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원공파(사형)

본문

p02.png 3.익원공 김사형(翼元公 金士衡) 약사 및 연보

공의 호는 낙포(洛圃)이고 안동부인(安東府人)이다.

 

여조도원수 추충정란 정원공신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 봉 상락군 개국공 김방경(金方慶) 시 충렬공의 현손, 대광상락군 김순(金恂) 문영공의 증손. 추성보절동덕익찬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수사도 첨의사사 좌정승 예문관 대제학 상주국 복창부원군, 상락후 김영후(金永煦) 정간공의 손(孫). 증 보국숭록대부 영삼사사 상락군 김천(金 )의 자(子). 고려 충렬왕 2년(1341년)에 출생하였다. 고려의 벼슬은 단성보리공신 삼사좌사 동판도평의사사사, 조선왕조에서는 순충분의좌명동덕개국공신. 추충협찬정란정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정승 겸 삼훈관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사. 상락백부원군. 식읍 1천호 식실봉 300호, 시호는 익원공이시다. 태종 7년(1407년) 7월 30일에 향년 67세로 서거하였다.

 

조준과 더불어 8년동안 정승에 있었으며 처음 벼슬할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다. 강직하고 명확한 성품으로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고려조에 음보로 연계관직이 되고 감찰규정이 되었다.

 

공민왕 9년(1360년) 성균관 문과급제하여 고공산랑이 되어 고을에 조세를 공평하게 부과하여 엄하게  다스려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377년 집의가 되어 동료 조준, 안익, 김주 등과 더불어 인물을 얻었다고 칭송이 있었다.

 

개성부윤이 되고 단성보리공신호를 받았다. 창왕 즉위년 1389년 가을 이성계가 집정하여 각 부처에 대개혁을 추진할 때 공을 중용하였다. 사전을 개혁하는 지방정치를 융성케 하고자 관백의 지위를 격상시켜 삼품 이상 관을 보임하고 안렴사를 도관찰출척사로 바꾸고 공은 교주 강릉도(交州 江陵道)를 맡아 공명하게 다스렸다.

 

공양왕 2년(1390년)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승진되어 동지경연사가 되어 왕이 장차 천도하고자 함에 시위제사와 도위군관이 병졸을 거느리고 나아가 백성의 주식이 어렵고 조정이 극도로 혼란하므로 관에서 논쟁을 진정시켰다. 또 우현보, 권중화, 장하 경보의 죄를 탄핵하여 추방하고 이때 관공서가 양파로 나뉘어 서로 탄핵함으로써 관원이 텅비자 병중에도 관에 나아가 대사헌의 중임으로 정몽주, 당인 정우 이색, 최운사와 이훈 등을 파직시켜 물의를 진정시켰다. 인하여 지문하부사가 되고 삼사좌사 동판도평의사사사에 올라 본 조정에 들어갔다.

 

연  대

연              보

1392년(조선개국)

태조원년

7월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여 조선이 개국되자 승문하시랑 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 응양위상장군에 제수되었다.

7월 28일 좌명공신 문하시랑 찬성사 판팔위사 상락군에 봉하고  8월 16일 좌명개국공신호를 받았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책훈되는 14인 공신의 한분이다.

8월 19일 공신들이 왕에게 잔치를 베풀고 공신의 부인들도 중궁(왕비)에게 시연하였다.

12월 문하우시중을 제수하고 상락백 식읍 1천호 식실봉 3백호의 봉작을 받았다.

태조5년 1396년

문하 우정승으로 오도병마도처치사에 임명되어 대마도원정군을 발하였다.

도주로부터 조공의 약속을 받고 익년 정월에 개선하였다.

태조6년 1397년

10월 6일 세자의 혼인을 관장하는 가례도감을 세우고 영삼사사 이화 우정승 김사형으로 제조를 삼았다. 12월 16일 김사형으로 겸판사헌부사를 삼았다.

태조7년 1398년

1월 11일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이 노비 판정도감의 일을 맡았다.

4월 26일 신도가 낙성되어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에게 신도팔경병풍을 하사하였다.

윤 5월 18일 양정에서 봉화백 정도전 참찬문하 이지란 월성군 설장수 문하찬성사 성석린을 불러 사신으로 갔던 일을 위로했는데, 판문하부사 심덕부 영삼사 권중하 좌정승 조준 우정승 김사형 의성군 남은이 잔치에 배석하였다.

이들 기로는 왕조의 중흥에 공효가 지대하며 이의 기능은 조직 활동에 표출되었다.

9월 1일 비로소 친왕자를 공으로 삼고 종친후로 정1품을 백으로 삼아 봉작제를 이루니 김사형을 우정승으로 삼았다.

왕자의 난에 입궐하여 적장자를 세자로 삼기를 청했다. 정종이 내선을 받자 공을 논하여 1등을 삼고 동덕정란사공신호를 받고 우정승으로 삼았다.

정종1년 1399년

6월 27일 우정승으로 명나라 건문황제 등극을 축하하는 하례사가 되어 가서 정종의 선위 사실을 승인받았다.

12월 왕의 허락을 받아 사직을 했다.

태종1년 1401년

3월 태종이 즉위한 후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2년 1402년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이무(李茂) 이회(李 )와 같이 제작하였다.

10월 사임하니 영사평부사를 삼고 달포가 지나 부원군이 되고 사저로 나갔다.

태종5년 1405년

64세로 기영회(기로회)에 입회하였다.

태종7년 1407년

7월에 향수 67세로 졸하니 시묘3일 유자부대언 윤수 치제하고, 시호는 익원공이다.

아들은 둘이며, 육(陸)은 동지중추공 승(陞)은 밀직사사공이다

 

<익원공 관련 주요 사진>

  1)<익원공 묘소>(경기도지방 문화재 107호.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 49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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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전면>(경기도 양서면 목왕리 산49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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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후면>

 

2) <익원공 김사형 부조묘 사당>(전북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3) 익원공 김사형 영정각(경남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 매각)

4) 익원공 김사형 신도비 및 신도비각(익원공 묘소 입구. 2002. 3.1 항용(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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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익원공 김사형 묘비문

6) 익원공 김사형 낙포재(익원공 묘소 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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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포재>(재실. 칼러 사진-2002. 3.1. 안.사.연 방문시 항용(제) 촬영. 제공)

 

 *<영정 관련 각종의 기록 내용 종합>

(2002. 4. 주회(안) 제공)

1)<문화유적총람>의 기록 내용

⊙【유적명칭】★낙포영각(洛圃影閣)

   【관리번호】676-820-279-325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사묘(기타)

   【소 재 지】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 매각마을

   【시 대】근대

   【관 리 자】

   【유적내용】

 

2)<문화재도록> (함양군, 1996) 의 기록 내용

낙포 김사형(1333∼1407)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影幀閣)이다. 김사형(金士衡)은 안동 김씨로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 삼사우사(三司右使)까지 올랐다. 태조 이성계를 추대, 조선 개국공신이 되고 상락백(上洛佰)에 봉해졌다. 정종(正宗)의 즉위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定社功臣)이 되고 태종때 좌정승, 상락부원군으로 퇴사하였다.

시호는 익원공(翼元公)이다.

낙포의 영정은 원래 고창(高敞)의 종손가 김영필(金榮珌) 집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1936년에 17세손 참봉 김영주(金榮珠) 등이 종손과 상의하여 이곳에 옮겨와 1938년에 영정각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1938년 4월에 김영주가 이봉사실기를 지었고, 12월에 정도현(鄭道鉉)이 김익원공 영정각 상량문을 9월에 17세손 김영석(金榮錫)이 영정각서를 1955년에 최훈교(崔薰敎)가 영정각기를 지었다.

 

【참고문헌】함양군, 1996, <<문화재도록>>

【비 고】

 3)  익원공 부조묘와 영정 자료 종합 (2005. 1. 19. 주회(안) 제공)  

   가. 익원공 부조묘(불천위사당) 는

1872년 : (부조묘 이건) 전남 영암에 익원공의 사당인 부조묘(不?廟)를 충북 청원군 강내면 용실동으로 이전,

   ---1870년∼1872년 8월에 영정은 처음 황해도 평산 엽동에 봉안하였고, 그후 영암으로 이전하기 이전의 사정은 사실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1900년 : 익원공 부조묘를 용실동에서 강내면 궁현리로 이건, 주창자 김영필, 간사 김태로, 김윤원, 김민상, 김재경, 이건기는 행주 기우만이 쓰다.

1916년 (부조묘 이관) : 익원공 부조묘를 궁현리에서 부여읍 저석리 석탄 이전, 신주, 익원공 김사형 회맹철권 보존

1934년 (부조묘 이건) : 익원공 부조묘를 부여읍 저석리에서 전북 고창읍 도산리로 이전, 상량문은 도산 김정회가 쓰다.

 

  나. 익원공 영정은 원래 고창(高敞)의 종손가 김영필(金榮珌) 집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1936년에  17세손 참봉 김영주(金榮珠) 등이 종손과 상의하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 매각마을 낙포영각(洛圃影閣)에 옮겨와 1938년에  영정각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4월에 김영주가 이봉사실기를 지었고, 12월에 정도현(鄭道鉉)이 김익원공 영정각 상량문을, 9월에 17세손 김영석(金榮錫)이 영정각서를 지었다.

 

1955년에  최훈교(崔薰敎)가 영정각기를 지었다.

2000. 12. 6일, 익원공 영정을 고창종가 사당에서 목왕리 낙포재로 이송 봉안하였다.

2005. 1. 18일, 새 익원공 영정을 제작하여 서울 영등포 익원공파 회관에 봉안하였다.

 

*<익원공 묘소 문화재 지정 고유제 봉행> (2002. 4. 주회(안) 제공)

  출전 :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74호> (2001년 10월호)  

지난 9월 5일 익원공파종회는 익원공 휘士衡의 묘소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음을 고하는 고유제를 백여명의 후손과 안동김씨대종회 임원 다수가 참석하여 파종회장 洙栢씨의 헌작으로 고유제를 봉행하였다. 이날 평산신씨 제정공파 회장과 임원이 참석하고 경축 화환까지 증정해 주어 더욱 감사하였다.

이에 익원공 묘소 문화재 지정에 관한 경과와 士衡의 약사를 다음과 같이 약기해 본다.

 

 2000. 10. 21 ---익원공파종회 회장단회의에서 익원공 묘소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기로 의결

          10. 31 ---적격서류를 작성 구비 문화재 지정 신청서를 양평군 문화관광과에 제출

          12. 20 ---양평군 문화관광과 담당관이 묘소 자료 답사

          12. 6  ---익원공 영정을 고창종가 사당에서 목왕리 낙포재로 이송 봉완

          12. 10 ---양평군 문화관광과 담당관이 2차 묘소 답사

 2001. 3. 16 ---경기도

 문화재 위원회 위원 2명과 경기도청 문화재 담당관 2명과 양평군 문화관광과 담당관 2명이 익원공 묘소를 답사

          6. 19 ---경기도 문화재 위원회에서 심의결과 경기도 문화재 묘소자료 제107호로 지정

          9. 5 ---안동김씨 익원공 묘소 문화재 지정 고유제 봉행

 

7)익원공 김사형 재실 관리사

8) 익원공 김사형 구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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