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경 시대 능묘와 부도(4) - 1221년 원진국사 승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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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9-08-10 07:54 조회2,261회 댓글0건본문
4) 1221년 원진국사 승형 입적. 부도와 비(포항 보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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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시자(侍者)를 불러 옷을 갈아 입고, 단정히 승상(繩床)에 앉아 범패(梵唄)를 읊게 하였다. 이때 시자(侍者)가 스님께 임종게(臨終偈)를 청(請)하니, 스님은 눈을 뜨고 한참동안 노려 보고 이르시기를,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평생동안 한 게송(偈頌)도 지은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무슨 게송을 지어달라는 말인가? 하시고, 승상(繩床)을 세 번 내리친 다음, 곧 적요(寂寥)하므로, 가까이 가서 보니 이미 입적하시었다. 그러나 안색(顔色)은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여 온 몸이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10월 10일 문도(門徒) 50여명이 영여(靈輿)를 모시고 팔공산(八公山) 남쪽 기슭에서 화장(火葬)하였다. 다음 날 영골(靈骨)을 수습(收拾)하여 신구산(神龜山)으로 이장(移葬)하고 탑(塔)을 세웠다. 세수는 51이요, 법랍은 37(비문에 24는 오치(誤植)이다)세였다. 고종(高宗) 임금께서 부고를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면서 국사(國師)로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원진(圓眞)이라 증정(贈呈)하였다. 문인(門人)들이 스님의 탑비(塔碑)를 세우고자 조정(朝廷)에 건의(建議)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신(臣) 공로(公老)에게 비문(碑文)을 지으라고 하명하였다.--- 통의대부(通議大夫) 추밀원(樞密院) 우부승선(右副承宣) 시국자감(試國子監) 대사성(大司成)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이공로(李公老)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장사랑(將仕郞) 대관서승(大官署丞) 겸(兼) 보문각(寶文閣)교감(校勘) 김효인(金孝印)은 교칙(敎勅)에 의하여 쓰다.--- 갑신년(甲申年) 5월 일 사문(沙門) 혜적(慧寂)등이 비석을 세우다. |
○ 원진국사(1171∼1221)는 산양(경북 문경) 사람으로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수선사 계열이 아님에도 보조국사 지눌을 계승하였다고 한다.
○ 김방경의 아버지 김효인이 왕명에 의하여 1224년 비문 글씨를 썼다.
○ 보경사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622 보경사. 보물 252호
고려의 고승 원진국사 승형(圓眞國師 承逈 : 1171~1221)의 비. 이공로(李公老)가 짓고 김효인(金孝印)이 써서 1224년(고종 11)에 세웠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 이와 유사한 비석은 보광사 중창비(重創碑), 억정사 대지국사비 등에서 볼 수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 보경사부도(寶鏡寺浮屠)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산101-1 보경사. 보물 제430호
보경사 뒷산의 중턱에 서 있는 묘탑으로, 원진국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같은 경내의 원진국사비가 고려 고종 11년(1224)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보면, 부도 역시 이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겠으나 양식과 형식 그리고 수법상으로 보아 좀 더 시대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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