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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충숙공(휘 승용)묘지명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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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2-25 13:00 조회2,7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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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님의 글입니다. >

 
曆二年己巳歲三月甲戌宣授宣武將軍管高麗▨萬戶匡靖大夫密直使寶文閣大提學上護軍金公奉表朝元賀」
▨▨渡鴨錄江感疾薨于新安旅館是月庚辰靈柩乘傅入京都殯於孤柳洞私第越四月丙申葬于墨洞北山之麓嗚呼公諱承用永壽人」
曾祖皇正議大夫兵部尙書翰林學士充史館修撰官知制誥追封中書令諱孝印祖皇中奉大夫都元帥推忠宣力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三重」
大匡都僉議中賛上將軍判典理事世子師上洛公諱方慶父皇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典法判書上護軍諱瑄母皇朝靖大夫司宰卿薜仁儉之女也公之」
爲人沉重寡言溫和正直常怡怡如也長身斗膽眞得宰相體居官淸儉爲務元善於將人出將則與士卒同甘若動得人心臨民則吏不敢欺民」
皆仰如父母入相則履正奉公執節不移公平生交人淡若水臧否不掛唇迺以朋黨之忌逆志於先朝出牧完山州移刺益城府又遠移長興府靈光」
郡非人望也洎爲東藩兵馬使兼監倉安集淮陽道▨摩鎭合浦營兼慶尙全羅道巡問使是公望也甞肅持風憲折獄秋曺咸有令聞中」
外服其平公以門資年方十四直調天和寺眞殿二十三登進士第二十七帶弓箭入侍 皇元自衛尉注簿歷官通礼門祗候神虎衛長史」
秘書郎軍簿佐郎都官正郎監察侍史司宰少尹國子司業司憲掌令捴部議郎司憲執義判內府事議部典書同知密直」
事密直使皆綰大學士上將軍階奉常中顯中正奉順通憲至匡靖大夫此其詳也公先娵僉議賛成事元瓘一女生二男」
一女一子曰厚今爲西部副令二子曰致爲郎將女嫡開城判官柳之演生子女若干先公歿後娶大護軍▨資▨監察侍史朴」
永堅女皆無後嗚呼年登六十二年不謂殤官登金紫階官不謂卑爵齒則於公何歉之有哉但滿腹經論大度不得」
殿施於廟堂之上重爲三韓惜之二孤知予爲先君舊執泣血▨誌濡淚滋毫爲之銘曰」
鵠峯過遆 鴨水汪洋 勤王一夢 ▨尔還鄕 家塡喪亂 國失忠良 上絡功業 公盛傳揚 今忽卒去」
誰襲餘芳美于石 爲窀穸光 千秋萬祀 永矢不忘」
中正大夫密直司左副代言三司右尹寶文閣提學知製敎李 叔琪述」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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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력(天曆) 2년 기사년(충숙 16, 1329) 3월 갑술일에 선수 선무장군 관고려군만호 광정대부 밀직사 보문각대제학 상호군(宣授 宣武將軍 管高麗軍萬戶 匡靖大夫 密直使 寶文閣大提學 上護軍) 김공(金公)이 왕의 글[表]를 받들고 ▨▨(聖節?)을 축하하러 원(元)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압록강(鴨淥江)을 건너자 병이 들어 신안여관(新安旅館)에서 별세하였다. 그 달 경진일에 영구(靈柩)가 수레로 옮겨져 서울로 들어오니 고류동(孤柳洞) 집에 빈소를 차렸다. 4월 丙辛일에 묵동(墨洞) 북쪽 산기슭에 장례지내니, 아, 슬프다.
> 공의 이름은 승용(承用)이고, 영가(永嘉) 사람이다. 증조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이며 중서령(中書令)에 추봉된 효인(孝印)이고, 조부는 중봉대부 도원수 추충선력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사 세자사 상락공(中奉大夫 都元帥 推忠宣力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都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事 世子師 上洛公) 방경(方慶)이며, 아버지는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 전법판서 상호군(奉翊大夫 副知密直司事 典法判書 上護軍) 선(瑄)이다. 어머니는 조정대부 사재경(朝靖大夫 司宰卿) 설인검(薛仁儉)의 딸이다.
> 공은 사람됨이 침착하고 중후하며, 말이 적고, 온화하고 정직하여 항상 즐거워하였으며, 키가 크고 담력이 커서 참으로 재상의 모습을 가졌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청렴하고 검소하기에 힘쓰면서 특히 사람을 거느리는 데에 능하였으며, 장수로 나가서는 사졸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 하면서 감동시키고 인심을 얻었다.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이(吏)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니, 백성들이 모두 부모처럼 바라보았다. 재상이 되어서는 바른 길을 밟으며 나라를 위해 절조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평생 사람을 사귀면서 맑기가 물 같았고, 남의 잘잘못을 입에 담지 않았다.
> 붕당(朋黨)의 꺼림 때문에 선왕의 뜻을 거슬려 완산주(完山州)의 목(牧)으로 나갔다가 익성부(益城府)의 수령으로 옮기고, 또 멀리 장흥부(長興府)영광군(靈光郡)으로 옮기니,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동번병마사 겸 감창사(東藩兵馬使 兼 監倉使)가 되었다가, 회양도억마진 합포영(淮陽道 抑摩鎭 合浦營)을 안집(安集)하고, 경상전라도 순문사(慶尙全羅道 巡問使)를 겸하니 이는 공이 바라던 것이었다. 항상 엄정하게 풍기를 단속하고 형조[秋曺]에서 옥사(獄事)를 다스렸으므로, 모두 명성을 얻었으며 중외(中外)가 그 공평함에 탄복하였다.
> 공은 문자(門資)로써 겨우 14세에 천화사 진전직(天和寺 眞殿直)에 임명되고, 23세에 진사과(進士科)에 올랐으며, 27세에 궁전(弓箭)을 차고 원[皇元]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위위주부(衛尉注簿)로부터 통례문지후 신호위장사 비서랑 군부좌랑 도관정랑 감찰시사 사재소윤 국자사업 사헌장령 총부의랑 사헌집의 판내부사 언부전서 동지밀직사 밀직사(通禮門祗候 神虎衛長史 秘書郞 軍簿佐郞 都官正郞 監察侍史 司宰少尹 國子司業 司憲掌令 摠部議郞 司憲執義 判內府事 讞部典書 同知密直事 密直使)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대학사(大學士)와 상장군(上將軍)을 겸대하였다. 품계는 봉상대부 중현대부 중정대부 봉순대부 통헌대부(奉常大夫 中顯大夫 中正大夫 奉順大夫 通憲大夫)를 거쳐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공의 자세한 경력이다.
> 공은 처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원관(元瓘)의 큰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후(厚)는 지금 서부부령(西部副令)이고, 차남 구(玖)는 낭장(郞將)이 되었다. 딸은 개성판관(開城判官) 유지연(柳之演)에게 시집가서 자녀 몇 명을 낳았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다. 다시 대호군▨자▨ 감찰시사(大護軍▨資▨ 監察侍史) 박영견(朴永堅)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손은 없다.
> 아, 나이가 62세에 이르렀으니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벼슬이 금자(金紫)에 올랐으니 품계가 낮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관작과 나이에 있어서는 공에게 무슨 아쉬움이 있겠는가. 다만 가슴에 가득 찬 경륜과 큰 도량을 조정의 최고 지위에 올라 펼칠 수 없었으니 거듭 삼한(三韓)을 위하여 애석한 일이다. 두 아들이 내가 선군(先君)과 오래도록 친한 것을 알고 울면서 묘지명을 ▨(청하니?), 흐르는 눈물로 붓끝을 적시면서 글을 짓는다.
> 명(銘)하여 이른다.
> 곡령(鵠峰)을 돌아드니 압록[鴨水]의 물은 넓고 넓은데
> 임금을 섬기려는 한 자락 꿈이 문득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도다.
> 집안은 상(喪)을 치르노라 어지럽고 분주한데 나라는 충량(忠良)한 신하를 잃었도다.
> 상락공(上洛公, 金方慶)의 공업을 공이 성대하게 드날렸으나
> 이제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누가 남은 덕을 이어갈 것인가.
> 훌륭한 행적을 돌에 새겨 무덤을 빛내려 하니
> 천 년 만 년이 지나더라도 영원히 잊혀지지 않으리라.
> 중정대부 밀직사좌부대언 삼사우윤 보문각제학 지제교(中正大夫 密直司左副代言 三司右尹 寶文閣提學 知製敎) 이숙기(李叔琪)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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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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