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묘정비문 -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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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4-08-04 14:55 조회1,898회 댓글0건본문
유명조선국 조증 요동백 김장군묘비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통훈대부 행 사헌부지평 박태유(朴泰維)가 글을 쓰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김수항(金壽恒)이 전액을 쓰다.
명나라 신종황제 47년 만력 무오년(1618년)에 오랑캐가 침입하자 천촉과 요계의 군사를 크게 출동시키고 도독 유정과 유격 교일기를 보내서 정벌하게 하고, 본조에 군사를 요구하였다. 본조에서는 2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강홍립(姜弘立)으로 하여금 원수로 삼고, 김경서(金景瑞)로 하여금 부원수를 삼아 유 ․ 교 두 장수와 함께 시일을 정하여 힘을 합하여 공격하였다. 이때 장군은 선천군수로서 좌영의 군사를 거느리고 경서의 군사에 예속되었다.
기미년(1619년) 2월 21일에 요하를 건너 오랑캐 땅으로 들어가다가 부차령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황제가 이미 권근하여 환관들이 용사하여 군사가 나오는 것이 계속되지 못하였고, 또 모든 군사가 경솔히 나가다가 전쟁에서 패하여 도독이 스스로 목매어 죽어서 우리 군사가 드디어 오랑캐와 서로 만나게 되었다.
장군은 수하의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주저하지 않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 지휘하여 진을 벌렸는데, 신기가 몹시 정가하였다. 진이 이미 이루어지자 홍립에게 고하기를, “속히 우영에 협력해서 적을 맞아 싸우게 하소서.”라고 하니, 홍립이 우영장 이일원(李一元)에게 “우리 군사가 만일 험준한 곳을 점령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일원이 따르지 않았다. 적 수천의 기병이 두 진 사이를 가로질러 끊자, 일원은 도망가고 이윽고 적 6만이 우리와 1리 밖에서 대진하고 정예병을 뽑아서 곧바로 그 앞을 침범해왔다. 장군이 포수로 전열을 삼아 일시에 탄환을 쏘니,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키고 적병은 퇴각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세 번 했는데, 유격장 교일기는 이때에 패해서 홍립이 진으로 돌아가서 바라보고 탄식하기를, “귀국의 보졸이 철기와 평지에서 서로 만나서 마침내 능히 이와 같이 하는구려!”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연기와 먼지가 사방을 막아서 포와 화살을 쏠 수 없게 되자, 적이 이에 힘을 합쳐 충돌해오니 우리 군사가 곧 바로 다 무너졌다.
장군이 손에는 활을 잡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서 홀로 버드나무 아래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두 명의 군사가 가지 않고서 한 사람은 기를 잡고 한 사람은 화살을 받들고 있었다. 장군은 화살을 잘못 쏘는 일이 없고 맞으면 반드시 겹쳐서 쓰러트려 적의 시체가 무더기를 이루었다. 죽은 자들이 대부분 오랑캐의 귀한 장수들이었으므로 오랑캐들이 매우 신비하게 여겼다. 장군은 갑옷을 겹으로 있었는데,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모여들어도 뚫지 못하였다. 화살이 이미 다하자 드디어 손에 칼을 쥐고 적을 치니, 투구와 목과 허리가 물건이 깨지듯이 한번에 떨어지는데, 소리가 마치 산을 깨뜨리는 것과 같아 매양 열 번 치면 열 번 모두 무너졌다. 이보다 앞서 홍립이 설인 하세국(河世國)을 오랑캐의 진영으로 보내자 오랑캐가 급히 우리 사람을 불렀으니, 이는 불러서 달래고자한 것이었다. 장군은 응하지 않고 크게 홍립을 꾸짖기를, “너희 무리들이 제 몸만 아끼고 나라를 저버렸기 때문에 서로 구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칼 또한 부러지자 빈주먹을 쥐고서도 오히려 더욱 스스로 분발하였는데, 어떤 한 적이 뒤에서 창을 던지자 드디어 땅에 쓰러져서 숨이 끊어졌으니, 이때가 3월 초 4일이었다. 그래도 칼자루를 쥐고 놓지 않으면서 노한 기운이 왕성하자 적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놀래어 감히 앞으로 다가오지 못하였다. 교유격 또한 자살하고, 홍립 ․ 경서 ․ 일원등은 모두 갑옷을 벗고 항복하였다. 오랑캐의 추장이 두 진의 죽은 시체를 묻게 하였는데, 장군은 유독 썩지 않고 칼자루가 그때까지도 주먹 안에 있었다.
조정에서 멀리 영의정을 증직하고 용만강(압록강)가에 사당을 세워 묘정비를 세우고, 그 자제들의 부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그의 아우 응해가 남긴 옷을 가지고 강가에서 초혼을 하고, 그 옷을 가지고 돌아와 철원의 선영 옆에 장사지내니, 당시의 문사들이 다투어 서로 뇌사와 만장을 지었다.
이듬해 경신년(1620년)에 신종황제가 조서를 내려 작위를 증직하고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처자에게 백금을 하사했는데, 그 고명하여 추증함이 몹시 성대하였다. 이 사실은 모두 충렬록에 실려 있다. 그 뒤에 잠곡 김육이 다시 그 시종의 일을 수습하여 국조명신록에 편입하였다. 장군은 신장이 8척이고, 말이 적었으며 기개가 뛰어났다. 술은 두어 말을 마셔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 18세에 맨주먹으로 맹호를 때려잡았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문득 부를 때마다 장군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또 금을 보기를 흙처럼 여기고 여색을 피하기를 원수와 같이 하였으니, 참으로 걸출하며 위대하고 굳센 대장부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효도와 우애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14세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는데, 병난 중이라 묘지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이상한 중이 그의 슬피 우는 것을 보고 장사지낼 곳을 가리켜 주어서 장사지냈는데, 장사지내고 제사지내는 예절이 비록 경학을 전수하는 학사라도 더 뛰어날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아우 응해와 함께 힘써 농사지어서 자급하였는데, 낮에는 사냥을 하고 밤에는 병서를 읽었다.
관찰사가 철원에 와서 크게 무사를 모아 놓고 무예를 시험하였는데 장군은 나이가 어린데도 활을 쏘면 과녁에 적중하니, 관찰사가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과거에 나아가기를 권하여 드디어 만력 을사과에 급제하고, 두 번 선전관이 되었는데, 그 득실과 높고 낮은 것에는 조용하고 욕심이 없었다. 백사 이항복이 추천해서 변방의 수령이 되어 장차 떠나려 할 때에 어느 귀가의 딸을 소개하는 자가 있었는데, 장군은 사양하기를, “저 귀가의 딸을 장차 처와 대등한 짝으로 삼는다면 명분이 어지러워 질 것이요, 첩으로 삼는다면 저 사람은 반드시 대우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년 시에 선조의 상사를 당하여 번화한 성기 속에서 막료의 일을 도왔으나 주색을 몹시 엄하게 끊었으니, 그 몸가짐과 행동을 제재하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효종대왕 때에 아우 응해의 말이 역옥에 연루되었으나,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응하의 아우요, 또 일찍이 오랑캐와 싸우다가 군사가 패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을 시도했었으니, 반드시 나라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고는 즉시 북병사에 임명하였다. 광해조에는 의리가 어둡고 막혔는데, 장군에 대해서는 흠모하고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오랑캐들까지도 탄복하더니 마침내 황상께서도 포상하고 총애하였으며, 우리 성고께서도 덕음이 또한 이와 같았으니, 이는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숭정 정묘년(1627년)에 의논하는 자들이 용만의 사당이 불편한 것이 있다고 하여 그 비석까지 철거하였는데, 금상 병오년(1666년)에 응교 김만균이 철원부사로 와서 비로소 사당을 짓고 제사를 받들었다. 현재 군수인 세귀와 병사 유비연은 장군의 내외손인데, 큰 비석을 세우고 와서 글을 기록해 줄 것을 요청해왔다. 일찍이 논해보건데, 장군은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며, 활쏘기와 말타기에 종사하면서도 조그만 행동까지 이미 삼갔다. 가도가 몹시 올바랐으니, 그렇다면 그 본이 이미 확립된 것이요, 출신하여 벼슬에 임해서는 영예와 모욕에 놀라지 않고, 종의 얼굴과 계집종의 무릎을 마치 내 몸이 더럽힐 것처럼 여겼으니, 그렇다면 그 지킴이 또한 확실한 것이다. 갑자기 큰 적을 만나서 만인이 모두 넋을 빼앗겼으나 조용히 진을 열고 몸을 빼어 싸움에 나아갔으니, 그 용명이 또한 크도다.
적이 싸우지 않고 불러 좋게 화친을 해보려고 하였으나 듣고도 못들은 척 하고 끝내 전사하였으니, 그 의리가 또한 정대하였다. 삼군을 격동하여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목숨을 다투어 한 번도 발꿈치를 돌리지 않았으니 ‘사람의 사력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버드나무에 의지해서 적을 쏘다 화살이 다 없어지자 칼로 치고, 칼이 부러지자 주먹으로 쳤으니 ‘백부를 당해낼 만하다.’고 하겠다. 죽어서도 오히려 칼을 쥐고 안색이 산 사람과 같았으며, 광평하고 저습한 땅에 모여 있었으나 오래되어도 썩지 않았으니, 그 충성스럽고 굳센 혼백은 또한 ‘죽음을 따라서 없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족히 장군을 위한 큰 것이 못되며, 오직 군신과 부자의 큰 윤리는 하늘의 떳떳한 법이요, 땅의 굳센 의리로서 이른바 민이인 것이다. 우리 조정은 두루 황조를 3백년동안 섬겨왔는데, 이제 신종황제에 이르러서 다시 나라를 만들었으니 의리로는 비록 군신간이지만 은혜는 실로 부자간과 같도다.
동쪽 땅에 있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라도 그 어느 것인들 황제의 덕에 젖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마는 저 이수가 감히 밀지가 있다고 일컬어 순을 버리고 역을 본받아 우리 예의의 나라로 하여금 모두 금수의 지경에 빠지게 하였으니, 만일에 장군의 한 죽음이 없었다면 장차 어떻게 천하 후세에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장군의 죽음은 천하의 대의(大義)를 밝히고 천하의 대경을 세운 것이니, 일월(日月)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 절개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오, 하해(河海)가 마르지 않는다면 그 공로가 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이 장군을 낸 것은 비단 우리 동방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장차 천하 만세를 위한 것이요, 주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춘추대의인 것이다. 하늘이 이미 훌륭한 일을 할 바가 있어서 내었다면 또한 할 바가 있어서 죽였을 것이다. 혹 어떤 자는 홍립이 구원하지 않아서 죽게 하였다고 허물하지만 어찌 그것이 장군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장군의 휘는 응하(應河)요, 자는 경희(景羲)이니 대대로 안동사람이다. 안동김씨는 실로 왕자의 후손이며,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이 그 원조이다. 그 아버지는 증 승지 지사장군이다. 만력 8년 경진(1580년) 3월 초 3일에 나서 죽을 때의 나이가 40이었다. 사당은 철원부 보개산 동서쪽 화전리에 있다. 숭정 기유(1669년) 6월 일.
숭정 갑신 후 40년 계해(숙종 9, 1683년) 10월 일에 세우다.
崇禎甲申後四十年癸亥十月 日建
금석문자료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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