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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5. 18. 윤식(문), 발용(군) 제공) ◇일시 : 2004년 5월 16일(일요일) ◇장소 : 원주 치악산 영원산성[문숙공(휘 悌甲) 순절지] ◇참석자 : 41명(가나다순, 존칭 생략, ☆표시는 부부 동반) 김호길(선산인, 강원대 석좌교수) 양근열(전 국어교사, 시인) 문원학(남평인, 충국 종친 직장동료) 규문(제), 규호(제), 대호(제), 덕응(제), 발용(군☆), 상석(제☆), 상천(제), 상환(제), 성수(제), 영수(제), 용두(제), 용주(안), 운영(제), 원응(제), 윤만(문), 은회(익), 장용(제), 정중(도), 주회(안), 진중(도), 충국(도), 태석(제), 태윤(제), 태일(제), 태헌(제), 학응(제), 항용(제☆), 희준(도), 덕훈(제), 선용(제), 철수(제), 윤식(문☆) 수형(희준 종친 아들), 용범(선용 종친 아들) ◇찬조금 : 영수ㆍ성수 종친(문숙공 후손) 30만원, 상석(제) 종친 기념타올 및 우비, 은회(익) 종친 6만원, 용주(안) 종친 3만원
▣ 07:30분 서울 잠실에서 안사연 답사팀이 예정대로 원주로 출발할 즈음, 부산, 대구, 괴산, 제천, 단양, 원주 등지의 종친들께서도 최종 집결지인 원주역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제8회 산행지는 문숙공(휘 제갑) 할아버지께서 임란 당시 순절하신 치악산의 영원산성입니다. 대종회 회장단 및 관묵 총장의 격려 속에 윤만ㆍ항용 종친께서 제학공파 및 문숙공 후손들과 긴밀한 접촉을 갖는 한편, 철저한 준비로 전국 규모에 버금가는 행사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는 평소에 우리 문중의 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전 종친들께서 안사연 행사에 지대한 관심과 성원을 보내 주신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을 올립니다. 아울러 원주지역에서 문숙공 선양사업에 헌신하시는 김호길 교수와 양근열 시인을 비롯한 관계자 및 원주종친회 종친 여러분과 문원학 님께도 사의를 표합니다.
김호길 교수와 양근열 시인 두 분께서는 문숙공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영원산성 대첩제’를 ‘영원산성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해 오신 고마운 분들이십니다. 영원산성 대첩제는 원충갑 장군 한 분만을 기리는 행사이지만, 영원산성제는 원충갑 장군뿐만 아니라 문숙공 및 임란 당시 왜적에 맞서 싸운 휘하 군졸 및 원주 백성들의 희생정신을 함께 추모하는 더욱 승화된 행사로서 원주를 대표하는 추모제가 된다는 주장입니다.
▲ 서울 1차 집결지 종합운동장앞
▣ 예정보다 다소 늦은 09:45분경 원주역에 도착하자 문숙공 후손들과 원주종친회 종친 등 30여 명이 서울 팀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눈 다음 <김제갑 충렬비(金悌甲忠烈碑)>와 <문숙공 김제갑 충렬탑(文肅公金悌甲忠烈塔)>이 서 있는 원주역 앞으로 자리를 옮겨 묵념으로 문숙공의 순국을 되새깁니다.(충렬비는 현종 11년(1670년)에 왕명으로, 충렬탑은 강원도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 의해 각각 건립되었습니다.)
이어 김호길 교수로부터 문숙공과 영원산성에 대한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호길 교수는 문숙공의 순절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의의를 비롯해 그 동안의 선양사업, 향후 계획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 김호길(선산인, 강원대 석좌교수)
문숙공에 대한 자료는 주회 종친께서 종합 정리해 주신 글 외에 윤만ㆍ태영ㆍ성수 종친께서 올려주신 글들을 참고하시기 바라며, 현지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보고하겠습니다.
문숙공께서 순국하시던 장면은 우리 선조님들의 순국 장면 중 가장 장렬하고 비장한 순국이기도 합니다. 주회 종친께서 올리신 글 중에서 문숙공의 순국 장면을 다시 살펴봅니다.
날이 저물 무렵 적이 풀어놓은 결사대 수십 명이 벼랑 틈으로 잠입하여 성벽에 구멍을 뚫고 올라와 큰소리로 어지럽게 고함치면서 대군을 지휘하여 성을 넘어오게 하였다.
성이 이미 함락되었는데도 공은 여전히 전투복을 입고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채 내려오지 않고 활을 당겨 적을 쏘려하던 차에 적의 화살이 먼저 공을 맞히고 말았다. 공은 화살이 등에 꽂혔는데도 여전히 걸상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다시 화살 한 대를 맞고도 내려오지 않았다.
이에 적이 공을 핍박하여 내려와 절을 하게 하자, 공은 상처가 심하여 의식이 없는 듯한 상태에서도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입으로는 욕설을 계속하다가 결국 부인 및 한 아들과 함께 처형을 당하니 적들도 그 불굴의 기개를 의롭게 여겼다.
- 김원성전(이산해 <아계유고>)
김호길 교수에 의하면 문숙공께서는 조선조의 상피(相避) 제도에 따라 다른 지역에서 재직하시다가 이곳 원주목사로 부임하셨답니다. 그것도 문숙공의 본래 직급보다 낮은 곳으로 자청해서 오신 것이라 합니다.
이곳 충렬탑이 서 있는 곳은 원주의 중심지이자 영원산성이 자리한 치악산이 바라다보이는 곳이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충렬탑을 이곳에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충렬탑 참배와 문숙공 순절에 대한 해설을 들은 다음 우리 일행은 기념사진을 찍고 9대의 차량에 분승, 영원산성으로 향했습니다.
▣ 영원산성으로 가는 길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치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개울을 따라 약 25분간 달리니 영원산성 입구인 금대매표소입니다.
영원산성 찾아가는 길은 비교적 쉬운 편입니다. 원주역 앞에서 좌회전한 다음 직진하면서 이정표를 보고 치악산 국립공원으로 길을 잡으시면 됩니다.
다소 차질이 있긴 했지만 치악산 국립공원 관리소의 도움으로 영원산성 못미처 영원사까지 차량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오시면 금대매표소 입구 주차장에서 걸어 올라가셔야 합니다.
영원사로 올라가는 길은 걸어서 가야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길입니다. 도중에 발목을 적셔야 하는 곳이 서너 군데 되어서 더 운치가 있습니다.
문숙공께서 영원산성으로 들어가실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이 땅을 지킬 신하는 난리를 당해서는 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문숙공께서 영원산성으로 들어갈 때는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칠 무렵이었답니다. 이에 원주목에서는 훈련된 군사들과 병장기를 모두 그곳으로 보냈기 때문에 적을 맞서 싸울 여력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곤 아전 몇몇과 수많은 피란민, 그것도 늙은 백성들과 아녀자뿐이었으니 왜적과 맞서 싸운다는 생각조차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당시 “적의 예봉을 피하자.”는 의견에 대해 문숙공께서는 단호하게 “적과 맞서 싸우는데 나중이 어디 있느냐? 적군이 들어오는데 나라의 녹을 먹는 자가 어떻게 몸을 피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말씀대로 문숙공께서는 피란민 5천 명을 이끌고 영원산성으로 들어가셨고, 왜적 정예병 수만 명과 맞서 싸우셨습니다.
불행히도 왜적 결사대에 의해 방어선 일부가 뚫리면서 수만 명의 적군이 일시에 몰려들어 문숙공께서는 장렬히 전사하셨습니다.
국란을 당해서, 전투에 이긴 장수의 기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성이 함락되었을망정 죽을 자리임을 알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쳐 적과 맞선 불굴의 정신은 더욱 고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 고귀한 희생정신이 현양되고 널리 알려질 때 나라와 겨레를 위해 기꺼이 봉사하는 동량들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문숙공께서는 그 정신을 실천으로 옮기신 위대한 원주시의 목민관이십니다.
문숙공께서 장렬히 전장(戰場)에서 돌아가시자 전주이씨 할머니께서도 정절을 지키시기 위해 순절하시고, 그 아드님(휘 時伯)께서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도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씀과 함께 문숙공 시신을 끌어안고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한날한시에 충ㆍ효ㆍ열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원주역 앞 <충렬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ㆍㆍㆍ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어야 할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오직 군자라야만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다. 위급함을 당하여도 평소와 같이 보고 충성심과 분개심을 가다듬어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았도다. 신하는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죽어 정절을 지켰으며, 아들은 죽어 효도를 다하였으니 여기 만고(萬古)에 삼강과 오륜을 남겼도다. 치악산이 동쪽에 우뚝 솟고 봉천(鳳川)은 서쪽으로 흐르니 선생의 이름과 함께 길이 갈 것이다.ㆍㆍㆍ” 사실 두렵습니다, 실제 이런 상황이 오면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때,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분연히 일어나 문숙공께서 택하신 그 길을 따라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문숙공의 정신을 더욱 뜻깊게 새겨야 할 것입니다.
▣ 영원사 바로 옆이 영원산성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30여분쯤 올라가면 성벽이 나타납니다. 처음 길은 제법 가파르나 조금만 참고 오르시면 일부 복원된 성벽과 그 뒤로 조금 더 가서 옛 성의 자취를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영원산성 입구에는 영원산성 수호사찰인 영원사가 있습니다.(영원사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마침 영원사 주지이신 무이(無貳) 스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원주산악회 종친들께서 준비하신 천막으로 모셔서 영원사에 대한 이야기를 청합니다.
무이 스님 말씀으로는 영원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는데 오랜 세월 폐찰되었다가 스님께서 10여 년 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답니다.
스님 말씀으로는 임란 당시 쌀 씻는 물이, 전투가 벌어진 후에는 핏물이 저 아래 금대매표소 입구의 민가까지 흘러내려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답니다.
영원산성 입구에는 제법 널찍한 공터가 있습니다. 어느새 풀이 무릎을 차고 넘을 정도로 자라 있었습니다. 종친들께서 달려들어 자리를 다듬고 임시로 제단을 모신 다음 산신제와 문숙공 추모제를 올릴 준비를 합니다.
산신제 및 문숙공 헌관 및 집례자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산신제 △헌관 상석(제) △축관 항용(제) △집례 용두(제) △사준 주회(안) △좌집사 주회(안) △우집사 은회(익)
▲문숙공 추모제 △초헌관 학응(제) △아헌관 대호(제) △종헌관 영수(제) △축관 항용(제) △집례 용두(제) △사준 주회(안) △우집사 윤만(문) △좌집사 윤식(문)
<山城祭文>
(文肅公 諱 金悌甲 追慕 鴒原山城 祭文)
단군기원 4337년 5월 16일에 이곳 영원산성에 모인 추모단 일동은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행 통정대부 수충청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贈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 行 通政大夫 守忠淸道 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이신 문숙공께 삼가 고하옵나이다.
우금(于今)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에 이곳 영원산성에서 우리 강토를 수호하기 위해 원주목사로서 혈전 분투하시다가 장렬하게 순국(殉國)하신 문숙공이시여! 공께서는 일찍이 신라의 왕손이시며 고려왕실의 외손인 안동김문의 후손이시며, 고려조의 출장입상(出將入相)으로 이름 높으신 상락군 개국공(上洛郡開國公) 충렬공(忠烈公) 휘 김방경(諱 金方慶)의 11대손으로서 조선조 중기의 명문가였던 괴산의 오갑(五甲) 명현(名賢) 중 넷째로 출생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보이신 공께서는 안동의 퇴계선생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셨으며, 29세(1553.명종8)에 문과에 급제하시어 홍문관 정자, 병조좌랑, 옥천군수, 남양부사를 거쳐 정언이 되셨습니다. 57세(1578.선조11)에는 당상에 오르시어 공마관압사(貢馬菅押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오셨으며 이때 명나라 신숭황제(神崇皇帝)로부터 말과 비단과 상아홀을 하사받기도 하셨습니다. 58세(1579.선조12)에는 해주와 진주의 목사, 예조참의, 대사간, 충청․황해 감사를 거쳐 좌승지에 오르셨습니다. 그 후 창성부사를 거쳐 67세(1591.선조24)에는 원주목사로 부임하셨고 그 이듬해에는 우리 민족사의 최대 시련이요 비극이었던 임진왜란을 만나 바로 이곳 영원산성에서 그 비통의 혈전을 맞게 되셨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평소 충(忠)과 의(義)를 목숨처럼 아끼셨던 공께서는 관동지방으로부터 서울을 향해 파죽지세로 이 땅을 유린해 오는 왜적 앞에 당당히 맞서셨습니다. 공께서는 아군의 열악한 전투태세와 패전의 두려움으로 도망치는 이속(吏屬)들과 민간인, 피난민, 노약자들을 불러모아 충의(忠義)를 깨우치고 감화시켜 이곳 천혜의 영원산성에서 수성계획을 세우고 전투준비에 임하셨습니다. 1592년 8월 25일, 드디어 벌어진 왜적과의 전투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열세로 인해 불행하게도 패전으로 기울어갔습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굴하지 않고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화살을 쏘며 당당히 왜적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공께서는 참혹하게도 왜적에게 목이 베이는 비극을 당하셨습니다. 이어 정경부인(貞敬夫人 全州李氏)께서도 자결(自決)하셨고, 차자(次子) 참의공(參議公 諱 金時伯)께서도 부친의 시신을 붙들고 최후까지 싸우시다가 몸과 머리가 나뉘는 슬픔이 바로 이곳 산성에서 있었사옵니다.
忠, 孝, 烈의 참의미를 깨닫게 해주신 문숙공이시여! 님과 가족들의 그 날 그 피의 절규소리가 지금 이 산성 어디선가에서 들려오고 있는 듯 하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바른 삶을 일깨워주신 님이시여! 님은 가셨어도 님의 발자취와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 민족 모든 이의 가슴속에 살아오고 있습니다. 또한 전쟁에 임하면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인 “나는 죽기로 결정하였다. 살아도 나라와 살고 죽어도 나라와 죽을 것이니 시간이나 끌면서 살기를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마땅히 험한 곳을 질러 막아 힘을 다하여 항거하다가 하늘의 덕으로 적의 칼날을 꺾을 수 있다면 다행이요, 만일 불행하면 오직 나라를 위한 죽음이 있을 뿐이니 오히려 사사로이 죽는 것보다 낫지 아니한가 ?” 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가슴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님이 가신지 412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피로써 지켜온 평화로운 이 땅에서 개인적인 안일(安逸)과 행복을 추구하는데는 열중하면서도 이 산성의 역사적 비극에 대해서는 점점 잊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먼 곳에서 굽어살피고 계신 님이시여! 바라옵건대 우리들의 무지와 불민(不敏), 불효와 무성의로 인해 이루지 못했던 님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는 현양사업들인 정기 산행제, 학술발표회, 평전(評傳) 발간 및 국역의재유고 재발간, 묘역과 원주 충렬비 주변 정화사업, 기념관과 정려각(旌閭閣) 건립 등의 사업이 오늘 이 산성제를 시작으로 크게 일어나 반드시 성취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고, 이 민족 이 겨레의 위대한 내일이 활짝 꽃필 수 있도록 크고 환한 등불을 밝혀 주시옵소서. 삼가 맑은 술과 간소한 제수를 올리오니 강림하시어 흠향하시옵소서
2004년 5월 16일 文肅公 16世孫 金恒鏞 奉撰, 奉讀
▣ 추모제를 봉행한 다음 음복을 나누고 원주산악회 종친들께서 미리 준비하신 차일로 자리를 옮겨 간단한 자기소개를 가졌습니다. 감격스럽게도 희준(대구), 진중(서울), 정중(대구), 충국(부산) 종친 등 도평의공파 종친들께서 대거 참석하셨습니다. 계파를 초월한 문중사랑을 다시 느낍니다. 뿐만 아니라 충국 종친의 직장 동료이신 문원학 님께서 자리를 빛내 주셨고, 희준 종친의 아들 수형 군(고1)도 참석하였습니다. 오늘의 최연소 참가자는 제천에서 사진작가로 큰 역할을 하고 계시는 제학공파 선용 종친의 아들 용범 군(초등학교 4년)입니다. 용범 군은 어린 나이에도 산성까지 올라갔다 오는 등 아주 의젓했습니다.
자기소개에 이어 김호길 교수께서 미리 준비해 주신 자료집, 안사연 주회 종친께서 준비하신 자료집을 배포한 다음 학술발표회를 가졌습니다.(학술발표회 내용은 우리 홈에 올라온 글들을 참고하시기 바라며 생략합니다.) 또한, 원주종친회에서는 문숙공 현양사업 경과, 향후 원주시를 비롯한 관계기관 및 지역민들의 의견, 원주종친회의 계획 등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날 행사를 위해 문숙공 후손이신 영수ㆍ성수 종친께서 30만원과 상석 종친께서 기념수건과 우비를 희사하셨습니다. 항용 종친께서는 성균관대학교에서 발간한 <槿墨(仁)>편에 수록된 문숙공 친필 서찰을 컬러 복사하여 배포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 올립니다.
▲ 대호 원주지역 종친회장
▲ 항용 홈페이지 관리자
▲ 괴산지역 종친
▲ 제천지역 종친
▲ 대구 부산지역 종친
▲ 원주지역 종친
▲ 안사연
▣ 학술발표회 후 점심을 들고 영원산성으로 올라갑니다. 길이 가팔라 숨이 턱에 찹니다. 그래도 몇 번 산행에 참가했더니 숨 가쁜 것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등산로 옆 풀섶에는 취와 참나물 등 나물이 많기도 합니다. 동행하신 우리 문중 며느리 네 분께서는 나물 뜯는 재미에 산길을 잘 타십니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겨우 한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가파른 곳입니다. 좌우의 험준한 산들이 자연 그대로의 성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훈련된 병사들이었다면 성이 함락되기는커녕 왜적을 모조리 무찌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이곳 원주, 특히 치악산은 현대전에서도 전략적 요충지에 속합니다. 우리 국군 1군사령부가 원주시에 주둔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인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산성에 오르니 옛 성벽에 검은 이끼가 자라는 곳이 많습니다. 하산길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종친께서 “검은 이끼는 피 흘린 곳에서만 자랍니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 격전지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린 곳이라는 뜻이죠.”라 하시던 말씀이 자꾸 떠오릅니다.
▣ 이제 문숙공의 고귀한 정신을 현양하는 막중한 책무를 생각하며 귀가 준비를 합니다. 우리가 머물렀던 자리를 말끔히 청소한 다음 금대매표소에 도착하니 어느덧 17:00시가 가까워졌습니다.
다들 헤어지기가 섭섭하신지 작별인사가 길어집니다. 손을 놓았다가 또 잡았다가ㆍㆍㆍ그게 핏줄인가 봅니다.
부산, 대구, 제천 등지로 떠나시는 종친들을 배웅한 뒤 서울 팀도 고속도로로 접어듭니다. 늘 그렇듯이 상경길은 막힙니다. 그 사이에 차 안에서 정담이 익어갑니다. 진중 종친의 구수한 입담에 정말 재밌는 TV 보았고, 침대도 새로 구입하기로 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하니 20:40분입니다. 대구 도착하신 정중 종친께서 23:00경 댁에 들어가셨다 하시니 부산까지 가신 충국 종친과 문원학 님께서는 새벽녘에야 도착하셨을 것 같습니다. 서울 팀은 하남시에서 저녁을 들고 다음 날을 위해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원주 영원산성 답사에 적극 협조해 주신 원주종친회와 제학공파 종친들께 거듭 감사 말씀 올리며, 종친 여러분 먼 길 무사히 귀가하셨기를 빕니다. 이상 제8회 정기산행 보고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영원산성의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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