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歷代 緬禮記 (書雲觀正公派宗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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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근 작성일15-07-01 05:03 조회1,491회 댓글0건본문
書雲觀正公派宗會
歷代 緬禮記
옛 先人들은 吉凶禍福의 근원이 조상의 幽宅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믿고 정성을 다하여 千年之地의 吉地를 택해 묘소를 정하기 때문에 묘소는 곧 先祖의 정신과 의지가 담긴 까닭에 후손이 함부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기 1938年 番大方洞 천묘 및 1985년 廣州천묘와 같이 종중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로 옮기게 되는 경우가 있듯이 累代에 걸쳐 천묘가 거듭됨에 따라 파보마다 다르게 기재되어 후대에 혼란을 가져올 우려가 있어 당시의 시행자 및 참관자의 증언을 모아 천묘연혁을 기록하여 두고자 한다. ... 중략...
註면례(緬禮)[멸ː례][명사] <민속> 무덤을 옮겨서 다시 장사를 지냄. 또는 그런 일.
廣州선대묘역 천묘
이 묘역은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산 29번지 지금의 신묘역에서 東北方향으로 삼백m 지점인 능선절개지 아래 현 고속도로상에 위치했었다. 이곳에 선대조가 자리를 잡은 것은 荷塘公(諱 瞻)의 묘소를 모신 뒤 老隱公이 낙향 은거 하던 곳으로 지금도 舊 노은공의 묘소 좌측(현 고속도로 교각아래)하천을 이곳에서는 논소 또는
논수라고 부르고 있어 이는 곧 노은의 줄임말로서 노은공의 아호를 딴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하당공의 묘소는 계족정혈 申좌에 자리한 곳으로 일찍이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 선생이 잡은 명당이라고 전하여 왔다. 그러나 서기 1985년 5월 26일 천호동에서 충남 대전을 잇는 중부고속도로가 이 지역을 통과하면서 도로부지로 편입되어 이장하도록 통고를 받았다. 이에 종중은 즉각 현지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이곳은 안동김씨의 세장지일뿐만 아니라 난설헌의 실묘등 문화재로서의 現狀保存의 필요가 있음을 들어 노선변경을 건의 진정 탄원서등으로 각계요로에 십여차나 제출하였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난설헌의 실묘와 유작시 곡자의 주제인 쌍분묘(자녀)가 실존하여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 까지도 문인 지사의 참배가 줄을 잇고 학계의 관심이 높아 마땅히 문화재로 보존하여야 했다. 그러나 문화재로서 지정받지 못한 까닭에 勢不利하고 力不足하여 선대의 유적을 훼손하게 되니 참으로 통탄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荷塘公의 墓
公의 묘소는 서기 1584년 9월 4일 이곳에 모셔진 이래 묘소의 莎草하는 것을 노인들도 보지 못했다고 하듯이 견고함이 외형에서도 잘 나타나 있고 다른 묘소에 비하여 잔디의 생육상태도 매우 양호한 均衡잡힌 거대한 봉분을 이루고 있었다. 서기1985년 9월 9일 오후 1시경 봉분을 헐으니 지면으로부터 약 8尺 깊이에 幅 4척 길이 8척 정도의 石灰石 巖盤으로된 外棺이 안치됐고 그 우편에 약간 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조금 작은 규모의 또 다른 외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우선 우측의 외관부터 開棺을 하니 가득한 물속에 거의 부패된 木棺이 부셔져 물에 잠겨 있었고 遺骨 頭上의 毛髮로서 배위 恩津宋氏 임이 판명 되었다. 배위의 유골을 모셔 염습을 한다음 公의 外棺을 대형 “포크레인”으로 蓋板部를 완전히 깨트려 냈을 때 외관내부에는 간장 빛 같은 물이 가득 고인 가운데 목관이 반드시 놓여 있고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安東金公瞻之柩”라고 쓴 비단 銘旌이 數十겹의 輓詞가 포개진 맨 위에 물에 젖은 상태로 덮여져서 걷어내면 찢어지는 정도로 腐蝕이 되어 있었다. 내관은 섬세하고도 튼튼하게 짜여져 人力으로는 개관을 할 수가 없어 불경스러우나 역시 “포크레인”으로 개관하니 내관에도 더 진한 물이 가득 찬 속에 보통의 倍가 넘는 巨大한 屍身이 殮襲한 상태가 젖어만 있을뿐 완전한 모습으로 누워 계시었다. 그 상태로 신묘지로 옮겨 모실가도 했으나 무게가 인력으로는 옮길 수가 없고 비록 옮긴다고 해도 신묘지에 만들어 놓은 석관의 폭이 좁아서 그대로는 모실 수가 없다고 판단되어 염습을 풀고 遺骨을 收拾하여 모시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시신을 內棺 밖으로 모셔내는 일마저도 인력으로는 불가능해 내관의 옆 부분을 뜯고 기계의 힘으로 모셔낸 후 염습을 풀기 시작했다. 올이 굵은 삼베로 시신을 縱으로 세가닥을 갈라 묶고 橫으로 六 매를 各各 세 가닥씩 갈라 合 二十一 매를 매듭을 짓지 아니하고 끼워 묶기로 묶었으며 요와 이불은 누에꼬치의 풀솜으로 곱게 누벼서 만들었고 내의 바지저고리 도포 등 새로 만든 襚衣가 입혀져 있었다. 以上의 大斂을 완전히 해체하니 같은 순서로 小殮이 되어 있었고 다만 도포 대신 官服이 입혀져 있었다. 물도 들어가지 않으리만큼 단단히 여며지고 조여진 수의를 한 겹 한 겹 헤쳐 나가며 부피가 줄어들지 않아 이상한 예감이 들었으나 수의가 물에 젖어서 그러려니 하고 저고리를 헤치자 屍身이 腐敗하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거의 마지막 襚衣를 헤치자 약간 축축 할 뿐 완전히 젖지 않은 부분이 나왔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수의를 모두 제쳤을 때 피부가 완전하게 보존된 알몸의 屍身이 들어나면서 모든 사람들은 驚愕을 금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唐惶중에 우선 시신을 밖으로 모셔 냈다.
눈(目) 부분은 감은 형태로 눈자위가 분명했고 깡마른 듯한 얼굴 위에는 입주변의 수염과 치아, 코, 귀 등이 방금 사망한 사람과 같았으며 팔과 다리에는 손톱과 발톱이 길게 자랐고 전신의 피부는 물론 배 부분의 피부가 彈力을 유지하고 있어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401年 前에 사망하신 十二 代 祖父의 잠드신 듯한 尊顔을 직접 뵙게 되었다. 마땅히 새 수의를 만들어 염습을 해야 도리이나 갑자기 수의를 장만한다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밖으로 나온 시신이 급속히 傷하여 罪스러운 마음에 잠시를 지체할 수가 없어 미리 準備해간 簡略한 수의로 염습을 한 후 신묘지로 후손들이 직접 運柩하여 모셨다.
魂은 비록 떠났을지라도 不生不滅하실 先祖肉身을 못난 후손들이 毁損하는구나 하는 自責이 강하게 가슴을 울렸다. 微孫의 不孝에 대한 震怒를 거두시고 永世是寧 하시기를 伏望하옵니다.
公의 묘소는 봉분은 물론 壙中에까지 돌을 골라낸 흙으로 造塋하는 등 지극한 정성을 볼 수가 있었고 剛灰에다 白土를 다져 만든 광중은 바위보다 더 단단하게 成石이 되어 섬세하고도 견고하게 짜여진 목관과 함께 능히 천년은 보존될 수 있으리니 爲先의 정성임을 알 수가 있었다. 내관 바닥에는 톱밥과 왕겨숯을 깔아 수분을 흡수할 수 있도록 했고 좌우에는 창문틀을 넣어 地下의 幽宅일 지라도 生居家屋 生時侍奉의 지극한 효성이 담겨 있었다. 수의를 입히는 순서와 손톱과 발톱을 깎아 작은 주머니에 담아 좌수 우수를 表記하는 등 諸般 喪禮가 그 이전부터 오늘까지 家傳됐음을 알 수가 있으며 다만 아쉬운 점은 誌石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과 副葬品이 없었으니 이는 麗末까지도 殉葬制度에서 비롯한 부장품의 습속이 鮮初이후에는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시신을 모시는데만 황급하여 묘소에서 나온 수의와 官服을 收拾하지 못하였는데 壬亂 以前의 의복은 모두가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고 殘餘品中 하당공의 木棺 바지저고리 노은공의 妹씨 것으로 추정되는 치마저고리 銘旌 일점 諱 大敬 配位 原州元氏의 치마, 저고리 누비옷 등 16점을 충북대학교 박물관(관장 이융조 박사)에게 기증하여 原形을 복원 현재 중부고속도로 중부휴게소에 전시되어 있다. 아무튼 公은 서기 1584년 9월 4일 知禮縣(現 慶北 金陵郡 知禮面) 任地에서 卒하셨으니 그곳에서 경기도 廣州까지는 약 300여km나 相距한 곳으로 運柩에만도 인력으로는 十餘日은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어찌“미이라”(mirra)가 될 수 있었는지? 外棺은 巨大한 筒으로 된 바위 속에 묻혀있는 형태로 완전한 眞空狀態를 이루었고 관속에 물은 하루에 한 방울 혹은 두 방울씩 四百餘年동안 濕氣(結露)가 모여서 고인 물로 완벽한 防腐劑 役活을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남겼을 뿐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이 될 수 없는 不可思議한 수수께끼를 남겼다.
*西堂公 (諱 誠立)의 墓
족보기록에 의하면 公은 壬辰倭亂時 義兵將으로 殉節 屍身을 찾지 못하여 衣冠葬으로 모셨다고 되어 있으나 서기 1985년 9월 10일 천묘에서 유골의 두 발과 무릎사이(정강이)가 切斷 毁失된 상태로 再娶 南陽洪氏와 合窆으로 모셨음이 확인되었다. 란설헌의 묘소는 서당공 묘소 우편 13m쯤에 별도로 모셔져 있었고, 蘭雪軒의 遺作詩 "哭子"의 주제인 子女의 묘도 破墓결과 시신이 埋葬되어 있었던 흔적이 검게 남아 있어 傳해오는 事實과 附合했고 다만 뼈가 없음은 幼年期의 사망으로 軟骨이 사백여년 동안 완전히 腐蝕됐음이라 推測 된다. 같은 날 公과 兩 配位 및 子女墓도 신묘역에 이장 원형을 復元했다.....中略......
신묘역은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산 29번지 약 일천여평 규모에 사계단으로 조성하여 위로부터1단 좌측에는 영의정공 四位合窆을, 右側에는 荷塘公 兩位를 모셨고, 二단 左側에는 西堂公과 配位 남양홍씨 兩位를, 右側에는 老隱公 兩位를 모셨으며 三단 중앙에 蘭雪軒과 左側 아래쪽에는 子女의 墓를 移葬 復元하였고 4단은 주차장으로 꾸몄다. 묘역 주위는150m의 蓋瓦曲墻으로 둘러 雄大하고 莊嚴하게 꾸며졌으며 특히 서기1985년11월24일 전국시가비건립동우회(회장 김동욱 박사)가 중심이 되고 전국의 文人 學者의 협찬으로 건립한 詩碑가 더욱 더 묘역을 돋보이게 했으며 晩時之歎은 있으나 서기1986년6월26일 경기도지방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는 千年之地가 되었다. 우리 선대묘역은 그 규모의 雄大함과 華麗함이 空前無後하나 어찌 先代의 爲先之道에 만분지일에나 미치겠는가? 다만 이 시대에 태어난 후손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避하지 아니하고 精誠을 다함은 植松望亭의 念願이라 하겠다. 끝으로 西堂公의 衣冠葬, 老隱公 配位 同原, 蘭雪軒 子女墓의 眞假, 等은 언제고 확실한 기록정정이 있어야할 부분을 이번에 사실 확인을 거쳐 바로잡은 셈이 되었다. 대져 宗事란 기록관리 보다 于先하는 宗事가 있을 수 없고 墓所保存보다 더 高貴한 崇祖尙門이없음을 모든 宗人은 가슴깊이 새기는 계기로 삼아야할 것이다.
서기1989년8월 15일 遷墓委員 在峻 謹識
서운관정공파종회장 在峻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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