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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보정 김정회 작품 소개>
한국고미술 네트워크 내 소개 http://kr.oldarts.net/. (2003. 7. 19. 주회(안) 제공)
(1) 묵죽도
*작품설명
가) 김 정 회 (1903~1970) --작가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호는 [보정,연당]이라하고 해강[김규진1868~1933]에게서 그림과 글씨를 배웠다. 그는 학문에 많은 관심을 두어 [연당문호]라는 책도발간하고 행서,초서,해서등잘썼으나 사군자중에서 대나무와 란을 특히 잘그려 세간에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나) 작품소개 -- 작가 : 보정 김정회 크기 : 125 X 35 제작시기 : 일제 작품구분 : 서화 판매구분 : 쇼핑용 판매가 : 380,000 원(2003. 7. 19 현재)
(2) 사군자 10폭 병풍 (2003. 7. 19. 주회(안) 제공)
* 작품설명-- 작가 : 보정 김정회 크기 : 130 X 32 X 10폭 제작시기 : 일제 작품구분 : 서화 판매구분 : 쇼핑용 판매가 : 2,500,000 원(2003. 7. 19. 현재)
(3) 보정공 서찰 소개 (2005. 4. 5. 태영(군) 제공)
(가)서찰 사진 소개
(나)서찰 발견 및 해독 과정
*2004. 12. 말 : 태영(군) 종친. 경매로 나온 상기 서찰문을 응찰하여 낙찰받아 소장.
*2005. 2. 27. : 태영(군) 종친, 상기 서찰을 <우암문집 출판기념회>장에서 공개. 익수(제)님께 해독 및 해석 의뢰
*2005. 3. 23. : 익수(제)님의 해독 및 해석 종료
*2005. 4. 4. : 재갑(군. 호고당 주. 서체 연구 전문가)에게 감정의뢰. 재갑님은 상기 서찰과 김정회님의 묵죽도와를 비교하여 일점의 의혹이 없는 일치 결정. 보정 김정회 서찰 확인
(다)서찰 해독 및 해석문 (2005. 3. 23. 익수(제) 해독 및 해석. 항용 종합 정리 제공)
敬承
惠復反覆提示啓發益深君子
以德而愛固如是其藹且蔚耶謹
承審
侍際經軆候萬重仰慰撲祝第
重省卽前耳 顧今大界陸沉冠
履(원문에 신발‘루’자이나 대신‘리’자 씀)倒置昨人而今獸朝夏而暮夷
學之一言爲衆所諱于斯時也自
拔於流俗之中特立獨行砥柱
矻矻斯文之責未始不在於
高明矣而撝謙不已譽人過情無
乃德愈進而禮愈卑耶
示誨諸處足使聾者得聞瞽
者有見而愚陋重隔不能默會於
提示之中或有所不能無疑自
愧無理之言不疑之疑而或以問辨
有得於理則固有愈於含默而無
所得故更以仰讀耳 夫易之理
因象而着易之象因數而推焉愚
囂則以爲康節象數之學大
有功於易學而先賢未嘗以聖學
正門庭許之 噫天下之理才出於
正則便是邪非其善則便是惡
天下無非正非邪非善非惡之理
康節旣非正門庭則其於邪正
善惡當何所居耶不揆率爾妄
議至此不勝皇恐耳 惟祝
爲文陰嗇不備上
卽回 金正會弟 再拜
삼가 답서를 받았습니다.
반복하여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심이 더욱 깊었습니다.
군자(君子)께서 덕으로써 사랑해 주시며 이와 같이 굳게 하심이 그 얼마나
무성하고 울창합니까. 삼가 부모님 모시고 몸 건강하심을 알고 나니 위로가 되고 축하를 드립니다.
다만 전처럼 거듭 (건강을) 살피소서.
생각건대, 지금 온 세계가 망해가는데 유림(儒林)들은 뒤바뀐 행동을 하여, 어제의 사람이 오늘은 짐승이 돼 버리고 아침에는 문명인이다가 저녁이면 오랑캐가 돼버려, 학문 있는 자의 한 마디 말도 민중에게는 요즘 기피되고 있습니다. 시류(時流)의 풍속가운데서도 스스로 발을 빼어 우뚝 서서 홀로 행동하여 (황하의 세찬 흐름 가운데 있는) 지주암(砥柱巖)처럼 수고롭게 버터내야 하는데, 이런 사문(斯文)의 책임은 그 시작이 고명(高明)께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겸양해 마지않고 명예를 지키는 사람의 지나친 생각은 아마 덕(德)은 더 나아가고 예는 더욱 낮아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곳곳에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셔서 귀머거리에게 듣게 하고 소경에게 보게 하였습니다만, 제가 미천하고 거리가 멀어서인지, 제시(提示)하신 가운데서 은연히 이해되지 않은 게 있습니다. 간혹 의문이 생길 때마다 스스로 부끄러워합니다만, 이치에 닿지 않는 말에는 의심아닌 의심을 하게 됩니다. 간혹 질문에 대한 대답에 이치를 얻게 되면 진실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그러나 소득이 없기 때문에 다시 읽어보곤 합니다.
무릇 역(易)의 이치는 상(象-卦)에서 뚜렷해지고 역(易)의 상(象)은 수(數-陰과 陽의 卦가 여섯 위치에 배치된 수)에서 근본을 캘 수 있습니다. 나는 아는 게 없습니다만, 큰 절(節-水澤節卦)은 상(象)과 수(數)를 배울 때 역학(易學)에서 크게 공부하여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선현(先賢)들은 일찍이 성학(聖學 .주: 공자의 학문)을 방법에서 바로 하지 못했습니다. 아! 천하의 이치로 재능이란 바름에서 나오는 것이거늘, 때마다 사악하다니... 그 선하지 않은 것은 바로 악(惡)일 것입니다. 천하에 비정(非正), 비사(非邪), 비선(非善), 비악(非惡)의 이치가 없으니, 큰 절도(節度)는 이미 방법에서 바르지 않은 것인즉, 그 절도는 사악함과 바름, 선함과 악함에서 당연히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모든 저 망녕된 논의를 헤아리지 못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나이다. 오직 안녕하시기 바라며, 글을 지으면서 몰래 막힌 데가 있어 다 갖추지 못하고 올립니다.
즉시 회답하오며
김정회( 金正會 )동생 올림
(4) 김정회 선생에 대하여 (2005. 4. 6. 김발용(군) 제공)
(가)출전 : <고창을 빛낸 인물>에서
보정 김정회 선생은 고창 도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으로 조선 개국공신인 익원공 김사형의 후예이며 회천 김재종의 아들이다. 호는 '보정'또는 '연연당'인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자세가 단정하고 품성이 고와서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다. 커서는 현성균관 대학교의 전신인 명륜전문학원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졸업후에는 성군관 사성과 명륜전문학원 강사로 있으면서 당시 석학들과 함께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쳤다. 한편 육영사업에도 관심이 많아서 도산초등학교와 고창여중학교를 건립하는데 재정적인 도움을 많이 주셨으며 광복 후에는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또한 선생은 시서화에서 고루 능하여 특히 그의 대그림 솜씨는 스승인 해암선생 조차도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선생은 시문이나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어 국내외에서 이름을 널리 떨쳤다. 시,서,화에 능하여 삼절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보정 김정회 선생님의 고택
○1993년 8월 31일.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9호로 지정
○위치: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151번지
2. 김정회 선생의 생가
도산리는 고창읍에서 약4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로 고창읍에서 아산방면으로 가다 보면 도로 우측에 도산마을이라 씌여진 입석이 있는 곳이다. 김정회 선생의 집의 대문에는 입춘대길이라는 문구가 씌어져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사랑채와 행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각지붕 건물이고 동쪽 끝에는 문을 달아 안채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 동쪽끝에는 정면 5칸,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사랑채가 안채보다 훨씬 훗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안채,사랑채,행랑채,사당,곳간으로 이루어진 가옥 형태는 조선시대 양반집에서 볼수 있는 전형적인 것이라 할수 있다. 지금도 김정회 선생의 후손이 그 집에서 살고 있다.
*후손은 숙종 8년(1682년)에 건축 된 김정회(金定會.1903-1970) 고가에서 90세 노모를 모시고 5대 째 살고 있는 김경식(68.전 군장대 교수. 고창읍 도산리 151)씨이다.
(나) 출전 : <고창군청 홈페이지>에서 (2007. 6. 14. 항용(제) 제공)
도산마을은 安東金氏와 淸道金氏의 世居地로서, 다른 곳에 비해 고가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고가는 한말 유학자인 金正會(1903~1970)의 고가이다. 이 곳은 현재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 4棟과 곳간 2棟 등 모두 6동으로 되어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로서, 나중에 동·서쪽에 각각 1칸씩을 덧붙였다. 주초는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이며 기둥은 방형과 두리기둥이 섞여 있다. 안채의 뒤에 있는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축대의 높이는 약 250cm 정도이다. 김정회는 松沙 奇宇萬의 문인으로, 成均館 經學院에서 경학을 가르쳤으며, 海岡 金圭鎭 문하에서 그림을 배워 사군자를 잘 그렸는데, 그 중 대나무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全北大學校 博物館, 1984, 『高敞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
1862년경에 지어진 이 김정회(1903-1970) 선생의 고가는 그의 고조때부터 살아온 집이다. 이는 조선조 상류 계층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로 안채, 사랑채, 그리고 행랑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간채, 사당, 안채를 중심으로 2동의 큰곳간돌은 자연석으로 되어 있다. 이중 용마루를 가진 팔각 지붕, 홑처마, 그리고 안마당보다 높이 자리잡고 있는 안채의 가옥양식이 보통 다른 집에 비해 아주 색다르다
안채 인근에 수채의 가옥이 있는데 그중 몇채는 한국 동란때 헐려 없어졌다. 보정, 김정회 선생은 조선 개국 공신인 익원공 김사형의 후예이며 대유학자이기도 하다. 한국 고등교육 기관의 하나인 현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경학원(명륜 전문학원)에서 경학을 가르쳤다.
보통때 그분은 매화,난초,국화를 즐겨 그렸지만 특히 대나무 그림은 아주 유명하다. 대학자로서,또 서예가로써 글씨와 그림은 지금도 세인으로 하여금 항상 진한 묵향을 느끼게 하고 있다. 보정, 김정회 선생은 상류 사회 출신이지만 많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덕행으로 많은 주위 사람들을 계도하였다. 선생이 타계한 후에도 두터운 덕망은 많은 향리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 기리어 지고 있다.
(5) 묵죽도 소개 (2006. 5. 11. 주회(안) 제공)
출전 : 문화저널 1993.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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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작품명 : 대나무33. 나. 작가명 : 보정 김정회. 다. 작품번호 : 326 번.
라. 제작년도 : 근대작 마. 작품사이즈 : 120x32cm 바. 판매가 : 350,000 원 (액자포함가)
사. 작 품 설 명 : 보정:김정회(1903~1970). 작가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호는 普亭이라 하였고
(해강:김규진1868~1933)에게서 그림과 글씨를 배웠고, 경학원(현 성균관대학교)을 졸업하였다.
보정은 학문에 관심이 많아"연당문호"라는 책외에도 여러 문집을 남겼고 행서,해서,초서,예서 등 모두 잘 썼다.
특히 대나무와 난을 더욱 잘 그렸다.
우리의 전통제례 매안제(埋安祭)
우리의 문화적 전통은 우리 민족의 정신사를 통하여 이해될 때 보다 깊은 의미와 근원적 힘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민족 정신사 속에서 유교는 하나의 근원으로 오늘까지 면면히 내려온 중심 축으로서 역할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자존의 긍지가 뿌리내림으로서 온갖 역경을 뚫고 나가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 원동력은 효(孝)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유교는 신앙이 아니고 실천위주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일가족 살해 암매장 사건은 인륜의 타락이 어느 선까지 이르렀는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사건에서 존속살인 이라는 패륜은 말할 것도 없으며 현대인의 잔인성마저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의 선영에 대한 제례(祭禮)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일지라도 좀 더 인륜을 생각하는 그 자세가 새로워져야겠고 오늘 우리 모습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필자는 지난 8월 22일 고향에서 세교(世交)해 오는 한 선배 댁의 제례에 참관한 일이 있다. 그 날의 제례는 우리의 주변에서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그 제례의 명칭조차 모르는 경우가 되어 버렸지만 이른바 유가(儒家)에서 행에 오는 길제(吉祭)와 매안제(埋安祭)가 그것이다.
옛날부터 우리의 전통적인 가정에서는 선영을 받들어 모시는데 있어서 고조이하 아버지까지 4대를 제사하게 되고 가묘가 있는 집안은 4대를 가묘에 신주로 모시고 봉제사(奉祭祀)해 왔다. 그리고 5대조부터는 묘전(墓前)에서 제를 지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전통의식 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문명에 밀리면서 경제생활에 급급한 나머지 인륜은 차츰 희박해 가고 제사 역시 합제(合祭) 아니면 편리할 때로 따르고 부모의 장례까지도 소홀히 하는 세태다. 또한 가묘, 즉 사당이 있는 가정도 요즈음은 극히 드물다. 그것은 한국전쟁때 소실된 경우도 있고 그 후 폐한 곳도 많기 때문이다.
가묘를 모시는 가정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시고 상기(喪期)가 끝나면 그 부모가 사당에 입묘(사당에 들어가심)해야 하기 때문에 5대조는 출묘하여 산소 옆에 매안(埋安)하게 되는데 이 제례가 매안제로 사당의 봉사자였던 아버지가 입묘함에 따라 이제 봉사지가 본인으로 바꿔지기 때문에 봉사지가 된 본인으로서는 사당의 선영 앞에 이제 부모의 상기를 끝내고 석고(돌아가신 아버지)가 입묘하게 됨을 고하고 또한 신주에 대해 개제(改題)하게 됨을 고하는 제례가 바로 길제다.
이러한 제례가 전북 고창읍 도산리에 거주하고 있는 안동 김씨 가문인 김경식박사댁(현, 한국교원대학원과 전주대에서 교육사상 강의)에서 행해 졌다. 그는 보정(普停) 김정회(金正會)1)선생의 장손이며 그 댁(宅)은 금년 8월 전라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댁 사당에는 당시 5대조인 만수 김영철(晩睡 金榮喆)2), 고조 학묵(學黙), 증조 재종(在鐘), 조고 정회(正會)의 내외분 4대의 신주가 모셔져 있었다.
이제 김박사가 선친의 탈상을 끝내고 선친이 사당에 들어가심에 앞서 만수공 영철의 신주께서 세대가 변하여 사당을 떠나가야 됨으로 이에 애통한 마음 무한하나 전례(典禮)에 따라 매안하게 된다는 독축으로 시작해서 행사가 끝나고 사당에서 신주를 모시어 임시로 한 쪽에 정중히 모셨다.
다음 김박사의 보고, 증조, 고조의 신주를 향하여 이제 선친을 사당에 모신다는 것 그리고 봉사자가 바뀜에 따라 신주의 개제가 있게 된다는 것을 독축하고 각 신주에 대한 개제를 봉사자인 김박사가 정중히 행하여 다시 모셔졌다.
제례가 끝난 후 여러 후손들이 아침식사를 마친 후 5대조인 만수공 내외분의 신주를 정중히 모시고 사당을 나와 그 분의 정사(精舍)인 만수당에 잠깐 유하시다가 묘소에 가서 그 옆에 매안하였다.
그 날 행사의 절차와 모습을 대략 적었는데 필자로서는 처음 참관한 것이었고 비록 사라져간 우리의 전통 제례였으나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제례 후 김박사로부터 그 소감을 들었다.
“뵙지도 못한 5대조이나 사당을 떠나시고 매안하게 되는 게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옛 전통을 그대로 고수한다거나 사치스럽게 효도한다거나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제 봉사지가 되었으니 선고(先考)를 이어 그저 직분을 하는데 까지 다하려 노력하겠다.
요즈음은 인륜에 대한 의식이 자꾸만 희박해져 가는데 인륜 그것은 변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선영에 대한 인식도 전통을 지킨다거나 효도한다거나 또 종교적인 이유 그 차원을 떠나 우선 쉽게 나의 존재를 인식한다면 선영에 대한 흠모의 정을 배제할 수가 없다“
숙연한 자라였다. 가족제도가 핵가족으로 바뀌고 있고 또 산업의 물결에 따라 세태가 변해 간다해도 가정, 그 곳은 어느 땐가 우리의 선조가 설정한 이 후 존속의 과정으로 지금까지 확대되면서 존속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륜과 선영을 잘 모셔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까?
김박사 그는 이 시대의 선비다. 가장 고향을 아끼고 사랑하며 효의 정신은 가르치는 일과 함께 늘 그의 임무인 것이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효를 중심으로 현대의 상황 속에서 재창조된다면 그것은 인간 긍정의 인도적 사상으로 열어 줄 것이요, 또한 여기에 장래가 있어 우리 역사의 미래적 방향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사당 뒤편의 울창한 대나무 숲과 고목이된 동백나무에서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한결 시원스러웠다.
1) 서울 經學院출신으로 成均館 司成을 지냈다. 1931년부터 해강 김규진문하에서 서예를 사사 받고 38년 全日本文藝展覽會에서 입선, 40년 전일본국전에서 風竹으로 1등 당선한 서예가로 사군자에 능하였다.
2) 성균관원생, 한일 의병을 일으키려고 松沙 奇宇萬선생과 밀약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송사 행장에 기록된 숨겨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次子 純黙은 최익현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그 분의 倡義를 돕게 하였다.
(6) 고창판소리박물관 김정회 행서 병풍2곡 (2006. 5. 11. 주회(안) 제공)
가. 유물번호 : 62001-40
나. 유 물 명 : 행서(行書)
다. 분 류 : 진기풍기증
라. 서예작가/제작자 : 보정 김정회(普亭 金正會, 1786-1856)
마. 시대 : 근대
바. 재질 : 화선지에 묵
사. 크기 : 병풍2곡
아. 상세설명 : 보정(普亭) 김정회(金正會)선생은 고창출신으로 조선 개국공신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이며 예술가이자 대유학자이기도 하다. 한국 고등교육 기관의 하나인 현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경학원(명륜 전문학원)에서 경학을 가르쳤다. 보통 때 그 분은 매화, 난초, 국화를 즐겨 그렸지만 특히 대나무 그림은 아주 유명하다. 대학자로써, 또 서예가로써 글씨와 그림은 지금도 세인으로 하여금 항상 진한 묵향을 느끼게 한다.
현재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151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는 고조(高祖) 때부터 살던 곳으로 1993년 8월 13일 전라북도민속자료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진철우 기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