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약재공 친필로 판각한 급암시집(及菴詩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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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15-03-03 11:06 조회2,600회 댓글0건본문
척약재공 친필로 판각한 급암시집(及菴詩集)
급압시집의 간행 경위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 선생은 척약재공(惕若齋公 : 휘 九容)의 외할아버지로 『급암시집(及菴詩集)』이 전해오고 있다. 이 시집은 한국 문학사(文學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서문과 발문에 따르면 1359년(공민왕 8년) 음력 7월 무신일(戊申日)에 향년 65세로 급암 선생이 작고한 직후부터 척약재공이 간직하고 있던 원고를 토대로 편집에 착수하여 1370년(공민왕 19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급암 선생의 대표작 중 하나인 <모란시(牧丹詩)> 맨 끝에 아래와 같은 글귀가 적혀 있는데, 서문과 발문을 참조하면 『급암시집』의 원고 수집과 정리는 전적으로 척약재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모란시(牧丹詩)
……益齋老人。以諸老所作牧丹及雜題無慮數百首。譔爲屛居遣悶集。此篇乃集中所載。今倂錄于此。至正庚子七月旣望。齊閔謹誌。
……익재 노인이 여러 노인들이 지은 모란 시와 잡제(雜題) 무려 수백 수를 찬술하여 『병거견민집(屛居遣悶集)』을 만들었다. 이 편은 그 책에 실려 있던 것인데 이제 여기에 기록한다. 지정(至正) 경자년(1360년, 공민왕 9년) 7월 16일 제민(齊閔 : 척약재공의 옛 이름)이 삼가 쓰다.
편집작업은 급암 선생 작고 직후인 1359년 12월부터 1362년 2월까지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전란에 휩싸여 중단되었다가 1362년 여름 이후에 재개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 선생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의 서문 내용을 보면, 이 무렵 편집이 거의 완료된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여말의 혼란과 홍건적과의 전쟁으로 인해 목판을 새기는 일이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행히 급암 선생의 문하생인 이이(李頤) 선생이 1369년(공민왕 18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경상도 안찰사로 재임하면서 목판을 새겨 책을 펴낼 수 있었다.(이색 선생의 <급암시집 서문> 참조)
▲ 이이(李頤) 선생의 경상도 안찰사 재임 기간. 『도선생안(道先生案)』, 국회도서관, 1970년, 23쪽.
급압시집의 판하본은 척약재공 친필
판각(板刻)할 때 글을 적은 종이를 뒤집어 나무판에 붙이고 기름을 칠하면 글자가 또렷해진다. 이때 나무판에 붙이는 종이에 적은 글을 판하본(板下本)이라고 한다.
보물 제708호인 『급암시집』은 5권 1책의 목판본인데, 표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원본은 총 88장(帳)이며, 이 가운데 20장(帳)이 훼손되어 후대에 필사(筆寫)로 보충해 놓았다(별첨 <급암집 판본 검토> 참조). 나머지 68장(帳)은 서문 일부를 제외하곤 비교적 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 서문과 발문의 내용, 인장(印章), 글씨체 등을 살펴보면 어느 분 필적인지 파악할 수 있다.
서문과 발문에서는 하나같이 『급암시집』 간행에 척약재공의 공력을 높이 사고 있다. 특히 이색 선생이 1370년(공민왕 19년)에 쓴 발문에는 이 책의 판하본이 척약재공 친필임을 밝히고 있다.
曩予旣爲金氏兄弟。序其外大父及菴先生之詩矣。及今與敬之同在成均。每見敬之授徒餘暇。輒屛靜處。日書一紙。豐暑弗輟。予益重之。蓋敬之生長外家。故知慕尤深。性喜文墨。故不怠如此。繕寫甫訖。先生門人李端公頤適按慶尙。鋟梓之功。由玆克成。豈天相敬之篤孝之誠耶。……
지난 번에 내가 김씨 형제를 위하여 그들의 외조부인 급암(及菴) 선생의 시집에 서문을 써 주었다. 지금 나는 경지(敬之 : 척약재공의 字)와 함께 성균관에 재직하고 있는데, 경지가 생도를 가르치는 가운데 여가가 있으면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 날마다 시집을 한 장씩 베껴 쓰면서 무더운 여름에도 그치지 않는 것을 매번 보고는 내가 더욱 중하게 여겼다. 아마 경지는 외가에서 나고 자랐기에 외조부를 사모하는 정이 더욱 깊고, 성품이 글 쓰는 일을 좋아하기에 태만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으리라. 베끼는 일을 막 끝냈을 때, 선생의 문인인 단공(端公) 이이(李頤)가 경상도 안찰사로 나가게 되어 문집을 간행하는 일이 이로 인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경지의 두터운 효성을 도와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급암시집』의 판하본은 척약재공 친필임을 알 수 있으나, 서문 3편과 발문 2편은 글씨체가 다르다.
◆ 서문ㆍ발문의 작성자와 작성 시기
구분 |
지은이 |
작성 시기 |
서문 |
이제현(李齊賢) |
미상(기록 없음.) |
백문보(白文寶) |
至正壬寅八月有日 : 1362년(공민왕 11년) 8월 어느 날 |
|
이색(李穡) |
至正壬寅日北至 : 1362년(공민왕 11년) 하지(夏至) |
|
발문 |
이색(李穡) |
庚戌春分前五日 : 1370년(공민왕 19년) 춘분(春分) 5일 전 |
이인복(李仁復) |
商橫閹茂姑洗旣望 : 1370년(공민왕 19년) 3월 16일 |
익재 선생 서문은 『급암시집』 첫머리에 적혀 있는데, 글 끝에 인장을 찍어서 이 글이 익재 선생 친필임을 나타내고 있다. 인장에는 ‘李氏仲思’와 ‘益齋’로 적혀 있는데, ‘仲思’는 자(字), ‘益齋’는 호(號)이다.
▲ 익재 이제현 선생 서문과 인장(印章)
두 번째 서문은 담암(淡庵) 선생이 1362년(공민왕 11년) 8월에 지었는데, 첫 장과 마지막 장이 훼손돼 후대에 보사(補寫)하였다. 이 때문에 글 끝에 찍혀 있던 인장도 함께 훼손된 듯하다. 원본은 초서체인데 반해 보사한 부분은 해서체에 일부 글자만 초서체라 쉽게 구분된다.
▲ 담암 백문보 선생 서문
세 번째 서문은 목은 선생이 1362년(공민왕 11년) 하지(夏至)에 지은 것으로 글 끝에 인장이 찍혀 있다. 인장에는 전서(篆書)로 ‘李穡’, ‘潁叔’, ‘韓山牧隱’이라 적혀 있다. ‘潁叔’은 자(字), ‘牧隱’은 호(號)이다. 이에 비해 1370년 봄에 지은 목은 선생의 발문에는 인장이 찍혀 있지 않으나, 필적은 서문과 같다.
▲ 목은 이색 선생의 서문과 인장
▲ 목은 이색 선생의 발문
▲ 목은 선생의 서문(왼쪽)과 발문의 글자체 비교
두 번째 발문은 초은(憔隱) 선생이 1370년(공민왕 19년) 3월에 지었으며, 끝에 인장이 찍혀 있다. 인장에는 ‘李氏克禮’, ‘京山憔隱’으로 적혀 있다. ‘克禮’는 자(字), ‘憔隱’은 호(號)이다.
▲ 초은 선생의 발문과 인장
이외에 제정(霽亭) 이달충(李達衷) 선생이 지은 급암 선생 묘지명이 있는데, 글씨체는 척약재공 필적과 같다. 또한 급암 선생 연보 끝에 익재 선생이 지은 <급암만사(及菴挽詞)>가 있는데, 익재 선생 필적이 아니라 척약재공 필적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급암시집』은 총 88장(帳) 중 20장이 훼손돼 원본은 68장만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익재 선생 2장, 담암 선생 4장, 목은 선생 3장, 초은 선생 2장 등 11장을 제외한 57장은 척약재공 친필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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