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페이지 정보
김영환 작성일14-10-01 16:10 조회4,110회 댓글0건본문
삼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水軍)을 총지휘하는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종2품이다. 지휘 관청과 해군 기지로 삼도수군통제영을 두었다.
하삼도
하삼도(下三道)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일컫는 말이다. 이 지명은 1377년 6월에 쓰여진 《고려사》 133권 열전에도 등장한다. 따라서 그 이전에도 쓰였던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통제사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해인 1593년에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당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이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종2품 관직으로 법제화되었다. 1895년 고종 32년에 폐지될 때까지 조선 수군의 최고 통치 관청으로서 기능을 하였다.
하삼도 수군
조선의 수군은 하삼도인 전라, 경상, 충청과 평안도, 경기도 등지에 수영을 설치하였으며, 수영은 오늘 날의 해군 기지와 사령부에 해당한다.
통제영에서 관할하는 하삼도의 수군은 다음과 같다.
1.경상우수영
경상우수영(통제영)은 처음에 거제에 두었으나 1604년 고성(지금의 통영시)으로 옮겼다. 통제사의 본영(本營)을 ‘통제영’(統制營)이라 하는데, 처음에는 초대 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의 본영인 여수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이 통제영의 역할을 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제4대 통제사 이시언이 부임하면서부터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으로 옮겨졌다. 오늘날의 경상남도 통영시는 통제영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2.경상좌수영
경상좌수영은 경상좌도수군 절도사의 진영으로, 주로 왜구의 침입경로인 낙동강에서 경주지역까지의 수로 방어를 담당하였다. 최초로 설치된 곳은 부산 동래현이었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이전하였다가, 1592년 동래 남촌으로 옮겨갔다. 1635년 인조 13년에는 최초의 장소인 감만이포로 옮겼다가 왜관과 가깝다는 이유로 1652년 효종 3년에 다시 동래 남촌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3.전라좌수영
1479년 성종 10년 전라도 수군절도사영이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으로 분리되면서 내례만호진 자리에 설치되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4.전라우수영
1377년 고려 우왕 3년에 무안 당곶포에 수군이 처음 설치된 후, 1440년 세종 22년에 해남 황원관으로 옮겼다. 1465년 세조 11년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하여, 임진왜란 때는 명량해전의 주요 본거지가 되었다.
5.충청수영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었고, 간단한 형태의 방어진만 존재하다가 1447년 세종 29년 대마도 정벌과 함께 수군과 기지를 정비하고, 충청수영의 체계를 갖추었으며, 1466년 세조 12년에 충청수군절도사로 승격하였다.
역대 삼도수군통제사
제1대 이순신(李舜臣)제2대 원균(元 均)제3대 이순신(李舜臣) 제4대 이시언(李時言)
제5대 류형(柳珩)제6대 이경준(李慶濬)제7대 이운룡(李雲龍) 제8대 이기빈(李箕賓)
제9대 이경준(李慶濬) 제10대 우치적(禹致績)제11대 성우길(成佑吉)제12대 이정표(李廷彪)
제13대 이영남(李英男)제14대 류지신(柳止信)제15대 정기룡(鄭起龍)제16대 김예직(金禮直)
제17대 정기룡(鄭起龍)제18대 원수신(元守身)제19대 구인후(具仁垕)제20대 이수일(李守一)
제21대 이완(李浣)제22대 구굉(具宏)제23대 신경원(申景瑗)제24대 변흡(邊潝)
제25대 구인후(具仁垕)제26대 신경인(申景禋)제27대 윤수(尹王肅)제28대 신경인(申景禋)
제29대 류림(柳琳)제30대 류정익(柳廷益)제31대 이곽(李廓)제32대 류림(柳琳)
제33대 이현달(李顯達)제34대 이완(李浣)
제35대 김응해(金應海)
1588(선조 21)∼1666(현종 7).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서(君瑞).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증 승지 지사(地四)이며, 형이 응하(應河)이다.
1616년(광해군 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희천군수(熙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후금(後金) 정벌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등을 파견하자, 형 응하와 함께 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20년에 강계부사·부령부사·인동부사·정주부사 등을 지내는 동안 청렴결백하여 칭찬을 많이 들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별장으로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켰다.
그러나 적병이 곧장 서울을 공격하자 그는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진로를 막고 고군분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적에게 포위되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살아났다. 그 뒤 1647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올랐다. 형제가 모두 무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제36대 이준한(李俊漢)제37대 류정익(柳廷益)제38대 황헌(黃瀗)제39대 이원로(李元老)
제40대 남두병(南斗柄)제41대 류혁연(柳赫然)제42대 정익(鄭膉)제43대 조필규(趙必逵)
제44대 김적(金逷)
본관은 안동. 개국공신 익원공 김사형의 후손이다. 무과 급제후 선전관,개천군수, 선천부사,은성부사를 거쳐 인조 27년 경상좌병사를 지냈다. 효종2년 정주목사, 평안병사,북병사(함경북도 병마절도사),동지중추부사, 전남병사, 효종10년 3월26일에 경상우병사 겸 3도수군 통제사를 제수받아 현종 원년 12월까지 병을 얻어 사직하는 날까지 남해바다를 지켰다.
제45대 박경지(朴敬祉)제46대 김시성(金是聲)제47대 정전현(鄭傳賢)제48대 박경지(朴敬祉)
제49대 이지형(李枝馨)제50대 이도빈(李道彬)제51대 류비연(柳斐然)제52대 김경(金鏡)
제53대 류여량(柳汝糧)제54대 신여철(申汝哲)제55대 이지원(李枝遠)제56대 노정(盧錠)
제57대 신류(申瀏)제58대 윤천뢰(尹天賚)제59대 이인하(李仁夏)제60대 전동흘(全東屹)
제61대 민섬(閔暹)제62대 원상(元相)제63대 변국한(邊國翰)
제64대 김세익(金世翊)1642-?
어영대장 응해의 손자이다. 1663년 무과에 급제하여 1685년 통제사에 올랐으나 1686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손자 김흡(金潝)이 101대 통제사가 되었다.
제65대 류중기(柳重起)제66대 이세선(李世選)제67대 신여철(申汝哲) 제68대 이성뢰(李聖賚)
제69대 심박(沈樸)제70대 목림기(睦林奇)제71대 최숙(崔橚)
제72대 김중기(金重器)
1653∼1735(영조 11). 충무공 김응하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증호조참판 세성이다.
자는 대기(大器). 1676년 무과에 급제, 여러 낮은 직책을 거쳐 1703년(숙종 29)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706년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북한산성 축조를 건의, 이를 실현하게 하였다.
그러나 작업과정에서 부정축재가 있었다고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713년 포도대장이 되었고, 1719년 통제사(統制使)가 되었으나 역시 탄핵을 받았다.
1720년(경종 즉위년) 한성부우윤, 이어서 포도대장·병조참판·한성부좌윤·어영대장·훈련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영조 즉위 후 소론으로 취급되어 파직되었다가 1727년(영조 3) 노론이 물러난 정미환국으로 다시 총융사로 기용되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순토사(巡討使)로 출정의 명령을 받았으나 타고갈 말이 없다는 핑계로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또한 반란 주동자의 한 사람이며 사돈간인 이유익(李有翼)을 숨겨주었다 하여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그 뒤 석방의 주장이 있었으나 감옥의 벽을 뚫고 내왕한 혐의를 받아 처형되었다.
제73대 이기하(李基夏)제74대 정홍좌(鄭弘佐)제75대 이홍술(李弘述)제76대 민함(閔涵)
제77대 류성추(柳星樞)제78대 원덕휘(元德徽)제79대 홍하명(洪夏明)제80대 이창조(李昌肇)
제81대 이상전(李尙香全)제82대남오성(南五星)제83대 오중주(吳重周)제84대정홍좌(鄭弘佐)
제85대 조미중(趙彌重)
제86대 김중원(金重元)
1653∼1716(숙종 42).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선경(善卿). 증조부는 어영대장 응해(應海)이다. 아버지는 증호조참판 세언이다.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자립하여 학문수양에 전력하였다. 1676년 24세에 장군의 후손답게 무과에 급제하였다.
1697년(숙종 23) 무관으로 윤지선(尹趾善)의 천거를 받은 바 있으며, 1711년 삼도통제사가 되었다. 영남에 있을 때 큰 가뭄이 들자 백성들의 구휼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길주에 있을 때도 가뭄의 피해로 백성들이 곤경에 처하자, 이들의 기아를 척결하는 데 공을 세웠다.
1711년 통제사로 있을 당시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힘쓰는 한편 현의 창고를 열어 서민들을 도와주었으므로, 군민(軍民)이 모두 힘을 합쳐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비석을 세웠다. 한편 글씨에도 뛰어나 초서·예서를 잘 썼다. 아들은제105대 통제사 金潗이다.
제87대 이우항(李宇恒)제88대 이석관(李碩寬)제89대 이택(李澤)제90대 윤의(尹懿)
제91대 이상집(李尙 香集)제92대 오중주(吳重周)
제93대 김중기(金重器) 72대에 이어 중임
제94대 이수민(李壽民)제95대 이봉상(李鳳祥)제96대 신익하(申翊夏)제97대 남태징(南泰徵)
제98대 윤오상(尹五商)제99대 이재항(李載恒)제100대 이복연(李復淵)
제101대 김흡(金潝) 1691-?
본관은 안동(安東). 어영대장 응해의 현손, 할아버지는 64대통제사 세익이며 아버지는 철원부사를 지낸 중휘이다. 1717년 무과급제하여 1723년(경종 3) 남병사(南兵使)를 거쳐 1727년(영조 3) 통제사(統制使)가 되었다. 1729년 우의정 이태좌(李台佐)의 신임을 받아 조현명(趙顯命) 등과 함께 『군공별록(軍功別錄)』을 다시 수정하기도 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취임하였다.
그 뒤 순탄하게 승진을 거듭하여 1733년에는 우포도대장이 되고, 2년 뒤에는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1737년 어영대장에 올랐으나 4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광해군 때의 명장이었던 응하(應河)의 후손으로 비록 문음(門蔭)으로 시작하였으나 대장까지 올랐다. 기강문란은 용서하지 않았으나 부드럽고 근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군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사행록이 전한다.
제102대 이수량(李遂良)제103대 정수송(鄭壽松)제104대 박찬신(朴纘新)
제105대 金潗 1687-?
어영대장 응해의 현손, 조부는 증 호조참판 세언世彦이며
86대통제사 중원의 아들로 1712년 무과급제하여 1733년 통제사가 되어 부자가 통제사가 되었으며 아들 창우도 무과에 급제하여 영원군수을 역임하였고 현손 선항善恒은 도총관을 지냈다. .
제106대 윤택정(尹宅鼎)제107대 구성익(具聖益)제108대 조경(趙儆)제109대 송징래(宋徵來)
제110대 이우(李玗)제111대 이의풍(李義豐)제112대 이언상(李彦祥)제113대 장태소(張泰紹)
제114대 정찬술(鄭纘述)제115대 구선행(具善行)제116대 조동점(趙東漸)
제117대 김윤(金潤) 1698-?
字 德甫 어영대장 김응해의 후손 아버지는 충청병사를 지낸 重呂이고 할아버지는 증 병조판서 世章이며1723년 무과에 급제하여 174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1754년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제118대 이장오(李章吾)제119대 이경철(李景喆)제120대 오연제121대 이윤성(李潤成)
제122대이태상(李泰祥)제123대이은춘(李殷春)제124대정여직(鄭汝稷)제125대윤태연(尹泰淵)
제126대이주국(李柱國)제127대이한응(李漢膺)제128대이국현(李國賢)제129대장지항(張志恒)
제130대 원중회(元重會)제131대 조제태(趙濟泰)제132대 구현겸(具顯謙)제133대 조완(趙岏)
제134대이방수(李邦綏)제135대이창운(李昌運)제136대이경무(李敬懋)제137대서유대(徐有大)
제138대 구명겸(具明謙)제139대 이한창(李漢昌)제140대 이방일(李邦一)
제141대 김영수(金永綬)1716 ~ 1786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1716년(숙종 42)에 태어났다. 여러 무관직을 거쳐 남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778년 (정조 2) 12월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1780년(정조 4) 제주도 내 목장에서 기르던 소와 말이 자주 분실되는 사고가 발생하자 각 목장의 경계에 담장을 쌓도록 했다. 또한 홍수로 하천이 범람해 민가가 물에 잠기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간성(間城)을 구축하도록 했는데, 이 간성의 규모가 길이는 550보(步)가 넘고 높이는 9척에 달했다고 한다. 같은 해 제주성에 소민문(蘇民門)과 수복문(受福門)의 두 성문을 새로 세웠다.
제주목사로 재임하는 동안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을 잘 보살피고 지방 목민관으로서 청렴한 생활을 했으며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해 제주 백성들로부터 추앙받았다. 1781년(정조 5) 2월까지 제주목사를 지냈다. 1786년(정조 10)에 사망했다
제142대류진항(柳鎭恒)제143대조심태(趙心泰)제144대이한풍(李漢豊)제145대신응주(申膺周)
제146대이윤경(李潤慶)제147대신대현(申大顯)제148대이득제(李得濟)제149대윤득규(尹得逵)
제150대 임률(任嵂)제151대 이인수(李仁秀)제152대 이윤겸(李潤謙)제153대 류효원(柳孝源)
제154대 이당(李溏)제155대 신대영(申大偀)제156대 오재광(吳載光)제157대 조계(趙啓)
제158대서영보(徐偀輔)제159대신홍주(申鴻周)제160대서춘보(徐春輔)제161대오의상(吳毅常)
제162대 신경(申絅)제163대 박기풍(朴基豊)제164대 조화석(趙華錫)제165대 이석구(李石求)
제166대이유수(李惟秀)제167대 김영(金煐)제168대 이항권(李恒權)제169대 류화원(柳和源)
제170대이완식(李完植)제171대임성고(任聖皐)제172대이정회(李鼎會)제173대이승권(李升權)
제174대 이응식(李應植)제175대 허계(許棨)제176대 백은진(白殷鎭)제177대 서상오(徐相五)
제178대 김건(金鍵)제179대 류기상(柳基常)제180대 이응서(李膺緖)제181대 이규철(李圭徹)
제182대김한철(金翰喆)제183대이희경(李凞絅)제184대류상정(柳相鼎)제185대임태영(任泰瑛)
제186대심락신(沈樂臣)제187대이경순(李景純)제188대신관호(申觀浩)제189대정규응(鄭圭應)
제190대 이봉주(李鳳周) -> 이재봉(李載鳳)으로 개명.제191대 김건(金鍵)
제192대이현직(李顯稷)제193대정규응(鄭圭應)제194대채동건(蔡東健)제195대이주철(李周喆)
제196대 권용섭(權容燮)제197대 이종승(李鐘承)제198대 신환(申桓)제199대 이규석(李奎奭)
제200대정낙용(鄭洛鎔)제201대정기원(鄭岐源)제202대이원회(李元會)제203대정운익(鄭雲翼)
제204대이규안(李奎顔)제205대민경호(閔敬鎬)제206대정기택(鄭騏澤)제207대민형식(閔炯植)
제208대 민영옥(閔泳玉)제209대 홍남주(洪南周)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