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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도 판서공 시제 참예 보고 (2005. 4. 26. 윤식(문) 제공)
일 시 : 2005년 5월 24일(일요일) 장 소 : 전남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 선영 참석자 : (무순, 존칭 생략) 문온공파 - 광우(회장), 영국(부회장), 수길(이사), 효만(이사), 광도(이사) 안 사 연 - 영환, 영윤, 윤만, 태우, 태영, 윤식
<4월 23일(토)>
2005년 5월 24일 충렬공 할아버지의 장자이신 전법판서상장군(휘 선) 할아버지를 비롯해 충숙공(휘 승용 : 판서공 2子) 이하 군사공파 할아버지 시제가 160여 명의 종친들이 참석한 가운데 토마리 선영에서 거행되었습니다.
판서공 시제에 참예키 위해 문온공파 회장단(회장 광우, 부회장 영국, 영윤)과 이사진, 안사연 6명 등 총 11명이 하루 전날인 23일(토) 오후 2시 30분 서울 잠실에서 출발, 강진 선영으로 향했습니다. 하루 전인 금요일 저녁만 하더라도 쌀쌀한 바람이 제법 불었는데, 오늘은 더운 기운이 느껴지는 화창한 봄날입니다. 영윤 종친께서 일찌감치 봉고를 약속장소에 대놓고 참석 종친들을 기다리십니다. 곧이어 광도 종친을 선두로 참석자들이 속속 도착합니다. 곧이어 태영 종친께서 커다란 충숙공 묘지명 표구를 들고 합류합니다. 충숙공 묘지명은 일전에 발용 종친께서 탁본과 번역문을 우리 홈에 소개한 것을 계기로 발용, 태영 두 분 종친께서 표구한 것입니다. 올해는 충숙공 묘지명을 강진 내동 재실에 모시게 돼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발용 종친께서는 지난 해 판서공 시제에 참석한 종인들께 나누어 드리라고 단체 사진 액자와 30여 매의 작은 사진을 보내 오셨습니다. 한 할아버지 자손들끼리 전해지는 진한 감동과 정성이 새삼스럽습니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참석자들이 모두 합류하고 15인승 봉고차는 강진을 향해 서울을 빠져나갑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중부고속도로는 그다지 붐비지 않아 음성휴게소와 벌곡휴게소를 거쳐 저녁 7시경 순조롭게 전남 장성인터체인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1시간 정도만 더 가면 내동 재실입니다.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직장 형편상 참석하지 못하신 발용 종친께서 벌써 서너 번 전화를 주십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우리 일행과 함께합니다.
아름다운 연녹색 길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렸습니다. 오후 8시 35분 내동 재실에 도착하니 재실에서는 두런두런 정담이 새어 나옵니다. 음력 보름이라 커다란 달이 하늘에 걸렸는데도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 있었습니다. 재실로 들어가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멀리서 어려운 걸음 하신 종친들 시장하시겠다며 고봉밥과 정성껏 준비하신 찬을 푸짐하게 내오십니다. 맛나게 저녁을 들고, 문온공파 회장님을 시작으로 차례로 도기(到記)를 적습니다.(이 도기에 대해서는 지난해 시제 참예 보고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태영 종친께서 제작해 오신 충숙공 묘지명 표구를 화제로 한동안 웃대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다음 예약해 둔 강진 읍내 숙소로 향합니다. 재이 종친께서도 숙소로 오시겠다는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재이 종친께서는 해마다 판서공 시제에 즈음해서는 매번 종친들 안내와 접대를 도맡아 하십니다. 매년 큰 신세만 지고 있으니 늘 송구하기만 합니다. 읍내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재이 종친께서도 막 도착했습니다. 반가운 얼굴을 대하자 두 손을 마냥 마주 잡은 채 놓을 줄 모릅니다.
우리 일행은 재이 종친과 함께 인근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남도의 명물인 홍어회를 안주로 탁주와 소주를 나누며 지난 일 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아마 사정만 허락한다면 날이 샐 때까지 그렇게 마주 보며 웃고 있었을 겁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자리를 파하기 무섭게 재이 종친께서 음식값을 지불하려고 나섭니다. 벌써 여러 해 신세를 져서 올해는 꼭 우리 일행이 값을 치르고자 해도, 멀리서 오신 종친들에 대한 대접이 아니라며 좀체 물러서질 않으시니......올해도 염치없이 또 지고 말았습니다. 재이 종친께서 귀가하신 다음 우리 일행은 숙소로 돌아와 잠시 더 정담을 나눈 다음 단잠에 빠져듭니다.
<4월 24일(일)>
일찌감치 잠자리에서 일어나 조반을 들고 내동 재실에 들러 인사를 한 다음 인근의 경묵 어른 묘소를 들러봅니다. 재철 종친(동원그룹 회장)의 선대인 묘소는 참으로 검소합니다. 해마다 묘소를 들르면서 그 어른과 재철 회장의 깊은 뜻과 정신을 화두로 올리곤 합니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난 고갯길을 넘어가면 토마리 선영입니다. 자동차로 10분 정도면 도착하는 길입니다.(토마리 선영 묘소 찾아가는 길은 <각파 문중회>란의 <군사공파>란에서 판서공 시제 참예기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토마리 선영 입구에는 버스 정류소가 있고, 선영 쪽으로 난 길섶에 <토동마을>이라 적은 커다란 돌표석과 <능성구씨세장비>가 서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습니다. 능성구씨 세장비 돌표석에서 왼쪽길로 산 쪽으로 따라가면 민가 형태의 영모재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 왼쪽이 토마리 선영입니다.
묘역에는 종친들께서 한창 진설 준비 중이었고, 종친들께서 묘역 곳곳을 둘러보고 계십니다. 지난 해에는 시제 전날 밤 비가 와 재실에서 모셔서 조금 아쉬웠는데 올해는 구름 한 점 없습니다. 인사를 나누다 보니 엊저녁 재실에서 인사를 드린 부사공파 전 회장님(재은)께서 저만치 서 계십니다.
몇 달 전 안사연 일행이 충무공(휘 응하) 할아버지 묘역 답사 때 마침 부사공파 전 회장님께서 비무장지대인 묘역에 계신 덕분에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인 묘역을 무사히 답사할 수 있었습니다. 부사공파 전 회장님께서는 칠순이 넘으셨는데도 해마다 판서공 시제를 모시러 인천에서 강진을 찾아오십니다. 올해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기차로 나주까지 오신 다음 버스편으로 내동 재실로 들어갔다고 하십니다. 그 정성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이 자리에서 부사공파 전 회장님께서는 종친 여러분 및 안사연 회원께 다음 사항에 대해 부탁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사공파 파조(휘 天順 : 밀직부사공) 할아버지를 비롯해 호조좌랑공(휘 談 : 밀직부사공 장자), 미암공(한성부참군 휘 대래 : 호조좌랑공의 子) 및 그 아드님 휘 鉉(昭威將軍 : 미암공 장자), 휘 鎭(참의공 : 미암공 2子)의 배위에 대한 기록을 찾아봐 주실 것을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문중 관련 기록을 보실 때 꼭 살펴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런 가운데 진설이 끝나고 판서공을 시작으로 시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날 헌관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 판서공(휘 선) 초헌관 : 병돈(개성윤공파) 아헌관 : 광우(문온공파 회장) 종헌관 : 재은(부사공파 전 회장, 현 부사공파 고문)
◆ 충숙공(휘 승용) 초헌관 : 영응(밀직사사공파) 아헌관 : 홍수(군사공파 광탄문중 회장) 종헌관 : 영석(군사공파 김제문중)
◆ 상락군(휘 후) 초헌관 : 창회(군사공파) 아헌관 : 진종(대구종친회) 종헌관 : 억(대구종친회)
◆ 군사공(휘 칠양) 초헌관 : 수인(군사공파 회장) 아헌관 : 승남(군사공파) 종헌관 : 태용(군사공파)
시제가 한창 진행될 무렵 대구종친회 45명(부부 동반)과 청주종친회 35명(부부 동반)의 종친들께서 참석하셨습니다. 덕분에 판서공 시제는 최근 들어 가장 많은 종친들이 참석한 시제가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대구종친회와 청주종친회 종친 여러분께 감사 말씀 올립니다. 한편,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칠정마을을 중심으로 세거해 오신 군사공파 칠정문중에서는 그 동안 여러 명칭으로 불려오던 문중 명칭을 최근에 <칠정문중>으로 통일하였다고 합니다.
아울러 칠정문중에서는 젊은층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문중 임원들을 청장년층으로 확대하였다고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칠정문중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군사공 할아버지 시제를 올리기 위해 진설을 하는 사이에 청주종친회 용두 종친께서는 직접 짜신 제석을 기증하였습니다. 용두 종친께서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종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도하시는 분 중 한 분입니다. 안사연과는 지난 해 실시한 영원산성 답사를 비롯해 제3회 여름 캠프에서는 청안사마소 방문시 지역 유림에 대한 섭외문제 등에도 도움을 주신 바 있습니다.
이후 참석 종인들은 영모재로 자리를 옮겨 내동마을 종친들께서 정성껏 준비해 주신 점심을 들고 차례차례 귀가길에 올랐습니다. 여느 농촌마을이 그러하듯이 이곳 역시 인구가 계속 줄어들어 영모재도 현재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퇴락한 대문간과 행랑채를 헐어내고 깨끗이 정리해 올해는 한결 산뜻해 보이기는 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탓에 쓸쓸해 보이기만 합니다.
우리 일행은 재이 종친 및 내동마을 종친들 손을 잡고 영모재 마당에서 한동안 서 있다가 12시 40분경 떨어지는 않는 발걸음을 옮겨 상서공(휘 효인) 할아버지 유적지인 월남사 터로 향했습니다. 월남사 터까지는 거리가 가까워 20분만인 오후 1시 정각에 도착하였습니다. 월남사 터는 그 뒤에 호남의 알프스로 불리는 월출산이 자리잡고 있어 언제나 장관을 이룹니다.
월남사 터에는 당대 명필이신 상서공 할아버지께서 쓰신 진각국사비(보물 313호)가 있습니다. 문중사에 해박하신 영환 종친께서 상서공 할아버지와 진각국사비에 대한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십니다. 언제 들어도 재미있고 신나는 해설입니다.(진각국사비와 상서공 필적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우리 게시판에 소개되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진각국사비는 거의 쓰러질 정도로 훼손된 상태인 데에다 앞면은 전체가 떨어져 나가고, 뒷면만 글자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 해 시제 때 잠시 이곳을 들러 할아버지 휘자를 찾아보았으나 시간이 넉넉지 못해 찾지 못하고 돌아섰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진각국사비 옆에는 아름드리 고목이 된 동백나무가 묵묵히 비각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붉은색 동백이 하나 가득입니다.
진각국사비에서 직선거리로 3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전형적인 백제계 목탑 양식을 본딴 고려시대 3층 석탑이 있습니다. 본래 이 석탑은 2기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 규모가 매우 장대할 뿐만 아니라 월출산과 어울려 또다른 장관을 이룹니다. 이곳에서 30분간 상서공 할아버지 숨결을 느낀 다음 우리 일행은 월남사 터를 출발해 영암휴게소와 여산휴게소를 거쳐 서울로 향했습니다. 걱정과는 달리 일부 구간에서만 잠시 막혔을 뿐 전용선을 따라 씽씽 서울로 올라갑니다. 덕분에 오후 6시를 조금 지나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강남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괴산지역에서 거행된 영상공 이하 4위분 묘비 건립 및 제막식 행사에 참석했던 상석, 발용, 항용 종친과 대여섯 번 전화통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우리 일행이나 괴산 행사에 참석한 종친들이나 서로 궁금한 것이 많았습니다. 드디어 오후 7시 30분경 교대역 인근 음식점에 도착한 다음 발용 종친께 합류 장소를 알린 다음 저녁을 들었습니다. 시장기 탓인지 과식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일부러 조금 늦게 출발한 괴산 팀이 상경하는 도로가 막히는 모양입니다. 몇 번씩 전화통화를 하면서 30~40분간 기다려도 합류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는 수 없이 오늘은 이만 헤어지기로 하고 귀가를 서두릅니다. 장거리 다녀오느라 피곤하실 텐데 모두들 흐믓한 표정입니다.
가고 올 때 분위기 흥겹게 이끌어 주신 회장님, 부회장님, 영환 이사님, 수길 이사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운전을 맡아주신 영윤 부회장님과 효만 이사님, 전체 일정 짜시느라 애쓰신 윤만 총무님께도 감사 말씀 올립니다. 귀경길에 귀한 말씀 들려주시고 격려해 주신 부사공파 전 회장님께도 감사 말씀 올리며, 무사히 댁에 도착하셨기를 빕니다.
재이 대부님, 그리고 내동마을 종친 여러분 큰일 치르시느라 바쁘고 힘드실 텐데도 해마다 반갑게 맞아주시니 무어라 감사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늘 평안하시고 모든 일 잘 이루어지시길 빌며, 내년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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