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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지 제출자료---화산군 연보5 (43-45세, 1554-15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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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18 10:12 조회1,3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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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세, 갑인, 명종 9년(1554)

? 정월 21일, 대사헌 윤춘년(尹春年)의 계론(啓論)에 따라 파직 당하였다. 사은사의 행차에 동지사 이탁(李鐸)과 동반하였는데, 이공은 표류하는 왜인을 붙잡은 것을 헌정하는 일을 겸하였다. 이미 일을 마친 뒤에 명나라 예부(禮部)가 상을 주려고 하여서, 동지사 일행의 성명을 써서 바치라고 하였다. 이공이 대동하였던 역관 한 두 사람이 동지사 이공에게 청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써넣게 하여 상을 받았다. 이것은 역관의 무리들이 늘 그러는 관습이되 공은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윤춘년이 그것을 문제로 삼아 아뢰었다. “나라를 욕되게 하였으니, 사은사와 동지사 및 서장관을 모두 파직시키고 역관(譯官) 고언명(高彦明)은 금부에 하옥하여 추고(推考)하고 그 일행이 받은 상물(賞物)은 국고에 몰수하소서.”

답하시기를, “중국이 하사한 것을 빼앗을 수는 없다. 김 아무개와 고언명은 아뢴 대로 하고 이택과 성의국은 추고하라.”라고 하셨다.

이때 윤춘년은 세력을 믿고 방자하게 굴어서 사론(士論)으로부터 모욕을 당하였는데, 공을 미워하는 것이 가장 심하였다. 이제 이 논계도 역시 공을 밀쳐서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 -----

? 2월 11일, 대사헌 윤춘년이 아뢰었다. “공조정랑 성의국(成義國)은 사은사와 동지사 양사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갔었으니 규검(糾檢)하는 모든 책임이 전적으로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은사의 하인(下人)이 당치 않게 상사(賞賜)를 받으려 할 때 한마디도 금하는 말을 하지 않아서 중국 조정을 기망(欺罔)하게까지 했습니다. 김 아무개는 파직되었으나 성의국은 모면하였기 때문에 물정(物情 : 여론)이 매우 온편치 못하게 여깁니다. 그러니 그를 파직시키소서.”

답하시길, “그렇게 하라.”라고 하셨다.

? 7월 10일, 동지중추부사에 배수되었다.

? 10월 17일,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배수되었다.



44세, 을묘, 명종 10년(1555)

? 2월 27일,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병마수군절도사에 배수되었다.

? 숙부 병사공(兵使公 : 公奭)의 신도비문을 지었다.

? 5월 16일, 치계(馳啓)하였다. “5월 11일에 왜선(倭船) 70여 척이 달량(達梁)【포구 이름이다.】 밖에 와서 정박했다가 이진포(梨津浦)와 달량포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육지로 상륙하여 성저(城底)의 민가를 불태워 버리고 드디어 성을 포위했습니다.”

? 5월 17일, 사인(舍人) 이수철(李壽鐵)이 삼공 및 비변사의 말로 아뢰었다. “주장(主將)이 포위당하면 수령(守令)은 달려가 구원하기를 마땅히 -----

? 5월 18일, 치계(馳啓)하였다. “이달 13일에 왜적(倭賊)들이 달량(達梁)을 포위하였습니다. 성 안의 군사들이 쏘려고 하자 절도사(節度使) 원적(元績)이 성 안에 양식이 다하였으므로 -----

? 대사헌 정유(鄭裕) 등이 윤원형(尹元衡)의 지시를 받아 아뢰었다. “외로운 성이 포위당했다가 3일 만에 함락되었으니 -----

? 홍문관 부제학 정유길(鄭惟吉) 등이 아뢰었다. “지금 헌부가 아뢴 말에 따라 전라도 감사 김주를 체직(遞職)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김주는 진실로 죄가 있기는 합니다만 병사(兵使)가 살해되었으므로 온 도의 군마(軍馬)의 조발(調發)과 조치해야 할 모든 일들이 오로지 감사에게 달려 있어 도내(道內)의 일에 관한 방략(方略)이 이미 정해졌을 것입니다. -----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홍담(洪曇)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윤원형(尹元衡)이 요직에 있었는데, 윤원형은 홍담을 좋아하지 않아서, -----

? 5월 19일, 왜적(倭賊)들이 이덕견(李德堅)에게 서계(書契)를 주어 달량(達梁)에서 영암(靈巖)으로 보냈다. 공은 그 서계의 내용을 치계(馳啓)하였는데, -----

? 5월 26일, 병영(兵營) 가장(假將) 유사(柳泗)와 장흥(長興) 가관(假官) 이수남(李壽男)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왜적(倭賊)들이 드디어 군량과 병기를 모두 가져갔다. 당초에 공이 전 부사(府使) 유사를 가장으로 삼아 병영을 지키도록 하고, 벽사찰방(碧沙察訪) 이수남을 가관으로 삼아 장흥부를 지키도록 한 것인데 먼저 모두 도망간 것이다. 5월 21일에 왜적 50여 명이 단지 창과 칼만 가지고 병영에 들어와 병기와 잡물(雜物)은 모두 뒤져가고, 또한 증미(蒸米) 7백여 석을 가져갔으며 영사(營舍)를 불태웠다. 22일에는 왜적들이 또 장흥부에 들어와 부안의 잡물을 모두 가져갔다.

? 5월 28일, 왜적들이 강진현(康津縣)에 들어왔다. 당초에 공이 광주목사(光州牧使) 이희손(李希孫)을 가장(假將)으로 삼고 강진 현감 홍언성(洪彦誠), 나주판관(羅州判官) 김기(金錡) 및 전 부사(府使) 박민제(朴敏齊), 마량첨사(馬梁僉使) 홍수양(洪守讓)과 함께 강진현을 지키도록 했었다. -----

? 공이 치계(馳啓)하였다. “이희손 등이 거느린 군사가 수천여 명이 넘고 군량과 병기(兵器)도 또한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으니 -----

? 당시 공은 영암(靈巖)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말을 사열하여 방어책을 세웠으나, 성안의 인사라고는 고작 수백 명에 불과하여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이었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흉흉하였다. 공은 사태가 어찌 할 수 없음을 알고서, 군사를 옮겨서 나주(羅州)의 도원수(都元帥) 이준경(李浚慶)의 군진에 합하려고 하였다. 뭇사람들의 의론도 또한 공이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마땅히 전라도의 한 가운데로 물러나 주둔하여야 책응(策應)의 계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한 소년 서생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진언하여 성을 와락 내어서 심지어 칼을 뽑아들며 언성을 높이기까지 하였다. 그가 누구냐고 물어보니 곧 윤기(尹祈)였다[뒤에 祈를 箕로 바꾸었다]. 당시 나이 고작 스물 한 살이었는데, 부친의 임소에 마침 와 있다가, 성 안에 포위되어 있게 되었다. 공의 좌우 사람들이 놀라서, 중법(重法)으로 처벌하라고 번갈아 청하였으나, 공은 태연하게 아무 노기도 띠지 않았으며, 담소하면서 인도하여 물러가도록 말하였다. 보는 이들이 모두 혀를 차면서 공이 능히 사람을 용납하는 것에 탄복하였다.

? 5월 29일,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윤경(李潤慶)이 우도 방어사(右道防禦使) 김경석(金景錫)과 함께 왜적(倭賊)을 쳐부수어 1백여 명의 수급(首級)을 베었다.

당초에 공이 이윤경에게 장수의 능력이 있음을 알고, 그를 가장(假將)으로 삼아 영암(靈巖)을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도원수 이준경(李浚慶)은 그 형이 포위된 성 안에 있다가 함락될까 두려워, 군령으로 이윤경을 성에서 나오게 하였는데, 이윤경은 응하지 않고서, “순찰사의 분부로 성안에 들어와 적을 막고 있다. -----

? 6월 1일, 장계(狀啓)를 올렸다. “전주부윤 이윤경이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암에 진을 치고 지키면서 명령이 분명하고 은혜와 위엄을 다 같이 보이므로 성에 있는 군졸들이 마음을 기울여 따랐습니다. -----

? 7월 2일, 상감께서 공에게 하서(下書)하였다. “지금 내수사(內需司)의 공사(公事)를 보면, 간리(奸吏)가 총통(銃筒)을 만든다는 핑계로 -----

? 7월 3일,  전라도 관찰사로서 장계(狀啓)를 올렸다. “장흥(長興)·강진(康津)은, 왜변(倭變) 때, 향교(鄕校)의 선성 위판(先聖位板)은 그대로 남았으나 제복(制服) 등 기물은 모두 불에 탔습니다. -----

? 전주부윤 이윤경(李潤慶)이 서장(書狀)을 올리기를, “본도  관찰사가 신을 영암(靈巖)의 진장(鎭將)으로 삼아 군사의 열에 부쳐, 요행히 적을 물리쳤습니다. 은전(恩典)을 거두어주시길 청합니다.”라고 하였다[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랐기 때문이다].

? 7월 17일, 장계를 올렸다. “본도(本道)는 여러 해 기근이 들었고 -----

?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준경(李浚慶),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 등과 의론하여, 군제(軍制)를 고쳐서 분할하여 도내의 여러 읍에 분산시켜 소속하게 하고, 순변사(巡邊使)방어사(防禦使)조방장(助防將)도원수 및 본도의 병사(兵使)수사(水使)를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 이름하고, 장계를 올려서 시행하였다.

? 나주(羅州) 무이루(撫夷樓), 김제(金堤) 동헌(東軒), 임피(臨陂) 집승루(集勝樓), 수영(水營), 산정(山亭) 등에 각각 차운(次韻)한 시를 남겼다. 언젠가 하루는 순행을 하다가 한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길가에 신총(神叢:성황당)이 있었다. 영리(營吏)가 앞에 엎드려 말하길, “이곳 성황당의 신은 아주 영험하오니, 지난날의 별성(別星 : 봉명사신)1)입니다. 만일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그 재앙이 당장 이르러 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호통을 쳐서 물리치고는, “한 도의 방백(方伯)이 어찌 이런 하찮은 성황당 신을 위해 말에서 내린단 말이냐?”라고 하고는, 즉시 말을 달려서 지나갔다. 얼마쯤 가다가 쌍교(雙轎)의 앞 말이 홀연 땅에 고꾸라져 다리가 부러졌다. 공이 노하여 그 말을 도살하게 하고 그 피를 성황당에 뿌리고는 이어서 그 말가죽을 덮어놓고 떠났다. 이보다 앞서 호남 사람들은 신을 제사지낼 때 반드시 이 성황당 신을 맞아다가 제물을 갖추어 기쁘게 해주었으므로, 이 신이 영험하기가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대로 다 들어줄 정도였다. 그러나 공이 이렇게 한 뒤로는 비록 신을 맞으려 하여도 강림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성황당 신이 마을 사람의 꿈에 나타나 울면서 말하길, “나는 김 감사가 무서워서 강림하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 7월 22일, 장계를 올렸다. “왜변(倭變)이 창궐하여 화(禍)가 극심합니다. 적선(賊船)을 깨뜨리는 기구로는 대장군전(大將軍箭)보다 나은 것이 없으나 -----

? 7월 30일, 정원에 전교하시어, “왜변이 일어났을 때 전라감사 김 아무개는 방비를 제대로 못하였으니 파직하라.”라고 하였다.

이때에 왜적이 패주한 것은, 여러 역사서들이 대부분 공이 사람을 잘 알아보고 임무를 잘 맡긴 힘 때문이라고 하였거늘, -----

? 8월 16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서배(敍拜)되었다.

?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의 한성부(漢城府) 1소(一所)의 부시관(副試官)이 되어 윤두수(尹斗壽) 서엄(徐?) 등을 선발하였다.



45세 병진, 명종 11년(1556)

? 5월 10일, 공조참판(工曹參判)에 배수되었다.

? 8월 25일,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배수되었다.

? 이산보의 시에 차운함(次李山甫) 시가 있다.





1) 별성(別星) : 봉명사신(奉命使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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