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공파(칠양)

본문

p02.png 토산현감 묘갈명

      9)통훈대부 토산현감공묘갈명(通訓大夫 兎山縣監墓碣銘) (2006. 4. 29. 태영(군) 제공)

<원문>

通訓大夫兎山縣監公墓碣銘幷序諱三老

公諱三老新羅敬順王之裔敬順王及其運去不忍生靈之塗炭讓國於高麗作賓松京逮至麗朝中葉太守公諱利請受籍安東雲仍遂爲安東人四傳至諱方慶再征日本以言乎誠忠則立感天日以言乎風烈則動孚華夷偉功殊績不但衣被一世左衽之免沒世不忘封上洛君諡忠烈事載麗史稱名將生諱愃密直司事典法判書生諱承用寶文閣大提學諡忠肅生諱厚襲封上洛君軒冕相繼迄爲大家卽公之曾祖祖諱七陽號康隱受與於稼亭李先生與圃隱鄭公夢周牧隱李公穡再從惕若齋九容同爲性理之學官職雖止遂安郡事麗運旣衰及其垂亡謂諸子曰我故國世臣雖不能與國階亡何面目歸于地下拜謁先王先祖乎汝等忠輔新國聖王隱於康津先塋下號曰康隱考諱塡與弟墩敬承嚴命早年登科俱官副提學直提學事載名臣略義錄生公於世宗時自幼耽書文章筆法壇于當時纔中成均進士未登龍門點額以蔭官佩符作宰于兎山縣卽海營中貿額極貧之鄕也始荏此縣先建私塾十餘間於邑內寂寥處求文學贍富品行端雅之士置敎師召集年少願學者使之受學卽發廩粟賑哺貧餒不過數朔民無饑弊一邑安靜視篆之未幾年數歲水旱八方大饑萬性愼壑之慘甚於兵火目不忍睹也公之家契元是贍饒少不吝惜私財先救塡壑之慘後極濟貧餒之命力須竭也志殆倦矣而十數間客館頹圮久尙無重甁又能損俸雇丁不遺民弊準舊制興役重新此蓋范文正公荒年興役之遺意也官民一體咸頌其德善政碑海伯擧公褒啓傳曰牧民治續如次特異將陞判官庶尹云瓜期漸簿百姓預遞去猝發病患月餘沈重召醫問藥十餘次試藥竟無效果奄殞館舍百姓知喪考妣號泣之聲不絶衛間內外百餘里程道奉陪旅櫬隣邑守令憑尸咸慟輓著交誼海伯聞訃臨喪含悲流涕設幄駐樞誄奠徐行歸于坡州七井面莫赤洞葬于甲向之原配位淑人延日鄭氏府使孝完之女名有婦德孝事舅姑承順君子育二男三女男長坤鐵原府使次遇長興庫主簿女長適李封韓山人判書次適禹麟孫丹陽人司果三適金愷臣延安人鐵原府使有二男一女男長允粹成均生員次允精慈山都護府使女適郭季元玄風人主簿有二男五女長允剛玉洞處士見六臣殉節隱而不仕次尹毅女長適鄭世傑次適李仁禿三適金器光直長四適柳宗茂五適尹思翼生員有二男一女男長謙生員義禁莩事次誠无后女適高堯壽慈山有一男지處士有二男一女長夏祥效力副尉次禹祥戶曹佐郞女適金崇位玄孫以下未能盡載竊想四百餘年具石物竪碑碣年久歲深風磨雨洗莫辨一字字畵未知誰撰乃者諸族齊誠合力退其舊碑將竪新碣諸族累托碣銘於不肖孫重會不肖於祖先事知其不敢不啻況孤陋於文法乎辭而不得猥以蕪辭是爲銘詞曰

 

天啓我金實降金櫃 開見惟人資貌奇異

姓曰金氏稱銘閼智 味鄒有國三五禪位

敬順運去不忍兵선 讓國高麗唐虞禪志

受籍安東繼統正祥 宗支分派昭穆辨彰

圭組連綿世稱宰相 天挺忠烈智勇莫當

征討再三必捷威揚 功振滄海義感戎羌

忠肅登科以榮事親 以忠事君品陞宰臣

竭力輔國淸白治民 當時名望世孰等倫

康隱麗凶隱於康津 太祖累徵永爲避身

恒念舊王畢竟不就 新獻忠節義僞正直

提學革命嚴命恭行 早年登科兄弟咸榮

俱陞提學國之干城 公守兎山牧民公正

不吝私財客館雉成 瓜期不遠奄歸玉京

各邑守令挽哭誄呈 葬于坡州鳥獸大驚

雲仍蔓延文蔭武生 文行聯綿行祀最精

若任祖靈應歆感誠

 

孔子誕降後四十三 乙卯 正月 日上元

 

<역문>

 

통훈대부 토산현감공묘갈명(通訓大夫 兎山縣監墓碣銘)

공(公)의 휘는 삼노(三老)이시니 신라 경순왕의 후예다. 경순왕이 나라의 운수가 다함에 이르러 ‘백성의 생령(生靈)이 도탄에 빠질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여 고려에 나라를 양도하고 송도(松都)의 손님이 되었고 고려 중엽에 이르러서 태수공(太守公) 휘이청(諱 利請)께서 적(籍)을 안동으로 받으시고 모든 후손들이 안동인(安東人)이 되었다. 사대(四代)를 내려와서 휘 방경(方慶)이라 하는분이 재차(再次) 일본(日本)을 정벌하셨으니 그 충성으로 말한다면 하늘이 감응(感應)함을 세우셨고 그 풍채와 정열로 말한다면 철없이 날뛰는 오랑캐를 움직여서 위대하고 특수한 공적(功績)은 단지 일세(一世)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오랑캐의 족속에서 면하게 되었으니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그 공을 잊지 앉게하기 위해서 상락군(上洛君)을 봉하고 시호를 충렬(忠烈)로 내리셨다는 사실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는데 명장으로 일컬었다. 이 어른이 휘 선(愃)을 낳으시니 밀직사사(密直司事) 전법판서(典法判書)로서 휘 승용(承用)을 낳으시고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으로 시호가 충숙(忠肅)이시며 휘 후(厚)를 낳으시고 세습(世襲)으로 상락군(上洛君)을 봉(封)하였으며 높은 벼슬이 대를 이어서 대가문(大家門)에 까지 이르렀으니 즉 공의 증조(曾祖)이신 조부의 휘 칠양(七陽)은 호(號)가 강은(康隱)이신데 학문을 가정(稼亭) 이곡(李穀)선생에게서 배우시고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재종(再從)이신 척약재(惕若齋) 구용(九容)과 더불어 성리(性理)의 학문을 창시하셨으니 벼슬은 비록 수안군사(遂安郡事)에서 마치셨으나 고려의 국운이 이미 쇄진해지고 망하게 되자 여러 아드님을 불러 말씀하시되 ‘나는 고국에서 대대로 이어온 신하이나 비록 나라와 함께 능히 죽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왕(先王)과 선조(先祖)를 뵈올 것인가 너희들은 충성을 다해서 새나라의 착한 임금을 도우라’ 하시고는 강진(康津)의 선영(先塋)이 계시는 곳으로 숨으시어 호(號)를 강은(康隱)이라 하셨으며 부친의 휘는 진(塡)이시니  아우 돈(墩)과 더불어 엄하신 명을 공경스레 받들어서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 하시어서 함께 벼슬이 부제학(副提學)과 직제학(直提學) 이었다는 사실이 명신약의록(名臣略義錄)에 실려 있다. 공이 세종(世宗)때 출생하시니 어리실때부터 서책(書冊)을 탐독(耽讀)하시고 문장과 필법이 당시에 홀로 뛰어 나셨으나 겨우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에 합격하셨을 뿐 과거(科擧)에는 합격하지 못하시다가 음관(蔭官)으로 임명되시어 토산현감(兎山縣監)으로 나가셨는데 토산현은 바로 해주영(海州營)에서 멀지않은 극빈의 고을이라 비로소 이 고을에 부임하셔서 먼저 서당(書堂) 십여간을 읍내 고요한곳에 지으시고 문학이 풍부하고 품행이 단정하고 우아한 선비를 구해서 교사로 앉히고 연소한 자(者)로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을 불러 모아서 이들로 하여금 수학케 하시고 바로 창고에 저장된 양곡을 가난하여 배고픈 자에게 풀어 먹이니 불과 수개월만에 백성중에 굶주리는 폐단이 없어지고 고을이 안정되었고 몇해 후에는 여러해 동안 수해(水害)와 한재(旱災)로 팔방에서 크게 굶주리고 있으니 모든 백성이 진흙 구렁이에 빠진 참상이며 심지어 병화(兵火)까지 있으니 눈으로 참아 볼수 없었다. 공의 가산(家産)이 원래 풍요하였는데 조금도 아끼지 않으시고 사재(私財)로서 먼져 구렁속에 눌려있는 참상을 구제한 후에 가난속에서 굶주린 생명을 구제하시다보니 모름지기 힘을 다하시어 뜻에 거의 실증이 날것이나 십수간의 객관(客館)이 퇴락한지 오래 되어도 고쳐짓지 못했는데 다시 녹봉(祿俸)으로 인부를 고용함으로서 민폐를 끼치지 아니하고 옛날제도대로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다시 새롭게 지었으니 이는 범문정공(範文正公)이 흉년에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유의(遺意)에 따름이었고  관민이 일체로 그 덕을 칭송하면서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를 세웠으며 해주감사(海州監司)는 공의 선정을 들어 포장할 것을 장계로 올렸더니 전교(傳敎)하시기를 ‘백성을 다스린 치적이 이와 같이 특이(特異)하니 장차 판관(判官)이나 서윤(庶尹)으로 승진(陞進)시키겠다’ 하였으나 만기(滿期)가 점점 임박해지자 백성들이 먼저 바뀌어 가실 것을 근심하더니 졸지에 병환이 발생해서 월여(月餘)가 되면서 크게 위중하셨고 의원(醫員)불러 문약을 십여차나 하였으나 시약이 끝내 효과가 없이 급작스레 관사(館舍)에서 운명하시니 백성들은 부모의 상사(喪事)와 같이 울음의 소리가 끊이지 아니했고  백여리 길에 객지(客地)에서 돌아가는 영구(靈柩)를 배향하였고 이웃 고을의 수령들은 시신(屍身)을 안고 모두가 통곡하고 만사(輓詞)를 지어 정의(情誼)를 표(表)하였으며 황해감사(黃海監司)는 부음을 듣고 상사(喪舍)로 달려와서 슬픔을 품은 눈물을 흘리면서 장막을 치고 영구를 정상(停喪)하고서 만사(輓詞)를 올리고 조용히 파주 칠정면 막적동 경좌 갑향에 장사하였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이니 연일정씨로서 부사(府使) 효완(孝完)의 따님이라 시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부군의 말씀을 잘 순종하였으며 이남삼여를 기르셨는데 장남 곤(坤)은 철원부사(鐵原府使)요 다음의 우(堣)는 장흥고(長興庫) 주부(主簿)이며 장녀는 이봉(李封)에게 출가하니 한산인(韓山人)으로 판서(判書)이며 다음은 우인손(禹麟孫)에게 출가하니 단양인(丹陽人)으로 사과(司果)이며 삼녀는 김개신(金愷臣)에게 출가하니 연안인(延安人)이라 철원부사에게 이남 일녀가 있었으니. 장남 윤수(允粹)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이며 다음 윤정(允精)은 자산도호부사(慈山都護府使)이며 여는 곽계원(郭季元)에게 출가하니 현풍인(玄風人)이라  주부(主簿)께서 이남오녀를 두셨으니 장남 윤강(允剛)은 옥동처사(玉洞處士)라 하여 육신(六臣)의 순절(殉節)을 보고 숨어서 벼슬에 나가지 아니 하였고 다음은 윤의(允毅)이며 장녀는 정세걸(鄭世傑)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이인독(李仁禿)에게 출가했으며 삼녀는 김기광(金器光)에게 출가하니 직장(直長)이요 사녀는 유종무(柳宗茂)에게 출가하고 오녀는 윤사익(尹思翼)에게 출가하다. 생원(生員)께서 이남일녀를 두셨으니 장남 겸(謙)은 생원으로 의금부도사(義禁莩事) 이었고 다음의 성(誠)은 무후하며 여는 고요수(高堯壽)에게 출가하다. 자산부사(慈山府使)께서는 일남을 두시니 지(址)이며 옥동처사께서 이남일녀를 두시니 장남 하상(夏祥)은 효력부위(效力副尉)이며 다음 우상(禹祥)은 호조좌랑(戶曹佐郞)이고 여는 김숭위(金崇位)에게 출가 하였다. 현손 이하는 능히 다 기재(記載)하지 못한다.

가만히 사백년의 일을 생각하니 모든 석물과 비갈이 갖추어 있었을 것이나 세월이 오래고 멀어서 바람에 갈리고 빗물에 씻겨서 한글자도 찾아서 읽을수없고  어느분이 비문을 지었는지 조차 알지못함으로 해서 지난날에 제족이 정성을 함께하고 힘을 모아서 그 옛비를 물려내고 장차 새비를 세우려 하여 여러 종친들이  여러 번 문법이 고루한 후손인 중회(重會)에게 갈(碣)의 명(銘)을 부탁하니 불초가 조상의 사실을 감히 안다고 할수없을뿐 아니라 하물며 견문이 적고 물정이 어두운 문법이라 사양하였으나 할 수 없이 외람하게도 두서 없는 말로서 이에 명(銘)으로 하여 말하니

 

하늘 문이 열리니 우리 김씨는     실제로 금궤가 내려 오셨네

열어보니 오직 사람있으니          바탕과 체모가 기이 하였네

姓을 일러 金氏라 정해 주시고     그 이름 알지(閼智)라 지어 주셨네

미추왕이 나라세워 임금되시니    삼십오대 왕위를 이어 받고서

경순왕에 이르러 운수 다하니      병화속에 죽는 백성 참아 못봐서

나라를 고려국에 양도 하고서      요순의 착한 뜻을 전해 받았네

安東으로 세적을 받고서 보니      계통이 정확하고 상세하구나

종계와 지파를 분명히 하고         소목(昭穆)의 분별이 밝혀졌으며

귀한 벼슬 대대로 이어 왔으니     세상사람 일러서 재상가(宰相家)라네

천성이 뛰어난 충렬공 선조         지혜와 용맹을 뉘가 당하리

이차 삼차 일본을 정토하시며      번번히 승리로 위풍 날려서

푸른바다 그곳에 공명 날리니      오랑캐들 정의에 감격하였네

충숙공이 문과에 급제하시어       영화로이 어버이를 효양하시고

충의로서 임금을 섬기심으로       품계높이 재상에 오르시었고

힘을다해 국가를 도우시고           세상에 어느 뉘가 이와 같으리

고려가 망하자 강은공께선           저멀리 강진으로 은거하시니

태조왕 몇번이고 부르셨으나       끝끝내 몸을 피해 안나오시며

언제나 옛 임금을 생각하시고      필경은 신왕조에 안나가시어

충절과 정의로서 공을 바치고      그릇된일 바르게 잡으시었네

제학공은 혁명이 일어난 후에      엄숙한 친명을 공행하고서

조년에 문과에 급제하시니          형제분이 다함께 영광누렸네

모두 함께 제학으로 올라가셔서   나라의 간성이 되시었는데

공 또한 토산의 수령으로서         공정하게 백성을 다스리시고

어려움에 사재를 아끼지 않고      퇴락된 객관을 이루었으나

어느덧 만기도 멀지않을 때         홀연히 옥경으로 돌아가시니

각 읍에 수령이 모두 모여서        마지막 곡을 하며 글을 올렸네

고향이라 파주땅에 장사 지낼 때  금수들도 웬일인가 크게 놀랐네

후손들이 넝쿨같이 뻗어나가서    문과 음직 무과가 일어나고

학문에 행실이 끊이지 않아         가장 정성으로 제사올리니

할아버님 영령께서 믿으신다면    자손정성 감흥하사 흠향하소서

 

공자탄강후43을묘(서기1975년) 정월   일 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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