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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집중탐구-판결사공(김효건)-5-- 김반(金槃)의 묘비명-김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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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3-28 11:39 조회2,5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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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 金槃 ]의 비명(碑銘)

저자 김상헌(金尙憲)

이명 자 : 사일(士逸)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공(金公)이 졸(卒)한 지 10년이지만 묘비(墓碑)에 글이 없었는데, 그 윤자(胤子)인 승지(承旨) 김익희(金益熙)가 나를 찾아보고 말하기를, “선인(先人)의 친구로서 세상에 살아 계신 분이 거의 없는데, 선군(先君)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공(公) 같은 분이 안 계시므로 감히 비명(碑銘)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서로 대면하자, 문득 전에 간청하였던 것을 거듭하여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미 약속한 말씀이 계셨으니, 서거(逝去)한 분에 대해 응낙(應諾)한 바를 그만두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아! 내 나이가 81세인지라 붓을 잡고 글을 쓰는 것은 맡을 바가 아니므로, 굳이 사양하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마침내 그를 위하여 서술하는 바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公)의 휘(諱)는 반(槃)이고, 자(字)는 사일(士逸)인데, 사계 선생(沙溪先生, 김장생(金長生))의 막내아들이다.사계 선생은 휘 장생(長生)으로 계통(系統)이 신라(新羅)에서 나왔는데, 신라 말기를 당하여 왕자(王子) 김흥광(金興光)이라는 분이 있어, 종국(宗國, 신라(新羅))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외방으로 나가서 광주(光州)에 은둔하였으므로, 그 자손들이 그곳을 본적(本籍)으로 삼았다. 고려(高麗) 왕조에 들어와서 8대(代)에 걸쳐 서로 잇달아서 평장사(平章事)가 되었기 때문에, 그 살고 있는 마을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하였다. 높은 관작이 서로 계승되니 대대로 삼한(三韓)의 명족(名族)을 세어 보아도 손가락을 먼저 꼽을 집안이 없는데 휘 약채(若采)란 분은 조선(朝鮮) 왕조에 들어와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2대(代)를 지나서 우의정(右議政) 김국광(金國光)에 이르러 적개 공신(敵愾功臣)과 좌리 공신(佐理功臣)의 두 공신에 책훈(策勳)되고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대사간(大司諫) 김극유(金克忸)를 낳았는데, 그가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회간(懷簡, 덕종(德宗)의 시호)을 추숭(追崇)하는 것은 올바른 예(禮)가 아니라고 힘써 간쟁하여, 의논을 비록 실행하지 못하였지만 그 곧은 명성(名聲)이 조정(朝廷)을 진동시켰다.
  고조(高祖) 휘(諱) 종윤(宗胤)은 군수(郡守)를 지냈고 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증조(曾祖) 휘(諱) 호(鎬)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조부(祖父)는 휘(諱) 계휘(繼輝)인데, 총명하여 재주와 학문이 당시에 제일이었으므로,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언제나 공(公)을 임금을 보좌할 재목이라고 칭찬하면서 반드시 공을 추천하여 으뜸으로 삼았는데, 이분이 세상에서 일컫는 황강 선생(黃岡先生)이다.
  선비(先妣)는 창녕 조씨(昌寧曹氏)인데,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조광원(曹光遠)의 손녀이고, 부사(府使) 조대건(曹大乾)의 따님이다. 공을 만력(萬曆)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 2월에 낳으매,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고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황강공(黃岡公)이 항상 그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집안의 가업(家業)을 이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점점 자라면서 남다르게 일찍 성숙하여 중형(仲兄) 김집(金集)과 더불어 모두 빼어났으므로, 사람들이 그들을 ‘쌍벽(雙璧)’이라고 일컬었다. 사계 선생이 대유(大儒)로 이름이 드러나자 공부를 배우러 오는 자가 날로 많아졌는데, 공이 중형과 함께 가정에서 시례(詩禮)의 교육을 받아서 명성이 세상에 대단히 알려졌으나 일찍이 분주하게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구하지 아니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가 사우(士友)들에게 존중을 받았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무고(誣告)하는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서얼(庶孼) 삼촌 두 사람이 연좌되어 고문(拷問)을 당하다가 죽었는데, 간사한 사람들이 평소에 사계 선생을 시기하다가 이때를 틈타서 종용(慫慂)하여 죽은 사람까지 추륙(追戮)하게 되어 장차 화(禍)가 아울러 그 문호(門戶)에 미치게 되었으나, 우연히 상언(上言)하는 자가 있어서 율(律)에 저촉되지 아니한 자는 마침내 중지하게 되었다. 공은 이때부터 세로(世路)에 자취를 끊어버리고 외부 사람들과 교제하지 아니한 채, 아버지와 형을 따라 전야(田野)에서 지낸 지가 10여 년이었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국가에서 반정(反正)이 일어나자, 전조(銓曹)에서 그를 추천하여 빙고 별제(氷庫別提)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아니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임금이 공주(公州)로 행차했는데, 공이 어가(御駕)를 따라서 공주에 가 있다가 정시(庭試)에 제3등으로 뽑혔으며, 임금을 호종(扈從)한 공로로써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으나, 곧 다른 사건에 연좌되어 파면(罷免)당하였다. 얼마 안되어 다시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좌랑으로 옮겨져 겸 사관(史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으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옮겼다가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수찬(修撰)에 임명되었고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다.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년) 문학(文學)ㆍ헌납(獻納)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가, 도로 교리(校理)가 되었는데, 당시에 새로 어사대(御史臺)의 우두머리가 된 자가 본래 광해군[昏朝] 때 인척의 사객(私客) 중에서 나왔으므로, 청의(淸議)에서 이를 비루(鄙陋)하게 여겼다. 공이 홍문관의 동료들과 함께 이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당시 재상(宰相)의 뜻을 거슬러서 ‘자기 당류가 아니라고 하여 공격한다’고 지적하자, 임금이 그 재상의 말을 받아들여서 옥당(玉堂)의 여러 관원들을 모두 물리치니, 공도 또한 파면당하였다. 오래 지나서 다시 헌납(獻納)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제배하지 못하였는데, 그 후부터 여러 차례 옮겨서 옥당과 간원(諫院)에 임명되었다. 인헌 왕후(仁獻王后)의 상사(喪事) 때에 대신(大臣)과 삼사(三司)에서 조정(朝廷)의 의논을 이미 정하였으나, 당시에 권력을 잡은 대신(大臣)이 홀로 잘못된 견해를 고집하여 상청(上聽, 임금의 들음)을 어지럽혀 미혹(迷惑)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통렬하게 그 잘못을 배척하였다. 교리(校理)에서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옮겨 임명되어 요행을 바라는 자를 억눌러 막아 반드시 공의(公議)를 따르게 하자, 당시에 낭관(郎官)의 체통(體統)을 지킨 사람이라고 칭찬하면서 공을 추대하여 그 으뜸으로 삼았다. 교리와 헌납을 거쳐 다시 전조(銓曹)에 들어가서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고,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어가(御駕)가 강화도[江都]에 행차하였을 때 체찰부(體察府)에서 청하여 막부(幕府)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양호(兩湖) 지방의 군정(軍政)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문학(文學)을 겸하여 삼자함(三字銜, 지제교(知製敎))의 직임을 띠었으며, 응교(應敎)ㆍ사간(司諫)ㆍ집의(執義)와 종부시(宗簿寺)ㆍ상의원(尙衣院)의 정(正)을 지내고, 천거되어 의정부 사인 겸 보덕(議政府舍人兼輔德)이 되었으며, 여러 차례 전한(典翰)에 임명되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 사계 선생의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예제(禮制)를 다하였다.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에 상복(喪服)을 벗고 다시 사인(舍人)ㆍ사간(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응교(應敎)로 교체되었고, 소명(召命)을 받들어 서울에 들어와서 전한(典翰)과 춘방(春坊)의 장관에 개차(改差)되었다. 그 사이에 장악원 정(掌樂院正)이 되어 도감(都監)을 겸하여 맡아 일이 끝나자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었으며, 병조 참지(兵曹參知)ㆍ대사간(大司諫)ㆍ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고, 차례대로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승진되었다가 형조(刑曹)로 옮겼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 대사간(大司諫)ㆍ대사성(大司成)ㆍ부제학(副提學)에 개차(改差)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도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서로(西虜, 청(淸)나라)의 대군(大軍)이 갑자기 이르자 창졸간에 어가(御駕)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서 위급하였는데, 공이 입대(入對)하여 간청하기를, “승여(乘輿, 임금이 타는 수레)가 성(城)에 올라가서 친히 네 성벽(城壁)의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힘을 다해 결전(決戰)할 것이며, 만약 천명(天命)을 이루지 못한다면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사직(社稷)을 위하여 함께 죽어서 선왕(先王)을 지하(地下)에서나 만나뵈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아들 김익희(金益熙)가 독전 어사(督戰御史)로서 남한산성을 지켰는데, 공이 이르기를, “우리들은 직사(職事)를 위해서 죽을 것인데, 다만 명백하게 의리를 좇아 몸을 바쳐서 이러한 마음을 나타내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시에 국사(國事)를 맡은 자들이 다투어 임금에게 오랑캐의 군영(軍營)에 나아가서 항복할 것을 권하였으나, 홀로 정온(鄭蘊)만이 이것을 불가(不可)하다고 말하면서 심지어 칼을 심장(心臟)에 꽂고 죽기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이 그와 함께 같은 견해를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아니하였다. 화해(和解)하는 일이 성립되자, 공은 부득이 어가(御駕)를 따라서 경성(京城)으로 돌아왔다. 관례대로 호종(扈從)한 공로를 상사(賞賜)할 적에 공도 또한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진되었고 다시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처음에 오랑캐가 맹약(盟約)을 어길려는 뜻을 드러내었을 적에, 우리 조정(朝廷)에서 사신을 보내어 다시 전날의 화호(和好)를 회복하려고 하였었는데, 나이 젊은 사류(士類)들이 불가하다고 큰소리치며 어그러져 부딪치므로, 공이 염려하여 힘써 그 의논을 조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세(事勢)가 크게 변하자, 사람들이 공의 말을 나중에 기억하였다. 당시 호란(胡亂)이 있기 처음에 여러 장수들로 적을 피해 머뭇거리다가 도망친 자는 모두 공로가 있는 구신(舊臣)과 세력 있는 가문이었으므로, 그 죄가 유배(流配)되는 데에 그쳤고, 그들에게 법(法)을 집행하자는 논의도 또한 곧 정지되었다. 공이 분개한 생각이 일어 사직(辭職)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군율(軍律)을 올바로 적용하는 것이 엄격하지 못합니다. 당초에 원수(元帥)의 직임을 맡았던 자들은 적군(敵軍)을 방치하고 임금을 유기(遺棄)하여 위험이 조석(朝夕)에 박두하였으나, 군사를 데리고 자기를 호위(護衛)하게 하면서도 끝내 와서 구원하지 아니하였으며, 강화도의 직임을 맡은 신하들은 변란에 임하여 도피(逃避)하였기 때문에, 종묘사직(宗廟社稷)을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참살당하게 하였으니, 그들의 죄는 머리털을 뽑더라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앞에 열거한 몇사람들은 이와 같이 나라를 저버렸는데도 오히려 현륙(顯戮)에서 도피하였으니, 이는 천하 고금(天下古今)에 아직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관직을 옮겨서 대사성(大司成), 예조 참판(禮曹參判), 부제학(副提學), 행이조참의 겸 동지경연사(行吏曹參議兼同知經筵事)에 임명되고, 또 바꾸어서 형조 참판(刑曹參判),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그때 유석(柳碩) 등이 적신(賊臣) 이계(李烓)와 힘을 합하여 사악(邪惡)한 의논을 주장하므로, 공이 추악하게 여겨서 홀로 그들에게 죄주자고 계청(啓請)하였다가 도리어 공격을 당하여 교체되어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었으며, 곧 대사간(大司諫)에 옮겨지고 또 대사헌에 옮겼는데, 진술(陳述)하기를, “정온(鄭蘊)이 본래 특별히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은 전하(殿下)께서 평소에 장려하고 허락한 바인데, 그가 심장에 칼을 꽂아서 죽지는 아니하였으나 그의 뜻을 볼 수가 있었으니, 어찌 정직(正直)하고 진실한 사람이 곧 계교(計巧)를 꾸며서 명예를 구하려는 마음을 내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의 의논이 엄한 법률을 적용하여 반드시 그에게 죄를 주려고 하였으니, 신(臣)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곧 한성 우윤(漢城右尹), 대사간, 이조 참판 겸 동지성균관사(吏曹參判兼同知成均館事)에 임명되었다. 공에게 서출(庶出) 아우가 있어 사람들에게 무고(誣告)당하여 체포되어서 의금부(義禁府)에 하옥되자, 공이 석고 대죄(席藁待罪)하였는데, 여러 소인배(小人輩)들이 이때를 틈타서 공을 사건에 연루시키고 친구들에게까지 뻗어 옮겨 재화(災禍)의 함정이 이미 설치되었으나, 임금이 그 무고한 것을 살피고 하교하기를, “듣건대, 참판(參判) 김반(金槃)이 대궐 문 밖에서 왕명(王命)을 기다린다는데, 쇠약하고 병든 사람이 오래도록 차가운 땅에서 있으면 반드시 몸을 더 상(傷)하게 할 것이다. 그로 하여금 물러가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옥사(獄事)를 살피는 여러 신하에게 분부하여 빨리 오명(汚名)을 깨끗이 씻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무사하게 되었다.

 

부제학(副提學)ㆍ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궁중(宮中)에 작은 오락(娛樂)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논이 있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서 극간(極諫)하기를, “인군(人君)은 만기(萬幾)를 다스리는 여가에 반드시 경사(經史)에 마음을 두어 나라의 흥망(興亡)한 자취를 거울삼아서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를 행하는 근원(根源)으로 삼으려는 것인데, 일찍이 와신 상담(臥薪嘗膽)할 때라 이르면서 완물(玩物) 따위에 뜻을 빼앗기는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인하여 한재(旱災)로 인하여 바야흐로 주(周)나라 ≪시경(詩經)≫의 운한장(雲漢章)을 강론(講論)하다가 인용(引用)한 내용이 너무나 알맞고 적절하여 임금의 뜻을 감동시키니,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고, 대사헌에 옮겨졌다. 공이 앞서 다리의 습진(濕疹)을 앓아서 자주 위독하였는데, 경진년(庚辰年, 1640년 인조 18년)에 이르러 병세가 점차 심해져서 4월 5일에 졸(卒)하니, 수(壽)가 61세였다. 이해 9월 15일에 회덕현(懷德縣) 치소(治所) 서북쪽 10리에 있는 전민촌(田民村)의 병향(丙向)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의 중형(仲兄)인 판서공(判書公, 김집(金集))이 항상 여러 조카들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비는 타고난 자질(資質)이 어질고 후하여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온화하고 편안하며, 가정(家庭)에서 보고 들어 익숙해져 자연히 도(道)에 가까워졌다. 일을 생각하는 것이 정밀하고 상세하며 자기를 규율(規律)하여 겸손하기 때문에 추호도 자랑하고 뽐내려는 뜻과 교만하고 인색한 기색이 없이 한결같이 돈독하고 신중하며 성실하고 정성스럽게 했기 때문에, 듣는 자들이 모두 그대로 믿어서 형제(兄弟)의 말로써 반간하지 못하였다. 평상시에는 온화한 기색을 반복하였으나, 사건의 시비(是非)와 당부(當否)를 논란(論難)할 때에 이르면 의연하게 분발(奮發)하였는데, 바깥으로 나타나는 감정을 가지고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였고, 얼굴빛을 바로 하고 올바른 말을 하여 사특(邪慝)한 의논을 여러 번 물리치니, 사림(士林)에서 의중(倚重)하게 여겼으며, 임금께서도 또한 평소부터 신임하여 은총과 예대(禮待)가 보통보다 아주 높았다. 친구들과 교유(交遊)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왕래한 사람은 겨우 친척과 고우(故友) 약간 정도였다. 집에는 너즈러진 상탑(床榻)이 없었고, 낭중(囊中)에는 남은 명자(名刺)가 없이 언제나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하였으며, 시사(時事)가 어려운 때를 만나서 형(兄)과 같이 동거(同居)하지 못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몸이 마칠 때까지 한스러워하였다.” 하였다.

 

공은 정사 공신(靖社功臣)ㆍ영사 공신(寧社功臣)에 녹훈(錄勳)되어 훈신(勳臣)에 참여하였고, 또 그 아들 김익희도 영국 공신(寧國功臣)으로서 훈신에 참여하여, 여러 번 증직(贈職)되어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에 이르렀다.

 

그는 재실(再室)을 두었는데, 초취(初娶)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진려(金進礪)의 따님이고, 후취(後娶) 연산 서씨(連山徐氏)는 참판(參判)을 증직(贈職)한 서주(徐澍)의 따님으로, 모두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추증(追贈)되었다. 서씨 부인은 매우 부덕(婦德)이 있어서 늙은 나이에 이르도록 내외간에 장엄(莊嚴)하게 지냈으므로, 안팎의 친족들이 그녀의 예경(禮敬)이 있음을 칭찬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여러 아이들을 거느리고 병화(兵禍)를 피하여 강화도[江都]에 피난갔는데, 적병(賊兵)이 성(城)에 가까이 오자 목욕(沐浴)하고 스스로 자결하였으며, 아들 1인과 따님 1인도 함께 어머니를 따라서 죽었으므로 나라에서 정려(旌閭)하였는데, 이리하여 사람들이 더욱 공의 가법(家法)에 바탕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공은 자녀 11인을 낳았는데, 남자가 6인이고 여자가 5인이다. 아들 김익렬(金益烈)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딸은 부사(府使) 이정(李淀)ㆍ대사헌(大司憲) 이후원(李厚源)ㆍ수찬(修撰) 장차주(張次周)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김씨 부인의 소출(所出)이다. 아들 김익희(金益熙)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지(承旨)이고, 김익겸(金益兼)은 생원시(生員試)에 장원(壯元)하였고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하였는데,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증직(贈職)하였으며, 김익훈(金益勳)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이고, 김익후(金益煦)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있다가 일찍이 죽었으며, 김익경(金益炅)은 진사(進士)이다. 딸은 진사 이해관(李海寬)과 심약제(沈若濟)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서씨 부인의 소출이다.

 

김익렬은 정자(正字) 황석(黃奭)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자식이 없다. 김익희는 참의(參議) 이덕수(李德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녀 3남을 낳았는데, 아들은 김만균(金萬均)ㆍ김만증(金萬增)ㆍ김만준(金萬埈)이고, 딸은 이세장(李世長)에게 시집갔다. 김익겸은 참판(參判) 윤지(尹墀)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김만기(金萬基)ㆍ김만중(金萬重)이다. 김익훈은 부사(府使) 김언(金琂)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고, 김익후는 청성군(靑城君) 심정화(沈廷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모두 나이가 어리다. 김익경(金益炅)은 현감(縣監) 윤제(尹隮)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사위 이정(李淀)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인석(李仁碩)과 현감(縣監) 이인하(李仁夏)이고, 딸은 생원(生員) 홍주삼(洪柱三)에게 시집갔다. 이후원(李厚源)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주(李週)ㆍ이선(李選)이고 딸은 김석주(金錫胄)에게 시집갔다. 장차주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장세명(張世明)으로 진사(進士)이고, 딸은 김원후(金元厚)에게 시집갔다. 이해관은 1남 1녀를 낳았다. 내외(內外)의 증손(曾孫)은 약간 명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목묘(穆廟, 선조(宣祖))가 세상을 다스릴 때에 여러 현인(賢人)들이 천양(闡揚)되었는데, 우계(牛溪, 성혼(成渾))ㆍ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도학(道學)과 황강 선생(黃岡先生, 김계휘)의 문장이로다. 연원(淵源)이 서로 유통하여 이에 사계 선생(沙溪先生, 김장생)을 출현시켰고, 쌍벽(雙璧)이 잇달아 빛났으므로 가풍(家風)을 추락시키지 않았네. 세상에 나가 등용되니 사람들이 그들과 더불어 다투지 못하였는데, 시대가 어려운 때를 만났으나 실천한 도(道)는 더욱 곧았도다. 한양(漢陽)에서 피난에 수행하여 대의(大義)가 해와 별같이 빛났으며, 조정의 간사한 자를 밝혀내니 음흉하고 사악(邪惡)한 자가 저절로 드러났네. 임금의 은정(恩情)은 더욱 두텁고 선비들의 기대는 더욱 높았네. 사헌부(司憲府)의 우두머리 자리와 전조(銓曹)에서 다음 자리 맡았으니, 중도(中途)에 밟은 자취는 천리마(千里馬)의 빠른 걸음이었도다. 저 옛날 숲을 바라보니 울창한 가성(佳城, 무덤)인데, 청오(靑烏, 지가서(地家書)) 화협한 곳이니 심오한 이치로 보아 편안하리로다. 돌을 깎아 문장을 표현함에 있어 꾸밈없이 글을 소박하게 썼는데, 앞으로의 끝없는 세월 동안에 군자(君子)들 반드시 경의(敬意)를 표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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