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하는 선조 광해군 때의 무신이다. 철원 출신으로 고려의 명장 김방경의 후손이다. 25살에 무과에 급제했으나 말직을 전전했다. 병조판서 박승종의 추천으로 선전관에 제수됐으나 권신들의 질시로 파직됐다. 29살에 박승종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자 비장으로 기용됐고 31살에 다시 선전관으로 임명됐다. 영의정 이항복에 의해 경원판관으로 발탁된 뒤 삼수군수·북우후 등을 역임했다.

십년 갈은 칼이 갑리에 우노매라
관산을 바라보며 때때로 만져보니
장부의 위국공훈을 어느 때에 드리울고


그가 변방으로 나간 30대 이후의 작품이다. 십년 동안 갈고 닦은 무술을 갑 속의 우는 칼로 비유했다. 변방을 바라보며 때때로 칼을 만지면서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때 장부의 위국공훈을 세울 것인가 하고 자신의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에게 그런 날이 왔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청했다. 이 때 평안도 좌조방장, 선천군수로서 부원수 김경서의 조방장이 됐다.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 정벌에 나섰다. 유정과 강홍립이 이끄는 조명 연합군은 심하의 부차에서 후금에 대패했다. 강홍립은 기회를 보아 청군에 항복하려했으나 김응하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끝까지 분전했다. 그러나 중과 부적으로 전사하고 말았다.

그는 목책을 설치해 수많은 적의 철기들을 막아냈다. 혼자서 큰 버드나무에 의지해 큰 활 세 개를 번갈아 쏘아가며 적병을 사살했다. 끝내는 화살이 떨어져 그만 적의 창에 찔려 죽었다. 적병이 그를 ‘의류장군’이라 했고 그 버드나무를 장군류라고 했다.

그는 조상인 고려의 김방경 장군처럼 역사에 남을 명장이 되고자 했다. 다른 장수들은 광해군의 밀명대로 청나라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울려고 하지 않았다. 강홍립과 김경서 등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에 투항했다. 김응하 장군은 명나라에 대한 명분을 내세워 끝까지 분전, 장렬하게 전사했다. 명나라에서 그런 그에게 요동백에 봉하고 용민관에 차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줬다.

함께 종군했던 이민환의 ‘책중일록’에 의하면, 후금에서는 “우리가 명과는 원한이 있으나, 너희 나라와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우리를 치러 왔느냐”라고 비판하면서도 화약을 맺자고 청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병자호란을 당한 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우리 민족 모두의 가슴에 타올랐다. 그러한 감정은 김응하를 기리고 추모하는 마음으로 나타나 조정에서는 그를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시호는 충무이며 철원의 포충사, 선천의 의열사 등에 배향됐다.
후대 국수였던 유찬홍은 ‘김응하 장군의 죽음을 슬퍼하며’ 시 한 수를 남겼다.

죽어서도 오히려 잡은 활을 놓지 않고
노한 눈 부릅떠 충성을 생각케 했네.
그 용맹 참으로 삼군의 으뜸이니
살아서 항복한 두 장군 부끄러워라.
돌아간 날 밤처럼 옛 성에는 달이 밝고
전쟁터 피비린 바람이 가시지 않았기에,
지금도 요하를 지나는 나그네들이
버들 아래에 전사한 영웅을 이야기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