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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김효인(상서공)의 좌주 琴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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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3-04-08 12:58 조회2,5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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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 琴儀 ]

 

금의(琴儀)1)는 자가 절지(節之)이고, 처음 이름이 금극의(琴克儀)로 본래 봉화현(奉化縣 : 지금의 경상북도 봉화군) 사람인데, 뒤에 김포(金浦 :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를 그 본관으로 받았다.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용식(琴容式)의 후손이다. 그는 외모가 훤칠하고 기국과 도량이 웅대했으며, 젊어서 열심히 공부해 글을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여러 차례 낙방했다. 청도 감무(淸道監務)로 나가서는, 강직한 성품으로 조금도 굽히는 일이 없으니, 백성들이 철태수(鐵太守)라 불렀다. 명종 14년(1184)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2)하여 내시(內侍)에 적을 두었다.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잡고서 문사(文士)3)를 구하자 이종규(李宗揆)란 사람이 금의를 천거하니 그로부터 최충헌에게 아첨하여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되었다. 신종 때에는 상서우승(尙書右丞)·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태자찬선대부(太子贊善大夫)로 임명되었으며, 일찍이 두 학사와 세 대부를 겸직하자 세상 사람들이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한때 집정자의 뜻을 거슬러서 장작감(將作監)으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좌간의대부로 임명되었다.

 

희종 4년(1208)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과거를 주관하여 황보관(皇甫瓘)4) 등을 선발하였다. 황보관 등이 최충헌을 찾아뵙자 최충헌이 따라온 방상(坊廂)5)에게 은병(銀甁) 각 한 벌씩을 주었고, 최이(崔怡)도 은병을 주었다. 또 왕을 알현하니 친히 술과 과일을 내려주고 이어서 각 방상의 노래와 풍악을 관람한 후, 황보관 등 일곱 명을 내시에 소속시켰다. 금의가 최충헌과 가까웠으므로, 이와 같이 후한 예로 대우한 것이다. 곧이어 지주사(知奏事)·지이부사(知吏部事)로 옮겼다. 금의가 오래 동안 요직을 맡아 아뢰거나 대답하는 것이 왕의 마음에 들었으므로, 왕이 그를 의지하고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금의가 자못 권세를 믿고 교만 방자해지자, 황보관은 금의의 숙직소로 찾아가서 시로써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넌지시 말하였다. 이일로 금의가 최충헌에게 고자질해 황보관을 섬으로 유배보내니 그 때의 여론이 그를 야박하다고 여겼다.

 

강종이 즉위하자 금나라가 책봉사를 보내왔는데, 그들이 의봉문(儀鳳門)6)의 가운데 정문으로 들어오려 하자, 조정에서는 반대하는 의견이 높았다. 예법을 따지는 말들이 오가자 왕이 금의를 사신들에게 보내 설득하게 했다. 금의가, “천자께서 천하[方岳7)]를 순수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었던 일인데, 만약 대국의 천자께서 소국으로 왕림한다면 어느 문으로 들어와야 하겠소?”라고 묻자, 금나라의 사신이, “천자께서 가운데 문을 버려두고 어디로 출입하겠소?”라고 대답했다. 금의가, “그렇다면 신하된 사람이 임금이 다니는 정문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소?” 하고 반문하니, 금나라 사신이 크게 탄복하고, 결국 서문으로 들어왔다. 왕이 기뻐하며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로 벼슬을 올려 주었다.

 

고종 2년(1215) 정당문학(政堂文學)·수국사(修國史)로 임명되고, 곧 수태위(守太尉)·중서 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있다가 5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고쳐 임명되었다. 어느 해의 팔관회(八關會) 때 어사대(御史臺)의 관리가 무슨 일로 대정(隊正)의 멱살을 잡고 모욕을 주었더니, 주장(主將)이 고함을 지르며 기왓장과 돌멩이를 어사대의 장막으로 마구 던졌다. 날아온 돌덩이가 재상들의 장막을 스치고 지나가자 금의가 크게 노하여 뜰에 내려서더니 성난 목소리로, “너희들이 임금과 신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정말 소란을 피우려거든 먼저 이 늙은이부터 죽여라.” 하며 꾸짖자, 주장의 기세가 누그러들어 소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수태보(守太保)·문하시랑(門下侍郞) 동 중서문하시랑평장사(中書門下侍郞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올려주었으며, 7년(1220)에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간청하자, 벽상공신(壁上功臣)의 칭호를 더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거문고와 바둑을 즐기다가 나이 일흔여덟으로 고종 17년(1230)에 죽었다. 왕이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면서 해당 관청에 분부해 관비로 장례를 치르게 했으며, 시호를 영렬(英烈)이라 하였다. 금의는 사람을 대할 때 면전에서 거리낌 없이 허물을 꾸짖었으므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여러 차례 과거를 주관해 훌륭한 인재를 많이 선발하였다. 「한림곡(翰林曲)」8)에 금학사(琴學士)라 일컬어진 사람이 바로 금의다. 아들은 금기(琴耆)·금규(琴揆)·금휘(琴暉)9)·금기(琴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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