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온공파(구용)

본문

p02.png 7. 주요 선조님 소개

 

3)문온공(文溫公-휘 九容)   1338(충숙왕 복위7)∼1384(우왕10).

 고려말 학자. 초명은 제민(濟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小易若齋),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進士)가 되고, 그 후 문과(文科)에 급제, 덕령부 주부(德寧府注簿)를 거쳐 민부의랑(民部議郞)겸 성균 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成均館)이 중영(重營)되자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정주학(程朱學)을 일으키고 척불양유(斥佛揚儒)의 선봉이 되었다.

 

친명파(親明派)로서 1375년(우왕1) 삼사좌윤(三司左尹)으로 있을 때, 이숭인·정도전(鄭 道傳)·권근(權近)등과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1381년(우왕7) 다시 풀려나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고, 이듬해 대사성, 이어 판 전교시사(判典校侍事)가 되었다. 고려와 명나라와의 국교(國交)가 난관에 부딪치자 1382년 행례사(行禮使)로 명나라에 가던 중, 요동(遼東)에서 붙잡혀 남경(南京)으로 압송된 뒤 대리(大理)로 유배되어 가다가 노주 영녕현(濾州永寧縣)에서 병사했다.

 

유고 시문집인 <척약재 학음집(小易若齋 學吟集)>이 전하고 있으며, 공의 시문집을 연구한 논문 서적인 <척약재 김구용 문학세계>(성범중저. 울산대 출판부. 1997)이 있다.

경북 예천의 <물계서원>(조선 현종 신축년)에 충렬공(휘 방경)과 함께 배향되었으나 지금은 훼철됨. 단묘가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 金水壇에 있다. 시제는 음력 10월 1일이다.

 

 ■ 연보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小易,若齋), 육우당(六友堂).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이다.

 

  1338년(충숙왕복위7) 태어나서 외가에서 자라며 외조부 민사평(閔思平)에게 수학하였다.

  16세 1353년(공민왕2) 송천봉(宋天奉)이 감시한 진사시에 합격하고, 친시에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장원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18세 1355년 과거에 합격하였다. 덕령부 주부(德寧府注簿)가 되고,

  24세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복주(안동)로 피난하였다. 26세 1363년 정언을 거쳐 헌납이 되었다.

  30세 1367년(공민왕16) 성균관(成均館)이 중영(重營)되자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하여 성리학을 일으키는 선봉이 되었다. 31세 1368년 전교부령이 되었다. 동생 김제안이 신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33세 1370년 외조부 閔思平의 문집 <급암집>을 편찬 간행하였는데, 보물 제708호로 지정되어 있다. 34세 1371년 민부의랑 겸성균직강이 되고,

  35세 1372년 총부의랑이 되고,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갔다. 전교령에 제수되고, 이듬해 7월 귀국하였다.

  38세 1375년(우왕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다.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뒤에 모향(母鄕)인 여흥(驪興)으로 옮겨 7년간 한거하였는데 이때 여강어우(驪江魚友)라 자호하고 강호에 노닐면서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六友堂)이라 이름하고 ---六友堂은 천령현, 현재의 금사면에 있었는데, 외가가 있던 곳이다---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침류정(沈流亭)---川寧 金沙里에 있었다--- 승산(勝山)---주 남쪽 5리에 있다---, 보은사(報恩寺)---여강 동쪽 기슭 봉미산에 있는데 옛 신륵사이다---, 여강(驪江) 등지를 다니면서 읊은 시문이 그의 문집 <척약재학음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남아 있다.

 

  44세 1381년 다시 풀려나와 나라에서 그 풍의를 숭상하여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제수하였다. 왕의 절제없는 거둥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였고, 45세 1382년 성균대사성이 되었고,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47세 1384년(우왕10) 고려와 명나라와의 국교(國交)가 난관에 부딪치자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가던 중 요동(遼東)에서 私交를 했다는 죄목으로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고,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운남 대리위(大理衛)로 유배가던 중 사천 노주 영녕현(瀘州永寧縣) 객사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하여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전장(典章)을 널리 구해 모아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고 이름지었고, 또 고금의 시문(時文) 몇 권을 모아 『선수집(選粹集)』이라고 했다. 유고 문집 『척약재 학음집(小易若齋 學吟集)』이 전하고 있다.

 

1400년 아들 明理가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이 초간본은 보물 제100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884년(고종21) 17세손 相元이 문집을 개간하고, 1964년 영천에서 문집이 개간되었으며, 1997년 그의 시문집을 연구한 논문 서적인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성범중, 울산대 출판)이 출간되었다.

 

1600년대 중반 경북 예천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고조부 김방경과 함께 배향되었으나 현재는 훼철되었고, 현재 전북 남원의 <용장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가)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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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소>

 

    나) 사적 비문

  고려조 후기에 성리학이란 思辨哲學이 도입된 이래, 斯界에는 여러 명현들이 잇달아 나왔으며, 士論 또한 첨예하여 이단과 부조리 배격에도 앞장 섰었다.  대체 이들이 당시의 학계와 사상계를 지도하는 역할을 다하였으니, 그중의 한분이 철학자요, 정치가요, 동국시인이라 숭앙받으시던 金九容선생이시다.

 

  선생의 貫은 安東이요, 諡號는 文溫 字는 敬之 號는 小易若齋 諱는 九容이시니 선생의 高祖는 고려국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군개국공 첨의령 중찬 시호 忠烈公 字 本然 諱 方慶이요, 曾祖는 안사보정공신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諱 小宣이며 祖는 직량동덕좌리공신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중서시랑평장사 영창군 시호 良簡 諱 承澤이요, 祖女比는 낙랑국부인 경주김씨이다. 考는 숭정대부 의정부찬성사 삼중대광 중서평장사 上洛君 諱 昴요, 女比는 삼한국부인 驪興閔氏인바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시호 文溫 號 及菴 諱 思平之女이며 配는 봉익대부 부밀직사사 진현관 제학 동지춘추관상호군 통직랑 예의정랑 南陽洪公 義元之女 당성군부인 南陽洪氏이다. 선생은 충숙왕후 7년(1338년)12월 1일 개성에서 출생하시니, 天稟이 聰敏하여 16세에 진사하고, 18세에 등제, 34세에 민부의랑겸 성균관직강에 임명되었다. 이때 성균관에는 巨儒 이색이 대사성에 그리고 선생을 비롯하여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등의 쟁쟁한 名儒 교관들이 관생을 지도강론하니 학교가 다시 부흥하고 성리학이 점차 성황을 이루었다. 이해 가을에 강릉도 안렴사에 부임하시어 선정을 베풀고 이듬해 8월에 서장관으로 明京에 봉사하여 문물제도를 두루 시찰후 귀국하셨으며, 우왕원년 서기 1375년에는 삼사좌윤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에 원의 패배정권인 북원사신의 영접을 강경반대 상소하여 이숭인 제공들과 같이 유배되니 선생은 처음에 죽주로 갔다가 다시 母鄕 여주로 이배되어 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산정에 거소를 두어 江山雪月風花와 산다고 하여 六友堂이라 불러 7년간이나 自娛하면서 때로는 同山麓江邊의 목은선생거소인 沈流亭과 시문을 교환하시었다. 1381년에 再起되어 좌사의대부에 올라 우왕의 방종을 누차 극간한바 있었으나 허사였었다. 서기 1382년 3월에 대사성에 오르고 이듬해에 판전교시사에 이르렀는데, 시국은 대내외적으로 복잡다난하여 갔었다. 특히 밖으로는 왜구의 창궐과 元 明 양국과의 까다로운 국제적 외교는 고려의 큰 두통거리가 되어, 마침 요동도지휘사에 대한 외교차 선생이 행례사로써 예물과 봉서를 가지고 그곳에 가시니 요동총병 반경등은 人臣義無私交라 하여 선생을 명의 서울 경사로 집송하였다. 명제 주원장은 貢馬 遲援을 이유로 전년의 김유 이자용 사건처럼 선생을 대리위에 유배하니, 도중 사천성 노주 영녕현 강문참에 이르러 와병 순국하시니 때는 우왕10년 서기 1384년 47세였다.

 

  오호라! 슬프도다. 한많은 그의 순국 애석하도다. 그의 나이와 才分, 그의 學問과 詩文은!

 

몸은 비록 이역만리에 숨졌지만 영령은 날아와 길이 고국에 머무르니 후일 명제의 명으로 의관을 보내와 초혼하여 개성부 선흥사 북서동 불당현에 위패를 안치하였으며 후손들이 포천군 창수면 가양리 종산에 설단 향사하여 오다가 다시 이곳에 이단하였으며 유림들이 예천 물계서원과 남원 용장서원에 배향하였느니라.

 

 회고컨대 선생의 철학과 經學 그리고 시문은 모두 탁월하여 排佛揚儒하고 東方理學을  始한 공이 컸고 격조높은 시인은 당대 제현들이 숭앙하여 동국시인이라 불러 흠모하였었다. 또한, 저서에는 의전제도에 관한 "주관육익" 과 역대 고금의 명시를 발췌한 "선수집" 이 있었고 기타 창작 시문이 많았으나 대부분 연멸되고 "척若齋學吟集" 만이 세상에 전해질 뿐이다.

  선생이 서거하신지 600여년이 흐른 오늘에 이르러 후손들이 조상의 史實을 경모하고 그 얼을 이어받기 위하여 사적비를 建竪함에 있어 나에게 비문을 청하여 왔다. 나는 일찍부터 선생의 숭고한 학문과 도덕관을 추모하고 있는 터이라 불문이나마 사양치 않고 삼가 약술 하노라.

 

                             문학박사 학술원회장 李丙燾 謹撰.                    20세손  在洪 謹書

 

 다)김구용 열전

     출전 : 고려사 권 104. 열전 권 17

  김구용의 字는 敬之, 初名은 齊閔이다. 공민왕때 16살로 진사에 합격하였다. 왕이 "牧丹"시를 짓도록 하여 김구용이 1등을 차지하자 왕이 기특하게 여겨 散員직을 하사하였다. 登第하여 德寧府主簿를 除授하였고, 여러번 옮겨 民部議郞 兼 成均直講이 되었다. 후학을 가르침에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휴가로 집에 있어도 여러 생도들이 질문하는 자가 서로 끊이지 않았다.

 

  우왕 원년에 三司左尹이 되었는데 이때에 北元이 使者를 보내 말하기를 "백안첨목아왕이 (공민왕)우리를 배반하고 명나라에 돌아감으로 너희나라가 왕을 弑害한 죄를 赦免한다."하니 이인임, 지윤이 그를 맞이하고자 하거늘 김구용은 이숭인, 정도전, 권근 등과 더불어 高堂에 上書하기를, "만약 이 使臣을 맞이하면 한나라의 臣民이 모두 亂賊의 죄에 빠질 것이니 훗날 무슨 면목으로 현릉(공민왕)을 지하에서 뵙겠는가?" 하니 경복흥, 이인임 이 그를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諫官 이섬, 전백영 등이 상소하여 이인임의 죄를 논하고 그를 죽이기를 청하니 이인임이 간관을 杖流하고 또 김구용, 이숭인등이 자기를 모해한다 하여 함께 유배하니 김구용은 죽주에 유배되었다가 얼마후 여흥으로 옮기니 江湖에 放浪하여 매일 詩酒로써 自樂하고 그 居所에 '六友堂' 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7년에 우왕이 불러 左司議大夫를 삼으니 이에 上書하기를, "지금 왜구가 침범하여 사방이 적을 만나 干戈가 쉬지 않으니 백성은 그 생업을 잃고 饑饉으로 유의하여 貢賦와 軍旅를 調發할 길이 없습니다. 하물며 變故가 자주 일어나니 진실로 마땅히 두려워하여 닦고 살펴서 천심에 보답해야 하는데, 전하는 興이 나면 節度가 없고 醉하면 閭巷사이에서 말을 달리니 만약 한번 실족하면 毁傷 까 두렵습니다. 전하는 비록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지만 종묘사직을 어쩌려고 하십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데 祖宗의 艱難한 업을 생각하고, 皇天이 諭告하는 마음을 살펴서 날마다 대신을 접하여 치도를 강론하고, 출입하는 위의는 대개 舊章에 따르십시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듬해 成均大司成으로 옮기고 이어서 判典校寺事가 되었다. 처음에 義州千戶 조계룡이 요동에 이르니 도지휘 매의 등이 속여 말하기를 "내가 너희 나라 일에 매양 마음을 다하여 행하는데 나희 나라는 어찌 치사치 않느냐?" 라고 했다. 10년에 김구용을 행례사를 삼아 그를 받들고, 겸하여 白金 백량, 細苧. 麻布가 50필을 가지고 요동에 가니 총병 반경과 엽왕이 매의와 함께 말하기를 "人臣은 의리상 私交가 없는 것인데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고 마침내 붙잡아 경사로 돌아가니 황제가 대리위로 유배를 명하여 노주 영녕현에 이르러 병사하니 나이 47세였다. 뒤에 우왕이 조계룡이 매의의 말을 잘못 전한 것을 추궁하여 그를 유배하였다.

  김구용은 詞章을 잘하여 "小易若齋集" 이 세상에 유행되었다. 아들은 明善, 明理, 明允이다.

  라)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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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척약재 학음집>

    (1)초간집 (조선 태종원년. 서기 1400년. 보물 1004호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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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약재학음집>(조정 종손가소장본(趙靖 宗孫家所藏本)

 

 (2) <재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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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간본>(조선 고종21년. 서기 1884년. 포천 종손가에서 재간)

 

 (3) <3간본>

 (4) <4간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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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간본>(1997년. 울산대학교 출판부에서 한글번역본 출간)

 

 (5)<정신문화원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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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약재 학음집. 표지 및 내부 사진>(2003. 5. 20. 태서(익) 제공. 출전:한국정신문화 연구원)

 

    (6)  <석판 미농지본 소개> (2006. 3. 28. 항용(제) 제공)

    * 입수일 : 2006. 1. 23.    *입수처 : 대구 고서점.  *입수자 : 김항용

    *내용 : 석판본, 미농지 인쇄. 1884년 이후 전라도에서 출판한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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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음집 재간본이 나온 1884년경 전라도 지역에서 발행한 것으로 추정됨>

 

  바) 문온공시비  (금수정 경내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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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面    <小易若齋先生 詩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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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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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易若齋 金九容先生 詩碑> (전면 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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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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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溫公 小易若齋 安東金公 諱 九容 略史>  (후면 하단)

 

 사)친필 암각문 (2002. 1. 23. 주회(안) 제공)

 

  * 소재지; 경북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 소천서원 내

  * 소천서원 정자 편액이 淸遠亭인데 이 글씨는 절벽에 새겨진 척약재 선조의 친필을 탁본 보필하였다.

 

청원정 重修記에 이르기를

山이 있어 千丈을 우뚝 솟아 옮아 오니 武夷라 한다. 물이 있어 三江에 會合하니 洛東江 上流를 省火라 하고 亭子가 있어 날아갈 듯이 가장 웅결한 곳에 서 있으니 이름하여 淸遠이라(香遠益淸-예기에서 온말-에서 준 말로 맑지 않음이 세속이라 이를 멀리하여 인생을 맑게 살아 심오한 진리를 머물게 하는 곳이란 뜻)

실로 竺山君 菊坡 全元發선생이 만년에 休老하신 때 지은 것이다. 그 위에 淸遠亭이라 三字를 새긴 것이 있는데 이는 척약재 김구용선생의

平筆이라.

소천서원은 낙동강의 상류인 성화천이 휘돌아나가는 경치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름답기로는 청원정이라는 정자가 으뜸이다.

청원정 정자는 임란시 소실되고, 그 후 복원하였는데, 정자의 편액은 원래 척약재 김구용 선조께서 쓰신 것이어서 이를 다시 복원하려 하였으나 원본을 잃어버렸고, 또 척약재 유묵이 가야리 창벽위에 새겨저 있었으나 떨어저 나가 강가운데로 묻히어 버렸으므로 도저히 고증할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강속에서 자주빛이 밤마다 비추어서 본토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강속을 샅샅히 살펴보니 커다란 돌위에 글씨가 새겨저 있는데 그 글씨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건져 올려서 다시 절벽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문중에서 이는 선조의 도움으로 청원정의 현판을 다시 척약재 필적으로 하라는 계시라 여기고 모사하여 청원정의 편액으로 달았다고 한다.

 

  아) 용장서원과 문온공 봉안 위패  (2004. 4. 29. 영환(문) 제공)

 

 (1)명  칭 : 용장서원(龍章書院)

 (2)지정별 : 전북 문화재자료 제53호(1984. 4. 1지정)

 (3)소재지 : 전라북도 남원군 주생면 상동리 644

 

 (4)연 혁

고려 충렬왕(忠烈王)28년(1302) 남원(南原) 수지(水旨)에 건립하였는데 당시(當時)에는 용성사(龍城祠)라 칭하였다. 선조(宣祖)30년(1597) 정유재란시(丁酉再亂時)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정조(正祖)때 현위치로 이축(移築)하였다. 고려 성종대(成宗代) 병부랑중(兵部朗中) 벼슬에 있다. 목종대(穆宗代) 김치양(金致陽) 일파의 난으로 운둔생활을 한 양능양(梁能讓)을 주벽(主壁)으로 고려 원종시(元宗時) 삼별초란(三別抄亂) 평정 공으로 용성군(龍城君)을 봉하고 남원부(南原府)를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은 양주운(梁朱雲)과, 고려말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김구용(金九容)과 임진왜란(壬辰倭亂)시 공훈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하였고 충장공(忠壯公)이라 시호한 양대박(梁大樸)을 봉안(奉安)하였다

 

 (5)주변현황

남원시내에서 순창간 국도 4㎞거리에서 좌측 진입로로 1㎞들어가면 상동리(上洞里)마을이 위치하며 서원앞에는 전라선 철도가 지나가고 전면에는 넓은 평야가 트여 있으며 배면에는 나지막한 야산이 있다. 서원의 배치는 산을 깎아 계단식으로 두고 건물 외곽에는 토석담장으로 둘렀다. 서원 입구에 관리사가 있고 외삼문을 지나 정면 4칸, 측면 1칸에 전후로 퇴칸을 둔 경의당(敬義堂)이 있다. 경의당(敬義堂) 배면에 높은 견치석 석축과 12계단위에 내삼문이 있고 정면 3칸, 측면 1칸의 숭덕사(崇德祠) 건물이 있다.

 

 (6)사진 소개 (2004. 5. 6. 강진 시제 참예시 방문단 답사. 김발용(군), 김윤식(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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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범급 시비 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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帆急 (小易若齋 金九容先生 詩碑) 책자

9) <국역 둔촌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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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둔촌문집>(약40여수의 척약재시가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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