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은암서(大隱庵序)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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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15-10-24 09:36 조회1,557회 댓글0건본문
대은암서(大隱庵序)
大隱庵序
大隱庵在明禮坊水下洞。枕橋臨溪。前對南山。正直國祀中麓。始國家定鼎漢陽。有金公孟獻。上洛公方慶五代1)惕若齋九容之子2)。以直提學在徙中。撤松都屋材。結構于茲。傳僉正自讓,郡守禮生,節度使胤宗,進士震紀。至吾外王父都事公大涉。家再傳爲吾有。內屋經先君中繕。名之曰大隱庵。客堂則吾所創置。今歸外孫申弼華。夫人營立室廬。孰不欲傳之子孫久遠。然而下自公卿庶人。所以固其基扃墻壁。辛勤以成就者。不易世而改壞者有矣。遇不肖子孫。鬻之爲酒食費者有矣。不幸數遭喪亂焚劫。又罕有以得全。見嗣守先業若斯之難也。此屋雖甚矮陋淺隘。不足備吉凶之所。而傳三姓二百六十餘年。不燬于兵燹。不屬于他人。中外相承。葆有舊物。吁亦幸矣。乃略敍其顚末以遺弼華。俾知吾所自出與屋之相傳有源有委。庶幾深惟永念。以無替張老之頌辭也。舊有尹校理繼善重修序文。篇末有曰。若余者學海跛鼈。文苑棲螟。空谷流年。已窮鼯鼠之五技。上林落照。未借鷦鷯之一枝。先君覽之憮然曰。恐是人不究於壽命。果以翌年年二十八終。今其文散佚不存。故偶及之云。
대은암(大隱庵)은 명례방(明禮坊) 수하동(水下洞)에 있는데, 침교(枕橋)가 시내에 닿아 있다. 앞쪽으로 남산(南山)을 마주 보고 있는데, 곧바로 국사당(國祀堂) 산중턱[中麓]으로 이어진다. 옛날에 새로 나라를 세워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할 때[定鼎]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 공의 6대손이자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선생의 손자인 김맹헌(金孟獻) 공이3)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이사하는 도중에 송도(松都 : 開京)에 있던 집의 재목을 뜯어다가 이곳에다 옮겨 지었는데, 첨정(僉正) 김자양(金自讓), 군수(郡守) 김예생(金禮生), 절도사(節度使) 김윤종(金胤宗), 진사(進士) 김진기(金震紀)에게 전해져 나(李敏求)의 외할아버지 도사공(都事公) 김대섭(金大涉)에 이르렀다. 이 집이 재차 전해져 내가 소유하게 되었는데 안채는 선친(芝峯 李睟光)을 거치면서 수선하여 ‘대은암(大隱庵)’이라 하였다. 사랑채[客堂]는 내가 처음 지은 것인데, 지금은 외손자 신필화(申弼華)에게 돌아갔다.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누군들 그 집이 자손에게 아주 멀리까지 전해지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그러나 높은 벼슬아치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본디 그 터와 문과 담과 벽이라고 하는 것이 부지런히 애써서 이룬 것이나, 세대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무너져서 다시 지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어리석은 자손을 만나서 그 집을 팔아 술값과 밥값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불행하게도 상란(喪亂)4)과 분겁(焚劫)5)을 자주 당하기도 하고, 그리고 온전히 손에 넣는 경우가 드물기도 해서 선업(先業 : 선대의 가업)을 계승하여 지키는 경우는 이처럼 눈으로 보기가 어렵다.
이 집이 비록 매우 작고 초라한 데에다 낡고 협소하여 길흉(吉凶)을 방비(防備)하는 데에는 부족할지 모르나 세 성씨[三姓]가 260여 년 동안 전해오면서 병화(兵火)에 불타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고, 중외(中外)6)에서 서로 계승하여 옛 물건을 보전한다면 이 또한 다행일 것이다. 이에 그 전말을 간략히 적어서 외손 필화(弼華)에게 남기니 집이 대대로 전해진 근원과 상세한 내용은 물론 내가 나온 근원을 알게 하고자 한다. 바라건대 사려 깊게 생각하고 헤아려서 장로(張老)의 송사(頌辭 : 축하하는 말)처럼 지나치게 분수에 넘치지 않아야 한다.7)
예전에 교리(校理) 윤계선(尹繼善)8)이 지은 대은암 중수(重修) 서문(序文)이 있었는데, 그 글 끝에 이르기를 “나 같은 자는 학해(學海)의 절뚝거리는 자라[跛鼈]9)요, 문원(文苑 : 文壇)에 끼어 사는 멸구[螟]일 뿐이다. 쓸쓸한 골짜기에 세월만 쏜살같이 흐르니 하잘것없는 날다람쥐 다섯 가지 재주 궁하고,10) 상림(上林 : 上林苑)11)에 해 지는데 뱁새(鷦鷯)는 나뭇가지 하나조차 빌리지 못했네.”12)라고 하였다.
선친께서 그 글을 보시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아마 이 사람이 수명(壽命)을 다하지 못할 듯하다.”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윤계선은 그 다음해에 나이 28세로 삶을 마쳤다. 지금 그 글을 잃어버려서 없는 까닭에 이 말까지 하게 되었다.
<주석>
註1) 五代 : ‘六代’의 잘못.
註2) 子 : ‘孫子’의 잘못.
註3) 상락공(上洛公)……김맹헌(金孟獻) 공이 : 원문 ‘오대(五代)’는 ‘육대(六代)’의 잘못이다. 충렬공에서부터 직제학공(김맹헌)까지 계대는 아래와 같으므로 번역문에서는 ‘五代’를 ‘六代’로, ‘惕若齋九容之子’를 ‘惕若齋九容之孫子’로 바로 잡았다.
• 충렬공 김방경(金方慶) - 선(愃) - 승택(承澤) - 묘(昴) - 구용(九容) - 명리(明理) - 맹헌(孟獻)
註4) 상란(喪亂) : 전쟁, 전염병, 천재지변 따위로 많은 사람이 죽는 재앙.
註5) 분겁(焚劫) : 분략(焚掠) -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빼앗음.
註6) 중외(中外) : 이 글은 대은암이 전해 온 내력을 적은 것인데, 외가인 안동 김씨 가문에서 사위인 전주 이씨 이수광 선생에게 전해졌다가 동주 이민구 선생이 물려받은 뒤 다시 외손인 평산 신씨 신필화 선생에게 집을 물려주면서 대은암을 타성에게 넘기지 말고 잘 유지하라는 당부를 적고 있다. 또한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 ‘중(中)’을 ‘내(內)’라 했으므로 ‘중외(中外)’는 ‘내외(內外)’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중외(中外)’는 ‘내손(內孫 : 親孫)’과 ‘외손(外孫)’을 뜻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註7) 장로(張老)의……한다 : 춘추시대에 진나라 조무(趙武)가 대저택을 준공하자 장로(張老)가 축하하는 말을 했는데, 그의 축하는 집이 크고 아름답다는 축하의 뜻 외에도 분수에 지나치다는 이중적 의미도 담겨 있었다. 동주 이민구 선생은 이 고사를 인용하여 외손자 신필화 선생에게 사치하지 말라는 경계를 한 것이다.
註8) 교리(校理) 윤계선(尹繼善) : 1577년(선조 10)∼1604년(선조 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이술(李述), 호는 파담(坡潭). 희굉(希宏)의 아들이며, 숙부 희정(希定)에게 입양되었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성균관전적·예조좌랑·병조좌랑·병조정랑·세자시강원사서·사간원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홍문관수찬으로 경연청검토관(經筵廳檢討官)을 겸직하였고, 1600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직중 설화(舌禍)로 황해도 옹진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개의치 않고 청렴하고 엄격하게 사무를 처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총명하고 인정이 있게 선정을 베풀어 관찰사의 추천으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그 뒤 평안도도사로 제수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성품이 탁월하고 큰 뜻이 있어 함부로 남에게 영합하지 않았다. 문장이 뛰어나 붓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만여언(萬餘言)을 지었으며, 특히 사륙병려문(四六騈儷文)을 잘 지었다.
註9) 학해(學海)의 절뚝거리는 자라[跛鼈] : 학해파별(學海跛鼈).
• 학해(學海) : 학문의 바다라는 뜻으로, 학문의 세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파별(跛鼈) : 절뚝거리는 자라.
註10) 날다람쥐……궁하고 : 궁오서지오기(窮鼯鼠之五技). 날다람쥐는 다섯 가지 재주가 있지만 궁하다는 뜻.
• 오서(鼯鼠) : 하늘다람쥐. 날다람쥐.
• 오서지기(鼯鼠之技) : ‘날다람쥐의 다섯 가지 재주’로 ‘변변찮은 재주라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뜻.
註11) 상림(上林 : 上林苑) : 정확히 무슨 뜻인지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상림(上林)’은 ‘상림원(上林苑)’ 즉 ‘임금의 정원’을 뜻하는데, 이수광 선생의 『지봉유설』에는 ‘上林落照’가 아니라 ‘秋林夕照’로 되어 있다. 이수광 선생은 윤계선 선생과 교유가 있어 『지봉유설』권14 문장부7(文章部七)에 ‘시참(詩讖)’을 남겼는데, 이 글 맨 끝에 윤계선 선생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 尹繼善而述。與余偕赴京。才調甚富。雖未精鍊。而援筆立成。甞和余詩。其結句曰。宦海風波惡。看吾早落帆。余憮然意謂必不究於宦路矣。竟不達而夭。其平日所爲詩。有曰。世事一春花落忙。一彈指處光陰忙。余將逝矣遊靑山。又有文曰。筆海窺豹。文苑棲螟。又曰。秋林夕照。未定鷦鷯之一枝。又曰。才如草螢。奈無輝於日觀。蓋短壽之驗云。
註12) 뱁새(鷦鷯)는……못했네 : 초료지일지(鷦鷯之一枝).
• 초료(鷦鷯) : 붉은머리오목눈이. 뱁새.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한번 힘을 내어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가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고 하였으며, 또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들어가 둥우리를 틀 때 나뭇가지 하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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