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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군사공(휘 七陽) 묘비 제막식 및 시향제 2015년 4월 12일(일요일)
▼군사공(휘 칠양 비문)
▼제막 고유제
▶고유문(告由文)
維 歲次 檀紀 4348年(乙未) 陰曆 2월 24일 戊午에 21代孫 안동김씨 군사공파 회장 홍수(鴻洙)는 감히 告하나이다.
이곳 작천(鵲川) 술좌원(戌座原)은 부군(府君)의 유댁(幽宅)으로 6백여 성상(星霜)이 흘러 감회가 새롭습니다. 삼가 생각해보면 부군께서는 상락(上洛) 충렬공(忠烈公)의 어진 현손으로, 일찍이 가정(稼亭) 이곡(李穀)선생 문하에서 재종(再從)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수학하며, 의리와 명분을 함께 하시었습니다. 부군께서는 고려말에 수안군(遂安郡)의 수령으로 나아가셨으나 마침내 고려 사직이 무너지고 조선을 개국하는 시기에 이르렀을 때에 이태조(李太祖)가 누차 출사(出仕)를 권유했으나 끝내 불응불취하시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시었습니다. 망해버린 나라 고려를 저버리고 조선개국에 협조하므로써 부군께서 누릴 수 있었던 높은 벼슬을 끝내 거절하시고, 개성 송도에서도 먼길, 인적도 드믄 전라도 강진땅, 금릉산(金陵山)아래 은거(隱居)하시며 당호(堂號)를 강은(康隱)이라 하시고, 옛 임금에 대한 붉은 충정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취를 감추고 들어내지 않으므로서 부군의 행적을 상고(詳考)할 길이 없었으며 정부인(貞夫人)의 관적(貫籍)도 역시 불명인채로 수갈(竪碣)되어 매양 시제(時祭)때 마다 서글픈 감회가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조선중기에 풍양(豊壤) 조종운(趙從耘)이 편찬한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 정부인의 관적이 도강김씨(道康金氏)임이 밝혀지고, 탐진(耽津)에 거주하셨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대함이 실로 크고 다행인지라, 후손들이 파조(派祖) 할머님의 관적을 알 수 있도록 비석을 새로 세우고, 때마침 편찬중인 안동김씨 대동보(大同譜)에도 등재하기로 하였습니다. 규모는 6尺이고, 좌대(座臺)는 거북형으로 않히고, 오석(烏石)으로 비신(碑身)을 깍아, 이수(螭首)를 얹고, 글은 예손(裔孫) 태영(泰榮)이 짓고, 해서체(楷書體)의 대가 이당(夷堂) 변요인(邊堯寅)이 전면을 썼습니다. 이번 역사(役事)가 순조롭게 완공된 것은 모두가 부군의 음덕(蔭德)이 내리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화창한 봄날 여러 후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묘비(墓碑) 제막식(除幕式)을 거행하오니 부군 혼령(魂靈)께서는 기뻐하시옵소서. 삼가 세사(歲祀)를 겸해 그 사유(事由)를 공경히 告하나이다. 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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