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삼소재 김종락의 실천적 삶과 충효열의 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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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작성일24-04-22 23:04 조회275회 댓글0건본문
황 만 기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학술연구대우교수)
Ⅰ. 머리말
Ⅱ. 삼소와 팔조목의 실천
Ⅲ. 충효열의 선양과 의식 세계
Ⅳ. 맺음말
<국문 요약>
본고는 삼소재(三素齋) 김종락(金宗洛)의 실천적 삶과 충효열의 선양에
대한 연구이다. 삼소재 김종락은 19세기 안동 풍산의 재지 사족이다. 선안
동김씨, 즉 상락김씨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평생 삼소(三素)를 실천하였
다. 삼소란 거소산(居素山), 식소찬(食素餐), 행소리(行素履)를 말하는데, 거
소산(居素山)은 사는데 소박하다는 뜻으로 맑고 척박한 두메의 누추한 집
에서 살며 천성을 기르고 안빈낙도한다는 의미이고, 식소찬(食素餐)이란
먹는데 소박하다는 뜻으로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참되고 담박한 음식을
먹으며 서적을 벗하는 기쁨을 얻는다는 의미이며, 행소리(行素履)는 행하
는데 소박하다는 뜻으로 욕심이 없고 깨끗하며 참되고 꾸밈이 없이 검소
하게 산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평생 그의 삶의 철학이자 자제들에게 교육
한 팔조목에 대한 실천은 19세기 지식인의 남다른 면모였다. 또 그는 조
선 왕조의 국시였던 충효열을 실천한 지역의 인물들을 선양하고자 하는
특별한 의식세계를 보여주었다. 또한 안동의 지식인으로서 안동의 병폐였
던 삼정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였고, 그 해결방안까지 제시하는 사
회의 감시자이자 재판관이었다는 점에서 여타 지식인들과 차별되는 특징
점이었다. 서애 류성룡과 병곡 권구 등이 남긴 교훈을 향내의 젊은 유생
들에게 학업을 권장하고 조언함으로써 쇠미해진 지역 학풍(學風)을 불러
일으키고자 했다. 이는 그의 애향정신의 발로이자 평생 지향했던 삶의 목
표였던 것이다. 비록 인물사에서나 지역에서조차도 널리 알려지지 못한
인물이긴 하나, 그의 삶의 족적이 녹아 있는 그의 문집 곳곳에는 그의 학
문적 역량과 차별적 의식이 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지역학의
외연을 넓히는 측면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주제어: 김종락(金宗洛), 삼정(三政), 삼소(三素), 팔조목(八條目), 충효
열(忠孝烈
Ⅰ. 머리말
안동 풍산에 위치한 소산마을은 안동김씨(安東金氏)가 400여 년을 세
거(世居)해 온 동성마을이다. 안동김씨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후안동김씨(後安東金氏 일명 新安東金氏)
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은열(銀說)을 시조로 하는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 일명 上洛金氏)로 구분한다. 소산리는 원래 금산
촌이라 했으며 풍산현에 속했다가 1895년 안동군 풍서면에 편입되었다.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금산촌은 풍산현의 서편 5리에
위치한다. 앞에 큰 들이 있고 땅이 기름져 온갖 곡식이 잘 된다.”라고 하
였다. 이 마을은 학가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 내린 정산(井山)과 사이에
있으며 풍산들을 동향으로 보고 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
1652)은 금산촌이 마을 이름으로선 너무 화려하다고 여겨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素耀山)의 이름을 따서 소산(素山)으로 고쳤다.1) 소산마을에
는 선안동김씨종택인 삼소재(三素齋)가 있는데,2) 이는 19세기 안동지역
재지 사족인 김종락(金宗洛, 1796~1875)의 당호이자, 호이기도 하다. 김
종락은 이 호를 짓고서 스스로를 경계하고 반성하는 지표로 삼아 안회
(顔回)의 안빈낙도의 삶을 실천하였으며 후손들에게도 교언영색(巧言令
色)의 겉모습보다는 검소하고 소박한 내면 수양을 위한 삶을 살 것을 주
문하였다. ‘소(素)’란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근본이 되는 본체로서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근본을 힘쓰고 본질을 숭상한다는
뜻이다. 또 삼소(三素)란 거소산(居素山), 식소찬(食素餐), 행소리(行素履)
를 말하는데, 거소산(居素山)은 사는데 소박하다는 뜻으로 맑고 척박한
두메의 누추한 집에서 살며 천성을 기르고 안빈낙도한다는 의미이고,
1) 金養根, 東埜集 권7, <京鄕三派卜基故實記> 참조. 2) 소산마을에는 이밖에도 청원루(淸遠樓), 삼귀정(三龜亭), 안동김씨종택(安東金
氏宗宅)인 양소당(養素堂), 묵재고택(黙齋古宅), 동야고택(東埜古宅), 비안공구
택(比安公舊宅)인 돈소당(敦素堂) 등이 있다.
식소찬(食素餐)이란 먹는데 소박하다는 뜻으로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참
되고 담박한 음식을 먹으며 서적을 벗하는 기쁨을 얻는다는 의미이며, 행소리(行素履)는 행하는데 소박하다는 뜻으로 욕심이 없고 깨끗하며 참
되고 꾸밈이 없이 검소하게 산다는 의미이다. 김종락의 인물됨에 대해
서는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시도
조차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김종락이 실천한 삼소(三
素)와 팔조목(八條目)의 구체적인 삶과 조선왕조 유교 이념인 충효열의
선양이라는 두 측면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삼소는 속세
에 물들이지 않고 타고난 자질을 유지하면서 한결같이 학문에만 전념한
김종락만이 지닌 실천적 삶이었고, 팔조목의 실천은 여타 지식인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김종락만의 의식구현이었다. 특히 삼정에 대한 언급은
사회적인 문제를 넘어선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매우 시급한 문제에
대해서 수수방관하지 않고 삼정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김종락만의 차별된 면모라 여겨진다.
Ⅱ. 삼소와 팔조목의 실천
1. 가계(家系)
김종락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의 가
계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김종락의 중시조(中始祖)는 김방
경(金方慶, 1212~1300)으로, 고려 충렬왕(忠烈王)을 섬겼고 벼슬이 삼중
대광 첨의중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世子師)이고 시호(諡號)는 충렬
(忠烈)이다. 김종락의 11대조 언준(彦濬)은 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로
안동 소산으로 낙향하여 살았으며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영남에서
명망이 높았다. 그 아들 율(慄)은 음사(蔭仕)로 충의교위(忠毅校尉)를 지
냈고, 그 아들 취려(就礪)는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그 아들 인달(仁達)
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냈으며 독실한 의지 로 학문에 힘썼으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도의로 사귀었다. 8대
조 종문(宗文)은 호가 송오(松塢)로 장례원사의(掌隸院司議)를 지냈으며
뛰어난 재주가 있어 문예를 크게 떨치니 세상에서 사문(斯文)의 노성인
(老成人)이라 일컬었다. 그 아들 욱(稶)은 통덕랑(通德郞)으로 학문에 뜻
이 깊어 문장과 글씨로 이름났고 같은 마을의 찰방(察訪) 김계상(金啓祥)
과 절차탁마하였다. 욱(稶)의 아들 해붕(海鵬)은 25세의 나이로 요절하였
고, 5대조 용추(用秋)는 호가 송정(松亭)으로 어려서는 고산(孤山) 이유장
(李惟樟, 1625~1701)을 사사(師事)하다가 만년에는 갈암(葛庵) 이현일(李
玄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조(高祖) 덕윤(德胤)은 호가 구헌(懼軒)인데 일찍이 과거 공부를 포
기하고 독서에만 매진하였으며,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의 손자인 추
담(秋潭) 김여만(金如萬)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증조(曾祖) 동식(東
軾)은 천품이 영오(穎悟)하고 풍채가 수려하며 문장이 뛰어나 15세부터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하였고 장원도 두 번을 하였다. 42세의 젊은 나이
에 졸하였다. 호가 소산자(蘇山子)인데 이는 문장이 뛰어나서 중국 송나
라의 소식에 비견하여 부른 것이다. 특히 부친 덕윤과 아우 동철(東轍)과
함께 삼소(三蘇)에 비견될 만큼 문장이 뛰어났으며, 사는 마을인 소산(素
山)을 소산(蘇山)으로 부르기까지 하였다. 조부(祖父) 용재(龍在)는 호가 소고(素皐)이며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
여 선고(先考)가 일찍 세상을 등지자, 대신 조부를 섬김에 성효(誠孝)를
극진하였고, 또 형제들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모부인을 섬기었다. 부친
은 이름이 도언(道言)이고 호가 금산자(金山子)이다. 타고난 자질이 빼어
나고 문행이 있었으며 임여재(臨汝齋) 류규(柳濶奎)에게 수업하였다. 의리
와 학문을 터득하고 평생 재리(財利)의 다과(多寡)를 말하지 않았다. 특
히 국가의 조세에 조심하여 매양 당송 팔대가의 한사람인 당나라 유종
원(柳宗元)의 「전가(田家)」에 나오는 “동쪽 고을에서는 납세 기일 놓쳐
수레바퀴가 진흙 늪에 빠진 듯 꼼짝 못하게 되었네.[東鄕後租期, 車轂陷
泥澤.]”라는 구절을 게시하여 스스로 경계하고, 자질(子侄)들을 경계하기를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는 낯빛을 온화하면서도 근엄해야 할지니, 낯
빛을 온화하게 하면 남과 친하기가 쉽고 낯빛을 근엄하게 하면 남이 범
하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어머니 청주정씨는 매창(梅窓) 정사신(鄭
士信)의 후손이고 취몽헌(醉夢軒) 정재후(鄭在厚)의 딸이다.
2. 삼소(三素)와 팔조목(八條目)의 실천
김종락의 생애와 행력은 그의 행장(行狀)과 가장(家狀)을 바탕으로 기
술하기로 한다. 김종락은 병진년 7월 4일에 소산리(蘇山里) 집에서 태어
났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품성이 온아하였다. 5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어
린 나이로 제대로 상을 치르지 못한 것을 종신토록 애통하였다. 8세에
통감절요(通鑑節要)를 읽다가 ‘지황씨역각(地皇氏亦各)’의 ‘역(亦)’ 자에
이르자 묻기를, “천황씨(天皇氏)의 각(各) 자 위에는 ‘역(亦)’ 자가 없는데
여기에 ‘역(亦)’ 자를 넣은 것은 만팔천세(萬八千歲)를 거듭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자 아버지가 놀라서 기특하게 여기며 말하
기를, “우리 집안에 글이 끊어지지 않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
이다.”라고 하였다. 장성하자 천성이 배움을 좋아하여 독려하지 않아도 사서(四書)와 육경
(六經)을 외웠으며 이따금 글을 지어 고원(高遠)한 뜻을 드러내자 당시의
홍유석학(鴻儒碩學)들이 큰 인물이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기묘년(1819)에 부친상을 당하여 매우 슬퍼하였고 장례를 치름에 정성
을 다하였다. 상을 치르고 나서 류상조(柳相祚, 1763~1838)와 류이좌(柳
台佐, 1763~1837) 두 문하에서 수학하여 장려하고 허여함을 입어 학문
의 요체를 얻었다. 병신년(1836)에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사마시
에 낙방하자 벼슬살이에는 뜻을 두지 않고서 사는 집을 ‘삼소재(三素齋)’
라 하였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학서 류이좌가 지은 「삼소재기(三素齋記)」
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반맹견(班孟堅)의 부(賦)에 가로되 “흰지고! 너 태소여. 어찌 빛깔이 변하랴.”
라고 했다. 대개 스스로 홀로 학문을 좋아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음을 말함이니, 흰 것은 타고난 바탕이기에 혹시라도 변함이 없다. 대저 태극의 시초에 태소(太
素)가 있었는데 음양과 오행의 묘리는 만물의 번영과 쇠퇴에 따라 그 변화가
무궁하나 그 근원은 소(素)이다. 변두(籩豆)와 뇌작의 장식이며, 보불(黼黻)과 포
백(布帛)의 무늬도 쓰임이 지극히 번거로우나 근본을 궁구해 보면 소(素)이다. 그러므로 논어에서예는 시경의 말을 인용해 “흰 것으로 선을 두름이여.”했
고, 또 “희다고 하지 않겠는가!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라고 했으
니, 모두가 소를 본질로 하고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음을 이른 것이다. 내 알지
못하거니와 맹견의 독실한 학문으로도 과연 세속을 떠나 타고난 자질이 변하지
않았음이 어찌 학문으로 도를 깨달음에 말미암지 않았겠는가?
내 친구 상락김씨 사문(斯文) 김기언(金耆彦)은 글을 읽고 행의가 있는 집안
의 사람이다. 하루는 와서 청하기를 “거처하는 집에 현판이 없을 수 없으니 ‘삼
소(三素)’라고 써 걸어 경계와 반성에 부치고자 한다.”라고 하며, 그 뜻은 “소리
(素履)를 행하고 소찬(素餐)을 먹고 소산(素山)에 산다.”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나는 “아름답구나! 집의 이름이여!’라고 하였다. …(중략)… 거처함에 소산(素山)
을 저버리지 않았고 행동함에 소리(素履)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서 타고난 품
성의 아름다움이 희어 변하지 않으면 삼소(三素)로 이름을 지은 뜻이 여기에서
갖추어지리라 하였는데, 기언(耆彦)이 나의 말에 동의하기에 글로 써서 기문으
로 삼는다.3)
또 경신년(1860)에 상곡(上谷)의 남쪽에 몇 칸의 띠 집을 지어 ‘지곡서
당(芝谷書堂)’이라 명명하고자 날마다 이곳에 지내면서 사물로 인하여
3) 金宗洛, 三素齋集 권4 부록 <三素齋記>(柳台佐 撰), “班孟堅賦曰: 皓爾太
素, 曷可渝兮. 盖自言篤信好學, 不染流俗, 白爾天質, 無或渝變也. 夫太極之初, 便有太素, 二五之妙, 應萬物之榮悴, 其變無窮, 而原其初則素也. 籩豆罍爵之餙, 黼亞布帛之文, 其用至繁, 而推其本則素也. 是以≪魯論≫引≪詩≫之訓曰:素
以爲絢兮. 又曰:不曰白乎, 涅而不緇. 皆言其素之所以爲質, 而質之不可變也. 吾未知孟堅篤信之學, 果能流俗之外, 不渝天質, 而亦豈非因文而悟道者耶? 吾
友上洛金, 斯文耆彦, 讀書行誼家人也. 一日來請於曰: 所居之室不可無扁, 欲以
三素字書揭, 以寓警省之意, 曰行素履, 食素餐, 居素山. 余曰: ‘美哉, 堂之扁乎!’ …中略… 居不負於素山, 行不愧於素履, 天質之美, 美皓不渝, 三素扁堂之義, 於斯備矣. 耆彦以余言爲然, 書以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오직 서사(書史)로써 스스로 즐겼으며, 심경(心
經)⋅근사록(近思錄)⋅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의 책들도 두루 읽
었으며, 온오(蘊奧)한 곳이 있으면 한송재(寒松齋) 이정보(李禎輔, 1766~
1845)에게 나아가 질문하였다. 일찍이 치재(恥齋) 안윤시(安潤蓍)⋅탑와
(㙮窩) 이동일(李東一)⋅화봉(華峯) 이적유(李迪裕)⋅고창(古窓) 이천유(李
天裕)와 도의(道義)로써 강마(講劘)하였다. 유림에서 중요한 문장을 지어
야 할 경우엔 모두가 그에게 양보하였다. 김종락은 일찍이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보본(報本)
하는 길은 제사를 잘 받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양좌(謝良佐)가 ‘나의 정
신이 곧 조상의 정신이다.’라고 하였고, 제의(祭儀)에 ‘3일간 재개하면
그 할 바가 보인다. 재계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니 어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으며,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여덟 가지 조항을 써서
두 아들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곧 조상을 받들고 집안을 다스리
는 대개(大槪)이며, 이것이 한평생 행해야 할 대략(大略)이다.”라고 하였
다. 팔조목(八條目)에 대해서 하나하나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봉제사(奉祭祀)이다. 김종락은 제사를 간소화하는 차원에서
고비위(考妣位) 합설(合設)이 본래 집안에서 이미 정한 법이므로 변경하
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합설을 하더라도 선친의 기일이 되어 애통
하게 통곡하는 것이 무방하지만 초헌(初獻)을 한 다음 애통하게 통곡하는
것은 선친의 영혼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서 그는 삼헌(三獻)을 하고 사신(辭神)할 즈음에 곡하는 것이 도리어 편안
하고 정례(情禮)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김종락은 가정 형편에 맞게
제수를 마련하고 형편이 어려우면 제수의 간소화를 언급하였다. 그는 제
수(祭需)를 마련하는 것도 가산(家産)의 유무(有無)에 맞게 하고 심력을 지
나치게 쓰지 말며, 너무 가난한 집안은 세 가지 과일과 세 가지 탕과 다
섯 가지 포(脯) 중에 한 그릇으로 하고 제물은 닭 한 마리가 좋다고 하였
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4)
두 번째는 근요역(謹繇役)이다. 김종락의 부친 김도언(金道言)은 매양책머리에 쓰고 벽 위에 써서 한평생을 경계하였다. 내용인즉, “장사지내
고 제사를 지낼 적에 손님과 벗들의 문자를 모두 세금으로 받으려고 아
전이 나타나지 않도록 일찍 세금을 내는 것이 최상의 요결이다. 내 눈이
미치는 곳에 써 두어 경계하는 것이니 납세 기일을 당하면 힘을 다해서
기한 전에 납부해라.”이다. 그리고 항상 아들 김종락을 꾸짖기를 “네 성
품이 미루고 나약하여 관청의 욕이 가히 두려운지고.”라고 하였으며, 하
회리의 계축년 화변을 낱낱이 예증하고, 또한 「석호시(石壕詩)」와 「포사
자설(捕蛇者說)」을 외어서 거울삼게 하였다. 김종락은 부친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5)
세 번째는 손님 접대에 대한 조목으로 대빈객(待賓客)이다. 봉제사 접
빈객은 안동지방에서 오래전부터 중요시한 덕목이다. 문제는 평상시가
아닌 기일에 손님이 찾아왔을 때의 손님 접대에 대한 것이다. 김종락은
기일(忌日)에 손님이 찾아오면 기고(忌故)라고 말해서 손님을 난처하게
해서는 안 되며 저녁을 차려준 뒤에 혹 노비가 거처하는 곳이나 다른
집에 가서 편히 유숙하게 함이 옳다고 여겼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는
정침(正寢)에서 제사를 지내므로 만약 관계가 서먹한 사이가 아니라면
바깥사랑채에서 머물게 하는 것도 괜찮다고 하였으며 손님을 대할 적에
는 비록 자질이나 노복이라도 큰소리로 욕을 하거나 꾸짖어서는 안 되
고, 집안일에만 힘을 쏟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항상 손님 접대에 대한
만전(萬全)을 기하려고 하였다.6)
4) 金宗洛, 三素齋集 권2, 雜著 <書日用彝法 示二子民秀成秀> 「奉祭祀」 “考
妣位合設, 自是吾家已定規法, 不當改易. 若當親忌, 則雖哀哭無妨, 而初獻後, 一室號哭, 似非敬恭安神之道. 吾意則三獻辭神之祭, 哭而還安, 甚合情禮. …(중
략)… 辦供之道, 稱家有無, 不可過費心力. 而至貧之家, 稱家亦難, 三果三湯五
脯中各一器, 祭物則鷄一首似好. 極其精潔, 致其明禋, 何必過分營辦, 以快子孫
之心乎哉?”
5) 같은 글, 「謹繇役」, “先人每筆之於卷端, 書之於壁上, 一生用念處也. 故葬祭時, 賓朋文字, 皆以官稅早輸門不見吏, 爲揄揚之最旨. 吾所目逮而身警者, 及當還
稅之日, 極力預備, 前期徵納, 而常責不肖曰: ‘汝性因循頹懦, 官辱可怕.’ 以河上
縣里癸丑禍變, 枚擧而證之. 又以石壕詩捕蛇說誦之而鑑戒焉.”
네 번째는 말을 삼가는 신언어(愼言語)이다. 김종락은 위무공의 백규
시(白圭詩)의 실천을 강조하였고, 정이천(程伊川)의 사물잠(四勿箴) 가운
에 언잠(言箴)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말은 다른 나라와 우호(友好)적인 결
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잘못하면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므로 말을 함에
있어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여 매우 신중해야 함을 강조하였다.7)
다섯 번째는 집안에 거처할 때의 행실에 대해서 언급한 거가실(居家
室)이다. 김종락은 조부 김덕윤(金德胤)의 남긴 어록을 실천하고자 하였
다. 김덕윤은 입신(立身) 행기(行己)의 요결을 터득하여 명성이 자자하였
고 「유안록(遺安錄)」과 「중종설(重宗說)」을 지어 자손을 경계하였다. 그
가운데 한 대목을 살펴보면 “큰일이 아니면 헐값에 물건을 팔지 말고 농
사와 누에치기를 권하며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라.” 하였고, “의(義) 아닌
부귀와 분수 아닌 영화를 어찌 감히 망령되이 구하겠느냐? 인사(人事)를
닦아 천명을 기다릴 뿐이니라.” 하였다. 김종락은 고조부의 가르침을 실
천하였고 이를 자식들에게 권고하기도 하였다.8)
여섯 번째는 근송독(勤誦讀)이다. 김종락의 독서 방법은 많은 것을 탐
하고 얻기에 힘쓰지 말고 오직 마음으로 이해하여 자신의 글을 읽는 소
리와 함께 뒤섞여 읽은 뒤이야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이해할 수 있
다고 하였다.9) 그러면서 서애 류성룡이 맹자를 읽고 문장을 터득했고
자제들에게 송독(誦讀)에 마음을 두어야지 다독(多讀)을 귀하지 여기지
6) 같은 글, 「待賓客」, “忌日客來, 則不可遽以忌故卽卽宣言, 使之難處, 供夕之後, 或定奴幕, 或就他家, 以便留宿, 可也. 吾家正寢行事, 若非疏遠之人, 則宿之外
廳, 亦無妨. 且對客而雖子姪奴僕, 亦不可勵聲罵詈, 又不可專力家務.”
7) 같은 글, 「愼言語」, “古之君子, 以愼言語垂敎者, 尙矣. 如衛武公白圭詩, 程伊
川言箴, 又如出好興戎, 出爾反爾之訓, 丁寧告戒, 亦不必更陳芻狗.”
8) 같은 글, 「居家室」, “詩曰‘相在爾室 尙不愧于玉漏’, 盖家屋雖云自已家室, 而惰
慢之容, 不設於身體, 此古人言之祥矣. …中略… 高王考遺錄有曰‘非有大故, 無
作斥賣之計, 勸農桑勤誦讀’ 又曰‘不義之富貴, 非分之榮華, 亦何敢妄求? 修人
事待天命而已’ 此外余安有更言? 汝其誌之.”
9) 같은 글, 「勤誦讀」, “讀書之法 亦不可探多務得, 只將心意領會, 與吾讀聲, 渾淪
俱下, 然後微辭奧旨, 乃可通會分析.”
말라는 가르침을 인용하였다. 그는 또 주자의 독서법인 침잠해서 반복
하면 뜻이 저절로 이해한다는 것을 가지고 양약(良藥)을 장기로 복용하
다 보면 몸이 가벼워지고 편안해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독서
를 잘하면 천하의 복을 맛보게 되므로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허노재(許魯齋)의 독서법을 수용하고 있다. 또한 영천(永川)의 선비인 정
만양(鄭萬陽, 1664~1730)과 정규양(鄭葵陽, 1667~1732) 형제가 독서를
유산(遊山)과 같기에 엽등하지 말라는 말도 수용하였다. 정만양과 정규
양의 독서법은 퇴계 이황의 독서법과 같다. 일곱 번째는 계출입(誡出入)이다. 김종락은 선친의 가르침인 여럿이
함께 지낼 적엔 용모를 온화하면서도 엄정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였다. 그의 선친은 또 서애 류성룡과 병곡(屛谷) 권구(權渠, 1672~1749)의 가르
침을 재해석하여 ‘남들이 쉽게 친해지고 용모를 엄정하면 쉽게 범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을 아들인 김종락에게 훈계하였다. 그리하여 김종락은
평생동안 선친의 가르침을 실행하고자 하였다.10) 출입을 경계해야 한다
는 말은 공자의 “말이 충성되고 미쁘며 행실이 독실하고 공경스러우면
멀리 오랑캐 나라에서도 행할 수 있으리라.”라는 교훈과 맥락이 같다. 무릇 몸을 닦으면 집이 가지런해지고 집이 가지런해지면 나라가 다스려
져서 고을과 마을에 행해지게 됨을 말한 것이다. 출입하는 법은 보고 듣
는 것에 크게 관계되므로 향리나 가정이 아닌 멀리 외지나 타지에서 보
고 듣는 자는 더욱 경계해야 할 바인 것이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농상을 권하는 권농상(勸農桑)이다. 김종락은 사
서삼경(四書三經)이 모두 성리(聖理)의 학문이지만 이들 책에서 농상(農
桑)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을 발췌하여 적시하였다. 그가 발췌한 부분을
옮겨보면, 역경에는 “재물을 손상하지 않으며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않
는다” 하였고, 서경에서는 “첫째가 식(食)이요, 둘째가 부(富)이다.”라고
했으며, 대학에서는 “재물로써 몸을 일으킨다.”라고 했으며 논어에
10) 같은 글, 「誡出入」, “先人每語不肖曰 ‘群居之容 和而莊. 盖因西厓屛谷之訓而
釋之曰 ‘和則人易親 莊則人不犯’ 吾每平生用力於是, 而終未體訓."
서는 “재정을 절약하며 백성을 사랑한다.”라고 했으며, 맹자에서는 “오
무의 집 담 밑에 뽕나무를 심는다.”라고 했으며, 중용에서는 “백성의
삶을 후하게 한다.” 하였고, 시경에서는 농상에 관한 이야기가 300편
에 실려 있으니, 백성들에게 있어서 농상이 참으로 중차대한 것이라고
하였다.11)
김종락은 위의 팔조목(八條目)을 두 아들 민수(民秀)와 성수(成秀)에게
전하면서 실천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면서 팔조목은 높고 아득해서
행하기 어려운 일들이 아니고 가깝고 쉬워서 평상시에 행할 규범이니
평범하게 보지 말고 오직 몸에 배게 하고 마음에 새기라고 하면서 경계
하라고 신칙하였다.
Ⅲ. 충효열(忠孝烈)의 선양과 의식 세계
1. 충효열의 선양
김종락은 충신, 효자, 열녀, 의기(義妓) 등 충효열(忠孝烈)의 유교 이념
을 실천한 인물들에 대해 선양하였다. 한국의 중세봉건체제는 이른바
충⋅효⋅열이라는 세 가지 덕목에 의해 그 이념적 지향을 극명하게 드
러낸다. 이는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 사이의 관계에서 종속
적 입장에 있는 신(臣)⋅자(子)⋅부(婦)가 지녀야 할 마음 자세를 표지한
다. 충효열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한 민중역량에 힘입어 새로
운 시민의식으로 대체되어갔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봉건체제를 유지하
기 위한 전대의 덕목이나 가치를 강조하거나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는
일정한 역사적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먼저 충을 실천한 인물로 임
11) 같은 글, 「勸農桑」, “七書爲書, 何等聖理之學, 而農桑無所不在. 易曰不傷財不
害民, 書曰一曰食二曰富, 大學曰君子以財發身, 論語曰節用而愛民. 鄒書曰五
畝之宅樹墻下以桑, 中庸曰厚民之生, 詩之言農桑, 備載於三百篇, 農桑之於民, 豈不重且大乎? 聖賢垂敎之際, 每以厚生節用等語, 反覆精切如此.”
진왜란 당시 서애 류성룡의 막하에서 공을 세운 만휴당(晩休堂) 황귀성
(黃貴成, 1538~1605)의 공적을 높이 기린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평해 황공은 용사지변을 당하여 일찍이 서애 류선생의 막하에서 돕고 계획
한 경륜과 모의한 정략이 평원군(平原君)에 대한 이동(李同)이나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에 대한 남제운(南霽雲) 같을 뿐 아니었다. 바야흐로 왜적이 쳐들어와
팔도가 무너지는데 강산의 보루는 위기일발이었다. 이때 류선생은 나라의 중책
을 맡아서 재주 있는 이를 발탁하니 권원수(權元師)⋅이충무공(李忠武公) 같은
분은 수륙(水陸)의 대장이 되고, 신경진(辛慶普)⋅홍종록(洪宗祿) 같은 이는 군무
를 돕는 종사관으로 삼아 때에 따라 수용하되 각각 그 재주에 합당하게 하였다. 공(公) 같은 이는 이웃 마을에서 생장하여 일찍이 포부를 알므로 잠시도 영부
(營府)를 떠나지 않게 하였다. 무릇 급하거나 서서히 한 계획에서 장한 꾀와 기
이한 술책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명령에 따라 칡넝쿨을 걷어서 임진강에
부교(浮橋)를 급작스레 이루고, 파발을 보내어 성을 지키게 함에 정주(定州)의
창고가 온전하였다. 필마(匹馬)로 바쁘게 뛰고 척검(尺劍)으로 횡행하며 비록 백인(白刃)을 밟고
말가죽에 시체를 쌀지라도 이를 감수하고 원망이나 후회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시에서 “붓 던지고 활 잡으니 솜씨 또한 높은데, 대동강 물은 정히 도도(滔
滔)하구나. 훗날에 도성(都城) 아래 승전기를 세우면, 은하수 끌어다가 이 칼을
씻으려네”하고 읊었다. 선생이 보시고 장난스레 가로되 “그대는 장사(將士)라
하였는데 시인(詩人)도 겸했구려” 하였다. 이 어찌 다만 천금으로 칭찬하고 나
무람에 비기리오, 당일 성중(城中)의 충장(忠壯)한 선비들에게 간담이 서늘하고
머리끝이 곤두서는 격려가 아니었겠는가? …(중략)… 공은 평해인(平海人)이다. 휘는 귀성(貴成)이요 자(字)는 치장(致章)
이며 만휴(晩休)는 그의 호(號)이다. 빼어나고 얽매이지 않았으며 여력(膂力)이
남보다 뛰어났다. 선생과 임진년에 환난을 같이 하고 드디어 큰 공적을 이루었
다. 아, 공의 지용(智勇)과 담략(膽略)으로 아무리 포부가 있다고 하더라도 선생
의 지감(知鑑)이 보통을 넘지 않았던들 어찌 이렇듯 선발되었으랴? 옛날 태사공
(太史公)이 백이전(伯夷傳)을 서술하고 말하되. “선비가 청운지사를 만나지 못하
면 어찌 후세에 이름을 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나 또한 만휴공에 대
해서 이렇게 말하도다.12)
12) 金宗洛, 三素齋集 권3, <書晩休堂黃公記事後>, “平海黃公, 當龍蛇之變, 嘗
김종락은 황귀성(黃貴成, 1538~1605)이 지은 임진년 기사(記事)가 불
에 타서 남은 부분이 적어서 당시의 사적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적혀진 임진년의 기록이 징비록과는 상략(詳略)의 차이가 있지만 가끔
은 토한 기운이 무지개를 이루고 몰아치는 바람이 물결을 깨뜨리는 형
세가 있다고 하면서 국난의 위기에 처해 살신성인한 애국충정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황귀성의 재능을 알아본 류성룡의 지감(知鑑)
에 대해서 높이 칭송하면서 이를 말의 모양만 보고 천리마의 능력을 지
녔음을 알아보는 백락(伯樂)에 견주기도 하였다. 다음은 효자 장시영(蔣時榮)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의성 비안(比
安)에 살았던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다. 아! 비안(比安) 송곡리(松谷里)의 사인(土人) 장치영(蔣致榮)의 고조(高祖) 장시
영(蔣時榮)은 참 효자였다. 공은 곧 조선조에 판서를 지낸 장성길(蔣成吉)의 10
세손이다. 판서공은 덕업(徳業)과 문장으로 국사(國史)에 소명하게 등재되어 있
으니 반드시 양자운(揚子雲)의 붓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지초(芝草)와 예천(醴泉)
에 근원하여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효자공의 탁이(卓異)한 행실에 대해서 일
일이 다 들 수는 없지만, 6세 때에 대추를 품속에 넣고 가서 어버이에게 드려
이웃 노인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였으며, 10세 때에 시탕(侍湯)하여 마침내 신인
(神人)의 도움을 얻었다가 상고를 당하자 장례를 지냈으며, 12세의 어린 나이로
날마다 세 번씩 성묘하기를 춥거나 덥거나 비가 와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이 어
爲西厓柳先生佐幕, 其贊畫經綸, 協謀定畧, 不啻如平原之李同, 巡遠之霽雲. 而
方其漆齒長驅, 八域瓦解, 江淮堡障, 危如一髮. 時柳先生爲國重任, 薦擢才俊, 如權元帥、李忠武爲水陸大將, 如辛慶晉、洪宗祿爲贊軍從事, 應時需用, 各當
其才. 如公生長鄰里, 夙知素畜, 暫不離於營府之間, 凡有緩急, 與定籌畫, 而壯
猷奇策, 多出其手. 倩命採葛, 臨津之浮橋忽成;急馬守城, 定州之倉穀賴完. 匹
騎倉黄, 尺劒橫行, 雖蹈白刃, 暴馬革, 直受之而無怨悔. 故其詩曰: ‘投筆操弓手
亦高, 大同江水正滔滔. 他時露布王城下, 欲挽銀河洗此刀’ 先生戯之曰: ‘君可謂
壯士而兼詩人. 此豈但千金之褒貶, 而當日城中忠壯之士, 想膽青髮竪而激勵者
矣’ …(중략)… 公平海人 諱貴成 字致章 晩休其號也 英爽不羈 膂力過人 先生
同患難於壬辰 遂成大績 噫 公之智勇膽畧 雖有素抱者 而若非先生識人之鑑 逈
出尋常 豈能如是薦拔哉 昔太史公敍伯夷傅曰 士非附青雲之士 烏得施於後世
哉 吾於晚休公
찌 10여 세 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아! 사람이 부모가 없겠으며, 사람이 어찌 12세를 살지 않으리오마는 몇 가지
의 일은 하늘이 낸 효자로 볼 수가 있다. 더욱 신기한 감동을 주는 것은 모부인
(母夫人) 권씨(權氏)가 일찍이 기이한 병에 걸려 여러 달을 자리에 누워있었는데
하루는 풋감을 먹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때가 2월이어서 감잎이 겨우 싹트려
하는데 어찌 가히 구할 수 있는 시기인가? 효자는 하늘에 부르짖고 북두성에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엎드려 축수하기를, “하늘이여! 하늘이여! 감 한 개를 내
려주시어 앓으시는 어머님의 소원을 풀게 하소서” 하였다. 이튿날 새벽 집 뒤
감나무에 갑작스레 열매가 맺어 크기가 공만 하였다. 이를 따 와서 어머니께 바
쳐서 큰 차도를 보았다. 권씨는 또 풍(風)으로 머리를 앓았는데 의원이 비둘기
탕이 좋다고 하였는데 마침 비둘기 한 쌍이 집안에 날아왔다. 이는 맹종(孟宗)
이 눈 속에 죽순(竹筍)을 얻은 것과 왕상(王祥)이 참새를 구해 드린 것과 같은
기적으로써 지성(至誠)의 극치(極致)이도다. 세상 만물을 감동시키는 것은 모두
가 하늘이로다. 시묘(侍墓) 날에는 눈물이 땅에 떨어지니 풀이 다 마르고 곡하
며 절할 즈음에 백조(白鳥)가 날아왔도다. 당시 명석(名碩)들의 포양(褒揚)하는
글과 감사(監司)의 가상(嘉尙)하는 제사(題辭)가 수레에 넘쳐 소가 땀을 낼 만큼
많았으리라 생각되지만, 화재를 당해 기(杞) 나라와 송(宋)나라처럼 문헌이 없어
백 년이 지나도록 매몰되었도다. 돌덩이에 묻혀 있는 구슬과 굴속에 감추어진
봉(鳳)에는 예부터 슬픔을 일으키는 탄식이 있도다. 세상에 한창려가 없었다면
누가 능히 동생(董生)의 행적을 엮었으며 석수도(石守道)가 없었던들 누가 다시
진효(陳孝)의 행적을 기록해서 세상에 길이 전하게 하였으리오?
13)
13) 金宗洛, 三素齋集 권3, <書蔣孝子實錄後>, “噫噫, 比安松谷里士人致榮高祖
諱時榮, 眞孝子也. 公卽我朝判書諱成吉十世孫也. 判書公, 以德業文章, 昭載國
乘, 不必待子雲之筆而芝醴根源有自來矣. 孝子公卓異之行不盡枚擧, 而六歲懷
棗, 旣感隣翁之心, 十歲侍湯, 竟得神人之佑. 及其當喪窆襄, 以十二歲弱齡, 逐
日三省于墓所, 雖祈寒暑雨, 未嘗或廢, 此豈十餘歲童子所可爲耶? 嗚呼! 人孰無
父母, 人孰不經十二歲時乎? 而數者足以觀出天之孝, 而尤有所神異而致感者, 母夫人權氏, 嘗遘奇疾, 累月床褥, 所願者靑柿, 而時當二月, 柿葉將萌, 則此豈
可求之時乎? 孝子呼天, 稽顙北辰伏地祝手曰: ‘天乎天乎! 願降一柿, 以副病母
之願也.’ 翌日曉頭, 家後柿木, 忽然結實大如毬也, 摘而獻母, 竟得差效. 權氏又
患風頭, 醫云: ‘正鳩湯爲良劑’. 適有靑鳩一雙飛入其幕. 此與孟氏之雪筍, 王祥
之黃雀, 同一奇蹟, 而至誠之至, 必有感物之致者, 皆天也. 及夫廬墓之日, 涕淚
落地, 靑草盡枯, 拜哭之際, 白鳥來翔, 當時名碩褒揚之筆, 營府嘉尙之題, 想應
溢車汗牛, 而遭鬱攸之變, 杞宋無徵, 居然百年之間, 寥寥無聞. 在璞之珠, 藏穴
김종락은 6세, 10세,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효를 실천하여 평생을 부
모를 위해 효를 행동으로 옮긴 장시영(蔣時榮)의 효행을 중국의 왕상(王
祥)과 맹종(孟宗)의 효행을 견주었다. 장시영의 효행에 대하여 당시의 명
현석학들이 포양하려는 글이 있었을 터이고 경상감사가 가상하는 글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문헌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장시영의 효행을 천양하여 포상하려고 하였다. 그는 또 안동 풍산 마애리에 박씨(朴氏)의 효행을 기록하여 안동부에
알리기도 하였다. 박씨는 권충적(權忠迪)의 아내로 남편이 병에 걸려 죽
자 시부모 봉양과 어린 자식 양육을 위해 순종하지 못하다가 남편의 3
년상을 마치고 나서 남몰래 침실에서 스스로 자결하였다. 그녀가 생각
했던 남편에 대한 의리는 살아서 같은 방에서 함께 지냈으니 죽어서 같
은 무덤에 묻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녀의 1차 자결은 집안사람이 급히
구제한 탓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날 밤 새벽에 깊
은 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14) 현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열행(烈
行)이지만 박씨는 그녀의 행동이 곧 아내로서의 남편에 대한 의리를 지
키는 것으로 여겼기에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김종락은 이런 박씨의 열
행을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의기로운 행동으로 인식하였기에 상부 기관에
올렸던 것이다. 김종락은 이적(異蹟)을 정표(旌表)하는 것은 조정의 높은
은전이고 숨겨진 일을 천양하는 것은 목민관의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한편 김종락은 진주 촉석루를 탐방했다가 누각 앞의 의암에 올라 오
열하듯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논개의 비장한 충혼을 달랬다.
之鳳, 自古有興嗟之歎, 而世無韓昌黎, 誰能作董生之行, 又無石守道, 誰復錄陳
孝之蹟, 使之不朽於世耶?”
14) 金宗洛, 三素齋集 권2, <爲朴烈婦呈本官文>, “今此本面磨崖里, 有權氏妻朴
氏烈者, 其夫忠迪遘癘不起, 朴氏爲老舅在, 不見有悲遑泣慽之狀, 以權辭慰悅
之, 又爲幼穉撫恤之. 每中夜撫枕咄咄曰, ‘夫死何生? 生其同室, 死當同穴, 女子
之義也.’ 及其初終已畢, 自縊於寢房, 爲家人之急救, 竟不售計. 其日夜二更, 畢
竟投死於不測之深淵. 使善水者連船而網取之, 衣裳不變, 顔貌如常. 此癸丑六
月日也
城門立馬問長洲 성문에 말을 멈추고 긴 모래톱에서 묻나니
何事澄江咽不流 무슨 일로 맑은 강물 오열하며 흐르지 않는가
四郭雲橫環陸海 사방의 빗긴 구름 육지와 바다 빙 둘렀고
一盃風凜壯高樓 한 가닥 찬 바람은 높은 누각에 씩씩하네
東溟赤日忠魂在 동해의 붉은 태양에는 충혼이 서려 있고
南斗靑虹劍氣愁 남쪽 하늘 푸른 무지개엔 검기가 슬프구나
野老梢工皆俗輩 농부들과 뱃사공은 모두가 속된 무리
無心看我等閒遊15) 무심코 한가로이 노는 우리를 쳐다보네
김종락은 진주성 성문 밖에 말을 세워 두고서 의암이 있는 곳으로 가
서 진주 남강 물이 왜 오열하며 흐리지 않는가를 물었다. 그렇지만 이내
스스로 던진 물음에 스스로 답을 한다. 왜냐면 강물에는 1592년 임진왜
란 당시 기생의 몸으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투신한 의기 주논개(朱
論介)의 충혼이 서려 있기 때문입니다. 김종락은 또 촉석루 옆 논개의 사당에 들러 임진왜란 당시 미천한 신
분임에도 나라를 위해 왜장 게아무라 로코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함
께 강물에 몸을 던진 의기로운 행동을 천양하였다. 堂堂烈氣義巖祠 의기사엔 열렬한 기운 당당한데
抱賊當年入水初 당시 적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네
七十嶠州無將士 어찌 영남 칠십 고을에는 장사 하나 없었던가
南來羞讀壬辰書16) 부끄럽게도 남쪽에 와서야 임진년의 글을 읽구나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진주(晉州)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산화한 일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회자되
고 있다. 구전되어오던 논개의 충절이 문헌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에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으로
추정된다.
15) 金宗洛, 三素齋集 권1, <登晉州矗石樓次板上韻>.
16) 金宗洛, 三素齋集 권1, <觀義妓祠>
논개는 진주의 관기이다. 만력 계사년(1593, 선조26)에 김천일이 거느리는 창
의군이 진주성을 거점으로 왜적과 항전하였는데 성이 함락되고 군대가 패하게
되자 백성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자 논개는 곱게 단장하고 화려한 의복
을 입은 채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앞에 서 있었으니, 그 아래는 만 길 낭떠
러지로 곧장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왜군들이 논개를 보고 기뻐하였
으나 모두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는데, 한 왜장이 몸을 빼 곧장 앞으로 나
왔다. 논개가 웃으면서 맞이하여 마침내 그 왜장을 껴안고 곧바로 깊은 강물 속
으로 뛰어들었다. 저 관기는 음란한 창기인데도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
럼 여기고 왜적에게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그 또한 성군의 교화를 입은 존
재로서 차마 나라를 배반하고 적을 따르지 않은 것은 다름 아니라 충성에서 비
롯된 것일 뿐이다. 아, 슬프도다!17)
유몽인에 의해서 기록화된 논개의 충절은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 1589~1670)가 1624년 영남 관찰사로 부임해서 읊은 「남정부(南征賦)」의 한
대목에도 남겨졌고,18)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이 1651년(효종2년) 10월에
진주에 와서 지은 <의암기(義巖記)>에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19)
한편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6년(영조2)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건의하였다.20) 최진한의 건의는 이후 국가가 논개의 순국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 호칭이 되
는 계기가 되었고, 논개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 년
뒤, 의혼(義魂)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1740년(영조
16)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정려가 내려지고, ‘일대장
17) 柳夢寅, 於于野談 권1, <孝烈篇> 9장, “論介者, 晉州官妓也. 當萬曆癸巳之
歲, 金千鎰倡義之士, 入於晉州以抗倭. 及城陷軍散, 人民俱死, 論介凝粧靚服, 立于矗石樓下峭巖之上, 其下萬丈, 直入江心. 羣倭見而悅之, 莫敢近. 獨一倭挺
然直進, 論介笑而迎之, 倭將以誘而引之, 論介遂抱持其倭, 直投于潭, 俱死. 壬
辰之亂, 官妓之遇賊不見辱而死者, 不可勝記, 非止一論介, 而多失其名. 彼官妓
皆淫娼也, 不可以貞烈稱, 而視死如歸, 不汚於賊, 渠亦聖化中一物, 不忍背國從
賊, 無他, 忠而已. 倚歟哀哉!” 18) 李敏求, 東洲集 권5, <南征賦>, “血遺咀於矗石兮, 天陰陰而鬼怒.”
19) 吳斗寅, 陽谷集 권3, <義巖記> 참조. 20) 승정원일기 영조 2년 병오년(1726) 5월 16일조 상소문 참조.
강 천추의열(一帶長江千秋義烈)’ 여덟 글자가 새겨지기도 하였으며,21) 급
기야 의기사(義妓祠)가 건립하는 숙원을 이루었다. 이후 의기사(義妓祠)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에 의해
의열이 높이 기려졌고,22)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 의해
서 기록으로 남겨지기도 하였으며,23) 구한말의 학자였던 창강(滄江) 김
택영(金澤榮, 1850~1927)은 의기가(義妓歌)로 승화하기도 하였다.24)
2. 의식 세계와 학문 활동
김종락은 29세 때인 1824년(순조 24)에 서애 류성룡을 문묘에 배향해
야 한다는 「승무소(陞廡疏)」를 지어 서애 류성룡이 퇴계 이황의 적전(嫡
傳)으로 도학적인 학문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빼어난 인물이고, 임진왜란
당시 일촉즉발의 국난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명재상이며, 스승인
이황이 칭찬하였고 국왕 선조(宣祖) 역시 훌륭한 군자로 인정한 점 등을
근거로 문묘에 배향됨에 필요충분 요건을 겸비한 국가적 인재라서 점에
서 문묘 배향의 타당성과 적합성을 주장하였다.25) 또 60세인 1855년(철
종 6)에는 법전과 예의에 관한 「전례소(典禮疏)」를 지어 사도세자의 왕
호 추존을 청하며 신자(臣子)의 대의를 폈으며, 62세 때인 1857년(철종 8)
에는 환곡(還穀)의 폐해를 지적하는 「환폐소(還弊疏)」를 짓기도 하였다. 그의 이런 글들은 그의 의식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글
21) 姜必孝, 海恩遺稿 권14, <四遊錄>下, “庚申秋, 兵使南德夏狀聞, 特命旌閭. 辛酉春, 刻義巖二字於巖面, 又刻一帶長江千秋義烈八大字.”
22) 蔡濟恭, 樊巖集 권3 <題矗石樓>, “遺廟泠風神鬼立, 畫船晴日綺羅明.”
23) 丁若鏞, 茶山詩文集 권13, <晉州義妓祠記>, “昔倭寇之陷晉州也, 有妓義娘
者, 引倭酋對舞於江中之石, 舞方合抱之, 投淵而死, 此其祠也. 嗟乎! 豈不烈烈
賢婦人哉? 今夫一酋之殲, 不足以雪三士之恥, 雖然城之方陷也, 鄰藩擁兵而不
救, 朝廷忌功而樂敗. 使金湯之固, 失之窮寇之手, 忠臣志士之憤歎恚恨, 未有甚
於斯役者矣, 而眇小一女子, 乃能殲賊酋以報國, 則君臣之義.”
24) 金澤榮, 韶濩堂集 권2, <義妓歌> 3首 참조. 25) 金宗洛, 三素齋集 권1 <陳請西厓文忠公陞廡疏> 참조
로, 눈여겨볼 대목이다. 삼가 엎드려 생각하건대, 본읍에 폐단이 세 가지 있으니 군포(軍布), 전결(田
結), 환정(還政)입니다. …(중략)… 군정(軍政) 한 조목은 과연 한 나라에 관계되
며 여염집의 소란과 화기(和氣)의 손상이 모두가 군정으로 말미암습니다. 갓난
아기를 안고 가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과 시신을 싣고 가서 하소연하는 이
들이 관청 뜰에 가득한데 이 어찌 백성과 장정이 부족해서이겠습니까? 호화롭
게 사는 부자가 뇌물을 바쳐 군역 면제를 꾀하고 간특하고 교활한 무리가 아전
과 결탁하여 자신의 이름을 지우며, 혹은 여러 각청(各廳)에 몸을 숨기고 혹은
역리(驛吏)의 명부에 기록하며, 혹은 또 아전의 무덤 아래에 몸을 의탁하고, 심
지어는 온 동네가 군역이 면제되도록 인구를 계산하여 뇌물을 바치는 자까지
생겼습니다. 장정은 점점 줄고 도망가거나 사망한 자가 속출하여 어쩔 수 없이
사가(私家)의 노비가 군역에 걸려들고 반족(班族)이 횡침(橫侵)하며, 한 몸으로
두 가지 일을 하는 자도 있고 남의 이름에 잘못 군역을 지는 자도 있습니다. …
(중략)… 전결(田結)의 폐단은 백성을 좀먹는 극심한 근원입니다. 근래에 아전들
이 인연을 따라 간사하게 굴고 사사로이 창고를 짓고 해마다 수확량을 조사하
며 개간한 곳을 따라 물을 대어도 나라의 세금은 더해지지 않고 관청의 총수익
도 늘어나지 않습니다. 수해가 나거나 가뭄이 든 해나 흉년이 든 해에는 재액을
따라 보상해준다. 이때부터 나라에 정해진 법이 있었건만, 재난을 보상할 때면
아전들이 제멋대로 농간해서 나라에서 감세(減稅)해 주어도 백성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감영에는 재난을 기록하여도 백성은 면세의 혜택을 받지 못합니
다. 경작하지 않은 땅에도 세금을 내는 원통함과 짐을 배로 부풀려서 내게 하는
환난은 본디 저들의 잔재주입니다. 가령 십결(十結)이 감영에서 조사한 수량이
라면 저들이 부풀려서 매기는 것은 몇십 결인지 모르고, 백결이 감영에 보고해
야 하는 수량이라면 저들이 몰래 매기는 것은 몇백 결인지 모릅니다. …(중
략)… 삼정(三政) 가운데 환정(還政)의 폐단이 더욱 뼈에 사무치는 원한입니다. 곡식을 팔고 사는 법은 곡식을 판 뒤에 사들이며 준 뒤에 받는 것입니다. 그래
서 환(還)이라 명명함은 백성에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대저 아전의 폐단은 환
정의 폐단보다도 백배나 더하여 이름도 모르는 곡색(穀色)이 해마다 늘어나서
지금은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라에 바치는 원세(原稅) 이외에 천방곡
(川防穀), 기부곡(記付穀), 신자곡(信資穀), 부류곡(府留穀), 의승곡(義僧穀)이니 하
는 것들이 있어서 어지러이 섞여 나와서 곡색(穀色)에 따라 독촉해서 곡식을 거
둬들이니 민생이 날로 오그라듭니다. 금년에 땅 한 뙈기를 팔면 내년에는 소 한
마리를 팔아야 하고 결국에는 솥을 팔고 집을 팔아도 동징(洞徵)을 하고 족징
(族徵)을 하여 한 마을이 텅 비게 되니 어쩌면 이리도 괴이합니까. 백성의 생계
가 날로 물과 불 속으로 들어가 점점 떠나고 흩어지게 됩니다.26)
조선 후기 삼정(三政)의 문란은 국가적 혼란을 초래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삼정이란 국가재정의 주류를 이루는 전정(田政)·군정(軍政)·환
정(還政)인데, 전정(田政)은 토지에 매기는 조세이고, 군정(軍政)은 군역
세이고 환정(還政)은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쌀을 꾸어주고 가을에 싼 이
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빈민구휼 제도였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에서 삼정의 문란을 자세하게 밝혀 놓았고 「조승문(弔蠅文)」 등 사회시
를 통하여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상과 수탈을 자행한 관리들을 신랄하게
고발하기도 하였다. 특히 1862년에 일어난 임술민란은 19세기 조선사회
의 각종 모순으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일시에 폭발하면서 발생하였다. 개화사상가인 추금(秋琴) 강위(姜瑋, 1820~1884)는 「응지삼정소(應旨三政
疏)」를 올려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활동에 방향을 제시하였다.27) 이
26) 金宗洛, 三素齋集 권1 <還幣疏>, “竊伏念 本邑之痼弊 有三焉 軍布也田結
也還政也 …(中略)… 軍政一款, 果是一國之關係, 而閭閻之紛騷, 和氣之損傷, 皆由於此. 抱襁之寃, 載尸之訴, 充滿於官庭, 此豈民丁之不足而然耶? 豪富之
民, 納賂而圖免, 奸猾之類, 締吏而割名. 或庇身於各廳, 或冒錄於驛案, 或托跡
於胥吏之墓下, 以至有全洞契防者, 計口納賂者, 漸致丁額空虛, 逃故相因, 末乃
有私奴之罹入, 班族之橫侵, 有一身兩役者, 有虛名誤出者 …(中略)… 田結之弊, 極爲蠹民之根本. 近來該吏輩, 因緣行奸, 看作私帑, 年年踏驗, 隨墾起川, 而國
納無加, 官總不增. 水旱之年, 豐歉之歲, 推災懸頉, 自是有國之常典, 而俵災之
際, 任意操弄. 國有減稅, 而民不蒙惠, 營有災記, 而民不受澤, 白地徵稅之寃, 疊卜加出之患, 自是渠輩之伎倆, 假令十結, 爲營勘之數, 渠之剩結, 不知爲幾十
結, 百結爲營報之數, 則渠之隱結, 又未知幾百結 …(中略)… 三政之中 還弊尤
爲切骨之寃, 糶糴之法, 糶之後糴, 授之後捧, 故以還爲名者, 以其還於民也. 大
抵吏弊, 百倍於還弊, 無名穀色, 年增歲加, 至于今日而極矣. 國還元總之外, 有
川防穀記付穀信資穀府留穀義僧穀, 紛然雜出, 逐色而督捧, 民生日縮, 今年賣
一土, 明年賣一牛, 至於賣鼎賣屋, 而洞徵族徵, 一村空虛, 何怪. 夫民生之日入
於水火, 而漸至於離散也耶.”
27) 임성수(2016), 「임술민란기 秋琴 姜瑋의 현실인식과 三政改革論」, 조선시대
사학보 79집, 조선시대사학회, 291쪽 참조
렇듯 삼정에 대한 대책을 위한 지식인이라면 관심을 두었을 성싶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소를 올리거나 문장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김
종락 역시 안동의 지식인으로서 안동의 병폐였던 삼정의 문제점을 예리
하게 지적하였고, 그 해결방안까지 제시하는 사회의 감시자이자 재판관
이었다는 점에서 여타 지식인들과 차별되는 특징점이었다.28) 김종락은
삼정의 폐해의 진상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명징한 논리로 진언하였다. 그러면서 그가 삼정의 폐단이 발생하게 된 근원은 아전에게 있었음을
진단하고 이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 급선무임을 설파하고 있다. 이 상
소가 비록 조정에까지 전달되지 못했지만, 안동지역 선비로서 사회적
부패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려 한 실천적 행동은 흔히 볼 수 있는 것
이 아니었다. 이는 사회적 문제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해결하려는 문제
의식에서 비롯된 소산임은 물론이다. 주지하다시피 병산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김
종락은 병산서원의 사액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김종락은 병산서원
사액의 일로 상주 도남서원에 모였다. 立馬西風喚蓐收 말을 세우니 가을바람이 가을 신을 부르는데
霪霖何事此遲留 장마가 무슨 일로 이 행보를 지체하게 하나
雲藏月色侵危壁 구름 속에 숨은 달빛이 높은 벽에 비치고
雨打江聲入古樓 비가 치는 강물 소리가 오랜 누각에 들리네
黌舍聯翩眞可樂 서원에서 함께 하니 진정 즐거워할 만하고
天門消息更寬愁 대궐 소식에 다시금 근심이 누그러지네
晴虹白日歸時路 무지개 드리운 대낮에 길을 되돌아가면서
珍重恩啣奉若球29) 진중한 임금 은혜를 보배처럼 받드네
도남서원에 머물던 김종락 일행은 이곳 도남서원에서 병산서원 사액
28) 삼정에 대한 영남 지식인들의 대응 방안과 비교 연구는 다른 지면을 통해 구
체적인 결과물을 도출하기로 한다. 29) 金宗洛, 三素齋集 卷1, <赴屛院請額疏, 會于道南院, 滯雨觀漲, 次姜寢郞(長
欽)韻>
소식을 듣게 된다. 그래서 임금의 은혜를 감사해하면서 병산서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려는 차에 장마로 인하여 발걸음이 지체되고 있다. 김
종락 등의 노력으로 사액된 병산서원은 1868(고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
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김종락은 또 류성룡을 배향한 병산서원에서 강학의 책임자 역할을 맡
기도 하였는데, 그의 시문 곳곳에 강학을 바탕으로 학문적 토론을 심화
하였음을 드러나고 있다. 半夜淸齋燭影深 맑은 집 한밤중에 촛불 더욱 돋우고
淸眸相對吐眞襟 젊은이 마주 앉아 진심을 토로하네
偏憐江上遙遙艦 더욱 좋은 건, 멀리 강 위의 배가
利涉風波一樣心30) 내 마음처럼 풍파를 잘 헤쳐감이네
김종락은 병산서원에서 친구 권장(權璋, 1802~1874)31)과 함께 학문적 토
론을 벌이면서 19세기 병산서원의 강학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병산
서원의 강학 활동은 17세기에는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백여 년 이상 침체에
빠져있었는데, 1781년에 외재(畏齋) 류종춘(柳宗春, 1720~1795)이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이때 강학한 서목은 대학이었다.32)
김종락은 병산서원 강학 책임자로 발탁되어 지역의 선비들에게 병산
서원에 함께 모여 강학하자는 회유문(回諭文)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때 소학(小學)을 먼저 강하고 오경(五經) 심경(心經) 근사록(近思
錄) 순으로 강학하고 토론하자는 제안을 하는 등 강학 활동을 지속적으
로 유지하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33)
30) 金宗洛, 三素齋集 卷1, <屛院會中, 與權章玉(璋), 相酬> 2수 중 둘째 수. 31) 권장은 수곡(樹谷) 권보(權䋠)의 증손으로 자가 장옥(章玉), 호가 야유당(野遺
堂)이다. 안동 풍천 가일 마을에 살았던 그는 국량이 크고 굳세며 성품이 효
성스럽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환곡의 폐해로 고을 백성들이 고통을 겪자, 류
도종(柳道宗)·김용락(金龍洛) 등과 함께 힘껏 구제하였다. 32) 박종배(2021), 「18세기 말 병산서원의 강학 활동과 그 의의」, 대동한문학 67
집, 대동한문학회, 209쪽 참조.
Ⅳ. 맺음말
김종락은 평소 삼소(三素)를 실천하며 당대 안동 서부권역의 대표 지
식인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향내 출신이자 지역의 선구적 학
덕을 겸비한 류성룡의 서애집, 권구의 병곡집, 이상진의 하지집의
간행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이끌었고, 병산서원 강학 책임자라는 중임
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향내와 지역적 입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또 그는 서애 류성룡과 병곡 권구 등이 남긴 교훈을 향내의 젊은 유생
들에게 학업을 권장하고 조언함으로써 쇠미해진 지역 학풍(學風)을 불러
일으키고자 했다. 이는 그의 애향정신의 발로이자 평생 지향했던 삶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는 또 지식인으로서 국가적 이념이었던 충효열을
실천한 인물들에 대해서 포숭(褒崇)하고 선양하려는 적극적인 행보를 펼
치기도 하였다. 비록 인물사에서나 지역에서조차도 널리 알려지지 못한
인물이긴 하나, 그의 삶의 족적이 녹아 있는 그의 문집 곳곳에는 그의
학문적 역량과 차별적 의식이 내재하고 있다. 삼소는 속세에 물들이지
않고 타고난 자질을 유지하면서 한결같이 학문에만 전념한 김종락만이
지닌 실천적 삶이었고, 팔조목의 실천은 여타 지식인들과는 뚜렷이 구
별되는 김종락만의 의식구현이었다. 특히 삼정에 대한 언급은 사회적인
문제를 넘어선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매우 시급한 문제에 대해서 수
수방관하지 않고 삼정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차별된 지식인의 면모였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지역학의 외연을 넓히
는 측면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으리라 여겨진다.34)
33) 金宗洛, 三素齋集 卷2, 「屛院講學時回諭文」, “以今月十二日, 齊會屛院, 先講
小學, 次第就五經心近等書, 以爲自小成大之地. 未知僉意果出於印可否耶? 玆
以奉告望須以右日齊會講討之地, 幸甚.”
* 논문투고일: 2023.03.22 / 심사개시일: 2023.03.30 / 게재확정일: 2023.04.21
<참고문헌>
1. 원전자료
姜必孝, 海恩遺稿 金澤榮, 韶濩堂集 金養根, 東埜集 金宗洛, 三素齋集 吳斗寅, 陽谷集 柳夢寅, 於于野談 李敏求, 東洲集 丁若鏞, 茶山詩文集 鄭德善 編, 忠烈實錄 蔡濟恭, 樊巖集
2. 논문자료
박종배(2021), 「18세기 말 병산서원의 강학 활동과 그 의의」, 대동한문학
67집, 대동한문학회, 209쪽. 임성수(2016), 「임술민란기 秋琴 姜瑋의 현실인식과 三政改革論」, 조선시대
사학보 79집, 조선시대사학회,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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