보이셨다. 호적단자 10매가 있었는데, 8대조 휘 내징(來徵) 1매, 7대조 휘 용저(龍著) 1매, 6대조 휘 범일(範一) 1매, 5대조 휘 치건(致健) 6매, 증조 휘 기년(箕年) 1매였다. 그리고 命龜 양자증서(예조로부터의 승인서) 1매, 기타 땅문서 1매 등 모두 귀한 대부님 집안의 보물들이었다. 사진 촬영을 하고 함께 밖으로 나와 일찍이 이 지역의 三進士(숫골의 金鏞應 진사, 마송의 이진사, 소수의 강익서 진사)로 이름이 높았던 正觀公(휘 용응)의 고택과 그 孫인 金瀅植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먼저 마을 앞쪽 길을 따라 산쪽으로 마을을 안고 돌아가는 길의 독립운동가로 이름 높은 正觀公(휘 鏞應)의 고택을 찾아갔다. 正觀公의 부친인 부사공(휘 相一)은 일찍이 進士에 급제하고 여섯 고을의 군수를 거쳐 淸風大都護府使, 忠州兵馬節制使를 역임한 바 있다. 정관공은 부사공의 장남으로서 1870년 태어나 무사장릉참봉(무仕章陵參奉)을 역임하고 1954년 몰하였는데,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자금을 모아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공이 살던 고가는 현재도 전하고 있는데 안채는 파손되고 행랑채만 남아 화가인 孫 형식(瀅植)님이 작업실 겸 살림집으로 쓰고 있었다. 만응 대부님의 안내로 갑자기 찾아간 우리들을 78세의 머리가 허옇게 센 님께서는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허술한 행랑채의 안은 좁고 작아 보였다. 마루를 연해 비닐로 막아 바람을 막았고 한 방은 침대 하나 있는 침실로, 다른 한 방은 거실 겸 작업실로 쓰고 있었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작품과 습작 작품들, 그리고 그림 도구들이 한 방 빼곡하게 차 있었다. 연세가 높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나의 호칭을 금새 '형님'이라고 수정해 주신다. 님의 눈에는 예술가의 혼이랄까 강렬한 빛이 발산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형식님은 1926년에 태어나 서울로 상경하여 당시의 명문인 배재중(현 배재고 전신)을 1945년 졸업하고 경성 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다시 1947년에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입교한 후 1949년에 중퇴하셨다 한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인텔리이셨다. 님을 만나기 전에 만응님으로부터 형식님에 간단한 사전 소개 말씀을 들었다. 님은 일제시대에 유행처럼 번졌던 마르크스의 프로레타리아 사상에 깊이 심취했다가 해방 후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0여 년 간 투옥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70년 경 출옥하여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자녀도 없다고 했다. 외로움과 고독이 가장 가까운 친구라 하신다.
형식님과 미술은 일찍이 배재고보 재학 당시인 1,2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학교 미술부에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순종 선생(동경 오에노 미술 출신)께 사사 받았다고 한다. 배재 미술전람회에서 준특선(1942년), 선만 미술전 입선(1943)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자신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는 학생이 같은 학교에 있었는데 그가 고교 2학년 3학년 때에 국전에 입선하는 일이 있자 자신은 그의 2인자가 되기 싫다는 판단으로 일단 미술을 포기했다가 옥살이 하는 동안 그림을 그리고 싶어 견딜 수 없었으며, 이때 많은 작품을 구상했고 출옥 후 본격적으로 미술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99년에 첫 개인전을 열고 2002. 10월 현재까지 2회에 걸친 개인 전시회를 가졌다고 한다.
님은 전시회의 팜플렛(2002. 10. 19-10. 25. 청주시 상당구 서문동 조흥문화 갤러리) 하나를 내게 주신 다음 다른 작품들도 눈 구경만 시켜 준다며 사진 10 여장을 보여 주셨다. 이해 할 수 없는 작품들도 더러 있었지만 몇 작품은 門外漢인 나에게도 매우 훌륭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이 있었다. 이를 사진으로 다시 찍거나 스캔작업을 하고 되돌려 드리면 어떻겠느냐는 나의 제안에 님은 "나중에 다시 만나서..., 나중에 내가 죽거들랑... "하면서 이유는 묻지 말라며 극력 거부하신다. 나중에 반드시 다시 올 것을 굳게 약속하고 집을 나왔다. 님이 살고 있는 古家는 울타리 흔적과 고목들로 보아 엄청난 규모였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고가 바로 옆에는 정관공(휘 鏞應)의 독립운동과 아들인 휘 태규(泰珪) 공이 일제시대 때 3.1운동 주도로 대구형무소에서 3년 옥고를 치르고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 업적을 기리는 공적비(<부자독립운동 공적비>)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공적비 이면에는 1991년 11월. 증손 容晩이 쓰고, 대한노인회 괴산군지회가 주관하였으며, 괴산군수가 후원하여 설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정관공의 부친인 부사공(휘 相一)의 불망비(<咸平郡守金相一惠及作人不忘碑> 光武 五年(1901) 辛丑 11月 立)가 서 있는데 이것은 원래 마을 앞에 있었던 불망비를 독립운동 공적비를 세우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의 기념비가 한 곳에 있었다. 주변의 고목과 고가와 잘 어울려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었다. 위 두 분의 독립운동 공으로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 근친들인 김태동, 김학응님이 장관과 도지사라는 고급 관직을 받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마을 뒷산 쪽으로 좁긴 했으나 포장도로가 잘 닦여져 있었다. 지난 2001년 10월에 설립한 참판공파 후손들의 합동 가족묘지인 납골묘로 가는 길이다. 납골묘 장려책의 하나로 도청에서 道費 3000여 만원을 지원하여 포장한 도로라고 한다.
뒷산(金鳳山) 납골 묘역 입구까지 승용차로 올라가니 웅장하고 아름답게 조성된 납골묘역이 나타난다. 본래 이곳은 참판공(휘 紀)과 부호군공(휘 鼎臣)의 묘소였으나 지난 2001년, 이 지역을 납골묘로 만들어 현재는 약 30 여기가 들어가 있고 앞으로도 70여 기는 더 모실 수 있는 대형 납골묘지라고 한다. 납골묘는 사각형으로서 전면은 폭 약 4M, 높이 2.5M, 옆면 길이 약 10M나 되었다. 사방을 화강석으로 쌓았고 위는 잔디를 심었다. 납골묘 앞에는 옛날 참판공과 부호군공의 묘에 있던 묘비와 장군석, 동자석을 그대로 세웠고 새로 만든 커다란 비석도 있었다. 비석 전면에는 <가족묘지>라고 새기고 이면에는 납골묘를 만든 그간의 과정과 배경, 모셔져 있는 분들(충렬공 14세손 紀부터 26세손 태봉까지), 앞으로 후손들도 모두 함께 들어간다는 말, 후손들에게의 당부 말씀, 앞으로의 관리 책임자와 관리방법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었다. 납골묘지 앞에 참배를 하고 사진촬영을 하였다. 약 6000여 만원의 문중 기금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주위에는 원래 있던 고송들을 잘 살려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납골묘의 표본이라 생각했다. 산을 내려와 마을에서 만응대부님과 작별하고 꼭 자주 들르기로 약속하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참으로 뜻깊은 날이었다.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고 새로운 일가 어른들도 만났으니 말이다. 또 김형식님 가정에서 일어난 일들 즉 구 한말과 현재에 이르는 우리 민족사와 평행선상에서 겪어야 하는 우여곡절의 가정 역사 과정을 실제의 현장에서 실 인물과 대담으로 듣고 보는 영광을 얻었으니 그 감동은 어찌 크지 않을 수 있으랴. 가슴이 벅찼다. 마치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의 역사과정과 이곳 김참판댁의 근현대사를 동시에 보는 듯 하였다. (終)
마)사진 설명> (1)마을 입구 전경
<마을 입구 전경>
(2)金萬應 댁내 소장 고문서류(호구단자 등)
<상기 자료 종합 정리> 1. <戶口單子>(10매) 1) 金來徵 단자 (1)작성자 : 김래징(53세). 萬應 八代祖) (2)관할관청 : 淸州牧. (3)연대 : 옹정7년(1729 영조5) 12월 (4)거주지 : 內北 江內一 立巖上里 2) 金龍著 단자 (1)작성자 : 金龍著(49세. 萬應 七代祖) (2)관할관청 : 淸州牧 (3)연대 : 건륭12년(1747. 영조23) 3월. (4)거주지 : 內一 立巖上里 3) 金範一 단자 (1)작성자 : 金範一(30세. 萬應 六代祖) (2)관할관청 : 未詳(淸州牧) (3)연대 : 건륭21년(1756. 영조32) 1월. (4)거주지 : 內一立巖上里 4) 金致健 단자1 (1)작성자 : 金致健(42세. 萬應 五代祖) (2)관할관청 : 未詳(淸州牧) (3)연대 : 가경6년(1801. 순조1) (4)거주지 : 立巖 北里 5) 金致健 단자2 (1)작성자 : 金致健(51세. 萬應 五代祖) (2)관할관청 : 未詳(淸州牧) (3)연대 : 가경15년(1810. 순조10) (4)거주지 : 立巖 北里 6) 金致健 단자3 (1)작성자 : 金致健(42세. 萬應 五代祖) (2)관할관청 : 未詳(淸州牧) (3)연대 : 가경18년(1813. 순조13) (4)거주지 : 立巖 北里 7) 金致健 단자4 (1)작성자 : 金致健(57세. 萬應 五代祖) (2)관할관청 : 未詳(淸州牧) (3)연대 : 가경21년(1816. 순조16) (4)거주지 : 立巖 北里 8) 金致健 단자5 (1)작성자 : 金致健(60세. 萬應 五代祖) (2)관할관청 : 未詳(淸州牧) (3)연대 : 가경24년(1819. 순조19) (4)거주지 : 立巖 北里 9) 金致健 단자6 (1)작성자 : 金致健(63세. 萬應 五代祖) (2)관할관청 : 未詳(淸州牧) (3)연대 : 도광2년(1822. 순조22) (4)거주지 : 內北 江內一 立巖 北里 10) 金箕年 단자 (1)작성자 : 金箕年(45세. 萬應 曾祖) (2)관할관청 : 未詳 (3)연대 : 1865(고종2년) (4)거주지 : 北中面 壽洞里
2. <養子 立戶 禮曹 啓目書> 1매 1) 연대 : 강희30년(1691. 숙종 17). 2) 관할관청 : 예조 3) 내용 : 金允之(萬應의 九代祖)가 無後하여 六寸 兄인 允迪의 제 三者인 命龜(來徵)를 兩家가 同意하여 養子로 立戶함을 認證하는 文書 *啓目:조선시대 임금에게 올리는 서류에 덧붙여 내놓는 목록 3. <토지 매매문서> 1매 1) 연대 : 광무5년(1901). 2. 14. 2) 내용 : 田畓 賣買 文書
(3)정관공(휘 鏞應) 고댁
<고택은 안채의 일부만 남아 있고 많은 부분이 허물어져 있음>
<김형식 화백께서 살고 있는 바깥 사랑채>
(4)金相一, 金鏞應, 金泰珪의 불망기 및 부자 독립기념비(고택 뒤 담장에 이어 있는 기념비)
<좌-김상일 불망비, 우-부자 독립기념기념비>
<기념비 옆의 고목>(김형식 화백의 그림(고목)과 유사한 이미지)
(5)참판공 문중(휘 紀 後孫) 가족묘원
<묘역 좌 우의 석물들>(참판공의 원 묘역에 있던 것임)
<참판공(휘 紀) 묘비> <부호군공(휘 鼎臣) 묘비>
(6)김형식 화백과 주요 작품들(2002. 10. 19. 청주 조흥문화갤러리. 개인전 출품작들)
<고목1. 1987. 유채. 60*80cm>
<고목2. 1992. 유채. 80*60cm>
<고목3. 1988. 60*80cm>
<천변. 2002. 유채.40*34cm>
<갈산고지. 2002. 40*32cm>
<뜰. 2002. 유채. 30*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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