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삼절각순충비명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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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15-03-01 08:59 조회1,609회 댓글0건본문
安東金氏三世 殉忠碑銘幷序
普顏不花死於建寧其妻阿魯眞抱其子投井其女及妾孫女皆隨溺丕寧子死於甘勿其子擧眞及奴合節入敵中戰死載筆者特書之夏山故金氏祖子孫之殉其二家之亞流乎收殘兵追强敵誓不共一天至死而戰不休者二家之所未有也諱傑部將諱大壽主簿諱厚生學生金氏安東人高麗名將忠烈公諱方慶其大祖也檢校諱休號學堂學于圃隱先生吏參諱益精號雲庵以孝旌三傳有諱鑄僉知僉知生希文始家夏山希文生應東應東生部將部將生主簿主簿生學生萬曆壬辰部將公率子若孫赴金文烈公千鎰晉陽之陣文烈壯其勇略爲前鋒屢獲捷癸巳六月城陷文烈死之部將公被執罵不絶口而殉主簿公藏屍于巖穴抱子慟哭曰父死於君子不死於父非子遂諭聚餘卒追敵至鼎巖津矢盡而死學生亦死三世三人同死於事忠臣也難定幷錄原從多士請旌贈者凡二十一度猶未蒙恩典粵三百三十五年丁卯鄕人悼偉蹟漸湮豎石于回山里後孫在勳在烈屬余爲銘余亦夏山人曷可以病朽不文辭銘曰
父曰主辱死吾所欲一劍橫突萬騎奔蹶天時不利惟義與比子曰父死余生爲恥百里馳轉萬死一戰孫亦忘身三世成仁峨峨矗皐洋洋鼎濤百代千秋忠魄長留
光州 盧相稷 謹撰
안동김씨삼절각순충비명병서
보안불화가 건영에서 죽자 그 부인 아로가 곧 그 아들을 안고 우물에 빠져 죽었고 그 딸과 그 첩 손녀가 모두 빠져 죽었다. 배영의 아들이 강물에서 빠져 죽으니 그 아들 거진과 그 노비 합절이 적진에 들어가 전사하니 이 세상에 역사를 쓰는 자는 그 공덕을 높이 평가하였다. 하산[昌寧]의 옛 김씨 할아버지와 그 아들과 손자가 임란에 죽으니 앞의 두 가문에 뒤질까? 패잔병을 거두어 강한 도적을 쫓아 맹세코 한 하늘 밑에 살지 않기 위해서 죽음에 이르러서도 싸움을 그치지 아니함은 앞의 두 가문에도 없는 일이지 않는가? 부장 휘 걸(傑), 주부 휘 대수(大壽), 학생 휘 후생(厚生)은 안동사람이니 고려 맹장 충렬공 휘 방경(方慶)은 그의 이름난 할아버지더라, 휘 휴(休) 호 학당(學堂)은 포은 선생의 제자이며 이조참판 휘 익정(益精) 호 운암(雲庵)은 효성으로 3대를 전하였다.
첨지(僉知) 휘 주(鑄)가 휘 희문(希文)을 낳고, 비로소 창녕에서 살았다. 희문(希文)이 응동(應東)을 낳고, 응동은 부장(部將) 걸을 낳고, 부장은 주부(主簿) 대수를 낳고, 주부는 학생(學生) 후생을 낳아 만력 임진년에 부장공이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고 김문렬공 천일(千鎰)과 진주의 전장으로 달려가니 문렬공이 그 용맹과 지략을 장하게 여겼으며, 선봉장으로 나가 공을 여러번 세웠다. 계사년 6월에 성이 함락되고 문렬공이 죽고 부장공(휘 걸)이 사로 잡혔으나 오히려 왜놈들을 호통치면서 죽으니 그 아들 주부공(휘 대수)이 시체를 바위틈에 숨겨두고 통곡하며 가로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죽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며 남은 군사를 독려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정암진(鼎巖津)에서 싸우다가 화살이 다 없어져 죽자 그 손자 또한 죽으니 3대 세 사람이 같이 나라를 위해 죽었도다.
충신의 대를 한꺼번에 정하기 어려워 원종다사(原從多士)가 나라에 상소함이 스믈한번이나 되었으나 정표를 얻지 못했다가 335년이 지난 정묘년 지금에 와서야 고을 사람들이 그 거룩한 업적이 사라질까 걱정이 되어 비석을 구산리에 세우려고 후손 재훈(在勳), 재열(在烈)이 나에게 글을 구하거늘 나 역시 창녕사람이라 어찌 병들고 늙어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리오. 명왈
아버지 가로대 “임금이 어려움에 처하면 나는 죽어도 마땅하다” 하며 칼 한자루를 가지고 일만 군사에게 돌격하며 “하늘과 때가 이롭지 못했으나 오직 ‘의, 만한 것이 있겠는가?” 하였으며 아들은 가로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나 혼자 살아 있음이 부끄럽다” 고 여기고 백리를 쫓아가 죽을 각오로 싸우다가 돌아가셨으며 손자 역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으니 3대가 어진 것을 이루었도다. 높고 높은 촉석루와 흐르고 흐르는 정암 물결에는 백대 천추의 충성스러운 넋이 길이 머무르리.
광주 노상직 근찬 병서
창녕 조왈수 병전
전서공(성목)-학당공(휴)-익정-숙-덕녕-주-희문-응동-걸-대수-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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