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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외갓댁 고모댁(30) 예안이씨 정간공파조李蓂(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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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0-25 16:08 조회1,3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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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간공 문(貞簡公 門)

 가. 전의(全義)로 낙남(落南)한 유래

 정간공(貞簡公)이 돌아가신지 26년 만인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온 국토와 국민이 왜적의 말발굽아래 짓밟히고 어육(魚肉)이 되자 관직에 남아 있던 후손들은 난을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고난을 겪다가 겨우 난리가 끝이 나고 집으로 돌아와 제대로 정착도 하기 전에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에 시달리고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숨을 돌리는가 하였으나 정간공의 증손자 영길(榮吉)께서 38세 되던 해인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한양을 등지고 솔권(率眷)하여 충남 연기군 전의현(忠南 燕岐郡 全義縣‥지금의 전동면 송성리 송치)에 정착을 하시었다. 영길(榮吉)께서는 네 아들을 두셨는데 장자는 통덕랑 함(ham.gif)이고 차자는 가선병사 담(dam.gif)이고 삼자는 통덕랑 험(heom.gif)이며 넷째는 여절교위 암(am.gif)이다. 사형제분중 맏아들과 셋째 아들 및 넷째 아들은 전의현에서 터를 잡아 형제간 우애하고 화목하게 지내며 오늘의 분파종(分派宗)을 이루게 되었고, 둘째 아들 담은 오랫동안 관직에 몸담았는데 특히 외직(外職)인 하동부사(河東府使)로 계시다가 내직(內職)인 가선병사(嘉善兵使)로 명을 받고 솔권하여 바닷길로 상경하던중 충남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忠南 泰安郡 所遠面 波濤里) 꽃장목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되어 식구들은 그곳에 머무르고 공께서 혼자 상경하여 벼슬을 하시다가 지금의 서울 노원구 월계동 각심재 선영아래 묻히시고 식솔들은 태안(泰安)에 정착함으로써 태안 세거지(世居地)를 이루게 된 것이다.

 나. 현조의 사적

  ○ 보간(輔幹)(1454∼1514)

 좌찬성공(左贊成公) 신(愼)의 셋째 아들로 자(字)는 익지(翼之)이다. 정간공문(貞簡公門)의 파조(派祖)이다. 공은 본래 자질과 인품이 영명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서 사림에 널리 알려져 여러번 관의 천거를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음사(蔭仕)로 연산현감(連山縣監)으로 제수되어 품계(品階)는 통훈대부(通訓大夫)를 받았으나 나이 52세에 고요한 시골 생활이 그리워 관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사시다가 갑술년(甲戌 1514) 9월 돌아가셨으니 향년(享年) 61세였으며 10월 각심사에 안장(安葬)되었다. 공은 성품이 온후하여 무슨 일이든 겉으로 드러남이 없었으며 여색(女色)과 가무(歌舞)를 좋아하지 않았고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여 평생을 검소한 생활로 분수에 넘치지 않았다. 공의 배위는 부마(駙馬) 윤연명(尹延命)의 손자인 감찰(監察) 윤혼(尹渾)의 따님 해평윤씨(海平尹氏)인데 이분 또한 단정하고 정숙하면서 자애로운 부덕(婦德)을 지닌 분으로 신사년(辛巳年 1521)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57세로 그해 3월에 공의 옆에 모셔졌다. 공은 슬하에 이남이녀(二男二女)를 두셨는데 맏아들 훤(萱)은 계유년(癸酉年 1513)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으나 공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은 명(蓂)인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착하여 공이 항상 우리 가문에 드디어 정승감이 태어났다. 「吾家始有政丞」이라고 하셨으나 애석하게도 아들 명(蓂)이 등과(登科)하는 것도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후에 아들 명(蓂)이 좌의정에 오름으로써 공에게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춘추관사 관상감(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春秋館事 觀象監)이 증직(贈職)되었다.

  ○ 명(蓂)(1496∼1572)

 자(字)는 요서(堯瑞)이며 호(號)는 동고(東皐)이다. 공은 연산 2년(1496) 4월 19일 한성부 소용동(漢城府 所用洞)에서 연산현감(連山縣監) 보간(輔幹)의 둘째 아들로 탄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천품이 단아하고 총명하였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어려서 경서를 종형인 근재공(近齋公) 전(jeon.gif)으로부터 배웠으며, 이때에 배운 경학과 경세사상이 공의 앞날에 있어서 일생을 좌우하였고 벼슬길에 올라 목민관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옥당(玉堂)에 올라 재상이 될 때까지 공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공은 불행히도 조실부모(早失父母)하니 공이 18세 되던 해인 중종 9년(1514)에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을 집상하였으며, 25세 되던 중종 16년(1521)에 모친상을 당하여 역시 삼년상을 집상했는데 상례(喪禮)와 제사는 모두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한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중종 20년(1525) 29세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며, 중종 23년(1528) 32세에 문과에 등재되어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로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봉교(奉敎)로 승진되었고 중종 26년(1531)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체임(遞任) 되었다가 중종 28년(1533)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승진되었고 다음해(1534)에는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겼다. 중종 31년(1536) 공이 40세 되던 해에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 올 때 모든 행동이 중용을 얻었다고 한다. 다음해 (1537)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임명되고 곧이어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제수받았다가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으로 체임되었으며, 42세 되던 해(1538)에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응교(應敎)로 특진되고 얼마 안되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선임되었다. 중종 34년(1539) 3월에 관북지방에 큰 흉변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는 처절한 지경에 이르매, 공이 구휼관(救恤官)으로 파견되어 진휼(賑恤)에 성력을 다 했으며, 간관(諫官)으로 있을 때, 권신(權臣)들의 미움을 사, 외직으로 밀려났다. 이 해에 홍주목사(洪州牧使), 이듬해에 담양부사(潭陽府使)로 좋은 치적을 거두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명종 2년(1547) 대사간(大司諫), 이듬해에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는데, 이기(李gi.gif)가 권세를 휘둘러, 사류(士類)를 박해했으나, 모두들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비판하기를 꺼리는 지경에, 공이 대사헌(大司憲)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이기를 규탄하여, 그 횡포를 줄였다. 동 4년 임금이 전현임(前現任) 강관(講官)을 모아 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되었으며, 그 해 여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춘추관(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를 거쳐, 그 겨울엔 황해관찰사(黃海觀察使), 동 7년(1552) 대사헌(大司憲)에 옮겨, 직언(直言)이 거슬린 바 되어 파직, 그 이듬해엔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임명되었다. 어느날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入侍), 이때 모진 가뭄으로 하여 공이 『천도(天道)를 순조롭게 함은 먼저 민심을 기쁘게 함에 있으니, 지난 을사옥사(乙巳獄死‥명종이 즉위하면서 척신인 大尹 尹任과 小尹 尹元衡의 반목으로 인한 士林의 禍獄)에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람이 많았으니, 그들의 사무친 원한을 풀게 하여, 하늘 뜻에 순응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아뢰었다. 역적을 감싼다하여 권간(權奸)으로부터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 감히 이런 말을 내지 못하던 때, 공의 거리낌 없는 제언이 임금을 감동시켜, 공은 곧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으며, 이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면서, 한결같이 중추부(中樞府) 경연(經筵), 의금부(義禁府) 등의 직을 겸했다. 동 12년(1517)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cham.gif贊),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했으며, 동 14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우찬성(右贊成)이 되었고, 동 16년엔 좌찬성(左贊成)으로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다. 동 19년(1564)에 대광(大匡)에 올라,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그 이듬해 공의 나이 70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궤장(gue.gif杖)을 특사(特賜)했다. 그해 가을, 지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화를 입은 이들의 명단을 보고하라는 왕명에 대해, 혹은 그 죄명을 분등하여 보고하자는 의견이 있어, 공은 『을사사건의 죄명이란 모두 이기(李gi.gif), 윤원형(尹元衡)의 무리가 꾸며서 조작한 것인데, 이제 만일 분등하여 보고한다면 이는 그 죄를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여 극력 반대했으나 관철하지는 못했다. 동 21년 좌의정(左議政)에 승진, 병을 이유로 여러번 사직하고자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듬해 명종임금이 승하하여 명나라에 시호(諡號)를 청하려함에, 당시의 시정기(時政記)를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정원일기(政院日記)가 있는데 구태어 사국(史局)의 기록을 본다는 것은 후일의 폐단을 남기는 것일 뿐이다』고 반대했으니, 공의 처사의 주밀함이 이러했다. 선조임금이 즉위하고, 처음 경연에서 공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입시하여 『제왕의 효도로는 선왕의 뜻을 계술(繼述)함이 가장 중한데, 선왕께서는 을사사건의 그릇된 사실을 밝혀 알고 억울한 이들을 복권시키려다가 이루지 못했으니, 이 일이 새정부의 당면한 급선무다.』라고 아뢰었던 바, 이로 인하여 드디어 신원(伸寃)의 특전이 내리게 되었으니, 이때는 공의 공이 크다 하겠다. 그해 겨울 공이 노병(老病)으로 사직을 간청함에, 임금은 『염치의 도리를 배양함은 대신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데, 경같이 충성되고 근실한 이가 마땅히 태보(兌輔‥三公의 자리)에 오래 있어야 한다.』하여 윤허하지 않아, 공이 닷새를 두고 간곡히 청함에 임금은 마지못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체임시켰다. 이윽고 중풍으로 눕게 됨에, 왕이 전의(典醫)를 보내어 다스리게 했으며, 선조 3년(1570) 가을, 조신(朝臣)들 가운데서 을사사화 때 봉해진 간신들의 훈작(勳爵)을 삭탈하기를 주청하려 했으나, 앞장설 사람이 없어 망설인다는 말을 듣고, 공은 『이는 내가 분통히 여기던 일이다.』하며 병중임에도 즉시 글을 초하며, 간절한 뜻으로 상소했다. 공은 직책을 행하지 못하면서 국록을 받을 수 없다 하며 굳이 사양했으나, 왕은 유사에 명하여 되보내주곤 했다. 공의 병세가 위독함을 듣고, 왕은 전의(典醫)를 보내는 한편, 승지를 보내어, 공의 남기고 싶은 말을 듣고 오라 했는데, 그들의 도착을 기다리지 못한 채 선조 5년(1572) 8월 초6일 향년 77세로 서거하니, 왕이 매우 슬피 여겨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초종(初終) 범절을 관에서 갖추어 보살피게 했다. 공은 성품이 침중근후(沈重謹厚)하고, 몸가짐이 단정했으며, 4대의 임금을 이어 섬겨 삼공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청렴 검소하여 그 집은 겨우 몸 담을만한 오막살이였으니 명종 6년(1551)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됨은 당연한 일이다. 공이 서거하자 왕은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수찬(修撰)케 하여 「정간(貞簡)」의 시호를 내렸고, 각심리(恪心里)에 장사지냈는데, 묘갈명(墓碣銘)은 대제학(大提學)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글씨는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심충겸(沈忠謙)이 써서 선조 7년(1574) 5월 공이 서거한지 2년만에 묘하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신도비는 1983년 11월 11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어 지금 각심재 경내에 비각을 세워 보호 관리 하고 있다. 또한 공의 후손들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계기로 경제(京第)를 버리고 충청도 연기군 전의현(忠淸道燕岐郡全義縣‥지금의 全東面 松城里) 송리재에 세거지(世居地)를 정하여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어 살아오고 있으며 마을 동쪽 양지바른 곳에 사당을 지어 공과 배위의 신위를 모시고 충정사(忠貞祠)라 묘호(廟號)를 지어 불천위(不遷位)로 제향(祭享)을 모시고 있다.

  ○ 응로(應老)

 정간공(貞簡公)의 아들이며 음사(蔭仕)로 목사(牧使)를 지냈다.

  ○ 성호(成虎)

 生父는 사직공의 四子 감찰 영(yeong.gif)의 子 景仁이고 정간공의 손자이며 응로(應老)의 아들로 系子되어 증직(贈職)으로 참의(cham.gif議)를 받았다.

  

 다. 사당(祠堂) 및 재사(齋舍)

  ○ 충정사(忠貞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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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사

 정간공(貞簡公) 동고(東皐) 명(蓂)의 사당으로 충남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 570-1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는 1933년 전동면 송성리 545에 삼간초옥으로 건립하였다가 1987년에 현 위치로 이전 중건하였다.  1985년부터 3개년에 걸쳐 공사를 하였는데 공사비는 전액 국고로 충당하였으며 충남도 지방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공사를 마쳤다.

  ○ 숭모재(崇慕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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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모재

 충정사(忠貞祠)의 재실(齋室)로 충남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 579-1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5년 9월 4일 공사를 시작하여 1996년 6월 4일 정간공(貞簡公) 500회 탄신일에 준공하였다. 

 

 

 

예안이씨 홈페지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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