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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책- 우물안 개구리 바다를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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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5-11-23 14:50 조회1,673회 댓글0건

본문

- 사백두 번째 이야기
2015년 11월 23일 (월)
여름 벌레는 얼음을 의심한다

[번역문]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의심하고 여름 벌레는 얼음을 의심하니, 이는 식견이 좁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군자라고 하는 이들 역시 조금 이상하다 싶은 자연의 이치나 현상에 대해 듣기라도 하면 믿지 않고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그런 이치가 있겠는가.” 라고 하는데, 이는 천지가 크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천지 안에는 없는 것이 없는데 자기 식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여 일체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마니, 얼마나 식견이 고루한가.
옛날 위 문제(魏文帝 조비(曹丕))가 『전론(典論)』을 지을 때, 처음에는 화완포(火浣布)가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 그 잘못을 깨닫고는 다시 바로잡았다. 위 문제처럼 박학한 사람도 오히려 이런 실수가 있었는데, 하물며 후대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성인께서 많이 들으려 하시면서, 의심스러운 것은 그대로 놔 둔 채 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 화완포(火浣布)는 불에 타지 않는 직물, 즉 석면포(石綿布)라고 하는데 화완포에 관한 이런저런 전설이 많은 것으로 보면 그 실체가 무엇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수신기(搜神記)』에는, “곤륜(崑崙)에 화염이 타오르는 산이 있다. 그 산 위에는 조수와 초목들이 모두 화염 속에서 사는 까닭에 화완포가 생산된다. 위(魏)나라 초에 사람들이 화완포의 유무에 대해 의심하자, 위 문제는 『전론』에서 그런 이치는 없다고 하였다. 아들 명제(明帝)가 즉위하여 『전론』의 내용을 돌에 새겨 묘문(廟門) 밖에 세웠는데, 마침 서역의 사신이 이르러 화완포를 공물로 바쳤다. 이에 명제는 돌에 새겼던 글을 지워버렸고, 이 일은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였다.

[원문]

余家貧無馬, 或借而乘之. 得駑井蛙疑海, 夏蟲疑氷, 所見之局也. 然世之君子, 每聞物理事變稍涉異常者, 輒斥之不信曰“世豈有此理”, 不知天地大矣. 無物不有, 今以己見所未達, 而一切誣之爲無, 何其陋也? 昔魏文帝作典論, 初謂無火浣布, 後知其誤刊正之. 以魏文之博學, 猶有此誤, 況後人乎? 聖人之欲多聞而貴傳疑, 其以是夫!

- 장유(張維, 1587~1638), 『계곡집(谿谷集)』, 「계곡만필(谿谷漫筆)」제2권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의심하고 여름 벌레는 얼음을 의심한다[井蛙疑海夏蟲疑氷]」

 


우물 안 개구리와 여름 벌레는 『장자(莊子)』「추수(秋水)」 편에 실린 이야기다. 가을 물로 황하(黃河)가 벌창하자, 황하의 신 하백(河伯)은 매우 기뻐하면서 천하의 장관을 자신이 다 차지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살을 따라 동쪽으로 북해(北海)에 이르렀는데 북해는 아예 끝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가 아닌가? 이에 하백은 넋 나간 표정으로 북해의 신 약(若)을 향해 이렇게 탄식한다.

“속담에 ‘도(道)에 대해 조금 들었다고 세상에 나만한 사람이 없다고 우쭐댄다.’라고 했는데,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입니다. 지금 나는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그대의 광대함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문하에 이르지 않았더라면 대도(大道)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뻔했습니다.”

그러자 북해의 신이 이렇게 말한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 줄 수 없는 것은 사는 곳에 매여 있기 때문이요,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해 줄 수 없는 것은 여름만 알기 때문이며, 고루한 선비에게 도에 대해 말해 줄 수 없는 것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대는 강물에서 나와서 큰 바다를 보고는 곧 그대의 부족함을 알았으니, 그대와 더불어 대도를 이야기할 만하구나!”

40년도 더 된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 생각난다. 내 고향은 서울서 5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궁벽한 시골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집에서 한 시간을 걸어가야 닿는 면 소재지에 있었고, 학교는 일제 때 지어진 단층 목조 건물이었다.
그 당시 같은 마을 동갑내기 중에 서울로 유학 간 친구가 방학 때 집에 내려와서 한다는 말이, 자기가 다니는 서울 학교는 이층집이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가본 가장 먼 곳이 면 소재지였고, 내가 본 가장 큰 집이 초등학교 단층 건물이었다.

나로서는 친구의 얘기가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세상에 이층집은 없다고 우겼다. 얼토당토않은 말로 서울 구경한 것을 으스대는 친구의 꼬락서니가 영 못마땅했던지 함께 놀던 다른 친구들도 나를 거들었다. 결국,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티격태격하다가 한바탕 치고받고 싸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보지도 못한 놈들에게 부정당하였으니 그 친구로서는 단단히 화가 났을 법도 하다.

그때는 어려서 그랬다지만,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도 어렸을 적 우(愚)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 반성을 하게 된다. 알량한 지식으로 세상사를 재단하거나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우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경계하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다. 고루한 식견을 드러내기 싫어서 침묵 뒤로 숨는 것은 더욱 비겁한 일이라고.

『맹자』에 이런 말씀이 있다. “공자께서 노(魯)나라 동산(東山)에 올라가시어 노나라를 작게 여기셨고, 태산(太山)에 올라가시어 천하를 작게 여기셨다. 그러므로 바다를 본 사람에게 웬만한 물은 물로 여겨지기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자에게 어지간한 말은 말로 여겨지기 어렵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 難爲水 游於聖人之門者 難爲言]” 가을의 끝자락을 밟고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안다면 선현의 말씀이 담긴 고전에 침잠하여 생각을 키우고 견식을 넓히는 것은 어떨까?

 


 


김낙철 글쓴이 : 김낙철
  •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 주요 번역서
    - 인조/ 영조/ 고종대 『승정원일기』
    - 정조대 『일성록』
    - 『명재유고』, 『서계집』, 『성호집』 등의 번역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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