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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후송재 사정(士貞)(1552∼1620)
자는 정숙(正叔), 호는 후송재(後松齋), 송은 광수의 증손이며 만취당 사원의 아우이다. 젊어서 재예와 총명이 과인했으며, 가훈에 따라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퇴도(退陶)를 사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임진란 때에는 중형 사형(士亨)과 함께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왜적에게 항전하여 크게 전과를 올린 바 있다. 창영 화왕산성에서 섶을 깔아 맹서하되 "피로서 맹서하니 마음은 칼날과 같고 몸은 불살라도 뜻은 재가되지 않으리 삽혈심여도 분신지불회( 血心如刀 焚身志不灰)" 하였다. 증직으로 사헌부 지평(持平)을 제수 받고 문집과 계문예설(溪門禮說)이 전하며 도담사(道潭祠)에 제향되었다. 그 후손에 이름있는 선비와 대소 과한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 손자 오계 상유(玉溪 尙瑜)는 장사랑을 지내고 문행이 있었으며 유집이 전한다. 현손인 북오 이중(北塢 履中)은 무과에 올라 선전 오위장(宣傳 五衛將)에 이르렀고 식략이 절인하고 무신란에 의장(義將)으로 추대되 어 군공을 세운 바 있다. 5세손 성고 성(省고 聲)과 귀은 오응(龜隱 五應)은 다같이 문과에 급제했는데 성(聲)은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를 지내고 경학에 고명하여 당세에 추앙을 받았다.
초휘는 성응(聲應)이었으나 어전에서 강경할 때 성(聲)음이 청아함으로 어명으로 성(聲)자 만을 이름하게 되었고, 오응은 사헌부 감찰, 병조정랑,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여러 주, 읍을 다스림에 청백리로 알려 졌다.
정희량의 반란이후 사론이 분분할 때, 소수로서 직언(直言) 충간하여 조의(朝議)를 바로 잡아 전 영남이 신원(伸寃)된 일이 있으며, 함평에 치적비가 세워졌다. 6세손 종필(宗泌)은 문장이 뛰어났고, 종헌(宗憲), 종국(宗國), 종식(宗軾)은 각각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로 모두가 경사에 능통했고 명망이 있었으며 형진(馨進)은 호가 괴음(槐陰)으로 족대부 재응(載應)에게 수학하여 지국이 준정하고 경학에 정통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유집 4권이 있으며 경진(景進)도 진사에 합격했다. 양정(養楨)과 그의 아들 노선(魯善), 양정의 아우 양식(養植)과 그 아들 기선(驥善)은 모두 생진과에 합격하여 향방에 널리 알려졌다. 양정(養楨)은 정종로(鄭宗魯)를, 노선(魯善)은 유치명(柳致明)을 사사하여 문장이 능하고 율기와 검약으로 후덕하게 처신했다. 한 때 도천의 물망에 올랐으나 사양했고, 양정은 문집 8권, 노선은 12권을 펴 냈으며, 양식, 기선 부자 또한 행의가 근엄하고 문사(文辭)가 탁월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고 유집이 전한다.
- 후송재(後松齋) (자료제공 : 김주회(안)
시군지순례 14-5. (의성군 : 義城遺蹟誌) (의성유적지/의성문화원/1996년)
●후송재(後松齋) pp329 . 소 재 지 : 의성군 점곡면 사촌3리
임란 때 화왕산의 곽망우당 의진에서 적신성서(積薪成誓)의 피 끊는 시(詩)로서 전진을 격려한 후송재 김사정(後松齋 金士貞)의 거실로서, 만년에 강학 휴식의 곳으로 삼고자 후송재(後松齋)라 편액했다. 1896년 병 신 의병 때 소실되고 중건하였으며, 1950년 6.25 당시 재차 소실된 것을 다시 세웠다. 1993년에는 후손 형수(瀅秀) 등의 주선으로 규모를 넓혀 4간 겹으로 신축하고 면모를 일신하였으며, 현재 문중 집회소로 이용된다. 진성 이원윤(眞城 李源胤)과 후손 위윤(渭允)의 기문이 있다.
<후송재집 표지 및 내부 사진>(2003. 5. 20. 태서(익) 제공. 출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