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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사공(府使公-휘 矱(확)) 소개 1572(선조 5)--1653(효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정경(正卿), 호는 금사(金沙). 문온공(휘 구용)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도사공 대섭(大涉)이다. 1589년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고,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철원부사(鐵原府使)에 이르렀다. 일찍이 하곡(荷谷) 허봉(許봉)에게 수학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사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하곡 허봉은 허균의 형이인데, 김확은 매부의 형에게서 수학을 한 것이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랑(兵郎)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호위하여 한강을 건넜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동궁을 배위(陪衛)하여 남행(南行)하는 등 국가의 비상시에 왕실의 안위를 담당한 바 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東洲集. 尙衣院正金公확墓誌銘〈趙啓纘〉<장노현 수정>
[지봉유설]의 이수광과 조선의 혁명가이자 허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은 김대섭의 사위이므로, 이들과 김확은 처남매부 사이이다.
김확의 필적은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 1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1점 (근묵에서 인용)이 소개되어 있다.
(1)묘지 사진 소개 (2004. 6. 1. 발용(군) 제공)
(2) <묘지석(청와백자) 소개> (1차-2002. 3. 12. 2차-2004. 7. 8. 영환(문) 제공)
1) 묘지석 발견일시 : 2001. 4.
2) 발견장소 :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추동리
3) 발견 경위 : 상기의 위치에서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가양리 선영 아래로 이장 과정에서 발견
4) 묘지석 총수 및 상태 : 9개. 양호
5) 사진
<지석1> <지석2>
<지석 3> <지석 4>
<지석 5> <지석 6>
<지석 7> <지석 8>
<지석 9> <지석 전체 사진 9장>
(3)묘지명 소개
(가)원문 (2004. 7. 6. 영환(문) 제공)
舅氏尙衣院正金公配淑人鄭氏墓誌銘 幷序
舅氏金沙公骯髒有奇節。博六而無所成名。敏求嘗從容言。舅氏之年長矣。無肯少留意進取。則奚以開後。時公在酒所。顧而曰。豈不足慁汝誌墓耶。敏求敬謝不敏。其後舅氏用儒科起。歷州府赫赫有聲。然亦公之細也。公沒二紀。敏求老白首。始以不腆之文奉效微言。能不悲哉。公諱矱。字正卿。少受業荷谷許篈。年十八己丑。擧進士。旣而遇亂。奉二親避兵北路。越三年甲午。都事公棄世。沈宜人自誓必殉。麤疏溢糜。哭擗無算。十五年如一日。舅氏左右扶護。不稅帶而養。亦十五年如一日。旣遭喪。自飯斂以往。飾棺反壤。治塋域立墓田。一誠不懈。用是故偃蹇場屋。戊午。始釋褐。隷成均館。兼任廣興奉事。倉官例責日供倉吏。吏倚以爲乾沒。時操長短。公一革其謬。壬戌。赴韓元帥文翼公幕辟。至則江氷合。偵報虜將大搶龍灣。且言其日。一軍咸氣懾。公請自往視師。旣行。元帥牒令毋輕進。公直前不顧。列城已發縣門矣。守陴者呼曰。從事公文吏。猶乘危冒難。介胄者死職耳。公留五日。益雍容曰。我若亟出。士心搖矣。元帥公稱其雅量。聞于朝。癸亥初政。祭酒鄭公曄擧公掌學務。公曰。是無非事者。隨方盡規畫。悉治齋舍頹缺。重建明倫堂。東夾正錄廳。噲然一新。陞拜兵曹郞。及逆适犯京。扈慈殿渡漢。乘輿馬不服驂。公脫所騎以更駕。乙丑。歷直講,司藝,司饔院正。除原州牧使。痛剗刮疵瘼。若瘝在躬。繕廨宇興學校。百爲具擧。事聞賜帛。居一歲。忤方伯罷歸。州人告闕乞留。不報。丁卯胡變。文翼公陪春宮南下。又以公從事。敍司饔,軍資監正。明年。守淳昌郡。其施措方略。視原益密。適歲惡。捐廩以哺餓。賦種以勸稼。郡以大治。龔水衡何人哉。秋以方伯親嫌解任。前後臨二邑。俱未浹歲。其人輒勒石以寓遺愛。逮公喪。淳昌民合土物以賻。小民之有事至京。皆來哭甚悲。是豈有約束期會也。己巳。由尙衣院正知鐵原府。治如其故操。至壬申。疾久不損。道臣擧狀請罷。上惜其治不許。癸酉春。乃免。竟以七月七日卒。葬永平鍾賢山東麓負丁之原。都事公墓直其西。
惟金氏出新羅敬順王。其後上洛公方慶,惕若齋九容爲聞祖。入我朝。直提學孟獻,僉正自讓爲六代五代。高祖諱禮生。淸道郡守。曾祖諱胤宗。慶尙兵使。祖諱震紀。活人署別提。考諱大涉。義禁府都事。妣靑松沈氏。靑城伯德符之後。觀察使諱銓其考也。公體貌魁碩。氣度瑰瑋。不肯隨俗齷齪。不肯置畦畛以接物。遇事當爲。不肯依阿顧望。初許氏姊死。瘞骨北地。一女纔四歲。公躬走數千里。迎葬其夫宗。撫其女長成有家。緩急喜施予不倦曰。不有以狗馬聲色破其先業者耶。南原敗。摠兵楊元軍熸。瘡痍載路。公爲設粥隋城道左。疲兵咸集。平居必有客。必有酒食。日飮爲樂。游閒者以爲歸。就洞陰縣下流臨川結宇。爲近先壟。依依不忍去。在騎省。言者劾郞官謬擧匪人。主薦者媕妸不首實。公笑曰。我亦與聞。寧以我應之。遂坐罷。人服其長厚。原州時。小吏犯法抵罪。其父怒曰。有官如此。汝欺神明。罪一也。爲惡受刑。毀我遺體。罪二也。人將謂某吏之子獲罪於官。今我愧見鄕閭。罪三也。會隣里杖其子。世以方吳祐云。嗚呼。舅氏早遊士林。蔚有令譽。律己以名節自勵。臨政以善敎率物。治身治人。施罔不宜。然而遭逢契闊。百不一試。世方決性命饕富貴。脂韋以取容。而公跡不涉形勢之門。名不絓權要之口。退然自靖。陸沈以沒世。孰執其咎。配東萊鄭氏。右議政諱彥信之女。莊懿靜專。罕言語簡起居。不踰閾不闚戶。自未行時已然。黨親邀請。必以事爲解。至年大猶然。議政公朝衫敝。夜則篝火手製新衣。旣成而天未明。議政公歎其敏。妙擇對歸公。移所以事父母者事舅姑。舅姑宜共養。敏求兄弟與夫人諸姪日在前娛侍。未嘗見一日不執女紅竟晷。出外則賓客滿坐。脯肔酒醪未嘗見一日不在尊俎。蓋議政公性喜客。居恒設饋。以夫人尸之。故習於敎也。晨起理家政。婢僕俯首聽役。指使有方。盈縮有制。始公世儒 。產不中高貲。而家道立。鄕黨爾豪者。以夫人莅梱故也。伯兄都憲公以媵當家。每遇議政公忌辰。具祭品以薦曰。豈可令吾親安僕妾之享也。女弟居貧。使朝夕取資猶寄藏。其子女及庶弟之女。皆育養昏嫁。在夫人爲疏節。年六十四辛未六月卒。祔公葬。有一子生員鼎之。鼎之亦生一子奐。五女。適縣監吳挺柱,士人宋之獻,李成翼,徐文道,洪億。銘
曰。
使公而早遇。優優乎黑頭廟廊。
使公而晩合。亹亹乎黃髮典刑。
早滯公車。晩困簿書。
得之不偶。非人也天也。
失之所在。非我也時也。
惟其責報而收贏闔。胡視似續之蕃昌
甥姪嘉善大夫前吏曹參判李敏求撰
崇禎紀元後三十八年乙巳八月 日
*출전 동주집(이민구 문집)
(나)번역문 (2004. 7. 6. 영환(문) 제공)
상의원정 김공 배 숙인 정씨 묘지명 병서
나의 외숙 금사공(金沙公)이 꼿꼿하여 특이한 지조가 있고 학문을 넓고 크게 닦았으나 이름을 성취한 바가 없기에 내가 일찍이 조용히 말하기를, “외숙께서는 장년(長年)이 되었는데도 진취(進取)에 조금도 뜻이 없으니, 어떻게 후사를 열려고 합니까?”라고 하였다. 그때 공이 술자리에 있다가 돌아보며 말하기를, “어찌 너에게 묘지(墓誌)를 써 달라고 할 만큼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기에 내가 불민(不敏)한 것을 사죄드렸다.
그 뒤에 외숙께서는 유과(儒科)를 통하여 벼슬길에 나가 지방의 고을을 역임하면서 혁혁(赫赫)하게 명성이 났었다. 그러나 이는 공에게 있어서 하찮은 것이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된 뒤에 늙어서 백수가 된 내가 비로소 잘하지 못한 글로 공의 은미한 말씀에 따라 묘지명을 쓰게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공의 휘(諱)는 확(矱)이고 자(字)는 정경(正卿)이다. 젊어서 하곡(荷谷) 허봉(許篈)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나이 18세에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윽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부모를 모시고 북쪽으로 피난 갔었는데, 3년을 지나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 도사공[都事公 김대섭(金大涉)=공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자 심 의인[沈宜人 청송 심씨(靑松沈氏)=공의 어머님]도 스스로 따라 죽기로 맹세하고 15년을 하루같이 죽을 먹으면서 수없이 통곡하였다.
외숙께서는 허리띠를 풀지 않고 역시 15년을 하루같이 봉양하다가 상(喪)을 당하자 염습(殮襲)하는 것부터 관(棺)을 꾸미고 반장(返葬)하고 묘역(墓域)을 조성하고 제위답(祭位畓)을 비치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게을리 하지 않고 한결같이 정성껏 하였다.
이 때문에 과거를 보지 못하다가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예속되어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를 겸임하였다. 광흥창의 관원이 으레 날마다 하급 관리에게 물건을 바치도록 하고 하급 관리는 이를 빙자해 사복을 채우거나 때로는 단점을 잡아 조종하기도 하였는데, 공이 잘못된 관행을 일체 개혁하였다.
임술년(壬戌年 1622년 광해군 14년)에 원수(元帥) 한 문익공[韓文翼公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부름을 받아 도착하여 보니, 강물이 얼어붙어 있었다. 정탐하는 사람이 보고하기를, “오랑캐의 장수가 의주(義州)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하고 그 날짜를 말하니, 온 군영(軍營)이 벌벌 떨었으나 공은 가서 군사를 사열하겠다고 자청하였다.
공이 이미 떠났을 때 원수가 전령을 보내어 경솔하게 진군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공은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나갔는데, 여러 성들의 군사가 이미 고을의 문을 출발하였다. 성가퀴를 지킨 사람이 말하기를, “종사공(從事公)은 문관(文官)이면서도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있으니, 병사가 죽는 것은 직분이다.” 하였다. 공이 그곳에 5일간 머물러 있으면서 더욱더 차분하게 행동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만약 빨리 나가면 군사의 마음이 동요할 것이다.” 하였는데, 원수가 그 말을 듣고 공의 아량을 칭찬하면서 조정에 보고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즉위년) 인조(仁祖)가 막 왕위에 올랐을 때 좨주(祭酒) 정엽(鄭曄) 공이 공을 추천하여 학무(學務)를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는 일 아닌 것이 없다.” 하고 방도에 따라 기획을 짜 허물어진 재실(齋室)을 모두 수리하고 명륜당(明倫堂) 동편 정록청(正錄廳)을 중건하는 등 시원하게 새로 단장하였는데, 그 공로로 병조 낭관(兵曹郎官)으로 승진하였다.
역적 이괄(李适)이 서울을 침범할 때 자전(慈殿)을 호위하고 한강(漢江)을 건너가 수레의 말이 부족하자, 공이 자신이 탄 말로 채워서 자전을 모시었다.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년)에 직강(直講), 사예(司藝), 사옹원 정(司饔院正)을 역임하고,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부임하여 자신의 몸에 있는 병을 제거하듯이 폐막을 통렬히 제거하고 강당을 수리하여 학교를 일으키는 등 온갖 일이 잘 거행되어 조정에 보고되자, 임금이 비단을 하사하였다. 1년간 있다가 관찰사(觀察使)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되어 돌아오자, 고을 사람들이 유임(留任)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호란(胡亂)이 일어나 문익공(文翼公=한준겸)이 동궁(東宮)을 모시고 남하(南下)할 때 또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으므로 서용되어 사옹원 정(司饔院正),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그 이듬해에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부임하여 원주에 있을 때보다 정사를 더 주도면밀하게 거행하였다. 그때 마침 흉년이 들었으나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종자를 나누어 주어 농사를 권장하여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으니, 공 수형(龔水衡)만 유능한 관리가 아니었다. 가을에 관찰사(金時讓)친척이라는 혐의로 해임되었다.
전후 두 고을에 부임하여 모두 1년이 차지 않았으나 그 고을 사람들이 비석에 선정(善政)을 새기어 추모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순창의 백성들이 토산물(土産物)을 모아 부조를 하였고 일이 있어 서울에 온 그곳 백성들이 모두 찾아와 매우 슬프게 곡하였으니, 이게 어찌 미리 만나자고 약속한 것이겠는가?
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년)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있다가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나가 옛날의 소신대로 고을을 다스렸다.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에 이르러 병환이 나 오래도록 낫지 않자 관찰사가 상황을 보고하면서 파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그의 치적(治積)을 애석하게 여기어 윤허하지 않았다.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 봄에 면직되었다가 결국 이 해 7월 7일에 세상을 떠나 영평(永平) 종현산(鍾顯山) 동쪽 산기슭 정좌(丁坐)의 묘원에 묻히었는데, 도사공(都事公)의 묘소가 바로 서쪽에 있다.
김씨(金氏)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에게서 비롯되었는데, 그 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과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 저명하였고, 우리 조선조(朝鮮朝)로 들어와 직제학(直提學) 김맹헌(金孟獻), 첨정(僉正) 김자양(金自讓)이 6대조, 5대조이다.
고조 김예생(金禮生)은 청도 군수(淸道郡守)이고, 증조 김윤종(金胤宗)은 경상 병사(慶尙兵使)이고, 할아버지 김진기(金震紀)는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이고, 아버지 김대섭(金大涉)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고, 어머니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청성백(淸城伯) 심덕부(沈德符)의 후손이자 관찰사(觀察使) 심전(沈詮)의 딸이다.
공은 체격이 우람하고 기개가 위대하여 풍속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을 접할 때 간격을 두지 않았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만나면 머뭇거리며 관망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허씨(許氏) 집안으로 출가한 누님이 죽어 북쪽 지방에 묻히었고 그의 1녀는 나이 겨우 4세였는데, 공이 몸소 수 천리를 달려가 그 남편의 묘에다 반장(返葬)하고 그의 딸을 장성할 때까지 보살펴 출가시켰다.
다급한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도와 주면서 말하기를, “구마(狗馬)나 성색(聲色) 때문에 조상의 유산을 파한 자가 있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총병(摠兵) 양원(楊元)이 남원(南原)에서 패배하여 사상자(死傷者)가 길에 가득하였으므로, 공이 수성(脩城)의 길 왼쪽에서 죽을 쑤어 구제하자 병사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평소에 손님이 오면 반드시 주식(酒食)을 차려놓고 날마다 마시며 즐기었으므로 한가롭게 노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동음현(洞陰縣) 하류의 물가에다 집을 지었는데, 선산(先山)과 가까웠으므로 노닐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병조(兵曹)에 있을 때는 대간(臺諫)이 ‘낭관이 사람을 잘못 추천하였다.’고 탄핵하였으나 추천을 주관한 사람이 머뭇거리며 사실대로 말하지 않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도 같이 참석하였으니, 차라니 내가 말하겠다.” 하고 이내 실토하여 파직되었는데, 사람들이 장후(長厚)한 기풍에 감복하였다.
원주(原州)에 있을 때는 하급 관리가 법을 범하여 처벌을 받자 그의 아비가 노하여 말하기를, “상관이 그러한데 네가 신명(神明)을 속이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나쁜 짓을 하여 형벌을 받아 내가 물려준 신체를 훼손하였으니 그 죄가 둘이고,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관리의 아들이 관청에 죄를 지었다고 하면 내가 향리의 사람을 보기가 부끄러울 것이니 그 죄사 셋이다.” 하고, 향리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의 아들에게 곤장을 쳤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오우[吳祐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사람]에게 비유하였다고 한다.
아! 외숙께선 일찍부터 초야의 현인(賢人)들과 노닐어 성대한 명망이 있었다. 자신을 다스릴 때 명절(名節)로 가다듬고 정사를 시행할 때 착한 교화로 사람을 이끄는 등 자신을 다스리거나 사람을 다스릴 때 시행한 바가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기회가 많지 않아 백분의 일도 시험해 보지 않았다. 세상은 생명을 내놓고 부귀를 탐하여 아부하면서 빌붙고 있는데, 공의 발자국은 세도가의 문전을 밟아 보지 않았고, 공의 이름은 권력자의 입에 오르지도 않은 채 뒤에서 조용히 살다가 침체된 대로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에 그 누가 트집을 잡을 수 있겠는가?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우의정(右議政) 정언신(鄭彦信)의 딸인데, 씩씩하고 아름다우며 차분한 데다 말이 적고 행실이 간결하여 대문을 나서지 않았고 창문을 통해 엿보지 않는 등 시집가기 전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친척이 초청하면 반드시 일을 들어 못 가는 이유를 해명하였고 나이가 많아서도 여전하였다.
의정공(議政公)의 조복(朝服)이 해어지자 밤에 등불을 켜 놓고 손수 새 옷을 만들기 시작하여 동이 트기 전에 완성하니, 의정공이 그의 민첩한 솜씨에 감탄하였다.
공에게 시집와서 부모를 섬길 때처럼 시부모를 섬기니, 시부모가 그의 봉양에 만족하였다. 나의 형제와 부인의 여러 조카들이 날마다 앞에서 모시고 놀았는데, 어느 날이나 해가 지도록 길쌈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고, 밖에 나가 보면 손님이 자리에 가득 하였으나 하루도 술과 고기가 술동이와 도마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는 의정공의 성품이 손님을 좋아하여 평소 술상을 차리는 일을 부인이 맡았었기 때문에 가르침을 익힌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가사(家事)를 다스리면 노비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였는데, 부리는 데 방법이 있었고 살림살이에 제도가 있었다. 처음에 공은 대대로 선비로 내려와서 가산(家産)이 그리 풍족하지 않았으나 가세(家勢)가 성립되어 향리에서 부호(富豪)로 일컬어진 것은 부인이 살림을 잘하였기 때문이었다.
큰오라버니 대사헌공[大司憲公 정협(鄭協)]은 첩실(妾室)이 집안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의정공의 기일(忌日)을 만날 때마다 제물(祭物)을 장만하여 주면서 말하기를, “어찌 나의 어버이로 하여금 복첩(僕妾)이 지내는 제사를 흠향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동생이 가난하여 조석(朝夕)거리를 대주었으나 여전히 그의 자녀들을 데리고 있었으며 서제(庶弟)의 딸들도 모두 양육하여 출가(出嫁)를 시키었는데, 이는 부인에게 있어서 자잘한 일이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 6월에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나 공의 곁에 묻히었다. 1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생원(生員) 김정지(金鼎之)이고 김정지도 1남 김환(金奐)을 두었다. 딸은 현감(縣監) 오정주(吳挺柱), 사인(士人) 송지헌(宋之獻), 이성익(李成翼), 서문도(徐文道), 홍억(洪億)에게 시집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공이 일찍이 때를 만났더라면
장년에 여유롭게 조정에서 일을 하였을 것이고,
공이 만년에 합치되었더라면
부지런히 원로로서 전형(典刑)이 되었을 것이다.
젊어서는 과거에 침체되었고
만년에는 문서에 시달렸도다.
얻어도 불우한 것은 사람 아닌 하늘 때문이었고
잃었던 이유는 내 아닌 시대 때문이도다.
자신이 보답을 받아 넉넉히 거두었다면
어찌 자손이 번창한 것을 볼 수 있으랴?
숭정기원후삼십팔년을사(서기1665년현종8년)팔월 일
생질 가선대부전이조참판이민구 찬
서기2004년 6월 김영환 옮김
<계표>
문온공(김구용)-부사공(김명리)-직제학공(김맹헌)-참의공(김자양)-참판공(김예생)-병사공(김윤종)-별제공(김진기)-도사공(김대섭)-철원부사공(김확)
(4)친필 서찰 소개
(1) 친필 사진 소개 : 2002. 3. 영환 제공. 출전 : 근묵
(2) 서찰 원문 해독문 소개 : 2004. 8. 25. 윤만(문) 제공. 《출처 : 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서비스 홈페이지》
○ 유물명칭 : 김확 시 ○ 국적시대 : 한국(韓國) / 조선(朝鮮) ○ 재 질 : 지(紙)
○ 크 기 : 가로 : 28 cm / 세로 : 24.5 cm ○ 작자필자 : 김확 ○ 용도기능 : 문화예술(文化藝術) / 문헌(文獻) / 서간류(書簡類)
○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소장기관 : 학교(學校) / 성균관대(성균관대)
○ 유물번호 : 성균관대(성균관대) 1163
奉次 狀元令監 瓊韻 呈案下
秋來久斷故人書 薄領關心路自疎
未必重陽爲勝事 前溪何日不觀魚
己巳仲秋上旬 榜下生
(3) 해독 및 해석 : 2004. 9. 1. 익수(제). 재해독 및 해석
奉次 狀元令鑒瓊韻呈案下 (장원 영감의 운으로 올립니다)
秋來久斷故人書 가을이 왔는데도 옛친구의 편지 끊기고
簿領關心跡自疎 문서에 마음이 묶여 거동이 자연 소홀했건만
未必重陽爲勝事 9월 9일에 좋은 일 없다해도
前溪何日不觀魚 앞 계곡엔 아무 날이나 고기를 볼 수 없기야 하겠소.
己巳仲秋上旬 기사년 8월 상순
榜下生 방하생
<주>
狀元... 과거에 일등으로 합격한 사람
瓊韻... 옥같이 아름다운 시, 상대방의 글의 미칭.
簿領.... 장부, 문서
重陽.... 9월 9일. 중양절
榜下生... 과거에 같이 합격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