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원공파(사형)

본문

p02.png 19. 기타 각종 문헌 자료 소개

1) 효자 안동김공 기행비 (2007. 2. 21. 영환(문) 제공)

 

孝子安東金公紀行碑甲戌

孝子安東金公在準旣沒之二十五年甲戌湖南谷城士人安在晦趙明植吳基泳柳建永等百一十有六人聯名走書幣以請于晉康河謙鎭曰孝子故恭靖王時上洛伯士衡之後也號敬庵天性至孝親有疾彌年行禱無所不誠凡侍奉諸節皆躬爲之不使家人代之喪葬一遵禮制不用堪輿禍福之說卜宅兆僅三武而近朝夕哭省不以寒暑風雨而懈焉積其誠意感動天聰用能闡先世四孝今竹里之烏頭四閭者是也孝子有一弟在規及其分門也析與田宅器物其半先墓皆置祭田不替其香火又放范氏義庄劃錢穀以濟宗族貧乏凡此皆孝子實行所塗於一鄕人耳目者非可誣也而表宅樹風之典顧今無由得焉惟立石逵道傳示久遠吾輩責也是敢徼惠吾子一言吾子圖之余作而言曰世降俗弊天下之寒心久矣而諸君子獨能以表章倫紀爲心可謂知所本矣吾安以不文辭諸遂爲撰次其事而系之以銘曰

安東之世世趾其孝維竹有谷四閭竝表猗公至行可四而五天王不作孰幽能耀輿情斯惻刻石逵道秉彝之同非以阿好尙其來後是則是效

 

출처 : 晦峯先生遺書卷之三十九    회봉 河謙鎭(하겸진)

하겸진(河謙鎭)

1870(고종 7)∼1946. 근세의 유학자.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숙형(叔亨), 호는 회봉(晦峯) 또는 외재(畏齋). 진양출생.

아버지는 재익(載翼)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이다.13세에 사서·오경의 요의(要義)를 모두 익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고, 17세에 당대의 명유 허유(許愈)를 만날 수 있었으며, 24세부터는 성리학(性理學)을 논하기 시작하였다.27세 때 스스로 쓴 《도문작해 陶文酌海》의 서(序)를 부탁하기 위하여 곽종석(郭鍾錫)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고, 29세 때에는 이승희(李承熙)·장석영(張錫英)·송준필(宋浚弼) 등과 교유하였으며, 안동·선산·성주 등지의 선현들의 유허지를 순례하고 많은 선비들과 사귀었다.

그뒤 명산대천은 물론 동서남의 3해안 일대와 명승고적, 중국의 공자·맹자·주자의 묘(廟)까지를 순례하려 하였으나 만주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저술로 《주어절요 朱語節要》 10권을 편찬하였고, 《도문작해》 6권 및 《명사강목 明史綱目》 18권을 저작하였다.

만년에는 《동시화 東詩話》를 엮었는데, 정인보(鄭寅普)는 그 서문에서 “동국(東國)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진기한 시화”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유현(儒賢)들의 학문과 연원을 체계 있게 정리한 《동유학안 東儒學案》 30권을 완성하였고, 《해동명장열전 海東名將列傳》, 일제하의 우리나라 국민정신 계발을 위한 〈국성론 國性論〉 3편과 주기론자(主氣論者)들이 주창한 〈성사심제론 性師心弟論〉에 대하여 2편의 변(辨)을 지어 그 부당성을 지적하였고, 심성론(心性論)의 대성인 〈심위자모설 心爲字母說〉 5편을 지었다.

그를 위하여 세운 덕곡서당(德谷書堂)에서는 1957년부터 사림들이 매년 석채례(釋采禮)를행하고 있다.

 

 

p20.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