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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서당[敬菴書堂] 중건[重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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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회 작성일13-10-30 11:19 조회3,2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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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암서당[敬菴書堂] 중건[重建]

 

      2013.10.20. 의성군 점곡면 사촌에서 경암서당[敬菴書堂] 중건[重建] 행사가 후손.종친 및 내빈 관계자 
      [來賓 關係者] 여러분이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 되었다.

      경암공[敬庵公] 휘회[諱淮]께서 이곳에 1626년 정암서당[鼎菴書堂]을 지어 후진들에게 강학[講學]하고
      이후 서원[書院]으로 승격[陞格] 원장[院長]으로 추대[推戴]되어 후학[後學]을 양성[養成]하던 건물인데 
      세월의 흐름으로 멸실[滅失]되어 오던중 이번 후손들께서 서당[書堂]을 복원[復元]하여 중건[重建] 행사를
      하였다.
安東金氏大宗會에서는 축하화환을 드려 중건[重建]을 축하[祝賀]하였다. 
      아래 종후손[從後孫] 창회[昌會]님의 경암서당 중건기[敬庵書堂 重建記]를 전재[轉載] 한다.

                  

 

                                                     경암서당 중건기[敬庵書堂 重建記]

      소주[韶州]고읍[古邑]의 북촌 사촌[沙村]마을은 원근에서 알려진 풍수[風水]의 명향[名鄕]으로 선조[先祖]
      감목공[監牧公]께서 조기정거[肇基定居]하신 곳이다. 돌아보건데 문물과환[文物科宦]과 충효탁절[忠孝卓   
      節]이 연세상승[連世相承]하여 울연[蔚然]히 남주망족[南州望族]이 되었으며 예악문화[禮樂文化]가 뚜렸한
      고벌[古閥]을 이루었다.

      희[噫]라 그 옛날 종선조[從先祖] 경암선생[敬庵先生]께서 후송재[後松齋] 전정[前庭]에 아담한 서당[書堂]
      을 지어 경암[敬庵]이라 현액[懸額]하고 스스로 호[號]를 삼았으며 매양 새벽마다 가묘[家廟]에 배알[拜謁]하
      고 자질[子姪]에게 경학[經學]을 강론[講論]하였다. 경의직방[敬義直方]을 써서 걸었으며 경재잠[敬齋箴]을
      송독[誦讀]하고 사람으로 태어나 평안하게 살면서 배움이 없다면 세상을 해치는 좀벌레가 된다고 훈회[訓誨]
      하였다. 곧 1624년으로 공[公]이 47세 당시였다. 무상세파[無常世波]에 4백년이흘러간 오늘 퇴훼[頹毁]를 
      상고[詳考]할 수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 학덕[學德]이 고매[高邁]한 송은선조[松隱先祖]의 서업[緖業]을
      소술[紹述]하고 백형[伯兄] 만취당선생[晩翠堂先生]과 훈지상화[塤篪相和]한 후송재선생[後松齋先生]의
      아드님으로 1578년 선조무인[宣祖戊寅]에 태어나셨다.15세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엄군[嚴君]을
      따라 의진[義陳]에 배종[陪從]하면서 촉석루에 올라 장월등남루[杖鉞登南樓]하니 남아보국추[男兒報國秋]의
      시[詩]를 읊었으니 개연[槪然]한 기개[氣槪]를 미루어 알 수 있다.

      26세에 생원시[生員試]에 입방[入榜]하고 백주 이명한[白州 李明漢] 용주 조경[龍州 趙絅] 제공[諸公]과 태학
     [太學]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수창토론[酬唱討論]하였다. 1612년 임자[壬子]에 명경과[明經科]에 등재[登載]하
      니 후송재선생[後松齋先生] 회갑[回甲]의 해 이다.그해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용[任用]되고 여러벼슬
      을  거쳐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신병[身病]으로 부임[赴任]하지 않았다.이어서 성절사[聖
      節使]서장관[書狀官]의 명[命]을 받아 연경[燕京]에 내왕[來往]하면서 일기체[日記體]기사[記事]와 뜻 깊은  
      시 [詩]를 읊어 조천록[朝天錄]에 남겼으며 서책[書冊]을 특사[特賜] 받았다.

      정묘[丁卯]시월[十月]에는 군위[軍威] 남계서원[南溪書院]에서 서애선생 위판을[西厓先生 位版]을 제주[題  
     主]  하고 서당[書堂]을 서원[書院]으로 승격[陞格] 도회[道會] 당시 사림[士林]의 추대[推戴]로 원장[院長]이
      되었다.뒤에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지우명사[知友名士]의 왕복[往復]서찰[書
      札]과  잡저문자[雜著文字]가 적지 않았으나 임거산인[林居散人]의 상사[常事]라 겸양[謙讓]하시고 자제[子
      弟]들의 문고[文稿] 수집[收集]을 허락하지 않았다. 후일[後日]몇 편의 시[詩]와 산초[散草]를 모아 실기[實
      記]를 엮었으니 애석[愛惜]하기 그지없다.돌아 보건대 공[公]이 서세[逝世]하고 창상수백재[滄桑數百載]라
      운잉[雲仍]의 가슴에 숭선상후의[崇先尙後]의 갸륵한 단성[丹誠]이 어이 없겠는가 임진년[壬辰年]의 가을
      창손[鬯孫] 희국보[熙國甫]가 문부로[門父老]의 뜻을 수렴[收斂]하여 삼간반퇴[三間反退]의 서당[書堂]을 
      복원[復元]하니 비록 규모가 화미[華美]하고 천석운물[泉石雲物]이 수려[秀麗]하지 못할지라도 조선[祖先]의
      체취[體臭]를 느끼는 듯 깊은 감회[感懷]에 젖어들었다.

      공정[工程]이 끝날 무렵 불영[不佞]에게 기문[記文]을 청[請]하였다.자고[自顧]하여 말학천식[末學淺識]이 
      어이 감당할까마는 초손[肖孫] 여러분의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성[誠]에 감히 사양[辭讓]할수 없어 삼가 옷깃
      을 여미고 우[右]와 같이 서술[敍述]하여 기문[記文]으로 삼는다.

      다만 후손[後孫]들의 창대무궁[昌大無窮]을 바라는 바이다.

 

                                                          2013년 계사 세초[癸巳 歲初]

 

                                                                                         종후손 창회 근기[從後孫 昌會 謹記]
                                                                                                               영양 남홍근 근서[英陽 南洪根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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