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평의공파(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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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2.png 17. 김문수의 만취당기

      (2003. 2.1 정중(도) 제공)

이 땅에는 어느 고장을 가더라도 유서깊은 반촌이 있고, 그 마을에는 으레 풍수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그 전설은 대개 그 마을이, 혹은 그 마을의 어느 집이 명당에 자리잡아 큰 인물이 몇 명 날 자리라는 식이거나 아니면 특정 조상의 무덤터와 관련된 후손의 발복 운운하는 이야기이게 마련이다. 그 뒤엔 또 그 전설을 철석같이 믿고, 후손들이 벌였다는 웃지못할에피소드들도 사족처럼 그럴듯하게 덧붙여져 재미를 더한다. 생각이 있는사람이라면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쯤으로 받아 넘기겠지만 가문과 땅에 대한 집착이 유별났던 시절에는 그 땅의 발복에 대한 믿음이 조상에 대한 경애심처럼 굳건하기도 했을 것이다.

 

작가 김문수씨(62)는 이같은 명당과 그 터에 대한 한 인간의 맹신과 집요한 집착을 해학적으로 엮어낸 소설로 20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만취당기'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이 소설의 무대는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일대. 더 없는 명당에 터를 잡아 세 명의 정승을 배출한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으며, 경북도 지방유형문화재로도 우리에게 친숙한 사촌리의 '의성만취당'에서 작가는 이 소설의 소재를 얻은 것. 실제상황과는 전혀 다른이야기의 구성이지만 턱없이 낡은 풍수설을 믿고 자신의 아들을 정승으로만들려는 아버지와 그것을 믿지 않는 자식간에 빚어지는 갈등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20여년전에 넘어간 고향집 만취당을 되찾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간 아버지를 뒤따라 온 주인공이 7세때 떠난 고향과 처음 맞닥뜨린곳은 중앙선 의성역. 새벽에 열차에서 내린 그에게 고향은 '따뜻한 잠자리와 예쁜 아가씨'로 유혹하며 다가온다.

 

그러나 작품속의 주인공과는 달리 기자가 벌건 대낮에 의성역 광장을 찾았을 때엔 주위는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예쁜 아가씨'로 방금 내린 승객을 유혹하려는 아줌마부대는 물론 역앞 가게에서조차 손님을 끌어보려는인기척도 없다. 1990년에 새로 지었다는 역사의 산뜻한 도색만이 삭막한분위기를 조금 덜어줄 뿐. 역사안으로 들어서자 어이없게도 대합실의 한쪽에 자그마한 정원이 꾸며져 있다. 앙증스러운 풍경에 미상불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 속에는 승객감소에 따른 철도청의 고민이 숨어있을 터. 인구가줄어들고, 농업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쇠락해가는 농촌의 한 단면이 그대로투영되는 듯해 안타까운 생각도 언뜻 든다. 때마침 역 주변 도로에서는 '쌀값 제값받기'를 주장하는 의성농민들의 시위가 한창이다.

 

이곳에서의 '따뜻한 잠자리' 유혹을 물리치고 소설속의 주인공은 고향과더 가까운 읍으로 택시를 타고 간 것으로 묘사돼 있지만 그 '고향과 가까운 읍'은 작품의 구성을 위해 설정한 가공의 무대일 뿐 실상은 존재하지않는 공간이다. 전국농악경연대회 탓에 잠자리를 구하지 못한 주인공이 고향마을까지의 시오리길을 샛별을 등불삼아 터덜터덜 걸어간 다음 서림에서한데잠을 자도록 만드는 공간배치일 뿐인 것.

 

해서 우리 일행은 곧장 점곡면 사촌리로 향했다. 좁은 지방도로를 따라20여분 달린 끝에 만난 사촌리는 시골마을 치고는 좀 규모가 클 뿐 평범하다. 크다고는 하지만 이 곳이 면소재지이고 보면 오히려 작다는 편이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300호를 넘었지만 지금은 130호 정도란다. 마을을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잠깐만 달리자 금세 왼쪽 골목길 입구에 붙어 있는 '의성만취당'의 입간판이 나타난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지금껏 평범했던 마을이 금세 다른 인상으로 다가온다. 돌과 흙을 섞어 만든 담이 기와를 머리에 인 채 길게 늘어서 있고, 민속마을에 들어선 듯 고색창연한 집들이 눈앞에 가득 들어온다. 그 마을의 한 복판에 누각인지 정자인지 짧은소견탓에 언뜻 구별이 되지 않는 큰 건물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만취당이다.

 

작가는 소설속에서 이 일대가 농공단지로 지정돼 만취당은 물론 마을전체가 없어질 운명으로 설정, 만취당이 지닌 전설대로 행정고시에 합격한아들이 반드시 국무총리나 장관이 돼 줄 것으로 믿는 이택희 노인을 분개하게 만들었지만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 만취당은 물론 마을까지 아직 건재하다. 기실 이 만취당과 사촌리 또한 이씨와는 무관하다. 사촌리는안동김씨의 세거지로, 타성받이는 지금도 네댓집에 불과하다. 만취당은 1582년에 지어진 안동 김씨 집안의 소유로 한번도 남에게 넘어간 적이 없다고 한다.

 

낯선 외지인들의 출현에 잔뜩 긴장한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만취당과 바로 옆에 자리잡은 이 집안의 종택을 둘러 본다.

 

수백년의 풍상을 견딘 고가에서는 옛 사람들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사람이 거처하지 않는 탓에 쇠락하기는 했지만 문화재로 지정됐기 때문에 이나마 버티고 있을 것이다. 빈집을 엿보는 객적은 마음에 조심스레 종택의 문을 열자 누군가 종택의 마당까지 알뜰히 밭으로 가꾸어 놓은 풍경이 눈에들어와 이채롭다.

 

동네 노인을 잡고 이 마을에서 정말 정승이 났느냐고 물어보자 이 곳이외가인 서애 유성룡 선생이 유일하단다. 옛날 마을의 오래 된 은행나무를베 불상을 조성하는 바람에 한 명의 정승이 날 기회를 상실했으며, 또 한명의 정승감이 태어나기는 했으나 시대를 잘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것. 일제의 민비시해당시 의병장을 지낸 김상종 선생이 바로 그 아까운 인물이라고 했다.

 

소설의 주인공이 고향집을 눈앞에 두고 노숙을 한 서림은 이름 그대로마을의 서쪽에 있는 숲이다. 마을의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풍수에 따라 안동김씨의 조상들이 600년전에 조성했다는 유명한 숲으로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초겨울의 서림은 황량하다. 활엽수로조성된 숲은 나무들의 굵은 둥치에서 연륜을 읽을 수 있을 뿐 메마른 가지들이 앙상하다. 그 옛날 이 숲을 뒤덮었다는 왜가리들도 사라진 지 오래라는데, 바닥에 널린 낙옆과 삭정이를 끌어모아 작품 속의 주인공이 그랬던것처럼 모닥불이라도 지피면 쓸쓸함이 가실까. 그러고 보니 나지막한 주위의 산에도 늘푸른 소나무 보다 활엽수들이 훨씬 많아 초겨울의 스산함을더하게 만든다. 소설속에선 만취당의 당호가 '저 시냇가의 소나무는 더디고 더디게 자라지만 무성하고도 늦도록 푸르도다'라는 한시의 한 구절에서따 왔다고 했는데....

 

서림을 뒤로 하고 돌아서면서도 '소설속의 이야기처럼 전설이 자신이나아들에게 구현되길 기다리며 분투하는 가족들이 아직도 있을까' 못내 궁금했다.

 

*작품 줄거리

나는 행정고시에 합격한 공무원이지만 세도가의 그릇된 부탁을 냉정히거절하는 바람에 앞날을 알 수 없게 된다. '정승이 세명 날 터'라는 고향집 만취당의 전설에 따라 내가 정승이 될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버지는 이 일을 알게 되자 더욱 조급해져 노름빚 때문에 남에게 넘긴 만취당을 되찾기 위해 통장을 들고 말없이 고향으로 내려간다. 손자도 만취당에서 낳게하고 싶은 못말리는 집착 때문이다.

 

아버지를 뒤따라온 나는 잠자리를 찾지못해 만취당을 눈앞에 두고 서림에서 하루밤을 지샌 다음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경찰의 안내로 아버지를 찾아 나서지만 아버지는 고향집이 내려다보이는산위의 바위에 올라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 고향마을이 농공단지로 지정돼 몽땅 헐리게 된데 대한 울화때문.

 

아버지는 집을 되찾기 위한 돈을 내놓으며, 세도가에게 백을 써서라도목을 보존하라고 나를 타이른다. 나는 짐짓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하겠다고달래면서도 속으로는 '끝까지 싸우다 안되면 이 돈으로 만취당이라는 주점이라도 내서 살지언정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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