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평의공파(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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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2.png 11. <내고향 사촌(沙村)>

        (2005. 10. 정중(도) 제공)

                 (글 : 김사수 )

동해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내리뻗은 태백산맥이 보현산에서 멈추었고

그 일지(一枝)가

서북으로 거슬러서 솟재(鼎嶺)가 우뚝하다.

 

이곳에서 발원한 기수(沂水)가

협곡을 따라 장장 팔십리를 관류하여 대천(大川)을 이루고

다시 서북으로 굽이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 언저리에

주회(周回)수십리의 옥야(沃野)에 자리 잡은

사촌(沙村)은

영남의 명기(名基)로

널리 알려 졌다.

 

북으로는 기령산(奇靈山)과 자하산(紫霞山)의 정기를 받아

온 마을에 양기(陽氣)를 쏟아준다.

안대(案對)의 병봉(丙峯)과 응봉(鷹峯=매봉)의 용수(聳秀)는

마을을 지켜주며

동으로 멀리 황학산의 운봉과

서편 의 천마산(天馬山)의

옛 성지(城址)는 외조(外兆)의 구실로 충족하다.

 

이래서

의성(義城)에서

<제일사촌(第一沙村)> 이라 할 만치

좋은 기지(基址)로 손꼽히며

이곳 사촌은 안동김씨 도평의공파(安東金氏 都平議公派)의

육백년 세거지(世居地)로

이마을 의 역사는 정확히 알수 없다.

다만

신라정승 나천업(孤雲 최치원의 빙부)이 이 마을에 살았다고 전해오니

아마 신라 중말엽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마을에 안동김씨가 뿌리 박은지는

약 6백년이 된다

 

서기 1392년(壬申)에 태조 이성계가

병마를 동원해서 이조를 창업하자

고려조의 함길도(咸吉道) 감목관(監牧官)이었던

도평의공(都平議公)의 아드님 휘 자첨(諱 子瞻)도

이태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이에 불응하고

상향(桑鄕)인 안동의 회곡(檜谷)을 떠나

이 마을(沙村)에 정착하므로써 후손이 세거하게 되었다.

 

감목공(監牧公)의 아드님 사직공 휘 효온(司直公 諱 孝溫)이

세종조(世宗朝)에

비로소 출사(出仕)해서

사직(司直)을 지냈고

 

그의 아드님 평사공<評事公 諱 극해(克諧)>은

진사(進士)로서 문과(文科) 북평사(北評事)를 지냈다.

 

 

 

사촌에 입향한 안동김씨에서

가장 빛을 낸 분은 평사공의 아드님

송은공(松隱公 諱 光粹)이었다.

 

公은 일찍이 상경(上京)해서

성균관 태학(成均館 太學)에 유학(遊學)하였고

성균진사(成均進士)에 입격(入格)하였으나

 

때 마침 연산 난정시(燕山亂政時)라

불원간에 큰 정변이 있을 것을 예기(豫期)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사촌(沙村)으로 내려 오셨다.

 

이로부터 송은선조(松隱先祖) 께서는

집옆에 한 그루의 왜송(矮松 =향나무)을 벗 삼아

시부(詩賦)로 세월을 보내시면서

이 왜송((矮松=香나무)을

<만년송>(萬年松)이라 이름하고

 

자호(自號)를 송은처사(松隱處士)라 하였으니

만년송은

후일에 많은 묵객(墨客)에게 시상(詩想)의 대상(對象)이 되었으며

 

그 창창(蒼蒼)한 용자(容姿)는

아직도 남아 있어

후손으로 하여금 선음(先蔭)을 회상(回想)케 한다.

 

공(公)은

또 남산(南山)밑 소담(小潭)위에

초당(草堂)을 지어

<영귀서당(詠歸書堂)>이라 현액(縣額)하고

후진(後進)의 강학(講學)을 일삼았다.

 

송은선조께서는

특히 시부(詩賦)에 능(能)하시어서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임진왜란에 소실(消失)되고

다만 문집(文集) 일권(一卷)만이 세상에 전해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금부(琴賦)>와 <관산부(關山賦)>는

명작중 명작으로

궁중악장(宮中樂章)에 실렸다 한다.

 

또 만년에는

<경심잠(警心箴)> 십조목(十條目)을 지어

내외손에게 전수하므로서

행실의 신조로 삼게하고

 

구십육세에 숙연(肅然)히

고종(考終)하시니

일향(一鄕)의 후학(後學)들이

공(公)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함에 이르렀다.

 

 

 

송은 선조께서는 일남 육녀를 두시었다.

그래서 내외손 백여명이라 하지만

친손(親孫)은 인의공 휘 세우(引儀公 諱 世佑)한 분이다.

 

칠대단신(七代單身)으로 근근히 가계가 상속(相續)된 가문이다.

인의공(引儀公 諱 世佑)이

비로소 삼남을 두었으니

 

만취당 휘 사원(晩翠堂 諱 士元),

독수헌 휘 사형(獨秀軒 諱 士亨),

후송제 휘 사정(後松齊 諱 士貞)이다.

 

宣祖25년(서기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송은선조의 내외손들은

모두 국란(國亂)의 수습(收拾)에 앞장섰다.

 

당시 영의정으로 팔도체찰사의 중임을 맡아

슬기롭게 전란을 수습한

서애 류성룡을 비롯해서

서애의 백씨(伯氏)겸암(謙菴)류운용(柳雲龍).

 

건마산(乾馬山)에

성(城)을 쌓고 침공(侵攻)하는 왜적(倭賊)과

독전(獨戰)하다가

 

세부득(勢不得)으로

절벽(絶壁)에 몸을 던져

순국(殉國)하고

부인(夫人)신씨(申氏)와

사비(私婢)복분(福分)

그리고 계견(鷄犬)까지

추락(墜落)순절(殉節)해서

일가삼절(一家三節)의 미담(美談)을 남긴

의사(義士)김치중(金致中)등

외손(外孫)중의 대표(代表)다.

 

 

뿐만 아니라

송은선조의 증손(曾孫) 삼형제도

창연(蒼然)히 창의(倡義)하여

 

만취당공(晩翠堂公)은

義兵을 소모(召募)하여 경주(慶州)까지 출진(出陣),

전과(戰果)를 올렸고

많은 사재(私財)로 난민(難民)을

진휼(賑恤)하였으며

 

독수헌공(獨秀軒公)과 후송제공(後松齊公)은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장군을 따라

창령(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다대(多大)한 전과를 거두므로서

그 공적이 모두

창의록(倡義錄)에 남아 있다.

 

이로서 만취당(晩翠堂)공은

부호군(副護軍)에

 

후송제(後松齊)공은

도유(道儒)의 천거(薦擧)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고

 

만취당공은 후산정사(後山精舍)에

후송제공은 도담사(道潭祠)에서 향사(享祀)하였다.

 

한편

문과직장(文科直長)을 지낸 독수헌(獨秀軒)공은

부진(赴陣)의 회로(回路)에

청송(靑松)의 진보(眞寶)에 定着하였기에

 

실로

사촌의 안동김씨는

만취당파와 후송제파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이렇게

영세(零細)한 사촌의 안동김씨가

번성(繁盛)하기 시작하기는

인조-효종 때 부터이며

이때는 이미 이십여의 문호(門戶)를 열게 되었다.

 

 

 

인조4년(서기1626년)에

경상감사 하담공<(荷潭公) 휘 시양 제학공파(諱 時讓 提學公派)>이

실전(失傳)되었던 충렬공 능소(忠烈公 陵所)의

逼近(핍근)에

범장(犯葬)한 근시제<(近始齊)(金垓光山人)>의 묘(墓)를

계정굴이(啓請掘移)한 후로 수호(守護)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사촌의 후손들이

이를 개탄(慨嘆)한 끝에

양진당공<(養眞堂公)휘 상린(諱 尙璘)>이

門內의 후손들과 공론(公論)하고

각자(各自)의 손출(損出)로 위사(位士)를 매치(買置)하여

상거백여리(相距百餘里)를 내왕(來往)하면서

세일제(歲一祭)의

향화(香火)를

궐(闕)하지 않았다.

 

이후부터

영남에 출사(出仕)한 후손들이

사비(祀費)를 도우므로

그 잉여금(剩餘金)으로 제전(祭田)을 확장,

 

안동 소산(素山)의 익원공파 종중에 반송(半送)해서

위사를 매입하고

사촌(沙村)과 소산(素山)의 양문중에서 수년윤행(遂年輪行)으로

 

이백여년을 봉사(奉祀)하다가

 

순조(純祖)조(朝)(서기1800년경)에

 

비로소 묘하에 위사를 매치(買置)하였다.(乙酉譜 충렬공 傍註에 의함)

 

 

 

사촌의 안동김씨는

여느 유생(儒生)들과 같이

선비의 기질로 학문에 전념할 뿐 벼슬을 탐내지 않았다.

그래도 문과 11명,무과 1명 급제와

40여명의 생원 및 진사가 배출되었지만

 

그다지 고관대작은 없었다.

 

효온(사직),극해(북평사),회<淮=科名渫:병조정랑(兵曹正郞)>,성좌(영해부사),성(통례원좌통례),오응(함평현감),도응(회(懷)인현감),종구(성균전적),종경(사헌부지평),종발(사헌부장령),의유(사훈원정언)등 문과 11명과 이중(오위도총부부장),무과 1명이며

소과40여명은 지면관계로 생략한다.

 

 

 

그리고

특히 문명저세(文鳴著世)하기는

천사(川沙 諱 宗德)선생이다.

 

川沙선생은

일찍이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선생에게 師事하여

퇴계학의 정통연원을

계승한

성리학의 대가(大家)로서

많은 士子가 의귀수업하였고

문하에서 이름 높은 문장가가 많이 배출하였으며

천사문집십권을 비롯하여

초려문답,성학정로,성학입문,년보,언행록,부록,동몽입본 등

많은 저서가 간행되었고 미간행 유고는

위손 창회(胃孫 昌會)가 보존하고 있다.

 

이래서

천사선생의 학덕과 경륜은

조가(朝家)에 상문(上聞)되어

정종(正宗)조(朝)에서는

일천(逸薦)으로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제수(除授)되고

다시 수첨구(壽僉 示+區)를 가자(加資)하였으며

 

사후( 死後)에

부조위(不 示+兆位)의 명(命)이 내렸다.

 

1895년(고종32년)

국모(國母)시해(屍害)의 을미사변, 단발령등의 개혁으로

배일의식이 고조되고

주로 지방유생들 중심으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외세를 몰아내려

의성지방에서도 창의(倡義)

 

의병(義兵)대장(大將)에 운산<(云山)휘(諱)상종(象鍾)>,

소모장(召募將)좌산<(左山)휘( 諱)수욱(壽旭)>.

중군(中軍)만포<(晩圃)권대직(權大稷)>

,선봉장<(先鋒將)휘(諱)수담(壽聃)>,

관향장(管餉將)휘(諱)수협(壽莢)>등

막하 참모와 자진해서 가담한

여러 향리(鄕吏) 의병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의성 구봉산

금성산운(金城山雲) 뒷산,

청송(靑松)감은(甘隱),

옥산황산 등지에서

여러차례 일군(日軍)들과 격렬히 싸웠으며

워낙 우수한 무기와 훈련된 일군(日軍)이라

(휘 수담)(휘 수협)황산전장에서 전사하시고

그외 많은 사상자가 발생 끝내는

퇴폐(頹廢)의 눈물을 머금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이곳 사촌은

 

영남지방의 와해(瓦海)라 불리울 정도로

많은 기와집들이 즐비한 동리 였는데

의병들이 전투에서 패하자

일군들은 의병의 본거지이자 의병대장마을이라 하며

집집마다 다니며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고

고색찬연하던 옛 기와집과 많은 서책 유물들이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으니

한심한 일이였다.(1896년3월30일)

 

이런 일련의 사실들은

을미의병활약에 대한 일본인의 보복조치로서

우리 고장에서는(

1896년)병 신난(丙申亂)이라 말하고 있다.

 

의병대장(諱 상종)1968년3월1일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유공자로 추서되어

대통령표창(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받았다.

 

 

 

1950년6월25일새벽

북한인민군이 기습남침을 개시

철갑차(鐵甲車)를 앞세우고

38선을 돌파 순식간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물 밀 듯이 몰아 내려와

8월초순경

사촌 앞산에서 대격전이 벌어져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당시

사촌주민들은

남으로 피난하여

청도 금천 천변에서 1개월여를 지내는 동안

한미합동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어

성공을 거둠으로써

인민군은 대구근교 팔공산까지 내려왔으나

후방보급이 차단되자 후퇴하기 시작하였으며

 

8월 추석날

비로소 피난짐을 짊어지고

폐허의 비린내나는 전쟁터를 밟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북상(北上)하던 인민군은

중부지역의 국군에 의해 차단되어

미처 북으로 가지못한 잔여사단규모의 병력이

태백산 줄기를 타고 남으로

또 다시 내려오면서

 

의성경찰서와 점곡지서를 습격

밤이면 인민군

낮이면 미해병대가 점거

일주일여에 걸쳐 작전이 벌어지는 동안

 

지당(웅텅)부근에 잠복중이던 인민군이

미군대위를 사살하자

화가난 미군들이

일제히 마을에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백여호가 소실(消失)되고

동리는 비참한 눈물로 얼룩졌다.

사변(事變)으로 인하여

사촌에도 여러사람이 희생을 당하였으며

청년들은 모두 용감하게 참전(參戰)하였다.

 

이렇게

사촌의 안동김씨가 번창하고

인물이 배출되기는

선령(先靈)의 음덕과 지령(地靈)의 탓이라하겠으며

영남(嶺南)일대(一帶)에서 사촌김씨(沙村金氏)로 통하는

벌족(閥族)으로 행세(行勢)한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는 많은 인재가 나오지 못했으니

이는

모든 유생(儒生)들이 그리하다시피

개화에 눈뜨지아니하고

수구(守舊)를 고집(固執)하여

신학문(新學問)을 멀리 하였고

청렴(淸廉)을 인간의 기본신조로 삼아

일본의 치하에서

굴욕적 영예(榮譽)를 기피(忌避)한 탓이라 하겠다.

 

이렇게

완고(頑固)한 환경에 젖어온

사촌문중은

 

타 종중에 못지않게 강력한 조직체를 가졌다.

문중의 대소사는 불문율에 의한 전통적 관례에 따라

대문회(大門會)에서 결의되고 양지파(兩支派)에서도 마찬가지다.

 

화수회(花樹會=大門中),

동약계(同約禾+契=만취당파),

친목계(후송제파)등 년 1차의 정기총회를 개최함으로서

재외족친은 방향(訪鄕)의 기회가 되어

족의(族誼)를 꾀하고 있다.

 

특히 문중소유인 전후십리의 광대한 임야는

문중산하 조직체인

공목계(共睦 禾+契)가 산림관리를 담당하고 있으며

상(喪) 장례(葬禮)에 대한

취로(就勞)의 의무(義務)도 맡고 있다.

 

그밖에 청년회, 부인회등이 있어

년중 경조사에 상부상조로 전통미풍양속을 지키고 있다. 끝

 

 

 

p/s

-글 쓴 분은

제가 평소 존경하는 족조(族祖) 김사수(金沙秀)님이며 십수년간 점곡면장 역임하셨으며, 경심장해설발간, 사촌서림사적비(沙村西林事蹟碑)건립 등(等) 많은 일을 하신 어른입니다

 

경심장해설(1987년刊)책자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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