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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군 친필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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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11-29 11:10 조회1,219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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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군 친필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


(1)金澍, 金輳 중 누구의 것인가?

(2)<1926년 해동역대명가필보>과 <2000년 한국서화가인명사전>의 기록중 어느 것이 참인가?


<해동역대 명가필보>(1926. 백두용 편) 6권중 1권

김주(金澍) 號 籠巖 先山人(호 농암 선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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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농임 김주 : 1926년 명가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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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6) 농암 김주 필적 : 1926년 명가필보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1926년 백두용(白斗鏞)이 한국 역대 필적을 모아 엮은 책이다. 표제는 오세창(吳世昌)이 썼으나 서문은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고 우리 역사 4,000년간의 고금명가의 필적 700점을 모았으며, 혹 주옥같은 것이 빠졌을지도 몰라 완벽은 훗일을 기한다고 했다.  구성은 서문을 넣고 권마다 첫머리에 인명의 약전을 적은 뒤 수적(手蹟)을 나열하였고 끝부분에 전각을 넣었으며, 편집자의 말을 실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역대 서예가 인명을 나열하였고, 수적이 빠짐없이 실려 글씨의 변천과 필적을  한 눈에 알 수 있어 서예사적으로 매우 중요 자료가 된다.   6권,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김주(金輳)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충신. 본관은 선산. 호는 농암(籠巖).

---1392년(공양왕 4)에 하절사로 명나라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개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후손들은 조복 등 유품을 보낸 날에 제사를 지냈다. ---그는 중국의 형초(刑楚)에 살았고, 3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전한다.

1597년(선조 30) 일본으로 파견된 사행(使行)의 막하관으로 수행한 허유성(許惟誠)이 그의 외손이라고 전하며, 명나라 고공(高珙)이 엮은 《병탑유언 炳#탑06遺言》에는 그의 자손이 대대로 통주(通州)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농암일고》 1책이 있다.


麗末의 忠節! 안렴사공(휘 士廉) 연보

농암 김주, 목은 이색 등 당대의 유명한 선비들과 함께 문정공 신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특히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과 가까이 사귀었다. 신현 선생은 일찍이 원나라에 건너가 왕의 사부로 대접받았었고 국내에서는 정몽주, 원천석, 김진양, 이색 등 당대의 거유들을 길러낸 대학자였다.. <1860 화해사전>


성소부부고 제20권   문부 17 文部十七 - 척독 상 尺牘上

윤월정(尹月汀) 주C-001에게 올림 병오년 3월

합하께서는 중국의 고사(故事)에 무척 밝으시어 중국 사람이라도 어깨를 겨룰 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을 저 같은 사람에게 물으시니 이것은 곧 귀머거리에게 소리를 들어 달라고 의뢰하는 격입니다.

김주(金澍)의 일은 전에 낭중(郞中) 가유약(賈維?)에게서 《이문광독(夷門廣牘)》이라는 책 속에 실려 있는 고중현(高中玄)이 쓴 《병탑유언(病榻遺言)》 일권(一卷)에서 보았습니다. 거기에 우리나라 일에 대하여 세 조항이 있었는데, 하나는 종계(宗系)에 대한 일이었고, 하나는 기 천사(祁天使 기순(祁順)을 말함)와 서사가(徐四佳)가 주고 받은 시(詩)의 이야기였으며, 또 하나는 바로 김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문자(文字)를 잊었는데, 삼가 그 대략을 기억하여 별단(別單)에 적어서 올리니 양찰하시기 바랍니다.

[주 C-001] 윤월정(尹月汀) : 조선 선조 때에 벼슬이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우찬성(右贊成) 등을 지낸 윤근수(尹根壽)를 말함. 월정(月汀)은 그의 호.



* 상기 서찰에 대하여 해독, 해석, 분석한 결과 종합 (2004. 6. 16. 항용(제) 제공)


1. 문제가 된 유사 친필본의 진위문제

1) #-1 : 명가필보본 (1926. 백두용 편)

2) #-2 : <서화가 인명사전 본>(2000. 범우사 간)

3) 상기 2가지본의 진위에 대한 판단 :

(1)익수 아저씨의 견해는 #-1의 <명가필보본>이 진본이고 #-2의 <서화가 인명사전본>은 #-1의 것을 재조합하여 편집한 조합본이라는 판단입니다. 이유는 서찰의 일반적인 구성상 #-2처럼 쓰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2)그리고 #-2의 좌하에 ‘金澍’라고 추록하여 넣은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항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상기 #-1의 글은 <명가필보>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 선조님이신 김주(金澍)가 아니라 선산인 김주(金, 삼수변+豆+寸)라는 것입니다. 엄연히 한자가 다른 선산인 김주라는 것입니다.

  *<명가필보본>에서 밝힌 인명록


2. 상기 <명가필보본>의 글이 화산군의 것이 아니라는 증거

1)<근묵>(1995. 성균관대)에 실려 있는 <근묵본>의 화산군 친필(우리 홈에 실려 있음)과 서체 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근묵본 친필>


2)둘째, 자필 수결과 다름없는 이름자가 서로 완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근묵본 이름자 수결>             <명가필보본 이름자 수결>


3)서찰 번역 내용상의 확인은 아직 미확인입니다. 둘째 따님의 혼사에 관련한 부탁의 글인데 화산군에게는 4분의 따님이 계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산인 김주의 가족관계(따님 관련 기록)는 아직 미확인입니다. 여러분의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상기 간찰은 둘째 딸을 시집보내면서 쓴 간찰임. 선산김씨 농암파 후손(    ) 문의결과,  농암 김주는 딸이 없고 28세에 명나라로 되돌아가서 그곳에서 몰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함.




댓글목록

김윤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만
작성일

  영 헷갈리네요.
간찰 내용상 농암 김주께서 따님이 없으시다면, 따님이 계신 화산군 김주 선조님의 간찰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간단히 생각했나요?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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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 감사함니다.