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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안동김씨 김순(金恂)계의 정치활동과 성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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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작성일24-06-03 21:15 조회49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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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안동김씨 김순(金恂)계의 정치활동과 성격
 
고려후기 安東金氏 金恂系의 정치활동과 성격
 
2019년 8월 고려대학교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정현
 
論 文 槪 要
본 논문은 고려후기 성장한 정치세력의 형성과 변화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金恂系를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14세기 고려가 원에 직간접적으로 간섭을 받게 되면서 지배층은 새로이 재편되었다. 이때 김순계 인물들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정치활동을 이어나가고 인적관계망을 형성하여 꾸준히 높은 위상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金方慶의 막내아들인 김순은 고려 내에서 활동한 고려 내부 관인의 단면을 보여주기에 의미가 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忠宣王이 세자인 시절부터 世子府관직을 역임하며, 1298년(충선왕 즉위) 당시 충선왕 개혁세력으로 활동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忠烈王이 복위된 이후에도 등용되어 정계활동을 이어갔으며, 이듬해 韓希愈 무고사건이 벌어지고 1300년 김방경마저 사망하면서 고향인 安東으로 내려가 한거하게 되었다.
또한 급변하는 麗-元관계 속에서 김순계 인물들이 당시 세족들과의 통혼권을 형성하여 권세를 유지하였음이 주목된다. 김순은 孔巖許氏 許珙의 딸과 혼인해 세족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하였으며, 이후 그의 자손들은 利川申氏, 淸州韓氏, 南陽洪氏, 安東權氏, 慶州李氏 등 당시 세족들과의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 중 괄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딸들의 혼인이었으며, 남양홍씨 洪奎와의 중첩된 통혼권을 형성하여 고려 내부에서의 정치적 위상을 향상시키고 원 조정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였다.
이후 원과의 관계가 심화되면서 당시 지배층들은 관직 및 인적관계망을 바탕으로 원과의 관련성을 강조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순계 인물들 또한 선대에 형성된 견고한 인적관계망을 바탕으로 원의 지배층과 교류하였고 그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갈 수 있었다. 특히, 김영돈은 원에 자주 왕래하며 別里哥不花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整治都監 判事를 역임하며 忠穆王의 개혁정치를 수행해 나갔다. 恭愍王代에는 2대 金永煦를 필두로 하여 3대 金縝, 4대 金士安, 金士衡 등이 활동하였다. 김영후는 書筵에서 공민왕의 의견에 반대할 정도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원로대신이었으며, 김진은 辛旽의 당여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김사형은 朱子性理學을 정치에 적용하고자 하는 新進士類로서 李成桂, 趙浚, 鄭道傳 등과 어울리며 여말 주요 사건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조선건국에 참여하며 1등개국공신이 되었다.
이상으로 김순계 인물들은 왕실과의 통혼권을 형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지속적인 개혁활동과 여타 세족들과의 중첩된 통혼권 형성, 그리고 신진사류로의 전환 등이 시대의 흐름과 유기적으로 작용하면서 고려후기 지배층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고려후기 김순계 인물들은 사회모순을 개혁하려는 지식인 계층으로서 고려에서 조선초로 이어지는 지배층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나아가 김순계의 성장은 고려후기 혼돈의 정치상황과 지배층의 인적관계망 및 권력재생산 구조, 여말선초 지배세력의 성격변화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여겨진다.
 
目 次
머리말 · 1
Ⅰ. 金恂의 생애와 주요활동 · 7
Ⅱ. 金恂系의 통혼권 · 23
Ⅲ. 金恂系의 특징과 위상 · 31
1) 金永旽의 정치도감 활동 · 31
2) 金士衡의 조선 건국 참여 · 38
맺음말 · 48參考文獻 · 52
 
表 目 次
[표 1] 고려시대 ‘行李’의 대표 용례 분석 · 13
[표 2] 1298년 김순의 관력 변화 · 15
[표 3] 金恂系 ‘上洛’號의 피봉 양상 · 20
[표 4] 김순의 관력 및 주요활동 일람 · 21
 
그 림 目 次
[그림 1] 金恂 家系圖 · 24
[그림 2] 許珙 家系圖 · 25
[그림 3] 金永旽系 家系 · 27
[그림 4] 金永煦系 家系圖 · 28
[그림 5] 洪奎 家系와 연결된 金恂 1女, 3女의 通婚圈 · 28
[그림 6] 白頤正, 李齊賢 家系와 연결된 金恂 2女의 通婚圈 · 30
 
부 록
[부록 1] 金恂 家系의 通婚圈 · 50
 
머리말
 
무신집권기가 막을 내린 이후 고려는 직간접적으로 元의 간섭을 받게 되었고, 사회 전반적으로 이전과 다른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때 새로이 재편된 세력들은 전기부터 명맥을 이어온 경우를 비롯해 譯人·鷹坊·宦官 출신이나 軍功을 쌓아 원과의 관계 속에서 등장한 경우 등 다양하였다. 이들은 기존 門閥貴族과 같이 家門을 기반으로 하여 각자 출신과 정치적 이상에 따라 활동하고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지배권,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안동김씨 가문도 이 무렵 金方慶이 三別抄의 난과 일본정벌에서 공을 세워 크게 성장하였다. 고려후기 안동김씨 가문은 權門으로 등장하여 점차 世族化 되어간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1) 1308년(충선왕 복위) 충선왕은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 즉 宰相之宗의 15가문을 발표하였다. 慶州金氏, 慶源李氏, 孔巖許氏, 海州崔氏, 平壤趙氏, 黃驪閔氏, 彦陽金氏, 坡平尹氏 등이 해당한다.2) 비록 안동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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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權門世族’은 원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이 형성된 지배층으로, 能文能吏의 관인층인 ‘新興
士大夫’에 상응하는 세력이었다(閔賢九, 1974, 高麗後期 權門世族의 成立 , 湖南文化硏究 6; 1974, 高麗後期의 權門世族 , 한국사 8, 국사편찬위원회). 이후 ‘權門’은 특정개인이 행사하고 있는 정치권력 또는 그러한 권력의 소유자를, ‘世族’은 특정 가계의 대대로 누려온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계층을 의미한다는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에대한 세부적인 분류가 이루어졌다(金光哲, 1987, 高麗後期世族層과 그 動向에 관한 硏究 , 東亞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91, 高麗後期世族層硏究, 東亞大出版部).
 
2) 金塘澤, 1991, 忠宣王의 復位敎書에 보이는 ‘宰相之宗’에 대하여―소위 '權門世族'의 구성분자와 관련하여― , 歷史學報 131.각각의 가문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들이 참고된다.
閔賢九, 1976·1977, 趙仁規와 그의 家門(上)·(中) , 震檀學報 42·43.
閔賢九, 1977, 閔漬와 李齊賢―李齊賢所撰 ‘閔漬 墓誌銘’의 紹介 檢討를 중심으로― , 李丙燾博士九旬紀念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朴龍雲, 1978, 고려시대 定安任氏, 鐵原崔氏, 孔巖許氏 家門 분석 , 誠信女大韓國史論叢 3; 2003, 高麗社會와 門閥貴族家門, 景仁文化社.
李萬烈, 1980, 高麗 慶源李氏 家門의 發展過程 , 韓國學報 6-4.
金蓮玉, 1982, 高麗時代 慶州金氏의 家系 , 淑大史論 11·12.
李樹健, 1984,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黃雲龍, 1990, 高麗閥族硏究, 東亞大學校出版部.
김호동, 2011, 고려·조선초 언양김씨 가문의 관계진출과 정치적 위상 , 한국중세사연구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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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가문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으나3) 김방경이 최초로 원에서 金符를 하사받은 고려인이었고, 고려 내에서의 관직은 僉議令까지 이르렀으므로 최고의 정치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당대에 김방경이 최고의 정치적 권력을 누리고 있었지만 일부 세력에게 견제를 받으면서 안동김씨 가문 전체의 위상은 세족으로서의 지위에는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후손대에 와서 재차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재상지종으로 선정된 가문들과 혼인관계를 형성하면서 세족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주요한 역할을 한 가계는 단연 金恂系였다.
일찍이 안동김씨 가문에 대한 연구는 김방경에 대한 관심과 함께 시작되었다. 김방경의 군사적·정치적 사건들을 분석하고,4) 생애와 행적을 검토한5) 연구들이 진행됨에 따라 가문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주제가 확대되었다. 먼저 그의 가계를 정리하여 후손들의 혼인관계와 출사방법, 정치적 현안에 대한 대응을 다루는 연구가 이루어졌다.6) 이후 ‘격동의 동아시아와 김방경, 그리고 그의 가문’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개최되면서 김방경 관련 기록과 계보,7) 수여받은 원 문산계를 분석하고,8) 후손들이 ‘士族’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연구9)들이 발표되었다. 그 결과 고려후기 지배층으로서 안동김씨 가문의 사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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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렬왕대 다수의 재상을 배출한 安東金氏, 原州元氏, 光山金氏 등의 가문들이 재상지종
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재상지종을 선정하는 기준이 정치적 지위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
닌 왕비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가, 여러 대에 걸쳐 재상과 과거합격자가 배출되었는가, 충선왕과 혼인 관계를 가진 가문인가의 여부였음이 밝혀진 바 있다(金塘澤, 1991, 앞 논문).
4) 閔賢九, 1991, 蒙古軍 金方慶 三別抄 , 韓國史市民講座 8.
권선우, 1999, 高麗 忠烈王代 金方慶誣告事件의 전개와 그 성격 , 人文科學硏究 5.
朴宰佑, 2003, 金方慶 , 韓國史人物列傳, 돌베개. 이정신, 2008, 원 간섭기 원종·충렬왕의 정치적 행적: 김방경의 삼별초 정벌 일본원정을중심으로 , 한국인물사연구 10.
5) 장동익, 2007, 金方慶의 生涯와 行蹟 , 退溪學과 儒敎文化 40.
6) 남인국, 2007, 원 간섭기 지배세력의 존재양태―안동김씨 김방경계를 중심으로― , 역
사교육논집 38.
7) 張東翼, 2013, 記錄에 남겨진 宰相金方慶 , 한국중세사연구 37.
박재우, 2013, 고려시대 김방경의 선대기록과 계보관념 , 한국중세사연구 37.
김난옥, 2013, 안동김씨 김방경가문의 족보 간행과 변천 , 한국중세사연구 37.
8) 이강한, 2013, 13~14세기 고려관료의 원제국 문산계 수령 , 한국중세사연구 37.
9) 이정란, 2013, 고려후기 ‘士族’의 변혁세력 이미지 창출과 金方慶 후손 , 한국중세사연구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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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과 정치적 지위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김씨 가문의 지속적인 성장 배경과 변화 양상에 대한 세부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간의 연구들은 김방경을 중심으로 하였을 뿐, 그 후속세대에 대한 연구가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원과 고려라는 이중의 정치공간에서 서로 다른 위상을 가질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275년(충렬왕 원년) 고려의 관제가 원에 의해 격하되는 등10) 원의 관제와 조응해 바뀌어간 이래, 고려의 관직 뿐 만 아니라 원의 관직을 수여받은 인물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고려와 원의 관계 속에서 관직을 혼용해서 수용하고 있는 상황이 나타난 것이다.
당시 김방경이 원에서 수여받았던 萬戶職과 고려 내에서 임명되었던 ‘上洛君’의 봉작 양상이 주목된다. 김방경은 원 世祖로부터 虎頭金牌를 하사받아 만호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次子 金忻에게 계승되었다가 다시 長孫인 金承用에게 계승되었다. 한편, 막내아들 김순은 고려 내에서 활약하여 上洛君으로 피봉되었다. 김순 이래 金永旽, 金永煦도 상락군으로 피봉되어 고려 내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았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양상은 원간섭기 원과 고려의 정치적 지위의 분산 양상을 보여주며, 안동김씨 가문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주요한 요인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김순은 원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기보다 고려에서 활동한 인물이었기에 고려 내부의 관인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金恂墓誌銘 이 남아있어 보다 상세한 행적을 알 수 있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科擧에 합격해 김방경의 기대에 부응하였으며, 충렬왕의 殿試門生들과 유사한 정치적 행보를 걸으며 충렬왕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세자였던 충선왕과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충선왕 즉위년 개혁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김영돈을 비롯한 김순계 인물들은 代를 거듭해 당대 유력 가문들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김방경대보다 더욱 복잡하고 확대된 통혼권을 형성하였다. 김순의 자녀들 중 출가한 思順을 제외하고 모두 高麗史와 墓誌銘 등에 등장하며, 사위와 며느리들도 당대 이름난 가문들의 자녀들이었다. 나아가 김순계가 고려내 상락군을 계속해 수여받았다는 것은 안동김씨 가문의 중심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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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高麗史 권76, 志30 百官1 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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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9년(충렬왕 25) 韓希愈 무고사건으로 가문의 일원들은 원으로 가거나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며 중앙정계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때 안동김씨 김순계는 이전에 연결된 통혼권 및 세습 받은 지위를 바탕으로 원과 고려정계에서의 영향력을 잃지 않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김순은 충숙왕에 의해 등용되어 중앙정계에 재등장하였다. 이 무렵은 원과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는 시기로, 안동김씨 가문이 직·간접적으로 원과 연결되어 가문의 위상을 제고해나간 시기였다.
아울러 김순의 長子인 김영돈은 원 조정과 교류하며 원 순제의 신임을 얻어 整治都監 判事까지 역임하였다. 그는 과거 급제자 출신으로 당시 고려 조정을 대표하고 있었고, 원 조정의 別里哥不花와 연결되어 양 조정을 대표하는 가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공민왕대에 이르러 원과의 관련성은 더 이상 주요 성장요인이 아니게 되었다. 공민왕 즉위 초부터 시행된 다양한 개혁들은 사회적 모순의 제거를 그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는 이전과 동일하였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朱子性理學을 정치에 적용하고자 하는 新進士類11)의 영향이 있었다.
즉, 원과의 관련성보다 학문적인 내용을 실제로 정치에 적용해 실천하는 것이 당시 지배층들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에 가문의 위상을 유지하는 기준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이때 안동김씨 가문에서는 김순계의 인물들이 대두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적 정당성과 당위성을 갖춘 집단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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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흥사대부’의 개념과 ‘新進士類’, ‘新興儒臣’ 등 대체용어와 관련된 연구로는 다음의
연구들이 참조된다.
李佑成, 1961, 麗代 百姓考―高麗時代 村落構造의 一斷面― , 歷史學報 14; 1964, 高麗朝의 「吏」에 對하여 , 歷史學報 23; 1965, 高麗의 永業田 , 歷史學報 28; 1991, 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朴龍雲, 1987, 新進士類의 개념 및 그의 대두 , 高麗時代史(下), 一志社; 2003, 고려후기 權門과 世族 및 士大夫·士類의 用例와 그 성격에 대한 재검토 , 高麗社會와 門閥貴族家門, 景仁文化社.
金塘澤, 1989, 忠烈王의 復位 과정을 통해 본 賤系 출신 관료와 '士族' 출신 관료의 정치
적 갈등―‘士大夫’의 개념에 대한 검토― , 東亞硏究 17; 1998, 元干涉下의 高麗政治史, 一潮閣.
박재우, 1995, 고려말 정치상황과 신흥유신 , 역사와 현실 15.
이익주, 1995,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 역사와 현실 15.
홍영의, 1995, 고려말 신흥유신의 추이와 분기 , 역사와 현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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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안동김씨 김순계의 성장은 고려후기 정치상황과 지배층의 인적관계망 및 권력재생산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가 있다. 본고에서는 이상의 연구흐름과 문제의식에 맞춰 고려후기 안동김씨 가문이 꾸준히 높은 지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 김순계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정치활동과 기반을 살펴보고 그들이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전략과 변화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연구 대상의 범위를 김순계의 父系親族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고려시대 親族은 兩側的 親屬關係로 이루어져 있어 本族뿐 만 아니라 妻族, 外族까지 모두 살펴보아야 그 범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12) 그러나 과거 응시자가 제출하는 四祖(父, 祖, 曾祖, 外祖)와 墓誌銘 의 기록 등이 어디까지나 父系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므로 한 가문의 정치적 위세를 분석함에 있어 여전히 부계를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되었다.13) 또한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관직 및 봉작 양상은 부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명확하므로 분석의 대상을 김순의 부계 자손들로 한정하고자 한다. 다만, 정치활동에 있어 妻族과 外族의 영향을 고려해야하므로 분석 대상의 통혼권 및 인적관계를 고려해 서술하도록 하겠다.
먼저 Ⅰ장에서는 김순의 정치활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김순은 김방경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충렬왕~충숙왕대 관직생활을 하고 判三司事까지 지낸 인물이다. 김순의 관직 입문부터 정계에서의 은퇴 등 일련의 정치활동을 검토하여 고려후기 정치사에서 그의 역할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관직과 봉작 양상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정치적 위상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안동김씨 가문의 정치적 지위의 분산과 고려후기 지배층의 권력유지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Ⅱ장에서는 김순 家系의 통혼권을 분석할 것이다. 이는 김순 가계의 성장 기반을 밝히기 위함이다. 김순은 공암허씨 허공의 딸과 혼인하여 坡平尹氏, 鐵原崔氏, 彦陽金氏, 平壤趙氏 등과 연결된 통혼권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자녀들을 다시 세족 가문과 혼인시켜 2차적인 통혼권 확대를 가져왔다. 이러한 통혼권에 대한 분석은 김순 가계가 세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Ⅲ장에서는 김순 이후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정치활동과 의의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특히 충목왕대 정치관 임명에 있어 金永旽의 인적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밝혀진 만큼14) 김영돈의 정치도감 활동을 중심으로 김순대의 통혼권이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정치도감 판사로서 개혁의 일선에 있었던 김영돈을 재평가하고, 조선 개국 공신에 참여한 4대 김사형을 통해 고려말의 정국과 사상, 지배층의 변화 양상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고려후기 김순계의 위상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후기 격동의 상황에서 여러 정치적 사건으로 인한 부침, 인적관계망의 형성, 개인의 능력 및 사상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한 가문 내에서도 다양한 성격을 가진 세력이 나타났다. 그중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김순과 그의 가계를 중심으로 정치세력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고려후기 지배층의 실체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당시 시대상과 지배세력의 성격과 의미를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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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盧明鎬, 1988, 高麗社會의 兩側的 親屬組織 硏究, 서울大學校 박사학위논문. 13) 金光哲, 1991, 앞의 책, 51~52쪽. 고려시대 父系制와 非父系制 논의는 김주희, 2008,
고려시대 친족의 특성: 친족용어 분석을 토대로 , 가족과 문14) 이정란, 2005, 政治都監 활동에서 드러난 家 속의 개인과 그의 행동방식 , 韓國史學
報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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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金恂의 생애와 주요활동
1298년(충선왕 즉위) 충선왕은 즉위하여 그동안의 사회경제적인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개혁을 시행하였다. 충선왕의 개혁은 충렬왕대의 지나친 측근정치를 바로잡는 한편, 元의 제도를 적극 수용하여 고려의 정치체제를 정비하는 데 있었다.15)이때 金恂이 충선왕 개혁 세력으로 활동하여 주목된다. 본 장에서는 김순의 관직입문부터 충선왕 개혁세력으로 거듭나는 과정, 그리고 정계에서 은퇴하기까지 전반의 정치활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김순은 김방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金方慶의 정치적 입지를 기반으로 관직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아버지 김방경은 삼별초 진압의 공으로써 侍中에 임명된 이래16) 두 차례의 일본정벌(1274, 1281)까지 지휘하면서 원으로부터 萬戶를 제수받고17) 1283년(충렬왕 9) 치사하기 이전까지 僉議中贊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었다.18) 김순은 김방경이 삼별초 진압의 공으로 시중에 임명될 무렵 관직에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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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충선왕 즉위년 개혁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이 참고된다.
李起男, 1971, 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 , 歷史學報 52.
金光哲, 1986, 高麗 忠宣王의 現實認識과 對元活動―忠烈王 24年 受禪以前를 중심으로― , 釜山史學 11.
이익주, 1992, 충선왕 즉위년(1298) ‘개혁정치’의 성격―관제(官制)개편을 중심으로― , 역사와 현실 7.
朴宰佑, 1993, 高麗 忠宣王代 政治運營과 政治勢力 動向 , 韓國史論 29.
권영국, 1994, 14세기 전반 개혁정치의 내용과 그 성격 , 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李益柱, 1996, ‘世祖舊制’下 政治體制의 변화 , 高麗·元關係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99~119쪽.
이강한, 2008, 고려 충선왕의 정치개혁과 元의 영향 , 한국문화 43.
16) 高麗史 권27, 世家27 元宗 14년 閏6월. “是日, 以金方慶爲侍中, 邊胤判樞密, 金錫爲上
將軍知御史臺事, 羅裕宋甫演, 各爲大將軍.”
17) 高麗史 권28, 世家28 忠烈王 2년 10월 戊辰. “金方慶受虎頭金牌, 仍賫詔書還, 王出城
以迎.”
高麗史 권104, 列傳17 金方慶. “金宰相有軍功, 賜虎頭金牌. 東人帶金符, 自方慶始.”
18) 高麗史 권29, 世家29 忠烈王 9년 12월 辛丑. “中贊金方慶乞退. 以上洛公致仕. 康允紹
亦以判三司事致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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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의 관직입문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사료가 참고된다.
 
가-1) 공은 글씨를 잘 써서 여러 碑文을 베껴 썼다. 나이 15세쯤[志學]에 門蔭으로 벼슬하여 掌牲署丞이 되고, 뒤에 別將으로 바뀌면서 御牽龍行首가 되었다. 관직은 비록 東班에서 시작하여 西班에 이르렀지만 그 뜻은 학문[文學]에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개 부친이 비록 兩朝의 將相이라는 극히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다만과거[桂籍]에 오르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겨, 아들이 祖業을 회복하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19)
 
가-1)에서 김순은 1273년(원종 14) 처음 음서[門蔭]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김방경은 竹山朴氏 朴益旌의 딸과 혼인해 金愃(瑄)20), 金忻, 김순의 3男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음서로 처음 관직에 진출하였다.21) 김방경의 입지를 기반으로 이른 나이에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정치생활에 유리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22) 그럼에도 科擧는 당시 지배층에게 주요한 정계진출 수단이었다. 이에 관직이 동반[文班]에서 시작하여 서반[武班]에 이르렀음에도 문학적 성향이 강하였던 김순은 父親의 기대를 한껏 받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276년 김방경이 무고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23)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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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김순묘지명 (김용선, 2012,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이하 본고에서 인용하는 묘지명은 별 다른 언급이 없는 한 같은 책에서 인용하였으며, ○○○묘지명 으로 표기하겠
다). “公以善書多寫碑文. 年方志學, 以門蔭入仕爲掌牲署丞, 後改爲別將御牽龍行首. 職雖從東
至西, 其志未嘗不在文學. 盖嚴君雖位極兩朝將相, 惟以未叅桂籍爲恨, 冀嗣子之能復祖業故也.”
20) 高麗史에는 金愃으로 되어있고, 김방경묘지명 에는 瑄으로 되어있다. 본고에서는 전
자로 표기하도록 하겠다.
21) 高麗史 권104, 列傳17 金方慶 附忻. “忻以蔭調刪定都監判官, 三轉爲將軍.”김순묘지명 . “年方志學, 以門蔭入仕爲掌牲署丞, 後改爲別將御牽龍行首.”김흔과 김순의 음서 여부는 위 사료들에 명확히 드러난다. 다만 장자인 김선의 경우, 음서 여부를 명시한 사료는 나타나지 않지만, 1279년(충렬왕 5) 김방경이 김순의 과거합격을 두고 그간의 분을 풀었다며 매우 기뻐한 것으로 보아 이전의 김선 또한 음서로관직에 진출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순묘지명 , “至至元十六年, 己卯, 春場, 一擧爲金榜副元是. 年初拜攝郎將, 後改爲國學直講, 此公之能伸大人之遺, 憤者也.”).
22) 朴龍雲, 1990, 高麗時代 蔭敍制의 實際와 그 機能 , 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 硏究, 一志社, 43~52쪽.
23) 高麗史 권28, 世家28 忠烈王 2년 12월 丙子. “夜有人投匿名書, 誣告貞和宮主呪咀公主, 又齊安公淑金方慶等四十三人, 謀不軌. 於是, 囚貞和宮主及淑方慶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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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이 충렬왕은 물론 원 世祖의 신임까지 얻고 높은 정치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견제로 무고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김방경 이외에 貞和宮主와 43명의 관인들이 연루되었으며 충렬왕 측근세력들이 기존 관료들의 정치적 지위를 약화시키고 충렬왕의 왕권강화를 위해 일으킨 것이었다.24) 김방경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柳璥의 충언으로 곧 모두 석방되었다.25)
그러나 이듬해 다시금 韋得儒와 盧進義 등이 김방경의 모반을 무고하여26) 김방경 세력은 정치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두 번째 무고사건은 김방경의 세 아들과 사위 趙抃까지 一家 전체가 연루되고, 관련인이 400여인에 이를 정도로 상당한 규모였다.27) 김방경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으로 시작된 사건에 洪茶丘가 개입하면서28) 해당 사건은 점차 고려국왕과 부원세력간의 대립으로 확대되어 원과의 외교 사안으로 번지게 되었다. 1278년 충렬왕이 직접 원으로 가 원 황제에게 적극적으로 해명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29)
이러한 두 차례의 무고사건으로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김순은 과거에 합격하여 가문의 위세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아래 사료는 김순의 과거 합격과 관련된 기록이다.
 
가-2) 공은 이로 말미암아 힘써 공부하고 게으르지 않아서 至元 16년 기묘년(충렬
왕 5, 1279)30)의 과거[春場]에 응시하여 단번에 2등[副元]으로 합격하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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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권선우, 1999, 高麗 忠烈王代 金方慶誣告事件의 전개와 그 성격 , 人文科學硏究 5,
120~125쪽.
25) 高麗史 권28, 世家28 忠烈王 2년 12월 丙子. “柳璥涕泣力諫, 公主感悟, 皆釋之.”
26) 高麗史 권28, 世家28 忠烈王 3년 12월 丁卯. “前大將軍韋得儒, 中郞將盧進義金福大等, 誣告金方慶謀叛, 命贊成事柳璥元傅, 知密直事李汾禧韓康, 承旨李槢, 與忻都天衢, 雜問, 王知其誣妄, 釋之.”
27) 高麗史節要 권19, 忠烈王 3년 12월. “方慶與子忻壻趙抃及孔愉羅裕韓希愈安社貞等, 四
百餘人謀, 去王公主達魯花赤, 入據江華以叛.”
28) 高麗史 권104, 列傳17 金方慶. “茶丘與本國, 有宿憾, 欲伺釁嫁禍, 聞方慶事, 請中書省
來鞫. 忻都亦嘗遣其子吉歹, 以得儒言奏, 帝詔與國王公主同問. 於是, 王與忻都茶丘, 復鞫方慶及忻. …… 王謂茶丘曰, 向與忻都, 已鞫訖, 何必更問. 茶丘不聽.”
29) 高麗史 권28, 世家28 忠烈王 4년 7월 甲申. “王奏曰, 今姦人, 以金方慶爲謀叛, 告於忻都. 忻都引兵, 入王京, 執而訊之, 無他, 唯東征將士, 有不納軍器於官者, 奪其職而杖之. 方
慶雖無叛狀, 時爲冢宰, 不納軍器者, 不加檢擧, 罪其踈慢, 流于海島. 然此乃有憾者所讒也, 後有若此不法者, 臣請罪之. 帝曰, 汝其識哉. 謂諸官人曰, 可亟召茶丘還.”
30) 인용된 사료의 괄호 안 내용은 필자가 부기한 것이다. 이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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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에 처음 攝郞將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國學直講으로 바뀌었으니, 이는 공이 아버지가 가진 憤을 푼 것이다. 이로부터 先公은 막내아들에게 은혜를 더 하여 늘 곁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였고, 上國에 賀正使로 갈 때에도 따라가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31)
 
가-2)에서 김순은 힘써 공부하여 1279년 마침내 科擧에 乙科로 급제하면서[副元] 김방경의 분을 풀고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다. 과거는 관인들이 政界의 관계망을 형성하는데 주요했고 가문의 명예를 높이는데 영향을 줄 수 있었으므로,32) 김방경이 매우 염원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고려후기는 座主·門生관계를 중심으로 통혼권과 정치이해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어 그 결속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충렬왕 또한 이를 활용해 정치세력을 형성하고자 할 정도로 과거를 통한 정계진출은 세족으로의 입지를 다지는데 주요한 수단이었다.33) 김순이 이러한 과거급제자 집단에 들어가게 된 것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 집단에 들어갈 수 있게 됨을 의미했다.34) 이로써 김방경은 유일하게 과거에 합격한 김순을 매우 아껴 元에 賀正使로 갈 때마다 동행하게 하였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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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김순묘지명 . “公由是力學不倦, 至至元十六年己卯春場, 一擧爲金榜副元是. 年初拜攝郎
將, 後改爲國學直講, 此公之能伸大人之遺, 憤者也. 自是, 先公益推偏季之恩, 常令不離, 左右賀正上國, 無不令.”
32) 과거에 급제하면, 대외적으로 급제한 자들의 放을 붙이고 국왕이 직접 자리하여 급제자
들을 격려하는 의식인 放牓儀를 행하였고(高麗史 권68, 志22 禮10 東堂監試放牓儀), 내부적으로 知貢擧와 同知貢擧를 座主 또는 恩門로 부르고, 급제자 스스로가 그들의 門生이 되어 父子와 같은 관계를 맺어 결속을 강조하였다(高麗史 권74, 志28 選擧2 試官 忠肅王 17년; 壄隱逸稿 권6, 尊慕錄附 門生). 뿐만 아니라 같이 급제한 자들은 同年이라 하여 형제처럼 친밀하게 지내는 등 과거를 중심으로 엘리트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집단으로의 유입은 정계활동에 주요한 통로가 되었기에 고려후기 지배층들은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許興植, 1981, 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朴龍雲, 1990, 앞의 책, 648~650쪽).
33) 許興植, 1981, 앞의 책, 34~43쪽. 34) 조간에 이어 2등으로 과거에 급제한 김순은 함께 급제한 이들과 同年契를 형성할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高麗史 권106, 列傳19 趙簡. “上洛君金恂, 簡牓第二人, 往問涕泣不已. 簡忽張目, 使人語曰, 不謂公之憫我如此. 豈心於喜而色於悲耶. 恂曰, 是何言. 四紀同年契, 烏得無情. 簡曰, 我死, 牓中無先公者. 恂收涕笑曰, 老子不死.”).
35) 김방경은 1276년 10월, 1280년 11월 두 차례에 걸쳐 원에 賀正使로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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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이 과거에 합격한 해의 知貢擧는 朴恒, 同知貢擧는 郭汝弼이었으며, 同年으로 趙簡, 權溥, 李世基, 李瑱 등의36) 여러 요직을 역임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37)
당시 정치상황과 관련해 이듬해 충렬왕이 새로 과거에 급제한 자들을 다시 親試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38) 충렬왕은 오랜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안정된 정권을 구축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39) 이에 宦官, 譯官, 鷹坊등 새로운 출신의 세력을 활용하고, 殿試를 실시하여 과거를 기반으로 한 관료층을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친시’ 또는 ‘전시’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자들을 왕이 자리한 가운데 다시 시험하는 제도로 왕이 자신의 관료들을 형성하여 왕권을 강화할 때 주로 시행하였다.40)
비록 이때 충렬왕의 의도와 다르게 7품 이하의 㕘外官 모두를 전시의 대상으로 하게 되었지만,41) 1279년 과거의 합격자들은 충렬왕이 본래 전시의 대상으로 삼으려했던 집단이고,42) 전시의 합격자도 대부분 그 안에서 배출되어 대부분 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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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高麗史 권73, 志27 選擧1 科目1 凡選場 忠烈王 5년 6월. “贊成事朴恒知貢擧, 典法判
書郭汝弼同知貢擧, 取進士, 賜趙簡等三十三人, 明經二人, 恩賜八人及第.”
37) 朴龍雲, 1990, 앞의 책, 435~436쪽.
38) 高麗史 권73, 志27 選擧1 科目1 科擧 忠烈王 6년 5월; 高麗史 권73, 志27 選擧1 科目1 凡選場 忠烈王 6년 5월.
39) 충렬왕대 정국 및 정치세력의 형성과 관련하여 다음의 논문들이 참고 된다.
李起男, 1971, 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 , 歷史學報 52
金光哲, 1985, 高麗 忠烈王代 政治勢力의 動向―충렬왕 초기 정치세력의 변화를 중심으로― , 昌原大學校 論文集 7-1.
李益柱, 1988, 高麗 忠烈王代의 政治狀況과 政治勢力의 性格 , 韓國史論 18; 1996, 高麗·元關係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金塘澤, 1989, 忠烈王의 復位 과정을 통해 본 賤系 출신 관료와 ‘士族’ 출신 관료의 정치적 갈등―‘士大夫’의 개념에 대한 검토― , 東亞硏究 17.
김광철, 1993, 충렬왕대 측근세력의 분화와 그 정치적 귀결 , 考古歷史學志 9.
邊銀淑, 2000, 高麗 忠烈王代 政治勢力의 형성배경 , 明知史論 12.
40) 柳浩錫, 1984, 高麗時代의 覆試 , 全北史學 8.
許興植, 1974, 高麗科擧制度의 檢討 , 韓國史硏究 10; 2005, 고려의 과거제도, 一潮閣. 朴龍雲, 1990, 高麗時代의 紅牌에 관한 一考察 ,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上;
2000, 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 硏究, 一志社.
41) 高麗史 권73, 志27 選擧1 科目1 忠烈王 6년 5월; 高麗史 권106, 列傳19 朴恒.
42) 高麗史 권106, 列傳19 朴恒. “王欲依舊制, 覆親試新及第, 僧祖英得幸於王, 爲其姪吳子宜及親舊者, 欲令不限登第久近, 皆赴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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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즉, 원과의 관계 속에서 충렬왕이 고려의 내정을 견고히 하기 위해 육성하고자 한 정치세력에 김순이 포함된 것이다.43)
그러나 점차 충렬왕과 충선왕의 대립이 격해지면서 충렬왕 전시문생 출신 중 점차 충선왕 세력으로 변화하는 부류가 있었는데, 이진, 권부, 조간 등이 이에 해당한다. 김순 또한 이들과 어울리며 충선왕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와 관련하여 충렬왕대 김순의 世子府 관직 역임과 이후 1298년(충선왕 즉위) 승진 상황이 주목된다. 먼저, 충렬왕대 김순의 세자부 관직 역임에 대해 살펴보겠다.
 
나-1) 무자년(충렬왕 14, 1288)에 秘書少尹 知通禮門事에 임명되었다. 그 해에 공을 世子府 行李別監으로 삼아 師傅의 임무를 다할 것을 명하였다.44)
 
나-1)에서 김순은 충렬왕의 명으로 世子府 行李別監에 임명되어 세자(충선왕)의 학문과 교양을 가르치는 師傅의 임무를 맡았다. 고려시대 別監은 현안이 발생하면 임명되던 임시직으로 고려후기에 국왕의 측근에게 중요한 권능을 부여할 때 활용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비추어보면 행리별감은 측근에게 제수하여 ‘行李’의 업무를 수행하는 임시직이었다고 이해된다.
일반적으로 ‘行李’는 ①使臣, ②唐代 官府의 導從에서 유래하여 ‘사신 일행의 행차(使行)’, ➂賓客을 관장하는 관인을 의미한다.45) 다음의 [표 1]는 고려시대 ‘行李’의 대표 용례를 분석해 정리한 것이다. [표 1]에 따르면 고려전기에도 주로 사신이나 사행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고려후기에도 고종대 몽골(원)과의 공물 문제, 著古與 사건 및 태자의 입조 문제 등을 논할 때 주로 사신 및 사행의 용례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이후 점차 원으로의 사행이 잦아지면서 齊國大長公主의 행차 및 사행과 관련된 役이나 비용 즉, 사행의 물품 조달 관련 업무를 지칭하는 사례에서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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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김순의 전시문생출신 여부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殿試’ 또는 ‘親試’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자들을 왕이 자리한 가운데 다시 시험하는 제도를 의미하므로1279년 과거합격자 중의 하나였던 김순 또한 전시문생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44) 김순묘지명 . “戊子. 除秘書少尹知通禮門事. 是年, 上命公爲世子府行李別, 監委以師傅
之任.”
45) 諸橋轍次, 2001, 行李 , 大漢和辭典 10, 大修館書店,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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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고려시대 ‘行李’의 대표 용례 분석※전거표시: 史(고려사), 要(고려사절요)
 
번호/시기/개요 /내용/전거
1/고려전기/최승로 時務28조(무역)/우리 태조께서는 참으로 事大에 힘쓰셨으나, 오히려 몇해에 한 번씩 사신[行李]을 보내시어 聘禮를 행하셨을 따름이었습니다.46)/史
2/고려전기/송 황제가사신을 도울것을 요청함/金에 보내는 편지를 지참한 사신[行李]을 특별히 파견하니,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는 것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일이겠지만 재난을 구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일이므로 반드시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47)/史
3/고려후기/몽골(원)과의貢物 문제/“또 군대를 철수할 때 남기고 간 병든 말들을 각 지역에서 찾아 모았더니 15필이 되므로 거둔 관청에서 기르게 하였는데, 이번 사신[行李]편에 모두 나누어 삼가 받들어 보냅니다.”48)/史
4/고려후기/著古與 사건/또 浦鮮萬奴는 우리나라로 오는 상국의 사신에게 속여 말하기를, ‘고려는 그대 나라를 배신하였으니 삼가 가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사신[行李]이 듣지 아니하고 또 그진위를 알고자 길을 계속 가자, 먼저 그 휘하의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우리나라의 복장을 하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는마침내 양국 山谷 사이에 군대를 매복시키고 몰래 사신 일행을 기다리다가 활을 쏘아 죽였던 것입니다. …… 얼마 후또 들리기를 ‘北界 한두 성의 逆民들이 그 성의 達魯花赤을망령되게 꾀어 평민들을 살육하였으며 또 신이 파견한 내신도 죽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실은 上國의 사신[行李]을 기다렸다가 영접하여 京師로 데리고 올 사람이었습니다.49)/史
5/고려후기/太子의 입조문제/왕이 溫陽加大 등을 康安殿에서 접견하였다. 온양가대가太子의 입조 시기를 물었다. 왕이 5월이라고 답하자 온양가대는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우리 군대의 진퇴는 太子의 사행[行李]이 더디냐 빠르냐에 달려 있는데 5월까지 기다린다니 어찌 그리 늦습니까”라고 하였다.50)/史
6/고려후기/齊國大長公主의행차관련 役일찍이 聖旨를 받들었는데 기미년(1259) 이래 사로잡힌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전년도에또다시 北京·東京路·東寧府에 경오년(1270) 이래로 도피하였거나 유인되어 사로잡힌 사람들 역시 쇄환하도록 한다는중서성의 省旨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한 사람도 돌아온 경우가 없습니다. 다시 쇄환할 수 있게 하되, 여러 대를 걸쳐거주하여 이사가 불편한 사람은 동경로에 모여 살면서 공주가 행차할 때 물품을 제공하고 뒷바라지 하는 역[行李廝養之役]에 충원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51)/要
7/고려후기/사행과관련된 경비全羅道王旨別監 權宜가 은 40근과 호랑이 가죽 20장을왕에게 진헌하여 사행에 필요한 경비[行李之費]를 보조하였다.52)/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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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행리별감은 세자부내에 임시로 설치된 사행관련부서의 장관으로서 사행의 물품 조달과 관련된 실제적인 행정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53) 한편, 행리별감은 사행관련 업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에게 옛 성현의 일[前修之事]을 고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54) 즉, 세자부 행리별감은 임시로 설치한 세자부의 장관으로서 사행의 물품 조달과 관련된 실제적인 행정 업무를 담당하며 세자의 측근에서 그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순은 이후에도 여러 세자부 관직을 겸임하였다. 나-2)와 나-3)는 김순의 세자부 관직 역임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나-2) 임진년(충렬왕 18, 1292)에 朝顯大夫·典法摠郞·知制誥로 승진하고, 여러 차례 옮기면서 少府尹, 世子文學, 軍簿摠郞, 典理摠郞, 朝奉大夫, 秘書尹, 三司右尹을지냈는데 모두 知制誥[三字]를 겸하였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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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高麗史 권93, 列傳6 崔承老. “我太祖情專事大, 然猶數年一遣行李, 以修聘禮而已.”
47) 高麗史 권15, 世家15 仁宗 6년 6월 己巳. “玆奉大金之尺書, 特馳一介之行李, 航海越
境, 良有溷煩, 救灾恤民, 必加軫助.”
48) 高麗史 권23, 世家23 高宗 19년 夏4월 壬戌. “又貴國還兵次, 所留下瘠馬, 每處搜集, 凡十五疋, 卽令收管牧養, 今此行李, 幷分去奉呈.”
49) 高麗史 권23, 世家23 高宗 19년 11월. “又萬奴與上國使佐之向我國者, 紿言, ‘高麗背你國, 愼勿前去.’ 使佐不聽, 且欲知眞僞, 遂便行李, 則先遣其麾下人, 僞爲我國服, 著及弓箭, 遂伏兵於兩國山谷之間, 潛候行李, 出射趁殌. …… 俄又聞, 北界一二城逆民等, 妄諭其城達
魯花赤, 殺戮平民, 又殺臣所遣內臣. 此人, 是候上國使佐値行李, 則迎到京師者也.”
50) 高麗史 권24 世家24 高宗 46년 3월 癸丑. “王引見溫陽加大等于康安殿. 溫陽加大問太
子入朝之期. 王以五月對, 溫陽加大怒曰, 我兵進退, 在太子行李遲速, 若待五月, 何其晩
也.”
51) 高麗史節要 권20, 忠烈王 4년 7월. “曾奉聖旨, 己未年以來驅掠人, 許令放還. 年前又有
省旨, 北京東京路東寧府, 庚午年以來逃誘虜掠之人, 亦令刷還, 迨今無一人還者. 願更令刷
還, 其有累世居住不便移徙者, 於東京路圓聚, 以充公主行李廝養之役.”
52) 高麗史 권33, 世家33 忠宣王 總序. “全羅道王旨別監權宜, 以銀四十斤, 虎皮二十領, 獻
王, 以助行李之費, 王曰, 此物皆剝民斂怨, 非吾所欲. 遣人, 悉還其主.”
53)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시대적인 배경으로는 원으로의 사행이 매우 빈번해졌고, 의례적이기보다 실무적인 사행으로 그 양상이 변화하고 있었음이 참고된다. 원과의 관계가밀접해지면서 정례적으로 이루어지던 사행이 수시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규모 또한 대규모에서 사안에 따라 소수 인원으로 사행단이 꾸려지기도 하였다(이명미, 2015, 고려-몽골간 使臣들의 활동 양상과 그 배경 , 한국중세사연구 43, 104쪽.).
54) 高麗史 권33, 世家33 忠宣王 總序. “常謂行李別監魏璇曰, 奇怪妖妄, 皆所不取. 但可以
前修之事, 告我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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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3) 병신년(충렬왕 22, 1296)에 世子舍人을 겸하였다.56)
 
나-2)에서 김순은 典法司와 軍簿司, 典理司의 摠郞(정4품)을 연이어 역임하고, 世子文學을 지냈다. 나-3)에서는 世子舍人을 겸직했음이 확인된다. 세자부 내에서 각각 관직의 구체적인 직임은 알 수 없지만, 김순은 고려전기 청요직에 해당하는 세자부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충선왕과의 유대관계를 쌓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는 1295년(충렬왕 21) 한 차례 同知貢擧를 지낸 이래57) 奉烈大夫·密直使·右副承旨를 거쳐58) 左副承旨·寶文閣直學士 등을 역임하였다.59)
이후 충선왕이 원에서 돌아와 1298년 개혁을 진행함에 있어 김순이 역임한 관직들을 살펴보면, 그가 개혁의 중심에 위치해있어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표 2]는 1298년(충선왕 즉위) 김순의 관력 변화를 보여주는 표이다.

[표 2] 1298년 김순의 관력 변화
※전거표시: 史(고려사), 要(고려사절요), 墓(김순묘지명)
 
왕 /년 /서기 /월 /나이 /관계 및 관직 /전거
충렬왕 /24년 /1298/ · /41 /右承旨(정3품)·知版圖司事모두 知制誥[三字]를 겸/墓
충선왕/즉위 /1298 /5월 /41 /通議大夫(종3품)·光政副使(종2품)·承旨·成均祭酒로 임명正議大夫(정3품)·集賢殿學士·左散騎常侍(정3품)로 바뀜/史, 墓
충선왕/즉위 /1298 /7월 /41/密直司使·右承旨(정3품)·成均/國學祭酒·寶文閣學士·知民曹事모두 知制誥[三字]를 겸/史, 墓
충선왕/즉위 /1298 /8월 /41 /奉翊大夫(정3품)·三司左使·崇文館學士 /史, 墓
충렬왕/24년 /1298 /9월 /41 /密直司左承旨(정3품)·判秘書寺事·充史館修撰官·知制誥· 知軍簿司事로 바뀜史, 墓
충렬왕/24년 /1298 /11월12월 /41 /奉翊大夫(정3품)·密直司副使(정3품)·文翰學士에 임명 /史, 要, 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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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김순묘지명 . “壬辰. 加朝顯大夫典法摠郞知制誥, 累遷少府尹 世子文學軍簿摠郞典理摠郎朝奉大夫秘書尹三司右尹, 皆兼三字.”
56) 김순묘지명 . “丙申. 兼世子舍人.”
57) 이때 僉議侍郞贊成事 鄭可臣과 함께 姜喧 등 27명을 뽑아 모두 이름난 선비들이 되었다고 하나, 더 이상의 내용은 알 수 없다(高麗史 권73, 志27 選擧1 科目1 凡選場. 忠烈王 21년 10월; 김순묘지명 . “元貞, 乙未冬. 同知貢擧所取, 皆當時名士大開.”).
58) 김순묘지명 . “又拜奉烈大夫密直使右副承旨.”
59) 김순묘지명 . “遷左副承旨寶文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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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은 즉위하여 密直司를 光政院으로 고쳤는데,60) 광정원은 元制의 영향으로 재편된 것이었으며61) 이때 김순이 종2품의 光政副使로 임명된 사실은 그가 충선왕 개혁세력이었음을 증명한다. 광정원의 관원 중 宰相은 使, 同知院事, 副使 밖에 없어 가장 개혁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김순은 또한 우승지와 승지로 활동하였는데, 이 또한 충선왕과 가까이서 소통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298년 김순의 관직들은 그가 충선왕의 개혁세력으로서 활동하였음을 보여준다. 김순의 관력에서 다른 주요한 특징은 그가 지속적으로 ‘학사직’을 역임했다는 점이다. [표 2]에서 김순은 일찍이 여러 차례 관직을 옮길 때마다 知制誥를 역임하였고, 충선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集賢殿學士, 寶文閣學士, 國學祭酒, 崇文館學士 등의 학사직을 역임하며 지제고를 겸하였다. 지제고는 본래 학식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 맡는 것이었으므로 김순의 학식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아울러 詞林院의 4학사인 朴全之·崔旵·吳漢卿·李瑱이 학사직을 역임한 이후 충선왕과의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였음을 미루어볼 때,62) 김순의 학사직 역임 또한 충선왕과의 특별한 유대관계를 쌓는데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충렬왕이 복위되고 충선왕 개혁세력들이 개편되면서 김순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63) 그러나 9월에 곧 다시 密直司左承旨·知軍簿司事 등을 지내고64) 12월에는 密直司副使·文翰學士에 임명되어65) 충렬왕 복위이후에도 정계생활을 지속하였다.
김순과 같이 충렬왕이 복위한 이후 충선왕 세력들이 모두 정계에서 물러난 것
은 아니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이진, 권부, 조간이 있다. 이들은 충렬왕의 殿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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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동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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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내용이 많아서 세번 나누어 전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