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苟全集 燕行贈遺 詩章- 金繼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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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근 작성일15-10-25 06:03 조회1,499회 댓글0건본문
▣ 苟全集 燕行贈遺 詩章- 金繼宗 ▣
北闕綸音下 임금의 명으로 북쪽 관문이 열리고
西天使節開 사신 일행이 서쪽을 향하여 출발하네
闕河千里路 천거 험한 관문 거치는 노정이지만
珍重好歸來 돌아오실 때 귀하고 좋은 결과 함께하네
苟全集- 조선 중기의 학자 김중청(金中淸)의 시문집.
김중청(金中淸)은 1567년 안동(현 봉화군)에서 태어났다.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성균관전적·예조좌랑·정랑을 역임하였고, 이듬해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광해군 7)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었으며, 사간원정언으로 폐모론에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자 파면되었다.
1616년(광해군 8) 신안현감에 이어 1621년(광해군 13) 승정원승지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다.
이후 산직(散職: 권력이나 직무의 중요성과 거리가 있는 관직)에 머물렀으며, 인조반정 후에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9년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중청 [金中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於于集 ▣
♧ 挽金安岳繼宗 김안악 계종에게 드리는 만사
黃綬銅章五馬榮 다섯 고을 낮은 벼슬 훌륭한 치적
漢庭循吏舊知名 한 가정에 내려오는 명성 그대로구나
空餘舞閣靑鶯下 텅 빈 정각에 어떤 봉황이 와서 춤추며
無復隨車白鹿迎 흰 사슴 끄는 수레로 영접하고자하니
蒲地海雲低旅襯 창포 땅은 해운 밑에서 그대와 여행하는
近天湖日迓銘旌 천계근처 은하물이 명정으로 덮으니
珠明玉潤俱光價 붉은 옥난간을 매입하여 밝은 곳에 세우고
莫歎浮休一夢驚 탄식과 아쉬움에 슬픔이 많아 꿈속에서 놀라네
♧ 送千秋使先歸次書狀-竹溪韻
祖席當新燠 조상의 여운은 지금도 입김이 생생하고
旋旌近抄秋 행적을 적은 깃대는 퍼럭이니 가을이구나
海暾巡望眼 바다에 아침 햇살이 전개되고
開樹繁離愁 나뭇가지에 근심을 묶어 보내고 싶어
獨鳥歸何暮 홀로 나 혼자 돌아가기 늦었는데
孤雲去不留 외로운 나를 두고 벗은 머물러 주지 않으니
遙知經鶴野 들 가운데 학의 울음소리 멀리서 들리지 않고
氷雪擁錦輈 눈 내리고 얼음 생기니 돌아갈 배에 오르네
神京秋色老 가을이 깊으니 색깔이 뛰어나게 아름답네
紅樹染淸霜 붉은 단풍은 맑은 서리에 더욱 화려하고
宮錦猩袍爛 궁 밖은 비단 같이 찬란하게 감싸고 있네
仙廚蟻釀芳 신선이 사는 집은 좋은 술 가득하다 하여
門開金鎖壯 문을 여니 단단히 장사가 지키고 있네
路拂玉鞭長 길가의 발자국 소리 불경 목탁 같고
雲樹三千塞 벗 떠난 삼천리 요새 같이 되었네
飄然一鳥忙 광풍이 자연 발생하니 내가 바빠지네
유몽인(1559~1623)은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으로 <어우야담>,<어우집> 등(等)의 문집을 남긴 설화문학의 대가였다.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세자시강원문학이었으며, 광해군 때 예조참판(禮曹參判), 이조참판(吏曹參判)에도 올랐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以後) 대역모 사건에 연루(連累)되어 아들 유약과 함께 사형되었고, 정조 때 복권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류몽인은 전라남도(全羅南道) 고흥군의 운곡사와 충청남도(忠淸南道) 천안시 목천의 청절사에도 향사되어 있다.
천안 송정의 대위산 산기슭에 선조대 어우(於于) 류몽인(柳夢寅) 유활(柳活(竹溪公 諱 繼宗의 婿) 고종때 유봉석(柳鳳錫)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를 지낸다.
천추사(千秋使) -황태자의 생일 축하애 판견하는사신
해마다 정례적으로 정월 초하루에 하정사(賀正使), 황제 생일 때에 성절사(聖節使), 황태자 생일 때 천추사(千秋使)를 보냈는데,
뒤에는 동지사(冬至使)까지 추가되었다.
이밖에도 중국 황제의 사위(嗣位)·훙거(薨去)·책비(冊妃) 등이 있을 때에는 진하사(進賀使)·사은사(謝恩使)·주청사(奏請使) 등의
명목으로 부정기적인 사신을 파견했으며, 이것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등장한 뒤에도 지속되었다.
사신단의 규모는 사행의 성격에 따라 달랐으나 사(使) 1명, 부사(副使) 1명, 서장관(書狀官) 1명, 대통관 3명, 압통관 24명 등 30명
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외에 이들을 수행하는 인원이 200~300명 정도 되었다.
1번의 사행에 걸리는 기간은 약 5개월이 었고, 베이징[北京]에 체류하는 기간도 명대에는 40일, 청대에는 60일까지 허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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