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 시대 능묘와 부도(2) - 1219년 최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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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8-06 09:14 조회2,703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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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大金) 정우(貞祐) 7년 기묘년(고종 6, 1219) 9월 20일 주석 삼한 중서령 진강공(柱石 三韓 中書令 晉康公)이 안흥리(安興里) 집에서 돌아가셨다. 12월 24일 봉황산(鳳凰山) 서남쪽 기슭에 장례지내려 하면서, 큰아들 부추공(副樞公, 崔怡)이 묘지명을 나(*조충)에게 부탁하였다.--- 충(冲, 趙冲)은 공에게 외람되게 보살핌을 가장 두텁게 받아서 늦게까지 태석(台席)에서 모시게 하고, 여러 차례 ▨▨▨▨을 이어 오르게 하니 영예가 매우 많았다. 이는 공이 추천하고 칭송해 준 덕분이다. 하물며 부추공은 특히 인척이 되어 ▨▨▨▨ 타이르니, 감히 매끄럽지 못한 글과 무딘 붓으로서 변명하고자 한다. 보문각대학사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정당문학 상장군 판예부사(寶文閣大學士 金紫光祿大夫 守司空 尙書左僕射 政堂文學 上將軍 判禮部事) 조충(趙冲)이 짓는다. |
○ 최충헌(崔忠獻 : 1149∼1219)의 본관은 우봉(牛峰 : 지금의 황해북도 금천군 우봉면)으로 1196년 무신권력을 장악하여 이후 최이-최항-최의로 이어지는 60년 최씨 무신정권을 세운 인물이다. 묘지명을 찬한 조충은 조영인-조충-조계순-조변(*김방경 사위) 가계이다.
○ 최충헌 시대에 김방경의 조부 김민성(?년), 백부 김창(1206년), 부 김효인(1208년)을 비롯하여, 김방경의 정치적 후원자 최종준(1201년)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의 아들 최이 시대에 최종준, 김창, 김효인 등이 중용됨으로써 가문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 최충헌의 묘는 강화도(봉황산(鳳凰山) 서남쪽 기슭)에 있으며, 일제시대 그의 묘에서 도굴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靑瓷辰沙蓮花紋瓢注子(청자진사연화문표주자)는 국보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靑磁辰砂蓮華文瓢形注子)
서울 용산구 한남동 748-18(소유자 삼성문화재단, 관리자 리움미술관). 국보 제133호
이것은 경기(京畿) 강화(江華)에서 고려(高麗) 최충헌(崔忠獻)(1149∼1219)의 묘지(墓誌)와 함께 출토된 유물이므로, 최충헌(崔忠獻)의 졸년(卒年) 무렵 곧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 강화도 최충헌 묘에서 출토 (서울 리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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