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2004. 10. 11. 글-주회(안), 사진-항용(제)) ■ 제13회 정기산행 개요 ○일시 : 2004. 10. 10(일) 06:30-24:30
○ 장소 : 대구 팔공산 일대 <만보당(휘 수동)묘역, 동화사 홍진국사 부도 및 홍진국존비 추정 소재지 확인>
○ 참가인원 (무순) <서울경기> 재철, 용주, 영환, 영윤, 상석(在항), 윤만(會항), 주회, 태우, 항용(植항)
<대구 일원> 홍묵(익) : 문경공 14대손, 윤회 창묵씨 등과 다년간 종사에 헌신 중원(묵항, 익) : 문경공 14대손, 문경공 종친회 총무 태원(보명 순묵, 익) : 문경공 14대손 진종(容항, 익) : 삼소재(휘 종락) 5대손, 대구지역 종친회 총무이사 /종보편집주간 태도(도) 희준(泰항, 도) 정중(植항, 도) 실경(泰항, 익) 남근(植항, 익) 석근(植항, 익) 재우(익) : 문경공 후손, 신룡동 만보당 재실 인근 거주, 청화식당 운영 재완(익) : 문경공 후손
■ 산행 후기
아침 5시반, 내려선 아파트 1층은 사위(四圍) 캄캄하고 아직도 잠들어 있다.
호기심 가득히 내닫는 발걸음은 호쾌하고 장하니 하루를 깨운다.
6시반, 종합운동장역 속속 도착하는 역군들! 동지들!
중부고속도로 타고 가다 중앙고속도로 갈아 탄다. 우리 일행을 위해 새로 포장한 듯 까만 도로가 예쁘다.
쌩쌩 달리는 15인승 노란 봉고 차창 밖으로는 가을 내음 청량하고 가을 풍광 가득하다.
10시 50분 어느새 도착한 북대구역! 서울손님 마중나온 삐까뻔쩍 차량 5대가 도열하고. 반가운 일가님들 얼굴에는 정성 가득하고 화안하다
경상도 사나이들. 무뚝뚝하나 굵직하다.
오늘은 문경공 종친회 이사회, 대구 청장년회 체육대회 등 이곳 대구 종친가는 바쁜 하루이다.
바쁜 일정을 조정하며 우리를 안내하시는 이곳 일가님들 손님 맞이하느라 땀과 정성을 다하시는 정중 님
무뚝뚝하나 언제나 듬직한 희준 님, 사촌의 젊은 날의 우상 태도님 모두가 고맙고 따뜻한 일가의 정이 샘솟는다.
대구광역시 동구 송정동 장등산 만보당(휘 수동) 선조님 묘역은 가을햇살 화창하다.
<묘역 전경>
<묘비>
<묘 봉분 앞에 있는 문양석>
공의 묘는 양천현 남 15리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하여 1981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한다.
1970년초 양천에서 양주 진전면 팔하리 목사공 묘하로 이장하였다고도 하는데,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고 하고.
이곳으로 이장시 묘비는 세 동강 난 상태로 옮겨 오고 신도비는 너무 커서 그 자리에 다시 묻었다고 한다.
영남에서 드문(?유일한) 영의정 묘역이 너무나 왜소하다. 경기 시흥시 소래산록 왕릉같은 영의정 하연 묘역이 떠오른다.
후손들의 간소한 참례가 이어지고 약간 흥분하신 듯한 홍묵 님의 설명이 이어진다.
<묘소 참배자 일동>
본격적인 묘비 탁본 작업이 들어가고 묘역 여기저기 둘러 앉은 후손들은 이야기 꽃을 피운다.
<탁본 후의 모습 -의정부 영의정 영가부원군 김공지묘> (처음의 <議>자는 주민들이 영험한 글자라고 자꾸 파가기 때문에 많이 훼손되어 있음)
신용개 찬, 김희수 서 옛 신도비는 흔적없고 1981년 원영 홍묵 님 번역하고, 창묵 님 새로 세웠다.
옛 신도비의 거북받침 귀부와 용머리 이수는 본 대로 복원하였으나 글씨는 예의 '석물공장체'로 새로 쓴 것이다. 아쉽고도 아깝다.
<묘역과 신도비>
<신도비>
되돌아 나온 대구시 동구 신룡동 묘우 문경공묘(文敬公廟)와 재실 만보정(晩保亭)
<재실과 사당 전경>
<재실>
<재실 현판>
<사당>
<사당 현판>
옛부터 이곳 종손가에서 관리해온 묘우는 2000년 고쳐 지었다 한다.
<대들보 상량일 기록>
만보당 불천위제는 매년 4월 한식날에 대구유림 주관으로 향사한다 역시 영남 유림은 전통을 굳건히 지켜가고 있음에 감사한다.
<위패>
원래 양천 묘하에 있던 재실은 40년전 이곳으로 옮겨 오고 재실 안의 郭昌承 찬 <만보정 상량문>, <만보정기> 글씨는 예쁘다.
<만보정 상량문>
<만보정기>
이 마을 문경공 후손 재우님 댁 청화식당에는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다.
배고픈 걸음들은 주안상으로 뛰어 오르고 서울 손님 온다고 정성이 푸짐하고 가득하다.
<청화식당에서>
<문경공묘>와 <만보정>을 뒤로 하고 문영공(휘 순)선조님 묵향(墨香)이 묻어 있는 팔공산 기슭을 돌아 오른다.
이곳 순회도로도 새로 포장하여 까만 아스팔트에 새하얀 선이 산뜻하다. 우리 일행을 맞이하는 초가을 팔공산은 황홀하고 넉넉하다.
동화사 서문에 당도하여 경내로 들어선다. 봉서루 계단 올라 대웅보전 마당. 보수공사중이다.
<동화사 전경>
우리는 오늘의 하이라이트에 다가서고 있다. 고즈넉한 구름다리를 건너 금당선원 입구에 외로이 서 있는 도학동 석조부도(보물 제601호)에 오른다.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부도의 기품이 듬직하면서도 귀족적이고 우아한 듯하다.
이 부도는 홍진국사 부도라 전해 오는데 이곳에서 1km 아래 내학(內鶴) 마을에서 옮겨 온 것이다.
1298년 김훤(金暄) 撰, 김순(金恂, 1258-1321) 선조님 書로 세운 동화사 홍진국사비는 도궤(倒潰)되어 없어진지 오래다. 현재 비편조차 확인할 길 없다.
<도학동 석조부도에서>
우리 문중의 비조이신 대보공(휘 알지)의 탄강설화 <금궤도(金櫃圖)>를 그린 조속(1595-1668)은 진적(眞蹟)과 금석문(金石文)을 수집하여 <금석청완>을 엮는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금궤도와 금석청완이 소장되어 있고 금석청완에 홍진국사비 탁본이 실려 있다.
비명제목 6자(弘眞國尊碑銘)를 1행에 3자 2행에 3자, 두칸으로 나누어 제작하고 비문 중앙의 일부분을 6행 11열로 총 60자로 제작한 것이다. <국립박물관 소장 '금석청완' 내의 홍진국사비 탁본>(2002. 1. 항용(제) 비디오 촬영후 재촬영)
이우(1637-1693)가 1668년 엮은 탑본첩.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이 책에도 비교적 선명한 홍진국사비 탁본 1점이 실려 있다.
비석 말미에 적는 銘 부분으로 탁본 右上 4-5글자는장서각 소장 탁본의 左下 조각과 같은 부분이다. <대동금석서 내의 문영공 홍진국사비 탁본 일부>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는 “탁본 實物”1점이 소장되어 있다. 서울 柳正秀(작고)藏 舊탁본(154.5×84.8)이다.
비편 6조각을 비문 내용에 맞추어 배열하여 탁본한 것이다. 현존하는 유일한 탁본이라 귀중한 유물이다.
<정신문화원 소장 홍진국사비 탁본 일부>
우리가 찾아 헤매는 홍진국사비는 어디에 있었는가? 내학 마을. 홍진국사 부도가 있던 주변에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동안 이 비를 찾아 얼마나 헤맸던가? 여러 후손들이 수많은 발걸음을 되풀이해 왔다.
재철 아저씨는 대여섯차례, 항용 선생님은 서너차례 모두들 한 두 번은 다녀간 길이다.
오늘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홍진국사 부도가 있었던 위치를 물어물어 가기로 했다.
체육대회를 마치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대구 청장년회 임원 일가님들께 양해 전화를 넣는다.
죄송하기는 하나 할수 없다. 그동안의 목마름을 풀어야만 했다.
지나가는 스님들은 물어봐도 멀뚱멀뚱 부도가 있었다던 내학 마을을 묻고 묻고 또 묻고 내려간다.
동화사 일주문 아래 학부 마을에 도착 슈퍼에도, 식당에도, 경로당에도 노인분들 있는 곳은 모두 휘젓고 다닌다.
다행히 나이 여든 넘으신 촌로를 만나 일말의 단서를 찾아냈다. 촌로를 모시고 그곳을 찾아 올라갔다. 동화사 입구 일주문 앞에서 우회전. 그곳에는 대구교육원이 들어서 있다. 이곳 교육원 오른편 언덕이 전에 부도가 있던 위치란다.
<1984년 완공 대구 교육원>
<대구 교육원 본관 우측 언덕의 산소 뒷쪽 부도가 있던 곳 앞에서> *고증인 : 金長根 (김해인. 84세. 대구시 동구 도학1동 경로당 아랫집 거주. 현지 최고 거주인) (전열 좌에서 2, 3번째가 고증인 내외분)
<진종 대구종친회 총무님과 김장근옹의 현지 탐사>
<현지를 확인하고 있는 안사연 여러분과 고증인 김장근 옹>
지세가 과연 아늑하고 포근하다. 앞 쪽에 마을이 있는데 '안 학부'라고 부른단다. 한자로는 '內鶴'
부도가 있었다던 구릉은 마당으로 변해 있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부근에 박혀 있을 수도 있는 비편 조각, 돌 조각이라도 찾아보려 했으나.....
교육원 주변에 수없이 많이 조경되어 박혀있는 옛 돌을 훑어 다닌다. 그 속에 비편이라도 끼워 있지 않나 하여.....
<대구교육원 내 도학동부도가 있던 곳 앞 도로상에서 홍진국사비의 위치 추정에 대한 즉석 난상 토론회>
그러나 오늘은 홍진국사비가 서 있었을 개연성이 가장 많은 위치를 확인한 것만 해도 큰 수확이고 보람이었다. 가슴 속이 다 시원하다.
해는 넘어가고 황홀한 경치와 분위기는 우리를 붙잡는다. 길바닥에 편한대로 앉아 남은 술과 다과를 즐기는 것으로 아쉬움과 시원함을 함께한다.
추사 김정희 42세, 1827년 1월 26일, (청나라)장심이 (추사 동생)김명희에게 장찰을 보낸다.
‘桐華 2비’등 여러 탁본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고 있는데 이 중 하나 정도는 동화사 홍진국사비 탁본이 아니었을까?
추사 선생 유품을 찾아 나서야 하나? 아니면 청나라 장심 후손을 찾아 그의 유품을 찾아 나서야 하나?
선조님 필적 하나 찾는 것이 이토록 힘이 든단 말인가? 그러나 굽히지 않으리라. 중국까지도 쫓아가서 찾아내리라 다짐하여 본다.
하루종일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신 진종 님, 태도님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애쓰시는 할머니처럼 손님맞이에 온 정성을 쏟으신 정중 님, 희준 님과의 아쉬운 작별
팔공산을 뒤로 하고 북대구IC로 향한다. 길이 어찌나 막히는지 북대구IC까지 시간반도 더 걸린다.
까만 밤길을 달려 서울 종합운동장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24시 00분
재철 아저씨는 손주가 차를 갖고 마중나와 있다. 80고령에도 40대보다 더 정열적이시고 젊으신 분이시다.
나이 60 넘었다고 다 늙는 것이 아니고 나이 20이라 하여도 다 청춘은 아니란 말이 있다.
이상으로 후기를 마칩니다. 참가하시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